생각보다 사람의 상상력이란 빈곤하다. 미국의 의료보험 제도를,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를 전부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른 철학 위에서 세워진 시스템을 상상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더구나

주류 언론, 거물급 정치인들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되풀이하며 선전선동을 일삼는 상황에선.


'This is not America!'라는 외침에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시니컬한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 예측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인종차별, 보이지 않는 계급 WASP(white-anglosaxon-protestantist), 총기, 마약, 시장주의,

패권주의, 제국주의적 속성까지. 미국에 대한 빈정거림과 비난은 하늘을 찌르지만, 그만큼 스스로를 노출하고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솔직히 까놓고, 미국의 인종차별이 심하다곤 하지만 한국은 어떤가. 미국의

정치판과 대통령이 대놓고 전세계의 놀림감이 되지만 한국의 그것들은 어떤가. 그게 미국의 저력이다.


마이클 무어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하다. 아무런 배경지식도 관심도 없던 사람들에게 딱딱한 사회 시스템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현학적이거나, 반대로 감정적이지도 않다. 눈높이를 바닥에서부터 서서히 올려가는,

능란한 요리사가 부식재료를 다루듯, 그는 냉소적이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멘트들로 포커스를 한 점에 모은다.

미국 의료보험업계 로비스트와 결탁한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시스템.


시스템이 포인트다. 그는 응급실에서 돈 얘기부터 하는 의사의 야박함을 탓하지도, 티비에 나와 캐나다의

의료보장제도를 욕하는 정치인들의 뻔뻔함을 비난하지도, '의료 손실'이라는 손익의 개념으로 접근해 최소한의

보험을 제공하려는 보험업계의 비인간성을 타박하지도 않는다. 물론 야유와 조소는 아낌없이 던져지지만,

문제는 사람들을 그렇게 상상하고 움직이도록 틀지워주는 시스템이란 걸 그가 결코 잊지 않고 있다는 거다.


시스템이 사람들을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지, 그는 캐나다, 영국, 프랑스, 그리고 심지어 쿠바의 사례까지

풍부하게 제시한다. 그 모든 장면에서, 의사와 마주해선 'How much..?'부터 조바심치며 묻는 미국인들은

그들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시선 앞에서 완전히 당황하고 만다. 미국에서 120불짜리 약이 그들의 적국

쿠바에서는 겨우 5센트라니, 미국의 시스템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다른 것'이 아니라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 앞에서는 완전한 배신감에 망연해지고 말았던 그들.


나라마다 시스템의 각론은 약간씩 다르지만, 'This is not America. System pays it'. 대답은 한결같고

그 대답이 깔고 있는 마인드도 한결같다. 돈이 아니라 환자가 우선이라는 거다. 누군가 자신의 지갑이 아닌

건강에 신경을 써주고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봐준다는 것. 적절한 치유를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은 국가의

기본이며, 더욱 부강해지자는 주문을 쉼없이 외우는 정치인들의 목적은 더욱 국민들을 잘 돌보기 위함이어야

한다. 그게 상식이다.


상식과 의지가 모여 시스템을 만든다. 상식의 힘은 시스템을 만들어낸다는 데에 있다.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부는, 상식을 조작하고 의지를 분쇄한다. 미국은 최소한 의료보장제도에 있어서는 그렇게 되어버렸다. 최근

오바마가 다시 전국민을 수혜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 개혁안을 통과시켰지만 두고 볼 일이고..


미국의 그들이 '시스템'과 '상식'의 가면을 빌어 하는 이야기는 뻔하다. 사회화의 비효율성, 비용 문제,

세금폭탄..사회화(socialization)와 몰락한 현실 사회주의/전체주의 국가 사이에 은근슬쩍 이퀄(=) 표시를

꼽아두고는 사회화나 국가적 차원의 복지 시스템을 절대악으로 몰아간다. 한국과 같다.


한국의 그들은 미국의 의료제도를 따라 영리 의료법인 설립을 독려하고, 의료서비스를 팔아 돈을 벌겠다는 거다.

