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 10점
올더스 헉슬리 지음, 정승섭 옮김, 바나나몽스 그림/혜원출판사

 

흔히들 말하듯 유토피아의 반대가 디스토피아, 그런 간단한 말로 축약될 때 뭉개지는 것들이 있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인간의 이지가 확장되면서 예견하는 밝고 풍요한 미래, 그 자신만만한 예측과 전망이

 

유토피아의 밑그림이 되는 거야 당연하다지만 실은 그대로 디스토피아의 깔개가 되기도 하는 거다.

 

 

"삶의 요소가 획기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생활의 학문이라는 수단에 의해서뿐이다...

진정 혁명적인 혁명은 외적인 세계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육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천국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은 술을 마셨습니다.

영혼이라는 것과 불멸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르핀과 코카인을 복용했습니다."

 

"감정은 욕망과 그 욕망의 달성 사이에 있는 시간 속에 숨어있다."

 

 

이런 얕지 않은 성찰과 반성을 기반으로, 인간의 물질적/정서적 필요를 최대한 신속정확하게 충족시키고

 

부정적인 감정과 불편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건 사실 대부분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공유하는 야심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가용한 모든 자원과 기술, 사회제도까지 송두리째 기울여지는.

 

 

"정말로 능률적인 전체주의 국가라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정치적 우두머리인 간부들과 그들 아래의 많은 관리층이

노예생활을 사랑하기 때문에 억압할 필요가 없는 노예를 통제하는 형태를 띄고 있다."

 

 

헉슬리가 묘사한 건 그런 야심을 거대한 뿌리로 삼은 커다란 나무가 키워낸 어느 굵은 가지의 한 극한이다.

 

사회적 역할과 운명이 결정된 인공 수정과 공동 양육, 자유로운 성생활, 더이상의 철학과 상상이 용인되지 않는

 

'완전한' 사회제도, 정교한 톱니바퀴와 같이 인간이 결핍을 느끼기도 전에 제공되는 물질들, 그리고 신경안정제까지.

 

 

아니, 그 '멋진 신세계'에서 완벽하게 충족되는 건 '인간' 일반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의 의미는, 마치 서서히 끓어오르는 물에 빠진 개구리와 같이 인간은 특정 사회제도와 분위기에 함몰된 채 휩쓸려가기

 

쉽다는 함의도 포함한다. 미래상을 늘어놓기만 하던 소설이 생명력을 얻는 건 버려졌던 땅의 '야만인'이 나타나면서부터다.

 

 

그는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이라 여기는 것들 하나하나에 당혹감을 느끼고, 어느 순간 굉장한 거부감을

 

토해내게 된다. 그는 셰익스피어 문학에 표현된 '옛 시대' 인간들의 정서와 상식에 기대어, 어느 극단적인 정점에 올라선 채

 

더이상 과거와 같은 인간이 살 수 없게 된 세계가 얼마나 기형적이고 추한 얼굴을 갖고 있는지 보는 눈을 가진 자다.

 

 

결국 그는 사람들로부터 구경거리가 되어 조롱받고 희화화되다가, 끝내 자살하고 만다. 그 '눈'을 감아버린 셈이다.

 

그의 죽음이란 현재 인류가 지향하고 있는 가치라거나 역사발전의 이상향 같은 게 끝내 도달하게 될 미래가 얼마나

 

황량하고 비인간적일지에 대한 감각을 극적으로 폭발시키는 장면이 아닐까.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끝내 못버텨낼 그런 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더 짚어보고 싶은 부분이 생긴다.

 

 

어쩌면 그 '원시인'은 단지 일종의 '타임-슬립'으로 인한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건 아닐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면,

 

그는 그 '멋진 신세계'에 적응이 실패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원시의 자연에 살다가 문득 발견된 사람의 아이들이

 

사회 적응에 실패해서 자살하거나 다시 자연으로 도망가는 사례가 없지 않은 것처럼, 그도 자신이 준거로 삼은 시대-

 

그것도 고작 세익스피어의 책 속에 그려진 시대-로 '퇴행'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보다 중요한 건, 책에 그려진 그 '멋진 신세계'의 모습이 진심으로 정말 그렇게 비극적이고 비인간적인지 하는 문제다.

 

"문제의식은 옳았다, 그러나 해결방식이 너무 극단적이었다?" 따위의 어정쩡한 봉합 말고, 인간의 생래적 한계를

 

극복하고 신체적, 사회적 모순을 해소하려는 그 가상한 문제의식과 상황판단을 공유했을 때 어떤 다른 그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원시인과 함께 했던 둘셋의 지식인들이 가진 먹물 고유의 불만은 그렇다치고, 책의 마지막장까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행복하면 되는 거 아닌가.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들에서 더욱 가슴 서늘하게 느끼게 되는 부분은 사실 소설 외부에 있다. 사실 지금 도래한

 

매순간이 외부에서 온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디스토피아일지도 모른다. 상식과 비상식이 어지러이 경합하는 와중에

 

무엇인가는 쉼없이 탈각되고 생성된다. 일일이 감응할 수 없는 보통사람에게는, 대체로 행복한 시대다. 소설 속 그들처럼.

 

 

우리는 어떤 비인간과 어떤 황량한 풍경을 껴안고 살고 있는 것일까. 알량한 행복감에 젖은 채 놓치고 있는 건 뭘까.

