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포항 앞에 있는 어부의 동상, 손에 실제로 두꺼운 줄이 감긴 채 힘을 주고 있는 모습이 마치 바다를 끌어당기는 것만 같다.

 

온통 빼곡하게 들어선 채 후끈한 김을 퍼올리고 있는 대게 음식점들. 가게마다 대게 한마리씩 간판에 올렸다.

 

 

구룡포항을 굽어보는 근대문화역사거리에서의 탁 트인 구룡포항 풍경. 어슴푸레한 어둠이 깔리는 시점, 항구 앞 노점들이 발갛다.

 

한쪽에서는 품바 '예술공연단'이 쉼없는 깨방정으로 장터의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지만 늦은 시간 탓인지 한적하기만 하다.

 

삽시간에 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장터, 과메기와 대게를 파는 노점들은 한산하고 주인들은 삼삼오오 모여서서 한담중이던.

 

풍어를 기원하며 배에 꽂아둔 나뭇가지들.

 

 

게섰거라~ 찜통에서 쉼없이 뿜어나오는 하얀 연기엔 촉촉하고 탱글거리는 대게의 바다내음이 섞였다.

 

 

포항 호미곶,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돋이를 볼 수 있다는 이 곳을 가본 사람이던 안 가본 사람이던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바로 이렇게 바다에서 불쑥 솟아오른 커다란 손의 형상. 갈매기들이 쉬어 가는 다섯 개의 봉우리이기도 하다.

 

 

사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생각보다 작아 보일 수도, 혹은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는 이 청동 조각상은 '상생의 손'이라는 이름으로

 

새천년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99년 12월에 완공된 상생의 손, 호미곶 해맞이 축전을 기리는 상징물로, 육지에선

 

왼손, 바다에선 오른손 이렇게 두 손이 함께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 손이 육지에도

 

하나 더 있다는 사실. 처음 알았다.

 

 

 

성화대에 있는 화반은 해와 달을 의미하고, 두 개의 원형고리는 화합을 의미한다던가.

 

바다에 있는 오른손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로 만들어진 육지의 왼손. 그 앞에는 독도 일출과 피지의 일출에서 얻어온 불씨가

 

2000년 1월 1일 이래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히고 있었다.

 

새천년 기념관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본 왼손과 오른손, 상생하라는 두 개의 손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공을 쥐고 있는 듯

 

살짝 움켜쥔 모양새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호미곶에 와서야 알게 된 손 조각상의 진실이랄까.

 

호미곶에 도착하면 딱 보이는 꽃마차들. 말갈기를 쉼없이 희롱하고 있던, 제법 쌀쌀한 바닷바람에도 말들은 꿈쩍없었다.

 

상생의 왼손을 에둘러 바다쪽으로 훅 들어가는 전망대. 바다 쪽에서 육지를 배경으로, 미친 듯이 날아다니며 시야를 가리는

 

갈매기들 틈새로 상생의 오른손을 볼 수 있다.

 

 

전망대 걸어들어가는 길에 한번씩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거대 문어상. 포항이 문어로도 유명한 데다 심지어 문어축제도 있다는 사실.

 

 

더이상 나갈 곳 없는 전망대의 끝단에 서면 정확히 동쪽을 가리키고 선 꼬마 아이의 동상이 있고, 호미곶의 위치가 잡혀 있는

 

한반도 지도와 나침반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분분히 날아다니며 상생의 손을 향한 시야를 여지없이 가리는 정신사나운 갈매기들. 사람들이 자꾸 과자를 던져댄 탓이다.

 

이쪽에서 보이는 상생의 오른손 측면샷. 아무래도 육지의 왼손보다 크기도 크거니와 그림도 훨씬 이쁘게 잡힌다.

 

다시 광장으로 돌아와서, 미처 보지 못했던 가로등에 눈길이 간다. 포효하는 호랑이 형태의 한반도가 장식된 가로등이다.

