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6, 7층 높이의 인공 산과 인공 폭포. 가든스 바이 더 베이의 두 실내 정원 중에 좀더 봉긋하니 올라선 쪽이 클라우드 포레스트.

 

폭포 자체도 거대한 가습기 역할을 하고 있겠지만 곳곳에서 마치 마트의 싱싱코너를 떠올리게 할 만큼 풍성한 습기가 피어오르던.

 

대략 35미터에 이른다는 인공 산은 온통 초록빛 식물로 잔뜩 뒤덮여 어찌 보면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잊혀진 왕국 같기도 하다.

 

클라우드 포레스트는 말그대로 열대우림 기후를 재현한 실내 정원. 폭포와 수증기는 그 자체로 두툼한 커튼이 되어

 

열대우림의 식물들을 울울창창하게 키워내는데 톡톡한 역할을 한다고.

 

온통 사방으로 흩날리는 물방울을 각오하고 폭포 아랫도리로 바싹 접근해 봤다.

 

그리고 인공 산의 꼭대기에서부터 실내 정원을 온통 휘감으며 사방으로 내뻗는 트레킹 코스.

 

밖에서 볼 때는 잘 못 느꼈는데 막상 안에 들어오니 훨씬 더 넓고 광활한 공간이란 느낌이다.

 

 

 

곳곳에서 방문객들을 내려다보는 동남아 지역 특유의 토템상들. 아마도 싱가포르 원주민들의 스타일이려나 싶다.

 

그리고 차 한대를 온통 휘감아버린 듯한 연두색 이끼 덩어리들. 잃어버린 도시의 느낌을 한층 더 배가시키는 소품이다.

 

 

그리고 정상까지 엘레베이터로 오른 후 천천히 인공산을 휘감은 산책로를 따라 걸어내려오는 길, 더러는 인공산 바깥으로

 

걷기도 하고, 혹은 인공산 안의 코스를 따라 걷기도 하고. 유리벽 너머 언뜻언뜻 비치는 싱가포르의 시내 모습과 가든 모습들.

 

 

 

옆의 플라워 돔에는 주로 바오밥나무니 다육성식물이 많은 다소간 황무지의 느낌이 있었다면, 여기는 난이나 양치식물이

 

주종을 이루는 풍요로운 녹색의 세계.

 

 

인공 산 정상에 꾸며져 있던 조그마한 연못, 그리고 원숭이들이 점령한 조각배 두 척.

 

 

저 너머로는 싱가포르 플라이어가 보이고.

 

내부에는 기기묘묘한 형태의 꽃과 나무들이 사방에서 자기 좀 봐달라며 우쭉우쭉 자라있었다.

 

 

 

 

이런 게 바로 마트 싱싱코너의 느낌. 굉장히 시원하거나 상쾌할 거 같아서 머리를 디밀어 봐야 사실 별 느낌없는.

 

그래도 저 자잘한 물방울 덕에 배추니 쌈야채들은 더욱더 싱싱하고 맛나게 보이던.

 

정상에서 내려다본, 클라우드 포레스트의 입구. 아까 내가 저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 봤더랬다.

 

그리고 비슷한 포즈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나무원숭이 일가족.

 

마치 기차라도 지나갈 듯한 산을 휘감은 산책로. 그러고 보면 가든스 바이 더 베이에는 스카이워킹을

 

실감케 해주는 코스들이 많다. 슈퍼트리 글로브에서나 여기에서나 발끝이 지릿지릿.

 

 

어떻게 보면 선녀옷에 붙어있다는 날개가 너울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점점 실감나는 깊고 짙은 열대우림 숲속의 느낌. 뜨거운 싱가포르 정오의 햇살도 빽빽한 나무와

 

짙게 피어오른 수증기의 안개구름에 걸려 한결 부드럽고 여릿한 빛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밑으로 내려오면서 점점 더 교육적인 내용이, 그러니까 숲과 자연 보호 및 지구 온난화 등등의 이슈에 대한, 본격 전개되면서

 

나름 흥미는 자연스레 북돋아졌지만 사진 찍을 거리는 조금 줄어드는 바람에, 출구 직전쯤에 발견한 거대한 악어 목각인형만 한 컷.