 

 

 

하루끼가 한 남자에게, 한 남자와 여자에게 빨간 점을 찍는다. 그 전까지는 그야말로 '갑남을녀',

익명의 바다를 떠다니던 남자와 여자에게 이름이 붙었다. '덴고'와 '아오마메'.


그의 소설은, 그의 소설 중 내가 좋아하는 류의 소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나, 주인공은 특정 분야에서 나름대로 특출하달 정도의 재능을 갖고 있지만 의지와 욕구가

부재하다. 맘만 먹으면 그래도 꽤나 해낼 수 있는데, 그 마음 먹기가 힘들다. 딱히 무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 사실 뭘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는 상태. 둘, 주인공은 다른 등장인물과의 관계나

세계 그 자체에 대한 회의나 비현실감을 끈질기게 품고 있다.

"여기는 여기가 아닌 세계구나"류의 대화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 내내 반복되는

질문, 우리가 지금 같은 시공간에 있는 걸까. 셋. 도무지 주인공의 문제가 해결되는 법이란 없다.

기껏해야 원점, 이거나 여기가 내가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할 수 있는 딱딱한 바닥면이구나, 정도의

확인에서 그친다.


그건 왠지 내 이야기다. 얼마전 하루끼와 관련한 잡지 인터뷰에서도 말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어필하는 부분은 바로 그런 부분이다. 적나라하게 지금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 맨날 보여주면

짜증나서 죽어 버릴지도 모를 볼품없고 엉성한 상태지만 그래도 가끔은 거울을 들여다보듯 날

비추어 볼 수 있는. 그의 이야기에서 공통된 부분들, 딱히 신나게 달리지도 않고 드라마틱하고

거창한 결말도 없으며 주인공은 늘 사변적이고 주춤거리는-때로 아주 답답하고 짜증나는-캐릭터에

딱히 꿈이나 야망이랄 것도 없고 사실 뭘 하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누추하고 김빠지며

'참 사느라 애쓴다' 싶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의 소설을 보는 이유는, 그게 지금 내 삶과 많은 부분

맞닿아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가 바닥이구나, 싶어서다. 그건 내가 살아감에 대한 일종의

데카르트식 '방법적 회의'를 가능케 하는 최후의 지반일 수도 있겠다.


항상 그렇듯 건조한 인생을 쌓아나가다 어느 순간 문제가 불거진다. 두 개의 달이 떠있음을 퍼뜩

깨닫게 되듯 일상에 그어진 작은 균열을 발견하고 나면 쭉쭉 균열이 사방으로 번지는 건 금방이다.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밋밋하고 조용했던 인생을 복기하다 보면, 정작 본인의 문제랄까,

본인의 결락이 심각함을 발견하고 그것에 매달리게 된다. 외부의 문제는 최초의 자극, 계기일 뿐

이내 시선은 내부로 향하게 되는 거다. 그 내부엔 자신의 가치, 자신의 사랑, 자신의 치부가 오롯이

숨겨져 있다. 모든 문제를 자기화하고,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내밀한 것으로 되돌이하고

마는 강력한 산화력이 발휘되지만, 그건 이기적이라거나 탈정치라거나 혹은 관념적, 사변적이라는

표현과 맞춤하지는 않다. 자신을 먼저 찾아내고 알아내려는 노력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A에서 A'로 바뀐 자신은 드디어 뭔가를 의욕하기 시작한다. 범속한 일상에서

무기력하고 무의지한 모습으로 일관하던 주인공이지만, 조금은 '의지'라는 것을 품게 된다. 그건

아마도 수많은 상실을 거친 후, 내적으로는 거의 세계대전에 가까울 만큼 혁명적이고 치열했을

전투를 거친 결과이겠지만, 정작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별반 다를 바 없다. 하루끼가 찍어 놓은

빨간점을 지우고 일상에 풀어주면 다시 이전처럼 이름없고 얼굴없는 대중 속으로 빨려들어갈 거다.
 

그의 이야기가 하나의 커다란 원을 돌아서 원점으로 돌아온다 싶은 게 그래서다. 결말이 이상하다

싶다는 소감들도 그래서 아닐까 싶다. 1984나, 1Q84나 다르지 않다. 내면에선 폭풍우가 일고 숱한

상실과 모험을 겪었지만, 외부로 드러나는 건 거의 없다. 여전히 세계는 해가 뜨고 달이 뜨고, 신은,

'리틀 피플'은 기분이 좋지 않으면 천둥치며 으르렁대는가 하면 사람들의 일상 역시 똑같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도 바뀌는 건 없는 거다. 건방지지만, 그게 세상이다, 라는 정도의 말을

해야 할 타이밍이다.


어쩌면 고마쓰니, 교쿄니, 아유미니, 교쿄의 남편이니 하는 등장인물들, 소설속 그리고 현실속 모든

동시대인들 역시 제각기의 모험 중이었을 거다. 상실감을 품고 뭔가를 계속해서 흘리듯 잃어버리면서,

허랑하게 뱉어지는 메마른 말들을 주고 받는 그들이었다. '리틀 피플'의 위협은, 주변의 소중하고

취약한 것들을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은 꼭 덴고나 아오마메에게만 전달된 것은 아니었을

거다. '리플 피플'이란 일종의 비료랄까, 원래 내면에 있던 씨앗을 이상성장시킬 뿐이다. 상실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을 조금 일찍 상실시킬 뿐이다. 그렇게 제각기의 전투와 모험을 마치고, 두권짜리

장편소설 분량의 이야기를 마치고 일상으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복귀했겠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루끼가 빨간 점을 찍고 들어올리기 전까지는.