 

같은 형태로 동해를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상 , 검고 노란 줄무늬가 선연하던 가로등 호랑이와는 달리 흰색과 하늘색의 줄무늬를 가졌다.

 

그리고 파란 하늘에 둥싯 떠있는 하얀 달을 움켜쥐려는 듯 내뻗은 육지의 왼손상.

 

 

광장에는 지난 새천년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전국 최대의 가마솥이라거나 각종 기념물들. 그 와중에 수쳔년 전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를 기념한 기념탑이 하나 숨바꼭질중.

 

 

새천년 기념관 전망대로 가는 길은 엘레베이터와 계단. 계단으로 갔더니 대충 4층에서 5층 정도 높이가 되는 거 같다.

 

 

옆에 나란히 선 풍력발전기 한 대. 시험삼아 돌리는 건가 싶기도 하고, 뭔가 효성의 광고판 같아보이기도 하고.

 

 

확실히 바닷바람이 매우 세게 몰아치기는 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얼레를 하나씩 손에 쥐고 연을 날리고 있었고,

 

호미곶에 갓 도착한 아이들은 일단 부모손을 끌고 연 하나씩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으니. 그나저나 바닷가의 소도시답게,

 

혹은 바닷가의 명소답게 저런 연들을 담은 종이박스에 새겨진 글자가 눈에 잡힌다. 돌자반.

 

 

 

 

 

포항 북부해수욕장, 새벽부터 내달려 세시간반만에 도착한 한반도 동남쪽 바닷가에는 그런 이름이 붙어있었다.

 

해수면까지 짙게 내려앉은 희뿌옇고 눈부신 장막 너머 포스코의 굴뚝들이 은폐엄폐중이던 그 곳.

 

 독도가 경상북도 울릉군, 이었다는 건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문구가 무수히 꽂힌 해수욕장 모래사장과 어릴 적부터

 

익어버린 노래 가사가 서로 만나는 순간 새롭게 각인되었다. 독도는 한국땅.

 

 포스코 제철공장을 마주본 이 곳인지라 그런지 곳곳에 철로 만들어진 조각들이 보였다. 이렇게 커다란 철로 만든 모기도 한마리.

 

 북부해수욕장 끄트머리부터 시작하는 야트막한 구릉은, 봄철에 왔더라면 좀더 물이 올라 싱싱한 초록빛으로 반짝이지 않았을까.

 

중앙공원, 해맞이공원, 혹은 환여공원이라고도 불리는 것 같은, 수많은 이름을 가진 그 큼지막한 공원 가운데께에는 멀리

 

영일만의 반짝이는 파도가 굽어보이는 전망대도 있고,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도착하는 포항시립미술관(POMA)도 품고 있다.

 

 

 지방이라 그런지 아니면 포항이 부유한 도시여서 그런지 포항시립미술관은 무료. 마침 개관 3주년 기념 전시라며 그간

 

수집한 한국 모더니즘 작가들의 예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현대적인 분위기 물씬한 미술관 내부에 문득 볕이 들이치던 순간.

 

 미술관 정문 옆에 심어져 있던 아롱다롱한 소망나무 한 그루. 은빛으로 번쩍거리는 열매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필체의 얼룩을 품었다.

 

 그리고 제법 오래 눈길을 붙잡았던, 포항시립미술관 앞의 이 작품. 허리춤을 아프지는 않게, 그렇지만 단단하게 부여잡은 저 손.

 

전망대에서 미술관을 지나 다시 공원 밖으로 내려서는 참에 다시 만난 포스코 제철공장의 어슴푸레한 풍경.

 

맑은날 밤에 여기서 야경을 찍어도 꽤나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항 죽도어시장을 돌아다니며 찍었던 사진 중에 가장 맘에 드는 한 장의 사진을 꼽으라면.

 

과메기 축제중인 시장통을 구경하다가 문득 시선을 돌린 한쪽에는 생선을 파느라 열심인 어느 청년이 보였다.