 

 

 

 

 

강릉에 가면 꼭 들르게 되는 커피 포레스트 바이 테라로사, 경포 해수욕장에서 순긋 해수욕장으로 가는 해송숲 옆에

 

슬쩍 숨어있는데, 그렇게 좁지 않은 건물 앞 주차장이 온통 차로 가득하다.

 

벽난롯불이 이글이글 열기를 내뿜는 1층의 공기가 2층짜리 높은 천장의 카페 건물을 지긋이 덥히고 있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다소 어둑한 와중에도 중간층에 걸려 있는 인형이 눈길을 잡는다.

 

 

까페 라떼랑 아포가토, 커피를 붓기 전에도 이미 초코시럽이 촉촉하게 쿠키랑 아이스크림에 젖어들었다.

 

 

바닷바람에 치이긴 했겠지만 아직 해송림의 푸른 빛이 살아있던 11월, 햇살이 문득 봄인양 하던 잠시지간.

 

시원하게 유리창으로 구분된 야외 테라스, 겨울 바람과 얄포름한 겨울 햇살이 자유로이 드나는 공간처럼 보인다.

 

 

 

까페에서 책도 보고 뒹굴대다 보니 어느새 짧은 겨울해가 까무룩하니 바닷속으로 잠겨버리고 까페 역시 어둠에 잠기다.

 

 

까페 입구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찻잔과 찻잔받침들이 반짝반짝 금빛을 번쩍이며 늘어서 있기도 했고.

 

 

도심의 이러저러한 까페들과는 달리 넉넉한 스탭들의 공간과 위아래로 즐비하게 늘어선 커피 원두나 찻잔들이 여유롭다.

 

(아마 이건 서울과 지방의 땅값 차이가 크게 작용했겠지만)

 

밤이 깊어지면서 더욱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벽난로의 화염이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사실 열기는 그다지.

 

떠나기 전 까페 건물 앞에서 노랑불빛이 일렁이는 유리창들을 한 장 담았다. 해송림 너머에서도 슬몃슬몃

 

드러나보이던, 보석을 담아둔 유리상자같이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모습의 까페.

 

 

 

 

 

커피 포레스트 by 테라로사. 강릉 순포해변 인근에 해안가를 잠식한 군부대 뒷켠에 이차선 도로 안쪽으로 숨어있는.

2층짜리 건물 벽면이 시원하게 온통 유리창이다. 말간 유리창에 비치는 솔숲과 맑은 하늘.

1층 전경. 널찍한 공간에 띄어띄엄 놓인 테이블이 맘에 들었다. 일단 주문부터 하고 한바퀴 돌아보기로 결정.

2층에 올라가 내려본 풍경. 2층 일부만 바닥이 있어 테이블이 놓였고, 나머지 대부분의 공간은 이렇게 뻥 뚫렸다.

1층과 2층 사이 계단에서, 커다란 액자처럼 바깥 풍경을 담고 있는 창문.

그리고 각양각색의 커피 가는 기계들. 우리 집에 있는 기계도 저렇게 손때가 잔뜩 묻고 세월의 연륜이 담기고 있으니

버리지 말고 계속해서 아껴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땔나무를 드문드문 넣어주던, 맹렬한 불길이 날름거리던 벽난로. 온통 유리로 된 건물이라 자칫 추워보일 수 있는데

벽난로가 있으니 심리적으로나 실제로나 덜 추운 거 같다.

내가 앉았던 자리. 예가체프 드립 커피를 시켰는데 자리에서 직접 내려주지는 않아 아쉬웠지만.

그래도 새콤하고 쌉쌀한 맛은 실망스럽지 않았던. 이쁜 찻잔 역시 맘에 들었다.

자리에 앉아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니 보이는 창밖 풍경. 건물 외벽을 타고 올라가는 사다리, 그리고 얼핏

시야 끄트머리에 가지만 걸쳐진 소나무들.

쿠스모토 마키 선집, 이란 책이 책꽂이에 꽂혀 있길래 뭔가 했더니 만화다. 이날 여기에 앉아 봤던 두 권의 책중

한 권. 필치도 좋고 스토리도 매력적이고, 그 중에서 인상적이던 페이지 하나.

그렇게 책도 보고 노래도 듣고 멍하니 있다 보니 창밖은 어느새 어둠이 깔렸다. 비워진지 오래였던 찻잔은

치워지고, 혼자 와서 청승떠는 게 불쌍해 보이셨는지 아메리카노 한잔을 서비스해주신 점원분. 감사해요.


