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혹은 분단 상황을 다룬 한국영화들을 보면서 어느순간 굉장히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나왔을 때, 실미도가 나왔을 때, 그리고 그 전의 쉬리가 나왔을 때의 참신함이나

과감함의 동력은 떨어지고, 그냥 스펙터클한 볼거리로서 전쟁을 소비하거나 휴머니즘이 부각된 드라마의

배경으로 소비되는 게 관습화되어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어쩌면 '퇴보'라고 불러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불을 뿜던 뜨거운 총구는 차갑게 식었지만 여전히

차가운 전쟁이 지속중인 한반도에서, 반세기가 넘는 분단상황에 의지한 양측의 지배권력이 적대적인

공생관계를 이어가며 사회와 경제와 문화를 일그러뜨리고 있는 한반도에서, 그 단초였던 '한국전쟁'이

고작 블록버스터용의 스펙터클이라거나 신파를 북돋우는 비극적 배경으로만 내리 읽히는 게 정상인가.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전쟁 이전의 남과 북의 정치적 상황은 어땠는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좀더

깊고 끈질긴 시각을 보여주는 영화가 나올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거다. 어린애들이 뉴스에서 나온

정치인들에게 "아저씨들은 왜 맨날 싸워요? 싸우지 말아요" 하는 수준으로 한국전쟁을 다루고

남과 북을 다루는 영화도 필요하지만, 이미 그런 '안전하고 손쉬운' 영화는 넘 많이 나왔다.


사실은, 내가 바라는 한국전쟁에 대한 영화는 그런 수준이다. 좀더 논쟁적이고 좀더 위험할 수 있는

영화. 여기서 위험하다는 건, 애초 '쉬리'가 나왔을 때 남북한 관계의 변화를 반영했거나 이끌었다고

평가되었듯 그렇게 영화의 현실 인식과 판단이 한국의 기존 시각을 뒤흔들 수 있는 그런 걸 말한다.

막말로, 한국전쟁이 남측의 도발로 일어났고 미국의 전쟁범죄가 빨갱이의 그것보다 심했다, 는 식의

수정주의적 시각에 기댄 영화도 한번 나올 수 있는 거 아닌가. 옳던 그르던, 지평의 문제 아닐까.


그렇지만 요새 같은 세상에 그런 건 너무 과도한 희망인 거다. 긴장완화의 10년 세월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언제라도 국지적 도발이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위태한 상황에 남북 모두 처해 있다.

마치 '고지전'에서 휴전 협정 조인 후 발효되기까지의 12시간 같은 상황 아닌가. 사실은 휴전으로

끝나는 것도 아닌데 12시간동안 어떻게든 상대를 밟고 올라서려 지옥도를 연출한 거나, 사실은 북의

숨통이 그리 쉽게 끊길 것도 아닌데 어떻게든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치킨게임중인 지금이나.


다시금 영화는, 한국전쟁을 해석했던 여태까지의 스펙트럼, 상식과 싸우고 변화된 현실을 치열하게

반영해냈던 그 '고지'를 지키고자 결사적이다. 붉은 깃발 휘두르며 빨갱이들 모두 쓸어내자, 라는 식의

반공 일색의 영화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우리가 이만큼 당했으니 어디 한번 본때를 보여주자, 라는

식의 호전적인 전쟁 독려 영화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어쩌면 장훈 감독은 여태 한국영화가 한국전쟁을

다뤄왔던 그 현실인식의 지평, 허용된 한계치에서 더이상 후퇴할 수 없다며 고지에 깃발을 꼽은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영화에 대한 얘기는 딱히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남북의 접경에서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양측

사람들이 겪는 거대한 분단체제와 가냘픈 휴머니즘 간의 갈등을 그렸던 '공동경비구역 JSA', 그리고

서로 다른 진영에 선 형제를 발견한 순간 기필코 죽여야할 불구대천의 적으로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무언가로 바뀌는 상황을 그렸던 '태극기 휘날리며'가 확보했던 나름의 성취를 잘 버무린 수준이지

싶어서다. 비인간적인 전쟁에 대한 혐오, 국가권력에 대한 무기력함 등, 이미 여러번 밟았던 고지다.