 

대담하도록 치켜올라간 점퍼와 내려뜨려진 츄리닝 바지를 위아래 입술삼아, 환하게 웃고 있었다.

 

 포항은 역시 과메기와 대게의 고장. 시장통 골목 곳곳에서 짙고 풍만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참돔배기라고 불리기도 하는 상어 녀석. 경북 지방의 제수용 생선으로 널리 쓰인다던가. 세모꼴 이빨이 원통하다.

 

원래 과메기는 청어로 만들었던 게 원조라고 하는데, 요새는 거의 이런 꽁치로 만든단다. 살가죽이 말라비틀어질 지경.

 

흔치는 않지만 이렇게 청어로 만들어진 과메기도 곧잘 내걸려 있었다. 아쉽게도 이 녀석들은 시식용이 없더란.

 

 좌판마다, 상점마다 맛보기로 내건 (꽁치) 과메기 시식을 하나씩 하며 시장을 걷다보니 배가 부를 지경이다.

 

입으로는 시식을 권하며 쉼없이 과메기의 껍데기를 벗기고 꼬리를 떼어내던 그네들의 손놀림은 가히 생활의 달인급.

 

 아무래도 살짝 찝찝한 건 없지 않았다. 과메기 클러스터, 형님 예산, 만사형통 따위의 단어들이다.

 

포항까지 내려와서 네놈의 이름 석자를 들을 줄은, 그래도 몰랐다.

 

에라이, 말라비틀어지다 못해 하얗게 성에가 내려앉은 동태의 썩은 눈깔같은. 

 

성황이다. 주말이라 그랬는지 서울같은 먼 곳 말고도 인근 지역에서도 총출동한 듯 하다.

 

 꼬리에 철사를 꿰고는 물구나무선 채 해풍에 노닐던 생선들도 있었고.

 

 보기만 해도 묵직하고 맛깔스런 핑크빛의 몸뚱이를 가진, 지느러미가 촘촘한 생선도 있었다.

 

 그런 생선들의 장막 뒤로 손만 바쁘게 움직이고 계신 아주머니들.

 

 그리고 마치 커튼처럼, 시장통의 어느 예기치 않게 한적한 모퉁이에서 건너편 풍경을 미묘하게 가리는 생선들의 버티컬.

 

붉은 대게 한마리가 붉은 벽돌 건물벽을 기어오르다 잠시 쉬어가는 중.

 

그리고, 오랜 세월 사람들의 질척한 발길과 무수한 생선비늘로 갈고 닦인 이곳 죽도시장의 분위기만큼이나

 

운치있고 정감어린 돼지국밥집의 모자이크 창문 하나.

 

 

나름 여러 공연이나 연주회들을 다니려고 애쓰긴 했지만 이런 '공연장'은 처음이었다. 한옥의

기와지붕 그림자가 그대로 떨어지는 무대에, 공연자 뒤에 나무대문이 바람에 흔들거리며 슬쩍

열렸다 닫히는 배경,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고아하고 아름다운 전통 한옥

툇마루에 이불을 깔고 다닥다닥 앉아듣는 객석의 운치라니.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 가옥이라는 경북 안동의 '수곡고택', 정조 시절 권씨 가문이 세운

건물인데 여전히 그 후손들이 살면서 수백년의 숨결을 입히고 있던 곳이다.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이 곳 '수곡고택'과 인근 '고산서원'이나 '묵계서원' 같은 곳에서 야간 고가공연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내가 11월에 가서도 공연을 볼 수 있던 건 일종의 특별공연, 밤날씨가

조금 쌀쌀했지만 공연을 즐기기엔 무리없던 가을밤.

까맣고 탱탱해보이는 찰옥수수가 알알이 반짝거리는 기둥 옆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실 가을이라기도 뭐할만큼 기온도 떨어졌고 해도 금방 지는 11월 말의 안동. 아무래도 서울보다

지방으로 내려오면 더욱 날씨도 춥고 바람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느낌이 있다.