그들은,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덴고'와 '아오메마'가 1984년에서 어느 순간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없는 1Q84년으로 흘러들었듯, 일상의 어느 순간 어디서 그런 갈림길, 혹은

스위치를 건드릴지 모른다. 기지개를 연달아 네번 켜본다거나, 왼쪽신발과 오른쪽신발을 바꿔

신어본다거나. 굳이 그런 거 아니어도 호, 흡, 호, 흡 대신 호, 호, 흡, 흡 하는 정도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런 사소한 스위치 하나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불가역한, 돌이킬 수 없는 세상으로

옮겨지는지 모른다.


그건 사실상 매순간 돌이킬 수 없는 시공간에 떨어지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지만 좀처럼

그 무게감때문에 직시하고 싶지 않은 깨달음과도 같다. 매순간 돌이킬 수 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많은 소중한 것들을 함께 쓸어내버린다는 것.

시간이 흐른다는 것 자체가 내 현재, 내 소중한 살점들이 흘러가 버린다는 거니까 사실은 같은

말이다. (불가역한) 시간, 과 상실, 이란 단어. 그리고 '리틀 피플'의 협박이란, 사실 언제가

'상실'에 있어 맞춤한 때인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갈협박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작용한 게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상실할 때였는지도 모른다.


1984년과 1Q84년이 결국 다르면서도 같을 수 밖에 없는 이유, 소설의 시작점과 마침점이

다르면서도 같을 수 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깨달은 후에도 별다를 바 없이 계속 똑같이 살아가게

되는 이유, 그 모든 이유는 아마도 시간 = 상실, 삶 = 상실, 실용적이지는 않은 깨달음 때문

아닐까 싶다. 딱히 그걸 알았다고 해서 어째야 할지 대책이 안 서는, 그저 거기서부터 다시

뭐든간에 쌓아올려볼 수 밖에 없는 '방법적 회의'의 밑장.



* 리뷰랄까, 내가 쓴 건 지독히도 재미없는데 소설은 사실 꽤나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하루끼가

이리저리 뒤척여가며 보여주는 그의 '밑장'은 여기서 보던 저기서 보던 똑같다. 그의 문제의식이나

글쓰기의 주제가 더이상 커지거나 발전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이미 그가 다루는 주제는 인간이

나고 자라면서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외로움, 상실감이라는 거대한 것, 그걸 이야기하는 그의

내공은 절정을 친 지 오래고 지금은 이리저리 변주만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물론 이야기는

세련되고 풍성해졌으며 더욱 '열렸지만', 핵심은 '상실의 시대'에서 이미 다 쓰여져 버렸다고 생각한다.



1Q84 1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1Q84 2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1Q84 3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1984 (반양장) - 10점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문학동네


솔직히 그런 책들이 있다. 제목을 워낙 많이 들었거나 그 핵심 아이디어라며 쉽사리 인용되는 한두가지 개념에

워낙 익숙해진 탓에 미처 읽기도 전에 이미 읽었다고 착각하고 마는 책. 예컨대 '빅브라더'같은 단어가 그런

착각을 일으킨다. 하루키의 1Q84를 두고 '아이큐84(IQ84)'라며 이상하게 읽어대는 어떤 문학평론가를 조소하다가,

그러고 보니 나 역시도 하루키가 1Q84라며 비튼 제목의 원전 격이랄 조지 오웰의 '1984'를 여태 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정말정말 굉장히 멋진 책이다. 하루키를 무지 좋아라 하지만, 그의 1Q84는 조지 오웰의 1984과 매우 '다르다.'

그리고 아마 2984년쯤에도 살아남아 찬사를 받을 작품은 조지 오웰의 1984일 거라는 데 걸겠다. 물론 두 작품은

제목 빼고는 별로 주제도, 내용도 겹치지 않으니 굳이 두 작품을 비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굳이 1Q84를

제목으로 내건 하루키가 1984의 문학적 성취를 의식하고 호승심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뭐랄까, 두 번째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 불현듯 마오쩌둥의 '영구혁명론'이 떠올랐다. 사회주의가 성취되기

위해서는 한번의 혁명, 한번의 전복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애써 이뤄낸 성취가 무위로 돌아가거나 후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모든 분야에 걸쳐 근본적인 변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그 '영구혁명론'의 대강인데,

이 책에서 그려지는 1984년의 세상은 그런 영구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세상인 거다. 다만 그 혁명은 위로부터의

혁명, 그러니까 기득권층, 더 적나라하게는 지배계급의 '영구혁명'이라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겠다.


1984년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권력, '빅브라더'는 역사의 흐름을 이해했다, 혹은 이해했다고 믿는다. 권력을 쥔

상층계급에 대항해서 자유와 평등, 정의 따위의 수식을 내건 중간계급이 하층계급을 끌어들여 그들을 전복시킨다.

그리고 중간계급은 상층계급으로 자리이동하고 다시 새로운 중간계급이 생성되어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한다는

식의, 커다란 순환을 무한반복한다는 것이다. 이제 권력은 그 역사의 흐름을 이해했으니 그 지식을 활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영구히 보유하려 한다. 중간계급이 성장하기 위해서 집적되어야 하는 부를 족족 소진시키고,

중간계급을 각성시키기 위한 지식을 황폐화시키겠다는 황당하지만 살벌한 전략. 그게 지배계급의, 지배계급을

위한, 지배계급에 의한 '영구혁명'의 목표다.


