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난 창을 통해 바닥, 그리고 벽면까지 기울어진 햇살 자국이 낙인처럼 선명하다. 아오모리현 카즈노의

호텔에 체크인하고 짐을 풀고는 다시 밖으로 나가 동네를 살펴보려는 차에 햇살부터 설레였다.

호텔 입구에 있던 뭔가 '안테나'를 광고하던 티켓.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저 사슴뿔이 안테나처럼

쫑긋쫑긋 서 있는 게 귀엽다. 아무래도 아오모리가 워낙 깊은 숲동네인지라 저런 동물들을 활용해서

캐릭터로 만들고 활용하는 게 좀더 잘 어울리는 거 같다.


아오모리로 오는 길에도 내내 도로변에서 온갖 야생동물이 그려진 표지판들을 보며 왔더랬다.

아, 중간에 한장은 담배꽁초 버리지 말라는 사인이지만 여하간, 그만큼 숲이 울창하고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이야기일 거다.

사람이 드문드문 지날 뿐인 골목을 걷다가 발견한 빈티지스러운 표지판. 뭔가 사방팔방으로 손가락을

해대는 게 살짝 수다스러워보이기도 하지만, 적당히 빛바래고 톤다운된 모습 덕에 과하진 않아 보인다.

호텔 앞으로 지나던 기찻길. 두 갈랫길이 합쳐지는 합류지점에 서서 짙은 초록색이 한가득한 산으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동네를 바라보았다.


마을을 어슬렁거리다가 간판 하나를 발견했다. 개울을 따라 쭉 이어지는 산책로가 십여킬로미터에

이르도록 정비되어 있다는 이야기인 거 같다. 일본어를 모르지만 대충 이런저런 풍경도 마주칠 수 있고

그렇다는 거 같아서, 설렁설렁 걸어보기로 했다.


슬쩍 산책로로 접어드니 방금 지나친 기찻길이 저 쪽의 다리 위로 지나는 게 보였다. 몇걸음 옮기지도 않았는데

마을 풍경이 저만큼이나 가려져 버렸고, 이내 빼곡하게 자라난 늘씬한 나무들 사이에 파묻혀 버렸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마을 뒷산같은 느낌이다 싶었는데, 산책로 바닥에 툭툭 돋아난 저 나무뿌리들을 보니

뒷산보다는 좀더 원시의, 야생의 느낌이 짙다.

출발하자마자 맞부딪힌 건 '곰 출몰주의'라는 커다란 경고문. 워낙 산이 깊고 숲도 울창해서 야생곰이

여전히 살고 있는 지역이란 얘긴데, 느리게만 보이는 곰의 최고 속도가 시속 40킬로미터에 육박한다니

맞부딪히면 큰일이다. 어느새 허리까지 올만큼 주변 풀숲도 무성해져서 딴 길로 새면 안되겠다 싶다.

이 길을 걷는 사람도 거의 없는 듯 길바닥에까지도 온통 초록색이다. 사람들이 많이 다녀야 조금이라도

사람 다니는 길과 옆엣 풀숲이 구분이 될 텐데, 정말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아도, 땅을 보아도 온통 초록색이다.

흔들다리. 다리 위를 걸으며 일부러 쿵쿵 소리 내어 발을 굴러보기도 하고 펄쩍펄쩍 뛰어보기도 했지만

그리 많이 출렁거리진 않았다. 다리를 건너다 말고 양쪽 끄트머리를 바라보니 무성하고 울창한 숲에 덥썩

먹힌 느낌이다. 뭐랄까, 커플이 빼빼로 하나 입에 물고 먹기게임을 하듯이, 숲과 숲 사이의 다리 하나.

숲과 숲 사이로 내어진 개울. 다리 위에서 바라보니 개울을 경계로 양쪽 숲이 삼엄하게 대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온통 녹색으로 뭉개진 듯 삼엄한 숲이지만 엄연히 디테일은 살아있었다. 초록 일색으로 보이던

풍경 속에 숨어있는 샛노랑 꽃밭이라거나, 사람 발길이 이어져 만들어진 길가에 용케 뿌리를 박고

꼬깃꼬깃 잎새를 편 산죽나무 새싹들.

개울을 끼고 계속 이어지는 산책길. 사람 하나 만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꽤나 잘 정비되어 있는 길이었다.

옆에 쉬어갈 만한 정자도 있구, 개울 옆으로 따라달리는 가지런한 나무데크와 적당한 높이의 나무난간도 그렇고.