그들이 우러러보는 '선진시스템', 미국의 시스템을 따라 국가가 운영하던 인천공항도, 한전이니 철도니 도로니

따위의 것들처럼 민영화한다는 이야기가 스물스물 나오는 판이지만, 한박자씩 뒤늦게 따르는 그들의 지독한

박자감각은 어쩔꺼나. 이미 시행됐고 문제가 잔뜩 불거져서 고칠려는 판에, 우리는 그 '정통 오리지널' 버전을

수입하겠다니.


아무리 그래도, '상식과 시스템'을 둘러싼 전투에서 한국의 그들은 줄곧 승리해 왔다.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부는, 상식을 조작하고 의지를 분쇄한다. IMF 이후 급격히 무너진 공공 영역, 공공 부문에 들이대진 효율과

수익성의 잣대로 민영화는 곧 지고선이 되었고. 하나하나 무너져내려 이젠 정말 돈 있는 자들의 생명과 재산을

유료로 지키는 경찰과 소방관들이 나온대도 딱히 이상해지진 않을 만큼 '상식'과 '시스템'이란 게 후퇴하고

있는 거 같다.


식코에 등장한 9/11 자원봉사자들, 한때 미국의 영웅으로 떠받들리다가 건축 폐자재 따위로 인한 신체적

손상이나 심리적 스트레스로 정신적 손상을 입은 채 내버려진 그들을 보고 중첩되는 이미지가 하나 있었다.

가해 선박의 이름으로 보통 기억되곤 하는 해상 기름유출 사고지만, 마치 누군가 본능 깊숙이 인셉션한 것처럼

'서해기름유출사태'로만 기억날 뿐인, 2007년의 "삼성 허베이스피리트호 기름유출사건".


아이들의 고사리손까지 끌고 가서 국민들은 돌덩이의 기름띠를 닦아냈지만, 사실 그 원유는 치명적인 독성을

갖고 있던 데다가 변변한 안전장비조차 갖추지 않은 채였던 거다. 거기서 국가나 언론이 해야 할 일은

그 '자원봉사'를 영웅화하고 애국마케팅으로 소모해버릴 게 아니라, 무엇보다 국민의 건강과 안위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상식'을 지켜야 했던 건 아닐까. 이놈의 나라 국민들은 너무 순해빠진 건 아닐까.






음식의 천국 대만에서 술 한잔 안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두개 사고, 맥주를 하나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컵라면은 아무래도 내국인용인지 영어 설명도 아주 박하게 찔끔 있어서, 대충 그림보고

맛을 그려보고, 번체자로 씌여진 한자 대충 눈치로 추측해보고.

그래서 요렇게 두 개, 하나는 왠지 길거리에서 많이 본 장면을 그려넣고 있어서, 다른 거 하나는 뭔가 그릇용기를

두 개나 쓰며 조리하는 거 같아 보이길래 풍성해 보여서.

내부에 들어간 건 비슷하다. 분말 스프 하나랑 뭔가 특제 소스 하나. 뭔가 했더니 하얗게 굳어있는 돼지기름,

아마도 국물 위에 맛있게 둥둥 떠있는 돼지기름을 낼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하얗게 굳은 돼지기름을 찍찍

봉지에서 짜내는 건 좀...쉽지 않았고 보기에도 좀...

다른 하나는 뭐랄까, 짜파게티와 비슷해 보이는 춘장 소스에 일반적인 분말 스프. 평이한 컵라면이었다.

그리고 맥주. 대만에 왔으니 대만 맥주를 마셔야겠다 싶어서, 타이완피조우. 무덥고 습해서 무지하게 끈끈한

하루를 보냈는지라 맥주 한 잔이 그야말로 '션하게' 바닥나고 말았다.

<막간을 이용해 배워보는 타이완의 음식 매너>

나쁜예) 음식을 먹기 전이나 먹는 중 젓가락을 이렇게 용기에 꽂아 놓거나 걸쳐 놓는 것은 비매너.