듣기엔 우습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다. 온 인류를 먹여살리고 노동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만큼 경이로운 수준에

오른 생산력은 주변국과의 쉼없는 전쟁을 위한 총과 대포를 위해 소모된다. 현재의 세상을 비교하고 평가하기

위한 나침반이자 전거로서 기능해야 할 과거의 역사, 과거의 지식은 매시간 새롭게 씌여진다. 늘 전시체제 하에서

동원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제 전쟁이 없던 시기를 기억하지 못하며, 배급되는 신발과 면도날의 질과 양이

불과 일년 전에 비해서도 양호해졌는지를 따지지 못한다. 그들은 전쟁의 광기에 불현듯 휩싸이면 빅브라더를

위해 만세를 부르며, 집안 화장실마저 감시하는 사상경찰 하에서 억지웃음을 지을 뿐이다.


권력이 자원을 무익하고 비생산적인 쪽으로 소모해버리고 적극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건 2010년 지구에서는 이미 익숙해져 버린 풍경이다. 한국만 해도, 온 국민을 먹여살리고 북녁의 주민들까지

먹여살릴 수 있을만큼의 풍요한 자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굳이 희소하게 만들어 버린다. 전쟁무기를

구매하고 국외와의 불공정한 경쟁에 노출시키며 4대강 같은 무익한 사업에 쏟아부으며 '소모'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와 이데올로기를 만들기에도 게으르지 않다. 권력과 언론간 '반복과 차용'의

근친교배를 통해 사실로 굳어져버리고 마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들. 천안함 사태가 그렇고, G20가 그렇고,

사대강 사업이 그렇고, FTA옹호론이 그렇다. 그 와중에 국내이슈를 덮어버리는 애국 마케팅도 절묘하다.


조지 오웰의 상상력은, 그렇지만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괜히 그를 '디스토피아'의 무시무시한 재현자로

이야기하는 게 아닌 거다. 이들, '빅브라더'를 전면에 내세운 채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춰버리려는 이들은 사회를

통제하고 구조를 고착화시키려 안간힘을 쓸 뿐만 아니라 아예 인간의 사고 자체를 개조하려 든다. 기계에서

자동으로 배열된 몇가지 단어로 짜맞춰진 시와 노래만을 유포하고, '섹스를 더럽게 변질시켜' 억압된 성욕을

전투적인 증오심과 지도자 숭배로 전환시키는 거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사고능력을 둔화시키고 제거하기

위해서 언어 그 자체를 새롭게 정리한다. 어휘를 계속 줄이고 줄여서 생각의 폭을 좁히고, 결국에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기계인간을 만드는 것이 빅브라더가 생각하는 혁명의 완수.


빅브라더의 생각대로 될까.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다양한 동사와 형용사들, 깊은 사고와 반성을 가능케 하는

관념어들이 없어지면, 정말 인간이 변화할까. 그리고 신발깔창처럼 제작되는 노래와 시들이 재래의 예술을

대체하면 인간의 문화는 황폐해지고 말까. 성욕을 억압하면 인간들이 까칠해져버려서 전투적으로 변하고

전시상태의 비인간성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되는 걸까. 전통적 가정을 하나의 상호 감시단위로 변화시킬 정도의

강력한 감시와 통제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수락할 수 밖에 없게 될까.


모르겠지만, 조지 오웰은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고 말한다. 이미 그의 주인공 윈스턴조차 찢겨진 시체의 팔목을

무심히 발로 차내어 버릴만큼 황폐해졌고,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을 곡괭이로 살해하고 말겠다 다짐할 만큼 살벌하다.

결국 지독한 고문과 자기 부정을 거쳐 윈스턴이 빅브라더를 사랑한다 고백하는 최후의 순간에 이르면, 오웰의

예측은 옳은 것이었다고 동의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고 마는 거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런 상황에까지 몰리면

인간은 멸종하고 말겠구나, 역사는 멈추고 말겠구나, 기껍지는 않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게 단순히 조지 오웰의 '사고 실험'이었으면 좋겠다. 아직 어떤 권력도 빅브라더만큼 철저하게 국민들을

통제한 바 없으며, 언어를 조직적으로 퇴화시키는 건 고사하고 문화와 사생활과 사고방식을 규율하고 억압한

적은 없다고 믿고 싶다. 그렇지만 불길하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간 신체에 대한 구속력-생체권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해졌고, 국가와 자본주의의 동학 내에서 대중문화는 스스로 천박해진지 오래다. 전신을

스캐닝하고 개인정보와 생체정보를 집적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란 너무 쉬워졌다. 민주주의의 이름을

팔아 하향평준화를 강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자기 성찰과 반성적 사고를 단련하기 위한 시간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슈들에 선점당한다고 느낀다면, 너무 시니컬한 건가.


다행히 아직은 그렇게까지 위태롭지 않다고 해도, 조지 오웰의 이 암울하고 염세적인 이야기는 여전히 값지다.