중간에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곳에 있던 나무등걸 하나가 눈길을 땡겼다. 누군가 나무를 일부러 저런

모양으로 자른 걸까 싶을 정도로 의자랑 비슷한 모양으로 남아있는 나무등걸. 엉덩이가 놓일 자리에는

보기만 해도 폭신폭신한 이끼가 소담하게 앉아있었다.

가다 보니 '폭포'라고 말하기도 민망할만큼 낮고 작은 낙수물도 떨어지고 있었다. 그 가느다란 물줄기가

굉장히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여 느낌을 좀 담아보려 노력했으나.

배배 꼬인 나무들이 불쑥 산책로를 틈입해서는 나봐란 듯이 팔다리를 내뻗고 있기도 했고, 맑고 투명하던

물은 어디쯤에선가 저런 쑥빛으로 바뀌어 있기도 했다. 햇살에 정통으로 맞아 하얗게 바래보이는 잎새들.


인근에 수력발전소가 있나보다. 물을 방류하면 수위가 높아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듯한 경고 표지판,

그런데 만화 그림체가 귀여워서 뭔가 메시지가 담고 있는 정색한 표정을 살짝 풀어주는 거 같다.

어느 순간 산책로 양쪽으로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던 산이 슬쩍 숨을 죽였다. 내려진 차창처럼 그 사이로

햇살이 잔뜩 들어왔고, 어슴푸레하지만 몇 그루 소나무가 비탈에서 꼿꼿이 자라고 있는게 보였다.

그리고 개울가의 돌밭에서 나뒹구는 새까매진 나뭇가지 하나.

너무 멀리 나왔다 싶어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사람도 하나 없어 문득 겁이 나기도 했고, 언제 곰이 나올지

모른다는 반투명하던 불안감이 점점 형체와 색깔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문득 잊었다는 듯 울어제끼는

새소리와 배경음처럼 깔린 물소리가 전부이던 산책로. 너무 좋았는데, 대충 한시간 가까이 걸어왔으니

그만큼 시간을 들여 돌아갈 생각하면 이쯤에서 유턴할 타이밍.

돌아나와 마을을 둘러보는데, 아무래도 사람 얼굴을 계속 연상시키는 이 노랑색 건물이 나름의 기준점

역할을 단단히 해주었다. 유독 높은 건물이기도 했고, 색깔이나 모양새가 워낙 튀기도 하고.

눈이 많은 아오모리 지방인지라 건물들은 대개 단층, 높아봐야 이층짜리, 그리고 지붕은 이렇게 비스듬히

얹힌다고 한다. 차가 워낙 조그마하니 차고도 미니어처처럼 조그맣다.

새 두마리가 노닐고 있는 모양이 새겨진 맨홀뚜껑. 외국에 나가서 눈여겨보는 것 중 하나가 맨홀뚜껑이다.

나름의 고유한 특징과 문화적인 미감이 담겨 있는 섬세한 것도 있고, 그저 기능에 치중한 심플하고 멋없는

것들도 있지만 그런 모양 자체로 그 지역의 분위기나 특색을 말해주는 게 있는 것 같다.


조그맣지만 정갈해 보이는 게 일본 가옥의 대체적인 이미지 아닌가 싶다. 특히나 여기는 집집마다 정원을

잘 꾸며놓아서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조용하지만 깔끔하고 화사한 분위기, 이런거 좋다.


호텔 내부를 찍은 몇 안 되는 사진 중 하나. 히메노유 호텔이란 호텔 이름을 군데군데 알아볼 수 있었던

등불이 지키고 선 뒤쪽으로는 노천온천이 있었다.

아무도 없을 법한 시간대에 카메라를 들고 들어간 노천온탕의 전경. 그렇게 크지 않은 온천탕이지만

소슬한 밤공기 속으로 펄펄 뜨거운 김을 흘려보내는 그 온천의 마력이란. '카즈노의 대표 미인 온천'이란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온천을 하고 나서 피부가 보들보들, 매끈매끈. 게다가 하루의 피로가 싹

풀리는 그 개운함은 잊을 수 없다.




@ 히메노유 온천호텔, 아오모리 카즈노.

카이세키 요리, 일본 아오모리현에 가서 카이세키 요리를 먹을 예정이라 하니 좀 안다는 사람들이

궁중에서 먹는 요리라느니 연회장 요리라느니 여러 구구한 설명을 해줐지만, 정확히는 이런 거란다.