(국물에 둥둥 떠 있는 기름들은 아까 하얗게 굳어 있던 그 돼지기름이 녹은 것,  확실히 대만/중국 음식은

기름이 많이 들어가 기름진 느낌이 강하다. 심지어는 컵라면에까지.)

좋은예) 음식을 먹기 전이나 먹는 중에는 늘 이렇게 똑바로 젓가락을 걸쳐두어야 한다고 한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젓가락 아랫부분이 국물에 담겨있지 않도록 하려는 위생상의 배려 아닐지.

그리고 용기를 두 개나 쓴다며 날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일종의 짜장면은 생각보다 초라한 행색, 짜장소스가

좀 많이 부족하달까, 맛이 심심하진 않은데 보기에 너무 노랗기만 해서 아쉬웠달까. 그렇지만 술안주로는

손색없던 대만의 컵라면들.





앙코르왓을 돌아보는 루트는 짜기 나름이다. 몇 권 들춰본 가이드북마다 제각기의 코스를 제안하고 있었는데,

그건 대개 가이드를 대동하고 뚝뚝을 이용하는 걸 전제로 깔고 있었다. 여행이라고 와서 오토바이로 윙윙 지나는 건

왠지 아니다 싶어서, 첫날은 우선 자전거를 타고 달려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하루에 3달러에 대여해 주었고, 사고에

대비한 예치금 20달러를 별도로 내야 했지만, 이미 자전거를 이용한 그랜드투어, 스몰투어 코스가 있을 정도로

자전거 이용은 활성화되어 있다. 근데 실제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은 전부 서양인이었다는.

자전거를 타고 숙소에서부터 앙코르왓까지 밟아댄 설레는 아침. 출근길의 캄보댜 사람들이 신기한 듯 흘낏대며

쳐다봤고, 승용차와 트럭과 뚝뚝과 오토바이(모또)와 자전거가 뒤섞인 도로는 생각보다 정신사나웠다. 알고 보니

아직 캄보디아는 제대로 된 교통질서가 확립되지 않았다던가. 신호등이나 교통 체계, 표지판 같은 게 꽤나 취약하다.

그래도 모두들 알아서 조심조심, 비록 차선도 무시되고 역주행도 흔한 일임에도, 별탈없이 유유자적 흐름을 잘 타고

있었다.

달리다가 보니 어느 순간 한적해진 길, 아마 씨엠립 시내 중심부까지의 출근길을 벗어나 앙코르왓으로 빠지는

길 어귀에서부터 급 한가해졌던 것 같다. 이제 자전거를 타며 카메라를 찍어대는 묘기를 부리기 시작. 춤추는

카메라에 길가 좌대가 잡혔다. 저건 뭘까. 양주병, 음료수페트병, 그리고 큼지막한 깔대기 하나까지.


뭐냐면, 오토바이 혹은 개조한 삼륜차 뚝뚝이 주된 교통수단이 되고 있는 나라인지라, 기름을 저렇게 병 단위로

사서 즉석에서 주유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빈병은 어디서 났는지, 저런 비싼 고급양주병이 흔할리가 없는데.

알고 보니 워낙 흔히 보이는 풍경이라 나중엔 그러려니 했지만, 처음엔 어찌나 신기하던지.ㅎ

캄보디아, 라고 하면 무지 멀어보이고 무지 못 사는 나라같지만-또 실제로도 맞긴 하지만-생각보다 세련되었달까

잘 꾸민 여성들, 남성들도 눈에 종종 띄었다. 특히 씨엠립같은 시골 관광마을 말고 프놈펜같은 수도로 가면 더욱.

매우 '컨츄리틱'한 '구루마'와 나름 세련된 스타일의 뽀얀 여성분.

이런 식으로 기름을 팔기도 한다. 휘발유와 디젤인가, 아마 그렇게 두 종류인 듯 한데 그냥 드럼통을 갖다놓고

저기서 바로 뽁뽁이로 주유. 아까 봤던 병들이 기름보다는 일보 전진이라 해야 할지.