언제쯤, 그들은 야전지휘관에 겨눴던 총부리를 남한의, 북한의 정치권력 심장부에 겨눌 수 있을까.

그래서 언제쯤, 우리나라에서 한국전쟁을 다루는 영화와 예술의 시각과 스펙트럼이 우측 끝에서부터

좌측 끝으로까지 다양해질 수 있을까. 그런 게 경제만 비대해진 '국격'에 맞는 수준으로 고양되는

문화의 힘 그자체일테고, 반공이데올로기를 넘어 자유로이 성찰하기 시작했다는 표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때쯤이면 전쟁을 다룬 영화 앞에 '휴먼'이니 '대작'이니 따위 상투어가 떨어지지 않을까.


언제쯤, 이 고지를 넘어설 수 있을까.



한국전쟁은, 어쩌면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개의 국가가 세워지는 국가 형성(Nation-building)의

급격하고도 폭력적인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전근대적인 사고방식과 사회시스템을

깨고 영토와 국민, 그리고 그것들을 규율할 대내적 주권을 장악한 근대국가가 만들어지는 거다.

물론 식민지 조선시대부터 이미 '근대'는 수혈되기 시작했지만, 전쟁은 그야말로 시골무지랭이

촌동네까지도 비켜가지 않고 적나라한 근대국가의 위력과 속성을 뼛속까지 새겨준 셈이다.


밤낮으로 국군과 산사람(인민군)들이 마을을 자신들의 영토라며 선혈이 낭자한 땅따먹기를 하고,

마을사람들이 상대 군인을 돕는 건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라며 을러대고 핍박하는 모습은

남한과 북한, 두 개의 근대국가가 어떻게 서로에 기대어 세워졌는지 그 적대적 공존의 기원을 보여준다.

게다가 당신들은 우리를 위해 가진 것을 탈탈 털어 바치고 필요하면 목숨도 내놓아야 한다는 건,

지금은 이미 너무도 공고해지고 세련되어져버려 잘 보이지도 않는 국가의 폭력성, 비인간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같은 대극장에서 연극이 올랐다는 점으로 꽤나 이슈가 되었던 연극 '산불'은

이런 지점에서 이야기를 출발시킨다. '한국인이라면 꼭 봐야 할 연극'이라느니, '리얼리즘 희곡'의

대명사라느니, 그런 홍보 문구들은 자연스레 그런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이데올로기 전쟁을 통해

드러나는 부조리나 비인간성, 혹은 근대국가의 위선이나 폭력성을 천착하며 쉽지 않은, 가슴

답답해지는 느낌을 가득 안고 나오겠구나 했던 거다. 답없는 질문, 그렇지만 질문 자체로 새로운

프레임이 잡히고 당연했던 상식들을 낯설게 보게 만들 수 있는 그런 멋진 경험이랄까.


그런 기대가 좀 컸던 탓일까. 리얼리즘은 커다란 무대 위에 구현된 산골마을의 초가집이나 언덕길,

봄에 지천으로 피어난 꽃들과 막판의 산불 이미지가 리얼했다고 붙여질 만한 이름은 아닐 텐데.

단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전쟁기를 배경으로 한 어정쩡한 치정극을 본 느낌이었다. 여리고 나약한

인텔리 '선생님'을 두고 이년간 수절했던 두 과부가 욕정과 애정이 뒤범벅되어 만들어낸 삼각관계,

한국전쟁은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조건이었을 뿐 꼭 그때가 배경일 필요는 없었을 거 같고,

그나마 사랑 이야기조차 제대로 설득력있게 풀리지는 않은 것 같다.