공연장으로 변신하며 커다란 앰프도 놓이고 건반도 놓이는 옛 양반집의 앞마당, 언젠가 설치된

수도꼭지마저 나뭇빛 은은한 건물의 풍채와 운치에 묘하게 합류하는 공간에서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기분이란 건 굉장히 묘하다. 자꾸 사방을 두리번거리게 되는 거다. 계속 내 시선을

붙잡았던 건 그 수돗가 바닥에 꼼꼼하게 박혀있던 돌멩이들, 기왓장과 맷돌과 다듬잇돌이 얼핏

무질서한 듯, 그렇지만 흔들림없이 제자리를 박은 채 박혀있던 모습이 재미있었다.

첫번째 공연, 퇴계 이황과 단양관기 '두향'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맛깔나게 풀어주던 아저씨가

덥썩 대금을 집어들었다. 안동국악단에서 '450년 사랑'이란 제목으로 공연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퇴계가 48세 때 단양군수로 봉직하던 9개월 동안 18살짜리 기생 두향이와 나눴던 짧은 사랑,

그리고 20년 동안의 긴 이별동안 서로를 그리며 끝내 다시 한번 보지도 못한 두 사람의 간절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게 했다. 차갑고 둔탁한 가을밤에 녹아드는 대금 소리가 그런 로맨틱한

이야기의 뒷맛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 같았다.

두번째로 나선 앳된 판소리 명창, 작고 갸름한 태와는 달리, 인사를 할 때의 발랄한 목소리와는

달리 두텁고 허스키한 목청으로 노래를 하는데에는 늘 놀라고 마는 거다. 이끼가 나무껍질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는 기와지붕 아래 황토벽면을 양쪽 배경으로 하고는,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기둥 사이에 선 명창의 노래를 듣다 보니 나 역시 한복을 입고 조선시대 어디메쯤에서 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일렁인다.

마음을 아프게 했던, 자꾸 바람이 열어놓고 도망치는 대문의 정체. 특히나 이 명창 아가씨가

노래를 하던 와중에 자꾸 문이 열리고 바람이 들어와 못내 신경이 쓰였었다.


폭신하고 따뜻한 이불이 깔린 대청마루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고구마를 까먹으며

퍼지고 앉아 노래를 듣다가 끝내 따뜻하게 덥혀놓은 내 자리와 고구마를 마다하고 마당 여기저리로

튀어나와 사진을 찍고 말았던 건, 이 아가씨가 넘넘 맘에 들어서라기보다는 그저 노래가 넘 좋았기

때문...정도로 해두는 게 좋겠다.

세번째 공연, 들고 나온 악기는 안 그래도 공연 전 저게 가야금이네 거문고네 말이 많던 거였다.

아무래도 줄이 스물몇개씩 잔뜩 있어서 한국악기는 아닌 거 같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중국악기인

고쟁, 연주자 역시 한국에 공부하러 왔다는 중국인이었다.

고쟁은 가야금과 거문고의 원조가 되었다는 중국의 고대 악기이자 2000년이 넘는 시간을 버틴

저력있는 악기, 여러 개량이 있었고 다양한 형태로 갈려 발전하기도 했다지만, 아무래도

현을 뜯으며 내는 그 소리에 담긴 원초성이랄까, 직접 감성에 호소하는 듯한 적나라함은

마력적이다. 더구나 그 연주자가 가늘고 긴 손가락을 줄 위에서 휘저으며 움직이는 모습까지

함께 보게 되면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자체 하나의 예술이라 생각하게 되는 거다.


더구나 이런 기와 지붕의 그늘이 드리워진 공간, 이제는 문을 꼭꼭 닫아걸어 내 맘도 조금

걱정을 덜어낸 공간에서 그다지 넓지않은 양반집 앞마당을 꽉 채워내는 선율이라면야.