아침 일곱시부터 서둘러 나서서 그랬는지, 앙코르왓까지 가는 길은 무척이나 한적했다. 드문드문 현지 사람들과

함께 달리기도 하고, 아직 관광객들은 아침을 먹고 있나보다 싶었다. 어쩌다 보니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입장료

사는 곳을 지나쳐버린지라 좀 돌아가야 했지만, 덕분에 아침부터 한시간 이십여분을 줄창 자전거로 달려야했지만,

꽤나 재미있었던 라이딩.

아침부터 사이좋게 아이스크림을 빨며 자전거를 타던 귀여운 남매, 자전거를 타고 카메라를 두리번대는 내게

자신있는 ^^V 제스처를 취해준다. 스스럼없는, 그리고 그저 친근한 그 태도에 나 역시 활짝 웃고 말았다.

옆에서 미친듯이 페달을 밟으며 맹추격했던 꼬맹이 녀석. 저 의지에 가득찬 눈빛과 그야말로 건각(健脚). 건강한 다리.

나랑 한동안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유쾌하게 앙코르왓으로 향하는 정글 가운데 이차선 도로를 점령했던 꼬마친구.

입장소에서 파는 앙코르왓 입장권은 1일 패스, 3일 패스, 그리고 일주일 패스. 3일짜리, 일주일짜리는 즉석에서

사진을 찍어준다. 저 여자분 뒤에 조그맣게 캠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걸 찍으려는 순간 여자분이 몸으로 가려버려

의도치 않은 도촬...ㅡㅡ;; 좀 더 웃는 얼굴로 나왔음 더 이뿌셨을 텐데 아쉽..

보통 앙코르왓을 제대로 보려면 최소한 3일 패스는 써야 한다고 한다. 워낙 넓은 지역에 많은 사원들이 흩어져있어서.

1일 패스는 20달러, 3일 패스는 40달러, 일주일 패스는...모르겠다. 입장권의 배경은 앙코르왓 유적의 정수 중 하나인

'반띠아이 쓰레이'. 여긴 앙코르왓서 약 30킬로 떨어져있어서 차량을 타고 가야 한다.

입장권을 사고 다시 앙코르왓으로 힘차게 페달을 밟는 길, 길을 좀 헤멘 탓인지 툭툭을 타고 속속 도착하고 표를

사 떠나는 여행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맘이 급해졌다.

그래도 이미 한시간여 자전거를 내리 달린 데다가, 입장권 판매소에서 앙코르왓까지는 2-3킬로미터를 또 달려야

하는 터라 길가에 과일판매대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바나나, 용과, 라임, 오렌지 따위를 팔고 있길래

용과를 사서 다시 출발하려는데, 저토록 편안해보이고 재미있어 보이는 해먹에 자꾸 눈이 갔다.

앙코르왓을 둘러싼 100미터짜리 해자, 그 바깥쪽 둔덕에 앉아 아이들을 씻기고 있던 아주머니. 아이들 셋을 혼자

단도리하려면 얼마나 힘들까 싶다. 해자가 얼마나 넓던지, 아침햇살을 맞으며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감싸니 마치

여름날 한강 상류에서나 마주할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뜨겁게 이글거릴 햇볕을 예고하는 짙은 물안개.

물안개 너머 보이는 앙코르 왓의 실루엣.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한시간 넘게 쉼없도록 달린 자전거

탓도 있겠지만, 툭툭 타고 슝 왔으면 왠지 이런 설렘은 덜하지 않았을까. 자전거 타고 첫날을 시작하길 잘했다 싶은

순간이었다.

문득 돌아본 길가엔 코끼리 주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음..코끼리가 노니는 땅이로구나.

짙은 정글, 그 사이 놓여진 얄포름한 포장길 한 줄. 그렇게 한참 가다가 문득 당도한 앙코르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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