그리고 2층 야외 테라스. 천막처럼 보이는 곳은 따로 마련된 흡연공간이고, 비스듬히 올라가는 벽면에는

커다란 통유리가 시원시원하게 짜맞춰져 있다. 근데 여기는 뭔가 세미나실같은 분위기기도 하고.

금세 어둑어둑해지는 한겨울의 금요일 저녁. 2층이나 1층이나 손님들이 거의 없어서 맘대로 돌아다니며 구경하기도

좋고, 누구 눈치볼 일도 없어서 참 좋았던 까페. 아니, 까페도 까페지만 시간대가 중요했을 거 같긴 하다.

찬바람을 맞으며 멍해진 정신을 애써 추스리고 있는데 저쪽의 도로에서 차들이 드문드문 달려오고 달려간다.

가뭄에 콩 나듯 쌩쌩 내달리는 차들 중에서도 더욱 드물게 코너를 돌아 까페로 찾아 들어오는 차 한대.


더이상 깜깜해지면 돌아가는 길이 걱정이다 싶어, 그리고 이미 네다섯시간 가까이 혼자 놀다보니 괜시리

혼자 눈치도 보인다 싶어 일어나기로 했다. 벽난로 속 노란 불빛은 여전히 맹렬하게 탁탁 타오르고.

다시 순포해변, 순긋해변과 사근진해변을 거쳐 경포해변으로 걷는 길. 이미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가 따꼼거렸고

깜깜해진 밤바다는 살짝 무섭기까지 해서, 그냥 도로를 따라 걷기로 했다. 안개가 끼었는지 뿌연 가로등만 띄엄띄엄.

갈 때보다는 훨씬 빠르게, 한시간정도 걸려서 도착한 경포해수욕장의 밤풍경. 차갑고 여린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던.




한 장의 사진을 기억하며 찾았던 강릉 경포해수욕장. 해풍을 막는 야트막한 솔숲 너머로 깔끔한 흔들의자가,

그리고 그 너머로 탈색되어버린 듯한 누런 빛의 모래사장과 퍼러딩딩한 바다가 있었다.

바다에 도달하면 더 나아갈 곳이 없다 멈추게 되지만, 사실 조금만 몸을 틀면 될 일이다. 바다와 함께, 파도소리와

함께 발맞춰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무한하게 뻗어가는 거다.

모래사장엔 경사에 기대어 꽁꽁 얼어있는 잔설들이 아직 남아있었다. 여름철 뜨겁게 달궈졌던 누런 모래사장이

색이 바랜듯 창백해져버린지라 시퍼렇게 차가운 얼음눈들은 자연스레 보호색을 맞춰입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바다를 따라 앞서 걸어간 걸음걸이들. 발자욱들이 줄맞춰 정연히 늘어선 게 왠지 땅을 헤집어둔 공동묘지같다.

무언가 저 구덩이에 넣고 봉긋하게 흙을 쌓아올리면 파도가 와서 다 쓸어버릴 것 같은. 그런 세기말적 풍경.

바다를 따라 걷는 기분이 그랬다. 파티나 잔치가 끝난 뒤의 적막함이랄까, 50연발 폭죽이 숨쉴틈 없이 터지고 나서

텅 비어버린 채 모래사장에 나뒹구는 느낌. 겨울바다의 풍경들이 하얗게 재만 남아버린 가슴에 날아와 박혔댔다.

BGM은 서영은의 '겨울바다', 경포해수욕장에서 무작정 북쪽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뭐 뾰족한 일정이 있는 것도

가야 할 곳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그냥 저 위쪽 어딘가에 테라로사라는 까페가 있다는 이야기만 듣고

슬슬 걸어보기로 했던 참이었다. 바다를 따라 걷다가 불쑥 기습하는 파도에 발걸음이 뒤척거리기도 하고,

문득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발걸음이 파도에 씻겨내리기도 하는 길.

그러다 문득 발에 채인 유리병 하나. 와인병에 코르크 마개로 단단히 막힌 게, 안에는 돌돌 말린 종이까지 제대로

갖춰져 있는 게 한눈에도 파도에 실려온 메시지를 담고 있어 보였다. 뭐지, 일본에서 왔나. 아님 미국..?