이런 분위기가 자아내는 묘하지만 매력적인 느낌이 훌륭한 공연에 더해지니 더욱 기억에

남을 시간이 되는 것 같다. 이런 건 공연장이나 다른 곳에서는 맛보기 쉽지 않을 거다.

마지막을 장식했던 안동의 '소울'이라는 남성4인조 성악단. 유쾌하고 재미있던 그들의 공연 앞에

어느 때보다 많은 카메라 셔터소리를 들었던 거 같다. 솔직히 안동에서 볼 수 있는 공연의 퀄리티란

한 수 접고 너그러이 봐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맘이 처음엔 있었는데, 첫번째 대금에서부터 두번째

판소리, 세번째 고쟁을 지나 마지막 이들 '소울'의 공연을 만끽하면서 그런 맘은 싹 지워버리고

말았다. 굳이 너그러이 봐줄 것도 없이, 이들의 공연은 정말 재미있으면서도 품위있었다.

물론 그런 후한 평가에는 이 '수곡고택'이 한 몫했음을 부인하긴 어렵겠다. 기와가 낭창낭창하게

리드미컬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담백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의 황토벽이 공연장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으며, 야트막하고 완만한 지붕 너머로 별빛이 쏟아지는 안동의 맑은 밤하늘까지.

툇마루에 다닥다닥 붙어서 이불을 깔고 담요를 뒤집어 쓰고 목도리를 머리에 둘둘 감고 공연을

즐기던 사람들. 꼭 여미고 있던 이불과 담요들을 쥐고 있던 손이 조금씩 박수치는데 동원되더니

공연 끝날 무렵에는 전부 무장해제, 추위고 뭐고 공연에 몰입해선 한마음으로 박수를 쳤다.

아침에 다시 둘러본 수곡고택, 옥수수가 여기저기 걸려있었는데 미처 못 봤었다. 밤에 본

나무기둥의 질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붉은 나무기둥. 까만 옥수수의 알이 탱탱하게 박힌 건

여전하고.

수곡고택 뒤로 완만하게 능선을 내리뜨리는 산이 버티고 섰고, 고택 앞에는 '야간고가 음악회'를

열고 있다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자세한 내용은 들고 온 팜플렛에 자세히 적혀 있어 아예 스캔.

2010년 4월-10월에 있었던 야간 고가공연 내용이니 2011년에도 이와 비슷하게 간다고 생각하면

될 거 같다. 아무래도 11월 이후부터 3월까지의 동절기에는 날씨도 춥고 공연자들도 제 솜씨를

내기에는 애로가 없지 않을 테니까.

수곡고택에서 이렇게 맛을 보고 나니까, '묵계서원'이나 '고산서원'에서 즐기는 공연은 어떨까

굉장히 궁금해졌다. 그저 건물 껍데기만 이리저리 구경하고 마는 여행이 아니라, 그 툇마루에

앉아 조선시대 어디메쯤으론가 옮겨간 느낌에 젖어 이런저런 공연을 만끽하는 여행을 내년엔

떠나야겠다. 그야말로 '만끽', 흠뻑 그 정취에 젖을 수 있는 여행이 될 거 같다.





안동 가일마을 앞머리 300년 묵은 나무엔 뭔가 특별한 게 있었다. 원래 마을마다 오랜 나무 하나쯤

소중히 여기며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목 정도로 생각하는 일이야 왕왕 있다지만, 그리고 300년쯤

나이먹은 나무가 그렇게 아주 희귀한 건 아니라지만, 정작 이 나무에는 용이 꿈틀거리는 문신이

그려져 있었던 거다.

나무 자체의 모양새도 위풍당당하니 에너지가 사방으로 뻗쳐나가는 모습이었지만, 그런

수형이 눈에 들어온 건 한참동안이나 굵은 가지 두 곳에 그려진 그림을 훑어본 다음이었다.