자연스런 흥망성쇠의 역사 흐름을 멈춘 채 현재의 지위와 특권을 영원히 장악하겠다는 그들 권력자들의 욕심은,

조지 오웰이 그 결과로 그려낸 세상은 낯설지언정, 그 욕심 자체는 지독히도 진부하고 익숙한 거다. 그들은

언제고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며, 그들을 위해 유리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를 강권한다.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 아닌가. 4대강은 운하가 아니고, FTA는 모두에게 유리하며, 아랍인은 테러리스트이고, 미국은 영원한

우방이자 세계경찰이고, 그리고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란 이야기.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다. 2+2=5, 라디오헤드의 이노래가 1984의 이 대목에서 비롯한 건 아닐까.

이제 끔찍해질 거야, 도망칠 곳은 없어.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쳐도 이제 너무 늦었어.


Are you such a dreamer
To put the world to rights?
I stay home forever
Where two and two always makes up five

I lay down the tracks
Sandbag and hide
January has april′s showers
And two and two always makes up five

Its the devil′s way now
There is no way out

You can SCREAM IT, you can shout
It is too late now

Because...
You′re not there!

payin′ attention
payin′ attention
payin′ attention
payin′ attention
You have not been paying attention

paying attention
paying attention
WHEN I SAY SOON oohh

I try to sing along
But I get it all wrong
′Cause I’m not
′Cause I’m not

I swat ′em like flies but like flies the buggers keep coming back NOT
But I’m not

All hail to the thief
All hail to the thief

But I′m not
But I′m not
But I′m not
But I′m not

Don′t question my authority or put me in the box
′Cause I′m not
′Cause I′m not

Oh go and tell the king that the sky is falling in

When it′s not
But it′s not
But it′s not
Maybe not
Maybe not


like 1984

언제나 의심해야 할 것은 '충성'과 '민족', '국가' 따위 단어를 내세워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막고

무조건 믿고 따르며 똘똘 뭉치라는 말이다. 'Strength through Unity, Unity through Faith'라는 그들의

구호, 그리고 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해 거대한 텔레스크린으로 화상지시를 하거나 언제라도 도감청을

내키는대로 할 수 있는 능력, 정부가 날조하고 의도한 이야기만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언론들,

음악과 예술이 사라지고 10시면 사람들을 집안에서 꼼짝도 못하게 만드는 통제력, 전쟁/테러/질병/

자연재해 등 '외부의 적'을 계속 만들어내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연장하는 그들의 패턴은 똑같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인류가 위계화된 이래 '권력'은 그런 식으로 대중을 동원하고 통제하고 조종해

왔으니까. 어느 정도의 사실을 가지고 언론과 학계의 권위를 빌려 '위기'를 만들어내고 '상식'을

만들어내는 거다. 영화에서 나왔던 소재는 악의적으로 뿌려진 '신종 바이러스'였지만, 1984에서는

'전쟁'과 '재구성되는 역사'였다. ([1984] 지배계급의 '영구혁명'이 진행되는 세상, 1984 혹은 현재.)


각시탈 혹은 바더 마인호프

권력에 대항한 '폭력'을 정면으로 제기하고 맥락을 수긍케하는 영화는 아무래도 '사회통념상' 쉽지

않은 거 같다. 떠올려보면 70년대 독일 적군파들의 무장봉기 및 테러를 앞세운 극좌노선 이야기를

그렸던 '바더 마인호프', 혹은 (한국에서 프로파간다 차원으로 만든 선전물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김일성 치하 북한에서 각시탈을 쓰고 무력투쟁의 선봉에 서는 '각시탈' 정도일까. '칠레전투3부작'은

조금 그림이 다르니까 논외로 치고, 당장 떠오르는 대부분의 영화는 '폭력은 나쁜 것'이란 선험적인

판단에서 그치고 있는 듯 하다.


이 영화는 어떨까. 국회의사당을 폭파하고 정부요인을 암살하며 테러를 선동하는 그 행동들의 기저에는

단순히 폭력에 대항하는 또다른 폭력, 반폭력으로 맞서는 건 어리석다는 판단이 깔린 채다. 총 앞에

총으로 맞서봐야 상대는 대포와 미사일을 갖춘 거대한 폭력집단. 중요한 건 잔뜩 움츠러 들어있고

마비되어있는 사람들의 이성과 감성을 일깨우는 자극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세뇌된 부자유에 대한 불만,

자유와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결핍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대가리가 바뀌어봐야 그대로일테니.

폭력에 대한 판단은 그래서 차라리 부차적이다. 굳이 정당화할 생각도 없지만, 그렇게 역사가

바뀌어 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현실적인 '매트릭스'

물론 이 영화에서 '폭력'이 수반하는 모두의 피와 고통을 진지하게 마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화려한 수식과 세련된 연출력으로 잘 만들어진 오락 영화, 'Phantom of Opera'의 사회적

버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주인공 V가 부패하고 부정의한 정치권력을 살육하고 스스로도 목숨을

바쳐 이전 시대를 끝내고자 했다지만, 그가 권력자 한 두명을 바꾼 건지 '앙시앙레짐' 체제 자체를

바꿔낸 건지에 대해서는 답도 없다. 폭파해나가는 국회의사당 안에서 팔다리가 찢겨나가 죽었을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적당한 가벼움과 오락성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끝내 현실성과 감동을 획득한다.