1부에서는 나름 충실하게 한국전쟁의 비극성과 작위적이지만 흉포한 근대국가의 폭력성을

묘사하려 애쓴 거 같은데, 20분의 쉬는 시간동안 겨울이 지나고 순식간에 봄이 오며 시작하는

2부에서는 다른 것들은 다 뒤로 물러나고 급작스레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의 갈등과 절망에

초점이 맞춰지는 거다. 남자의 분노도 여자들의 절망도 공감하기에는 너무 급작스러워서, 이후

온통 무대를 벌겋게 피어오른 산불은 극의 절정이라거나 극적인 결말이라기보다는 그냥 모든 문제를

무화시키고 덮어버리는 느낌이었다. 20분의 쉬는 시간동안 나도 모르게 극이 계속 진행되었던 걸까.


물론 공정하게 말하자면 꽤나 재미있었다. 연기도 좋았고, 넓은 무대를 십분 활용한 동선이라거나

그럴듯한 배경과 효과들, 그리고 무대인사 때 특히 인상적이었던 강부자의 무게감이나 관록까지.

다만 막이 내리고 돌아나오면서 뭔가 당황스럽고, 딱히 이야기의 포커스를 잡아서 이해하기엔

모호하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는 거다. 희곡의 원저자가 누구던, 어떤 금테가 둘려 있던 간에, 글쎄,

'한국전쟁기'라는 특수하고도 깊숙한 상흔을 갖고 이정도 문제의식 밖에 못 꺼내고 이정도 이야기

풀어낸다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 특히나 '한국인이 꼭 봐야 할 연극'이라고 팔고 싶다면.







순교자 (양장) - 10점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문학동네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순교, 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굉장히 사람을 숙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누군가의 죽음이

여하간에 대의를 위한 죽음으로 포장되는 순간, '순교'로 불리우는 순간 더이상 그 죽음의

전후 맥락을 따지거나 정확한 팩트를 판별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만다. 심지어는,

그렇게 죽어간 사람이 어떠한 고민과 생각을 거쳤고 어떤 죽음을 맞았는지조차도.


고은 시인 이전에 한국계 작가가 이미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김은국이란 작가, 함경도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전쟁때 해병대 근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그의 프로필이나 이 책의 심상찮은 제목 '순교자'를 보고 처음에는 꽤나 거부감이

생겼더랬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도의 시각으로 본 미국, 남한 만세 이야기인가 했다.


'그래, 언제 이 병신같은 전쟁놀이를 그만둔다지?'
'전쟁은 천지창조 이후 계속되어온 거 아닙니까?'

아니었다. 그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이 전쟁 역시 짐승같은 국가들과 썩은 정치인들 사이의

눈먼 권력 투쟁이 빚어낸 구역질나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미 죽었고 앞으로

죽어갈 수많은 사람들은 정말이지 개죽음이며, 무고한 제물로 희생된 것이며 냉혹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국제 정치 무대에 꼼짝없이 붙들린 죄없는 볼모들이다'라는 거다.


한국전쟁에 대해 이토록 냉정한 평가, 그리고 뜨거운 평가는 꽤나 인상적이다. 그렇지만

더욱 강렬한 건 정작 이 다음이다. 그러한 배경 하에서, 주인공 이 대위는 갈등하고 있다.

빨갱이들에게 죽은 열두명의 목사와 살아남은 두명의 목사, 그 생사의 스토리에 얽힌 진실이

무엇이던간에 '순교'의 금칠을 하려는 군대와 기독교인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다.


'목사들의 신성한 복장 밑에 더러운 속옷이 숨겨져 있었다고 폭로하기보다는 열두 명 순교자들의 영광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자네들 기독교에 더 큰 봉사가 되지 않는가?'