"에도시대부터 연회요리에 이용하는 정식요리이다. '가이세키[]'는 모임의 좌석이라는 뜻이다.

일본의 정식요리인 혼젠요리를 간단하게 변형한 것이다. 결혼식이나 공식연회 또는 손님을 접대할 때

사용한다. 처음부터 음식을 모두 차리는 혼젠요리와 달리 국과 생선회를 먼저 차린다. 그리고 다음

요리를 차례로 낸다.


보통 1즙3채()·1즙5채()·2즙5채()를 이용한다. '즙()'은 국을 뜻하며,

'채()'는 반찬을 이르는 말이다. 요리는 손님의 취향에 맞추어 계절에 어울리는 것으로 준비한다.

음식마다 서로 같은 재료, 같은 요리법, 같은 맛이 중복되지 않도록 구성한다. 음식의 맛은 물론이고

색깔과 모양을 감안하여 요리하고, 그릇에 담을 때도 그릇의 모양과 재질까지 고려한다."

뭐 그러고 보니 국과 생선회가 먼저 나오긴 했던 거 같다. 참치랑 연어랑 새우회.

그리고 약간의 면이 들어간 맑은 냉국.

새우랑 문어, 그리고 파프리카랑 채소들이 버무려져 있는 상큼한 샐러드.

오리훈제고기와 큼직하게 썰린 토마토 한 조각.

마 같은 느낌이었는데 정확치는 않고, 유부랑 마가 얇게 슬라이스된 반찬.

그리고 아오모리 고유의 특성이 살아있는 메인요리. 한국에 '도루묵'으로 알려져 있는 생선과 쌀로 빚어진

떡같은 것, 그리고 좀 짭조름하게 간이 배어있는 어묵같은 것들을 화롯불에 굽기 시작.

그리고 큰 무쇠냄비에 푸짐하게 담겨나온 아오모리 지역의 대표음식. 어묵처럼 생긴 저것은 꼬치구이로

이미 나와서 철판 위에 구워지고 있는 것과 같이 쌀로 빚어진 떡이라고 해야 하나. 찰지게 엉겨있어서

그렇지 입안에서는 물에 갠 밥처럼 이내 풀어지는 식감이 독특하다.

서빙해주시는 호텔의 아주머니가 일본식으로 얌전히 무릎을 모으고 앉으셔서 젓가락을 교묘하게 움직이며

고르게 배분되도록 신경쓰셔서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한그릇씩 덜어주셨다.

뾰족뾰족 깃대처럼 꽂혀있던 것들을 철판 위에 고이 눕히고 노릇노릇해질때까지 굽는데 아무래도

저 '숭악스런' 도루묵 생선의 표정이라거나 구불구불 잘도 꼬챙이에 꽂혀 있는 그 모양새가 계속

시선이 간다. 다른 것들이야 뭐, 그냥 별스럽지 않은 꼬치스럽게 생겼다지만 저 역동적으로 파닥대다

굳어버린 듯한 자세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없는 아우성을 내뱉는 듯한 입모양하며.


도루묵의 어원이, 임진왜란 때던가 청나라가 쳐들어왔을 때던가 임금이 한양을 버리고 어딘가로 피신하던

그 곤궁하고 핍박받던 상황에 여느 어부가 바친 생선이 너무도 달고 맛있게 느껴졌다던가. 그래 생선의

이름을 왕이 묻자 '묵'이라 답하였고 이에 왕은 이토록 맛난 생선에 이름이 너무 별로라 하여 다른 뭔가

그럴듯한 이름을 지어줬다가, 나중에 다시 사태가 진정되어 왕궁에 돌아와 배부르고 등따실 때 옛 추억

더듬는다며 '묵'을 맛보자 하고는 에잇 퉤퉤, 도로 묵이라고 하여라, 하여 도루묵이 되었다고 했었다.


뭐, 그 장황하고 변덕스런 이야기는 굳이 제대로 된 버전을 찾을 것도 없이 별다른 교훈도 의미도

찾을 수 없는 거니까 그렇다 치고, 중요한 포인트는 '도루묵'이란 생선의 맛. 개인적으로는 저렇게

구워진 도루묵은 꽤나 맛있었다. 꼬챙이에 아코디언처럼 꿰어버린 몸뚱이에 활짝 벌린 아가리가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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