노랑색 몸통에 파란 갈기를 가진 용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치솟는 그림이 마치 조폭들

등짝에 그려진 문신처럼 살짝 으스스하기도 하고, 굉장히 멋져보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이 나무가 이렇게 멋져 보이는 건 이 용그림, 타투를 했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다.

나무 거죽이 벗겨져 매끈하게 드러난 속살이 자칫 밋밋하고 부족해 보일 수 있었을 거 같은데,

그 빈 공간을 화려한 색감의 그림으로 채워넣고 나니까 오히려 더욱 당당해진 느낌.

안동 가일마을, 이 마을에는 조선 정조 때 권씨 가문이 지은 수곡고택 등 오랜 고택들이 많이

남아 있어 '양반마을 안동'의 분위기를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 이런 멋진 마을 지킴이

나무를 갖고 있으니 아무래도 다른 마을들보다 훨씬 외부의 나쁘고 삿된 것들로부터 잘 버티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 안동 가일마을.






안동의 어느 전시관에서 만난 이 때깔나는 옷들은 사람의 상상력을 마구마구 자극했다.

비에 젖거나 물이 묻으면 흐물흐물 녹아내리거나 힘없이 벗겨지지 않을까. 때가 묻으면

지우개로 그저 쓱쓱 지워버리면 되는 걸까. 여차하면 한 귀퉁이 찢어내어 수첩으로도

쓸 수 있는 걸까. 저 옷은 급하면 그냥 아무데나 잡고 쫙 찢어내리면 되는 걸까, 따위 온갖

흥미진진하고 살짝 야시시한 그림을 뭉게뭉게 피어오르게 만드는 옷들의 재료는, 바로 종이다.


'종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아무리 찾아도 그런 의미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종이라고 하면

으레 글자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좀더 머리를 굴리면 뭔가를 포장하고 덮는 정도의 기능을

한다고 생각할 뿐인 거다. 찾다 찾다가, 무려 '식품과학기술대사전'에까지 가서 찾아본 종이의

만드는 법, 분류, 용례 등은 이런 거다.


식물섬유나 그 밖의 섬유로 제조한 펄프를 얽히게 하여 엷게 교착시켜 말려서 시트 상으로 만든 것. 광의로는 합성고분자물질로 제조한 합성지도 포함된다. 종이는 한지, 양지, 판지, 합성지로 나누어지나 용도에 따라서 인쇄용지, 필기용지, 도화용지, 지도용지, 여과지, 감광지 등 또는 백판지, 골판지원지 등으로도 분류한다. 종이의 제조원리로는 플라스틱이라든가 인청동의 망 위에 펄프를 부유시킨 물을 흘려, 수분을 제거하고 건조시켜 만들어진다.

약 3000~4000년 전, 이집트에서 파피루스(papyrus)의 육질부를 종횡으로 펴놓고, 압착하여 건조시켜 필기용으로 사용했던 것에서 유래하여 paper(영), papier(독일), papel(프랑스)의 어원이 되었다. 현재의 종이는 서력 105년 중국에서 채윤이 삼 또는 동백의 나무껍질을 원료로 발에 올려 종이로 한 것이 기원으로 되어 있다. 종이가 대량으로 쓰이게 된 것은 목재로부터 펄프가 만들어지고 원망, 장망 등 기계적으로 연속생산이 가능하여 가격이 싸졌기 때문이지만 그전까지는 귀중품이었다.

종이에 의해서 인류는 과거의 문화유산을 계승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종이의 소비량은 문화의 척도가 되고 있다. 컴퓨터시대가 되어 종이의 소비량이 감소할 것으로 추측하였으나 실제로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용도별로는 중량비로 약 4할이 포장에 사용되고 있어 종이는 포장의 중요한 소재이다.