그 자리에서 코르크마개를 따고 안의 종이두루마리를 꺼내 보았다. 약간 습기가 차 있긴 했지만 까끌한 종이의

질감이 그대로 남아있고, 테이프로 허리춤이 둘둘 감겨 있어 슬쩍 들춰본 속지엔 한글이 써져 있는 듯. 일단은

들고 가다가 나중에 따뜻한 데 앉아서 읽어보기로 했다.

꽁꽁 언 민물길이 바다로 향하는 길, 얼음에 반사된 빛무리들이 시멘트 교각 바닥을 긁으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삼면이 바다라는 한국의 해안가에 빼놓을 수 없는, 군부대와 군대 시설물들. 여긴 심지어 탱크가 한대

바닷바람에 녹슬어가고 있었다.

뭍에서 흘러내리는 민물이 모래사장 사이로 야트막한 개울을 만들었다. 찰박거리며 위태로이 바다로 향하는

물길을 시시각각 얼리며 덮쳐오는 얼음판, 그 위로 성글게 번지는 빛그림자.


더이상 물의 흐름이 읽히지 않는 빙판, 여러번 깨지고 얼고 깨지고 얼고의 과정을 반복한 듯 조각난 얼음판들이

조각보처럼 이리저리 얽혔다.

그리고 어느 모래사장에 꽂힌 채 당당히 바다를 굽어보던 팽팽한 낚시대 하나. 가늘고 약해 보이는 낚시대가

바싹 성난 듯이 머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게 제법 긴장감을 머금고 있다.

몇 걸음 걷다가 문득 뒷주머니가 허전해졌다. 아까 그 와인병 안에서 꺼냈던 메시지를 뒷춤에 꼽아넣고 있었는데

여러번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카메라를 만지다 보니 어느 틈에 도망가 버린 것. 왠지, 그 종이쪼가리를 꼭 찾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발걸음을 되짚어 거꾸로 걷길 십여분. 이렇게 얌전히 구덩이에 놓여있는 걸 용케 다시 만났다.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모습은 언제 봐도 가슴이 시원해진다. 바다가 떠밀어 보내준 메시지도 다시 찾았고,

방파제를 때려부술 듯한 소리를 내며 들썩이는 파도를 보며 계속 걸었다. 


날카로운 칼날처럼 깨어졌을 유리조각조차 이렇게 부드럽고 둥그런 모습으로 바꿔버리는 파도의, 바다의 위력.

특히나 겨울바다가 주는 신산하고 허한 느낌이란 건, 어쩌면 이렇게 모든 것들을 쓸어버리고 잘게 부숴버리다가

종국에는 남는 것 하나 없이 지워버리는 그 압도적이고 거대한 힘에 대한 경외감이나 허무함일지도 모르겠다.

겨울이라 그런지, 바다 색깔이 한결 더 검푸르다. 잉크처럼 검푸른 바닷물이 수면으로 밀어올려져서는 점점

에메랄드빛으로 연해지다간 하얀 파도로 보글보글. 모래사장까지 끌려나온 파도는 뒤미쳐 온 파도에 익사해버린다.

이쯤이 좋겠다 싶어서, 메시지를 펼쳐 보았다. 누군가의 글씨가 하얀 종이 가득 적힌 채 인연을 칭하며 친구를

청하고 있었고, 언제나 행운이 가득하기를 바란다는 인사까지 적혀있었던 메시지. 이메일 주소도 적혀있었지만

알아볼 수가 없어 연락할 도리는 없고, 배를 접어 바다에 띄워보내는 게 최선이지 싶었다.

그렇게 뭍에서 흘러내리는 민물이 만들어낸 자그마한 개울에 띄워서 바다로 흘려보내며. 중간중간 모래톱에

걸쳐 멈추기도 하고, 빙글빙글 제자리에 맴을 돌기도 했지만 어쨌든 바다까지 나가는데 성공.

순긋해변이던가, 간소하게 만들어진 부두가 방파제의 품 속에 안겨 있었다. 시뻘겋게 녹슨 철제구조물 위로

앙상하게 덮인 나무판때기, 그리고 딱딱한 부두시설과 딱딱하고 약한 배 사이의 완충을 위한 고무타이어.


파도가 철썩철썩 방파제에 속절없이 부딪혀 깨지고 있었다. 자그마한 부두의 외곽을 단단히 감싼 방파제,

언뜻 보면 아무렇게나 팔다리를 쩍쩍 벌린 채 내팽개친 탕녀나 탕아 같기도 하다.