매트릭스에서 나왔던 빨간 알약, 이번에도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빨간 알약을 나도 함께 먹은

느낌이 드는 거지만, 그때만큼 막막하거나 멍한 느낌은 없는 거다. 이 세상이 통째로 거짓이란

이야기, 차라리 세상을 떠나 어디 가서 도나 닦는게 낫겠다 싶게 만드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이 세상이 거짓이긴 하지만 그건 그들이 각본하고 짜맞춘 이야기와 시스템이 그렇다는 거지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부정하진 않으니까. 뭘 해야 하고 뭘 피해야 할지 알려주니까.


감동의 3단부스터 (아이유 좋아요)

그렇게, 옆에 있는 사람들과 만들어내는 장면들은 정말 너무너무 좋았다. V의 가면을 쓰고

국회의사당 앞 광장으로 물밀듯 몰려오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느리지만 단호한 발걸음이

탱크와 중무장한 군부대 턱앞까지 두려움없이 다가오던 그 때. 수뇌부가 무너진 군병력이

망연자실 손을 놓은 가운데 바리케이트와 방패와 탱크를 넘어 계속 나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1단 감동. 그리고 이윽고 시간이 되자 거대한 국회의사당이 사방으로 불을 뿜으며

폭발해 나가는 그 모습에서 2단 감동. 거대하게 화석화된 권위, 사람들로부터 나왔지만 어느새

사람들 위에 군림하던 국회의사당이 터져나가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정말 국회의사당이 무너져내리자 비로소 가면을 벗고 맨얼굴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손놀림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던 장면. 감동의 화룡점정, 그야말로 3단부스터였던 거다.

가면 뒤에 숨어서, 가면의 통일성을 빌어 자신들의 목소리와 의지를 전달하던 그들은 이제 가면이

필요없게 되었음을 웅변하던 장면이었다. 제각기의 얼굴로 제각기의 목소리로, 새로운 권위를

세우고 자신들의, 자신들을 위한 새로운 국회의사당을 만들어낼 거다.


어쩌면, 워쇼스키 형제는 이런 식의 낭만적인 혁명이 진짜로 가능하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아름답고 깔끔한 혁명이란 영화속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그렇게

나도 따라 믿고 싶어지는 어느 혁명의 이야기, 브이 포 벤데타.




니야조프 투르크메니스탄 초대대통령, 금빛으로 번쩍이는 그의 동상은 아쉬하바드 곳곳에서 눈에 띄었지만

특히나, 여기는 그 중에서도 가장 신경쓰고 만들어진 곳 같다. 북한으로 치자면 '주체사상탑'과 그 앞의 거대한

금빛 김일성 동상이 세워져 있는 곳에 비길 수 있을까. 적어도 삼사미터는 훌쩍 넘어보이는 커다란 동상은

설마 석유와 가스를 팔아 사온 금덩이로 빚어놓은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돈 냄새가 물씬 나는 것 같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옛 전사들 복장을 하고 옛 무기를 꼬나쥐고 있는 이 근위병들도 인상적이었다. 마치 절 앞을

지키고 선 사천왕상처럼 부리부리한 눈과 다부진 포스를 뿜어내며 왼켠에 둘, 오른켠에 둘, 도합 네 명의

커다란 병사가 그들의 왕, 아니 그들의 대통령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은 그들의 대통령이 자원을 팔아 이뤄낸 '쇼윈도 건물'들이 열맞춰 서 있었고. 번쩍이는 하얀 대리석에

거대한 건축물들이 띄엄띄엄, 마치 무슨 테마파크처럼. 그리고 번쩍이는 금빛 동상에 거대한 호위 무사들을 갖춘

대통령이 마치 무슨 왕처럼.

자세히 보니 대통령 앞에 시립해 서있는 네 명의 호위 무사 말고도, 또다시 그의 최측근에서 대통령을 지키고 선

네마리 독수리가 있었다. 이걸 네마리라고 해야할지 조금 난감한 게, 머리가 무려 다섯인 독수리인데다가 발톱에

걸고 있는 뱀의 머리도 양쪽으로 두개가 있으니.

다섯개의 독수리 머리는 투르크메니스탄의 다섯 개 지역을 상징하니 투르크메니스탄 그 자체이며, 각기 반대편을

보고 있는 뱀은 투르크메니스탄 양편의 외적을 경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가이드 압둘라가 그렇게

뭉뚱그려 말한 걸 두고 눈치없이 반문하고 말았다. 서쪽의 이란과 동쪽의 아프가니스탄을 경계하는 거군요.

이란은 중동 지역의 패권국가이니 늘 경계할 수 밖에 없을 테고, 아프간 같은 경우는 좀처럼 정돈되지 않는

내정불안의 문제가 자칫 투르크로 번질 우려가 있어서 아닐까 싶었는데, 대략 맞는 듯 하다. 압둘라가 당황했다.

뭐랄까, 광화문광장 같다. 사람이 쉴 만한 곳은 없고, 그저 거쳐가거나 방황하며 지나는 곳. 여긴 그래도 뻔뻔하게시리

'광장'이란 이름을 붙여서 사람을 미혹시키지는 않을 거 같았다. 공산주의의 잔재가 아직까지 자본주의적인

성향을 막아주는 건지도 모르겠고, (반)주변부적인 '촌스러운' 동네라 한결 인간적이고 순박해 보이는 사람들인

것처럼 느껴졌다. 떠나려는데, 그새 어느 아주머니가 텅빈 공간을 쓸고 있었다. 밤이고 낮이고, 정말 밤 두세시에도

나와서 차도를 쓸고 보도를 쓸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많았던 것도 투르크에서 얻은 인상적인 장면 하나.