* 출전 : 식품과학기술대사전 한국식품과학회 저, 2008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뭔가를 접고 오려 만들거나, 단단하게 말려서 바람을 일으키거나, 혹은

벽에 바르거나 바람을 막는데 쓰는 건, 그 위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과 함께 오래전부터

활용되어 온 종이의 쓰임 중 하나인 거다. 그런데 옷이라니. 종이로 옷을 만든다는 건 어릴 적

여자애들과 같이 못 이기는 척 인형 옷입히기 놀이를 할 때 빼고는 생각도 안 해본 일이다.

그런데 그저 슬쩍 걸쳐놓기만 하는, 전혀 실제로 입을 엄두도 낼 수 없는 그 2차원의 옷이

실제 사람이 입고 생활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채 이 곳에 전시되어 있던 거다. 마치 아바타를

필두로 한 3D영화가 전혀 새로운 충격과 감각을 일깨우듯, 3차원으로 구현된 옷들이 눈앞에서

화려하게 펼쳐졌다.

사실은 생각을 조금만 뒤집으면 되는 건지도 모른다. (왜 하필 수의를 앞에 두고 그렇게

납득이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옷이나 포장지나, 뭔가를 싼다는 것에선 같은 거다.

물론 수의와 달리 실생활에서 입을 수 있으려면 그 종이의 견고함이나 내구성, 부드러움

정도가 굉장히 특출해야 하겠지만.

여기가 바로 그런 한지를 만드는 곳이다. 이미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가 다녀간 안동 하회마을 옆의 안동한지공장이다. 얼마전 있었던 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이 곳의 한지가 또다시 국제적으로 알려질 기회를 얻었는데 15개 회의장 전체의 실내공간을

장식할 도배지로 활용되었다는 것. 전국 최고의 품질임을 거푸 인증받은 셈이다.

이 곳에서는 단순히 한지를 전통적인 제조법에 따라 생산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만들어진 한지를

전시하고 제작과정을 체험할 수 있도록 체험관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지를 원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들도 전시하고 있었고, 명함통이나 필통 같은 것들을 직접 한지로 만드는

체험 역시 해 볼 수 있었다. 단순히 만들어진 종이를 파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을 직접 경험해보고

앞으로도 한지를 볼 때마다 스스로의 이야깃거리와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랄까.

닥나무가 시래기와 함께 시름시름 마르고 있던 컴컴한 창고. 얼핏 보아서는 무슨 뱀가죽을

벗겨놓은 듯 길고 가늘고, 그렇지만 질겨보이는 것이 잔뜩이다.

가까이서 보면 겉껍데기는 칙칙하지만 속은 제법 하얀 빛깔을 숨기고 있는 게, 어찌어찌 살살

잘만 다뤄주면 하얗다 못해 뽀얀 빛깔을 낼 수도 있겠구나 싶다. 실제로 한지를 제조하는 건

이 녀석들을 사정없이 삶고 헹구고 햇볕 아래 표백하는 과정부터 시작이라고 한다.

한지만들기1. 커다랗고 네모난 솥에서 삶아지고 있는 닥나무 껍데기들, 슬쩍 만져보니

제법 낭창하게 많이 부드러워졌다. 물기도 흠뻑 머금은 데다가 불에 삶아진 덕분인 듯 했다.

한지만들기2. 창고에서 봤던 녀석과는 비교도 안 되게 새하얀 빛깔로 변신한 닥나무 껍데기,

아주머니 둘이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무더기무더기 끄집어 내어 열심히 뭔가를 골라내고

있었다. 껍질 속에 혹여 섞여 들어간 티를 골라내는 작업이라고 했다.

한지만들기3. 잡티가 없이 깔끔하게 골라진 닥나무 껍질을 분쇄기에 들어가 잘게 짓이겨진다.

그때 아무 염료 없이 그대로 짓이기면 하얀 한지를 만들 원료가 되는 거고, 뭔가 빨갛거나

파랗거나 노란 염료를 첨가하면 그 색깔을 띈 한지가 만들어지는 거라 한다.

한지만들기4. 여기가 아마 제일 기술도 필요하고 힘도 필요한 작업이지 싶었다.