그런 금칠을 단순히 사기극이라고 치부할 건 아니다. 군인은 지켜야할 국가와 그 명분이 있는

거고 목사도 또한 지켜야할 교회와 교회의 명예가 있는 거니까, 전면전의 상황에서 그런 둘의

이해 관계나 목적은 굉장히 단단하고 뚜렷하며 현실적이다. 거기에 대고 진실은 모두가 알아야

한다느니, 순교자는 하나님의 뜻에 봉사하는 거지 인간의 일시적 필요로 만들어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물론 옳지만 다소 한가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열두명의 목사가 끝까지 종교적 신념과 신앙을 지키며 죽었건 아니면 서로 헐뜯으며 살려달라고

애걸하다 죽었건, '목사들의 신성한 복장 밑에 더러운 속옷이 숨겨져 있었다고 폭로하기보다는

열두 명 순교자들의 영광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자네들 기독교에 더 큰 봉사가 되지 않는가?'하는

대령의 말에 군종목사가 입을 닫고 마는 게 딱 그런 논박의 한계다. 탈영병 백명을 백명의 영웅으로

둔갑시키는 것과 신앙의 영웅을 만드는 게 다를 바 없다는 것. 조직 보위와 프로파간다의 논리다.

 
 '신성하게 미친 가련한 젊은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조롱과 미움의 대상이 되고 로마 병정의 창끝에 온 몸을 찔리고, 적들의 시선 앞에서 그를 구해줄 기적 하나 없이 무력하게 헐떡이고 땀을 흘리고 피를 쏟고 있는 젊은이, 신의 아들이라는 사람의 그 가련한 육신의 절규'를 구원의 동화로 만드는 것. 그런 동화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을 경멸할 텐가, 사랑할 텐가. '

그런데 이렇게 치열한 세속의 고민에서 작가는 한발 더 내딛는다.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종교와 신앙의 역할에 대한 질문, 특히 전쟁과 인생에 지쳐있는 그야말로 절망적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러한 '동화'를 주어 위로하는 종교에 대한 폭넓고 깊은, 극한까지 밀고 들어가는

고민인 거다. 고난에 시달리고 고문당하는 불쌍한 사람들, 그들의 비참한 생에 달콤한 환상을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줘야 하는가.


이 대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들을 잘 보살펴주시고 국가는 그들의 운명을 진지하게

걱정해주고 있으니 만사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는 모든 고상한 거짓말,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위한다며 저질러지는 이 모든 것들이 역겹게만 느껴진다. 그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동정하면서도 종교나 신이 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 거다.

하여 계속 묻는다.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그와 다른 축으로 모여선 사람들, 신목사와 박 대위는 그저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진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삶을 의미있게 하고 고난을 값진 것으로

해줄 그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련하고 유약한 사람들이라는 거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자신의 신과 신앙을 모두 의심하고 무너졌던 열두명의 목사가 '순교자'로 불리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라는 거다. 정의에 대한 약속, 신에 대한 약속 없이는 모두 무너질 테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당하는 고통은 고통일 뿐, 거기에는 우리가 이승 너머에서 찾아낼 어떤 정의로움도 없습니다.'

작가는 두 가지 입장을 첨예하게 밀고 나간다. 수백만명이 죽어가는 한국전쟁의 와중이라는

혼란하고 부조리한 상황 한복판에서, 아무런 희망과 약속을 얻을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근대의 낙관주의처럼 모두가 차갑고 냉엄한 현실 앞에서 당당하진

못하더라도 괴로운 진실을 떠안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입장과 불의하고 무의미한

삶을 견디지 못해 무너져버리고 말거라며 '환상'을 쥐어준다면 그것자체가 희망 아니겠냐는

입장, 그 두 입장은 끝까지 머리맞대어 고뇌하며 이리저리 약점을 찾아 타격하며 투쟁한다.