국방부 였던가, 건물 앞에 몇 명의 군인이 총을 들고 선채 삼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왠지 맘에 걸렸지만

건물 앞에 선 황금빛 니야조프 대통령의 동상이 그새 반가운 거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셔터를 누르자마자 군인

한명이 잔뜩 쏘아보며 손사래를 친다. 국방부 건물이라 보안상의 이유로 그런 건지, 대통령 동상에 대한 불경이라

그런 건지. 사진을 지우라고 요구하고 확인까지 하는 중동 나라들에 비하면 낫다고 생각하며 얼른 도망.

차안에서만 바라본 금빛 돔의 건물, 저게 바로 대통령궁이라고 한다. 투르크의 초록색 국기와 금빛이 생각보다

꽤 잘 어울린다는 뜬금없는 생각과 함께, 생각보다 현대의 대통령궁(집무실 건물)과 과거의 왕궁 간의 갭이란 게

그리 크지 않은 건 아닐까,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싶었다. 미국의 백악관이나 프랑스의 사이요궁, 한국의 청와대나

뭐 기타 등등. 어차피 본질은 그 자리의 위세를 뻗치고 우러러보게 만드는 것이니 당연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 곳곳에서 마주치다 보니 결국 돌아올 즈음엔 왠지 굉장히 친숙하고 허물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듯한 (혼자만의) 착각에 빠지고 말았던  베르디무하메도프 현재 대통령의 커다란 사진들. 정말이지

북한의 그들이 하는 행태와 다를 게 없다. 호텔 로비에서 만난 그의 인자한 미소.

어느 사무실 건물의 계단 중간층에 걸려있는 같은 사진.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가 아마 저렇듯

자애롭고 인간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을 대량배포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러 갔던 어느 식당, 연회장을 겸하고 있던 그 공간에서도 현 대통령은 인자하게 웃으며 맞이해

주고 있었다. 심지어 그 위치는 결혼식으로 치자면 주례가 서는 뒷편, 모든 이의 시선을 한몸에 받을 수 있는

바로 그 위치. 펜을 쥐고 뭔가를 쓰는 듯한 포즈를 잡고 있는 그 사진, 활용도가 가히 백만 퍼센트다.

아쉬하바드의 밤거리라고 대통령의 모습이 지워질리 없다. 시내의 어느 거리에서 환한 불빛을 사방으로 튕겨내며

금빛 미소를 선보였던 초대 대통령의 동상. 이 나라 사람들은 아마도 초대 대통령과 현 대통령의 얼굴이라면

눈감고도 그릴지 모르겠다.

국제포럼이 열리던 행사장에도, 자칫 떨어지면 사람이 깔려죽을만한 사이즈의 사진, 바로 그 사진이 커다랗게

한 옆을 차지하고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연사로 나섰던 사람들 역시, 과민하게 받아들인 건지도 모르지만

예외없이 전/현직 대통령의 리더십과 결정을 칭찬하는 언사를 양념처럼 빼먹지 않았던 거 같다. (물론 그들이

전부 그에게 밥그릇이 달린 공무원이었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만찬장에서도, 이들이 연주를 계속하는 동안 뒤에서 눈을 살짝 올려뜬 채 혹시 삑사리가 나지는 않는지, 음식은

다들 맛있게 먹고 있는지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사방을 살피던 거다.

투르크메니스탄은, 그리고 대통령에 대한 '충성'은 어느정도 경찰에 의해 지탱되는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한블럭이 지나기도 전 새로운 교통경찰과 마주할 만큼 곳곳에 지키고 선 경찰들은, 내키는 대로 아무 차량이나

멈춰 세워서 불심검문을 하는가 하면, 시도때도 없이 도로 전체를 막아선 채 지나지 못하게 통제하기도 한다.

새벽 세네시쯤, 예고도 없이 통제된 채 텅텅 비어버린 호텔 앞 도로. 그리고 사이렌도 없이 우르르 달려나가는

십여대의 새까만 세단들. 대통령이 탄 차가 저 도로 끝에 있는 별장으로 가는 거라 했다.

새벽에도, 저녁에도, 한낮에도, 대통령이 다니는 길은 늘 완전히 비워진 채 그들만을 위해 열리던 나라. 우리나라는

교통정체니 사람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구간구간별로 끊어서 통제한지가 꽤 된 걸로 알고 있는데, 투르크도

그렇게 바뀔 때쯤에는 사방에 널려있는 대통령 사진도 철거되어 있으려나.



* 유비쿼터스 (Ubiquitous) :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라는 뜻의 라틴어.







마치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묘사된 '오세아니아'를 비롯한 세 개의 제국을 묘사하는 듯 한,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식은 힘


뚜얼슬랭 박물관에서 발견한 시. 1970년대 후반 폴 포트가 집권했던 약 5년간 2만여명의 크메르인들이 끌려들어가

단 6명만 살아남았다는 악명높은 뚜얼슬랭 수용소, 그 상상할 수 없는 시기를 상상케 해주는 시.


사랑, 결혼, 웃음, 게임, 학교, 신발, 빵, 온통 금지된 것들의 목록으로 이어지는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No hope, No life

A third of the people didn't survive.

The regiem died.