모래사장을 따라 계속 걷고 있는 참이었다. 경포대에서 사근진, 순긋, 순포해변까지 이름이 계속 바뀌고는

있었지만, 모래사장은 죽 이어진 한 길이었다. 물론 이렇게 중간중간 민물이 넘실거리며 모래사장을 가르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물이 마른 겨울철이라 잔뜩 녹슨 다리는 아무 쓰임도 없이 그저 거기 있을 뿐.


바다를 계속 끼고 걷자니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까는 바다가 모든 걸 지워버리고 무화시켜 버리는 힘을

갖고 있어서 허무하다 했지만, 아니, 그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아무리 잘게 깨고 부수고 으깨어도 뭔가는


남는다. 그렇게 남은 것들이 조금씩 쌓여 모래사장을 이룬 걸 테니까. 말하자면 저건 수백년, 수만년 전의

감정과 희로애락이 그대로 담겨 있는 거대한 아카이브인지도 모른다.

사념(思念), 사념(沙念), 모래들의 사념들. 파도가 아무리 으깨고 바스라뜨릴 기세로 억겁년을 덤벼든다 해도

사념들은 고스란히 남는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변한다는 말이 진리처럼 통용되지만, 아닐지도 모른다.

조금씩 해가 기울어갔다. 쉬엄쉬엄 사진도 찍고 돌아보기도 하며 걸은 길인지라, 게다가 바닥이 단단하지 않아

걷기 쉽지 않은 모래사장으로만 따라 걸어온 길인지라 꽤나 시간을 들여 걷고 있었다.

저 너머 고래등처럼 수면 위로 불쑥 튀어나온 바위 위에는 갈매기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석들이

싸질렀을 게 뻔한 배설물들이 성난 파도로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하얀 줄무늬가 얼룩덜룩.

순포해변을 지나 계속 올라가려는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하다. 해안가를 따라 철망을 얹은 철책이 끝없이

이어져있고 중간중간 저렇게 침투 대비용 표찰까지 붙여놨다. 어렸을 때는 돌멩이를 철책에 꼽아놨었던 거 같은데.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모래사장, 녹슨 깡통만 굴러다니며 버려진 해변이나 마찬가지다.

한쪽엔 바다를, 한쪽엔 부대를 끼고서 아예 쭉 주파해버릴 생각으로 열심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난리가

났다. 호루라기를 불고 손을 흔들고. 더이상 접근하지 말라길래 은근 부아가 나서 걍 지나간다는데 왜 난리냐고

한마디 했다가, 그냥 왔던 걸음 되짚어 돌아가기로. 불쌍한 군바리들, 까라면 까는 그들이 무슨 잘못인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트리 위에 얹었던 탈지면 솜뭉치를 닮은 얼어붙은 눈 한조각. 밟으면 아작아작 소리가 나는게

좋아서 한참 밟고 돌아다니다가 조그마한 이 녀석은 차마 밟지 못하고 사진 한장.

이 녀석은 얼마나 묵은 걸까. 모래를 잔뜩 묵은 이 녀석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단단한 알루미늄 캔이 호일처럼

얊고 약해질만큼의 시간이 흘렀고, 이제 조금씩 몸이 헐어가며 모래알로 변해갈 거다.

돌아나와선 부대 뒷켠의 차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앙상한 싸리비를 거꾸로 꽂아놓은 듯한 겨울 나무, 그 위로

싸리비에 이리저리 쓸리고 번져버린 듯한 겨울 하늘. 슬몃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애초 목적지도 없이 그저 걷던 참이었지만, 문득 생각해보니 이 근방에 테라로사라는 까페가 있다고 했었다.

겨울바다라봐야, 도착하면 금세 추워져서 이내 돌아올 걸 알고 있었으니까. 저런 까페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거짓말처럼 눈 앞에 번쩍 나타났다.

그렇게 근 세시간, 경포대에서부터 북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모래사장을 밟아 걷던 길이 끝나고, 테라로사에 앉아

다시 또 네다섯시간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글도 끼적이고.


잔뜩 걸었지만, 쉼없이 뭔가를 생각했던 것 같지만. 막상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니 다 사라져버린 것 같아서

따뜻한 까페 안에서 이상한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했던. 그렇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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