사실 한국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아니어도, 사람들은 종종 자문하곤 한다. 이걸 지금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내 삶은 어딜 향하고 있을까, 죽고 나면 다 끝나는 건가. '죽음'이나 '사후'에
 
대한 그런 숱한 질문은 더러는 사회적인 터부가 되어 자물쇠가 채워져 관리되고, 개인적으로도

애써 힘내보자는 자기계발류의 이야기나 생에 대한 이야기로 집요하게 돌려버리곤 하는 거다.

그런 걸 보면 인간은, 끝내 스스로 삶과 죽음, 영원한 소멸과 사라짐을 긍정할 수 없는 걸까.


'교인들은 이 무의미한 세계에서 그들의 생을 지속시키는 그 무언가를 갖고 있어. 한데 우리에겐 그게 없지. 그들이 가진 그것을 우리가 꼭 동화라고 불러야 할까.'

소설에선 신 목사가 그런 '경지'에 이른 거 같다. '스스로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스스로 그 십자가를 짊어질 수

없는 사람들을 삶에서 보호하는 거다. 그들을 위해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지켜주는 목자.

소설 제목인 '순교자'는 이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신을 위해 봉사하고 목숨까지 바친

사람이 아니라, 신을 믿는 사람과 삶에 의미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사람인 거다.


그건 어쩌면 매트릭스 식으로 말하자면, 빨간 알약을 먹어버리고도 이 세계에 남아있는 존재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깨닫고도 아직 피안으로 넘어가지 않은 채 중생을 계도하는 존재,

보디사트바(보살)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난 궁금하다. 이 대위도 궁금했던 거다.

'국외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애초에 신을 믿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에 기댈 수 있을까.

신으로 엮인 목자와 양떼의 관계가 아니라, 신의 개입없는 개인과 개인이라면.


분명 그건 더욱더 힘든 싸움일 거다. 십자가뿐 아니라 온갖 기도와 염불과 예배 소리로

가득한 땅에 살면서 그런 '종교'라는 마약에 취하지 않고 눈 똑바로 뜨고 아연하게

짖쳐들어오는 온갖 희로애락과 불행들을 맞닥뜨리고 온전히 감내하려면. '순교자'에

기대어 삶의 의미를 보증받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회의와 두려움 속에서 한치 앞도

알 수 없고 의미조차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니까. 신 없이 살아간단 건 그런 거다.


* 굉장히 인상깊었던 대목 하나. 이 작품과 이 작가가 한국 사회에서 잊혀진 이유 아닐까.

기독교에 대한 굉장히 전향적이랄까 혁신적인 해석, 그리고 기독교 교리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랄까 새로운 시각이란 것들을 품기에는 한국사회가 너무. 여전히.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그러나 내가 찾아낸 건 고통받는 인간...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그리고 죽음의 다음은?"
"아무것도 없소! 아무것도!"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주어야 해요. 영광과 환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희망이라는 환상을 준단 말입니까? 무덤 이후의, 죽음 이후에 대한 환상을 주란 말입니까?"
"그렇소!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이오. 절망은 이 피곤한 생의 질병이오. 무의미한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삶의 질병입니다."

..."목사님은요? 당신의 절망은 어떡하고 말입니까?"
"그건 나 자신의 십자가요. 그 십자가는 나 혼자서 짊어져야 하오"
"다른 사람들은?"
"많은 이들이 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건 아니잖소? 그들은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이오. 우린 그들에게 그들의 그리스도와 그들의 유다를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부활도?"
"그렇소, 육체의 부활도!"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도?"
"그렇소, 그 천국도!"
"정의는?"
"물론이오. 정의, 얼마나 그리운 이름이오? 그렇소. 정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궁극적인 정의를 주어야 하오."
"목사님은?"
"계속 괴로워해야겠지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얼마 동안이나? 얼마 동안이나 괴로워해야 하는 겁니까?"
"죽을 때까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없을 때까지!"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떻게 내려져야 하는 걸까.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기로 한

목사가 여전히 말로 답하기를 거부하는 그 질문.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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