생각보다 훨씬 작고 열악한 공장에서 내리쬐는 형광등은 왜 그다지도 밝은지, 판을

휘젓는 아저씨의 팔뚝에 솟아오른 굵고 야성적인 힘줄과 핏줄들을 그대로 비췄다.


한지만들기5. 잘게 짓이겨진 닥나무 섬유들이 둥둥 떠다니는 물 속에 저 커다란 판을 넣고

좌우로 세번, 위아래로 세번, 그렇게 십여번 가까이 힘차게 흔들어주면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없던 판 안에 하얀 종이가 생겨나는 거다. 섬유들이 물풀처럼 흔들리며 좌우로 정렬하는

모습이 머릿속엔 생생하게 그려졌지만, 아저씨들의 두꺼운 팔목이 움직이는 아랫쪽을 아무리

눈 크게 뜨고 지켜보아도 한지가 생겨나는 과정은 좀체 신기롭기만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지를 판에서 떼어내어 아랫쪽에 차곡차곡 쌓아올리곤, 다시 닥나무

섬유들이 흐늘거리는 물 속으로 판을 집어넣었다. 다시금 시작되는 좌우로 세번, 위아래로

세번의 십단콤보. 둘이 나란히 서서 하는 작업이니 아무래도 조금 덜 심심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두분이서 슬쩍 장단을 맞춰가며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한 분이 조금 앞선다

싶으면 다른 분이 금세 따라잡기도 하고.

그렇게 쌓여만 가는 한지는 아직 너무 축축하다. 축축하고 미끌거리고, 해서 좀처럼

손으로 잡아올릴 수가 없었다. 귀퉁이에 슬쩍 손가락을 댄다는 게 무슨 지문을 남기듯

깊은 흔적을 남겨버려서 시껍하곤 도망나와버렸다. 아직 종이라기보다는 뭔가..묵이나

전병같은, 먹을거리에 가까워보이는 네모판.

한지만들기6. 어느 정도 물을 빠지도록 방치했던 그 하얗고 네모진 묵덩어리에서는 이제

한장씩 '종이'라 부를 만한 것이 떨어져 나올만큼 형체가 잡혔다. 따뜻하다기보다는 뜨거운

철판 위에 한장씩 솜씨좋게 잡아당겨 붓질 한 방에 찰싹 붙여놓는 아주머니의 손놀림은

거의 춤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게 마른 종이는 이제 한장씩 다시 포개져선 밖으로.

한지 만들기 체험관에서는 '좌우 세번, 위아래 세번'의 과정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었다.

손가락만 슬쩍 빠뜨려도 온통 닥나무 섬유들이 휘감기는 물 속에서 조그마한 판을 움직여

종이를 만들고, 수건 위에 올려 물을 뺀 후에 뜨거운 철판 위에서 바싹 말리는 과정. 그렇게

내가 만든 종이 양쪽 귀퉁이에는 서로 마주보도록 도장을 두 방 찍어줬다.


내가 만든 한지를 조심스레 접어서는 어디에 쓸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옆 방으로 옮겼더니

온통 화려하고 아름다운 종이들이다. 닥나무 섬유질이 그대로 살아있는 듯한 결하며, 정말

곱게 나염된 그 빛깔하며, 저런 종이는 포장지로 쓰거나 아님 아까 봤던 한지 옷의 허리띠로

써도 딱 좋을 거 같다.


무려 천 년 이상 보존된다는 우리 나라 고유의 전통 한지는 '조선종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독자적인 특징과 개성이 묻어 있다고 한다. 종이 한 장이라도 직접 만들어보고 나니

그 과정에서 천년을 버틴 사람들의 지혜와 미감의 한켠이나마 엿본 듯 했다. 아무래도 앞으론

한옥집이나 한지로 된 포장지만 보아도, 아니 한지 비스무레한 아름다운 종이 한 장만 보아도

마음이 설렐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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