이번 출장에서도 사진은 여지없이 찍었댔다. 두바이의 유명한 7성급호텔 버즈 알아랍,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아직 공사중인) 버즈 두바이 등등 두바이의 풍경들. 사우디 리야드의 밤거리, 드문드문 땡땡이치며

산책나갔던 시내 골목길에 쿠웨이트의 쇼핑몰까지. 왠지 사진을 올리려는 의욕이 안 생긴다. 물론 왠지 10월

내내 바빴고 바쁜 탓도 있겠지만.


작년에 이미 갔던 호텔에 고대로 묵는 사우디와 쿠웨이트는 사실 별 기대가 없었고, 이번 출장은 사실 오로지

이집트 카이로에 다시 간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 (드디어) 디카를 들고 간다는 것, 5년만에 피라밋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내 짧은 삶에서 뭔가 갈치 토막치듯 분기점을 나눠보라면

2004년 그때의 여행은 두세번째 순서쯤 되지 않을까 싶다. '먹고 살 고민' 따위, '먹고 살 궁리' 따위 '굴하지

않던' 철부지에서 '먹고 살 고민'씩이나 하는 철부지로 변신한 게.


마침 이집트에서 카메라를 누군가에게 빼앗겨서만은 아니었다. 현지인들과 함께 부대끼고 암내맡으며, 하루에

2리터들이 물병을 두개씩 마시며 마주했던 카이로의 거리들, 그리고 피라밋과는 너무 달랐다. 반듯한 정장에

(무거워서 고리가 휘어버린) 노트북 가방을 척 걸치고, 45인승 고속버스 차창 밖에서 넘쳐들어온 햇볕 한 줌에

아 뜨거라 하며 큰길로만 다녔다. 군자는 대로행이라던가. 흥. 카이로는, 길거리는 그대로였다. 사천년을

멀쩡했던 피라밋도 고작 오년만에 달라졌을리 없다. 내가 달라졌다.


그다지 맘에 썩 들지는 않았다. 출장과 여행의 차이일 수도, '먹고 살 고민' 따위의 유무 차이일 수도, 그저

2004년 8월과 2009년 10월의 온도 차였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단순히 눈높이의 차이였을지 모른다. 피라밋을

굽어보게 만드는 45인승 고속버스라니. 왠지 순례하듯 그곳을 우러렀던 과거의 내게 모멸감을 안겼던 걸지도
 
모른다. 피라밋은, 카이로는, 사람 사는 곳은 그렇게 건방지게 내려보며 점점이 둘러보는 게 아닌데. 굽어보아

미안해. 내려보아 미안해요, 라고, 날 완전한 이방인으로 격리시켜 버린 양철캔 안에서 외치고 싶었다.


얄쌍하고 길쭉하며 튼튼해 보이는 고속버스들이 피라밋 앞 주차장을 쉼없이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입구에서부터 한참을 걸으며 피라밋의 위용과 이질감에 숨막혀했던 바로 그 오르막길 역시, 버스의 탄탄한

모터는 잘도 부릉거리며 한숨에 정복해버렸다. 이건 강간이다. 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5분만에 피라밋

코앞까지 내달렸다가, 다시 5분만에 피라밋 세 기가 배경으로 쭈그러든 포스트로 내달려 사진을 남기고 휑하니

가버렸다. 왜이리 덥냐고, 왜이리 사람이 많냐고, 이집트 삐끼들 못살겠다고.


어떤 식의 여행이 되어야 한다, 는 건 아니다. 꼭 땀 삐질삐질 흘리고 빡세야 여행이란 것도 아니다. 그저 난,

내가 풍경과 풍경 사이에 이전에 밟았던 그 울퉁불퉁하고 냄새나고 미칠듯 덥던 길이 사라지고 순간이동하듯

뿅뽕 튀어나오는 풍경들만 남아버린 것이 안타까웠다. 전희도 없이 덜컥 달려나간 꼴. 그런 식의 폭력적인

풍경의 소환. 그건 서로에게 상처일 뿐이지 않을까. 이미 닳고 닳아버린 이미지라 해도 좀더 조심스럽게,

세심하게 접근하면 조금은 더 신선하고 깊이 느낄 수 있을 텐데. 


그 야만스럽고 난폭한 고속버스의 행렬이 피라밋과 '관광지'로서의 카이로를 현지 사람들로부터 뺏어들고

희롱하는 것처럼 보여 수치스러웠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낙타에 오른 이집션들의 눈높이가 차창에

바싹 붙어앉은 내 눈높이와 같았다는 사실. 이 녀석들, 마리당 몸값이 일억원이라더니 몸값 제대로 하는구나.

왠지 거대 고속버스들이 지분거리며 들고 나는 피라밋 앞 주차장에서 이집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게 그

낙타들 같아서 안쓰럽고, 대견하고 그랬다.


다시 한번 가고 싶다. 45인승 삐까뻔쩍한 고속버스 말고, 소금기 얼룩진 티쪼가리 입고 시커멓게 그을린 채,

박박 기듯이 걸으며 걷고 뛰고, 그러고 싶다. 뭔가 거기서부터 나의 1984년과 1Q84년이 갈라져버렸다고 

느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님 그저 훼손되고 벗겨내어진 내 기억속 그 공간의 아우라를 다시 조심조심

덮어씌워주고 싶어서인지도. 어쩌면 그 모든 건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와 같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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