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위는 효과의 우롱차', 후쿠오카나 유후인은 아무래도 한국인 여행객들이 워낙 많아서 이런 한글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편의점이나 어디나, 만화적인 이미지들이 많은 나라인지라 이런 유머러스한 그림도 곳곳에 숨어있다. 저 침흘리는 모습은 참.

 

 

그리고 이번에 마셔본 것 중 가장 신기했던 건, 무려 스파클링 소이 워터. 한국어론 뭐랄까, 탄산 콩물?

 

 

그렇지만 역시 포장도 참 이쁘고 깔끔해서 더욱 호기심을 부채질, 맛은 생각보다 괜찮은 탄산 콩물맛이었다.

 

편의점에 흔한 과자랄까, 스낵이랄까. 이걸 먹을 때는 저 꼬맹이처럼 눈을 가리고 먹어야 하나보다.

 

볶음면이 레토르트 음식으로 편의점에서 이렇게 팔리기도 했다. 양념도 다 되고 야채도 조금 들어간 상태 그대로.

 

오후의 홍차 시리즈 증에서도, 이건 아마 한국에선 보지 못했던 거 같은데.

 

미니쉘 같은 초코렛들이 이렇게 낱갤로 팔리기도 한다. 리라쿠마가 누워있는 포장지가 귀엽다.

 

 

210ml, 딱 한잔감인 월계관의 사케병.

 

편의점 옆에도 굳이 이렇게 음료가 잔뜩 디스플레이된 자판기가 줄줄줄.

 

 

편의점, 슈퍼에 들러서 한바퀴 돌며 이 동네 이 나라 사람들은 뭘 먹고 사나 살피는 것도 여행의 재미 중 하나.

 

특히나 일본의 진하디 진한 마차가 맘에 들어서 꼭꼭 찾아보곤 했던 일본차 코너.

 

그리고 편의점에서 사왔던 라면들, 다다미가 깔린 유후인 료칸의 방에 앉아 시식 시작.

 

 

짜파게티나 볶음면처럼 끓는 물로 면을 익히고 나서 물을 빼 버려야 하는 조리상, 이렇게 속포장지에는 구멍이

 

뽕뽕 뚫리게 되는 부분이 배려되어 있다. 이런 게 정말 일본의 세심함을 보여주는 사례.

 

 

그리고 이 녀석은, 모밀면으로 된 라면..이라고 해야 하나. 온천물 속에서 하드보일드하게 익고 있던 계란 하나를

 

풀어 넣었더니 더 맛있게 먹었던 거 같다. 아니면 그냥 밤늦은 시간에 컵라면과 맥주란 게 으레 그런지도 모른다.

 

 

 

 


첫번째 생각.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글자를 거꾸로 붙여둔 걸까. 는있맛, 뎅오&빵찐??

이런 비슷한 건 사실 종종 본 적 있었다. 'ECNALUBMA'. 삐요삐요 달리는 빨간 앰뷸란스 앞에서.

각각 "맛있는 찐빵&오뎅", "AMBULANCE"가 되어야 할 글자들이 거꾸로 내달리고 있다.


두번째 생각.

편의점 종업원이 게을렀던 게다. 아마도 저 동그란 글자판 뒤에도 앞면과 같은 글자가 붙어있는 거

아닐까. 편의점 안쪽에서 붙이면서 그저 자신 기준으로 편할대로 붙였으니 정작 밖에선 저렇게 보인단
 
걸 모르고 있는 게으른 종업원. 여즉 아무도 저걸 알려주지 않았다니 세상 참 무신경하다.


세번째 생각.

사실 편의점에서도 고민을 안 했을리 없다. 어차피 안이던 밖이던 어느 한쪽에서 보는 글자는

저렇게 이상하게 배열되고 말 테니 결국은 선택의 문제인 거다. 어쩌면 편의점 주인은 가게 안에

들어온 손님들을 기준으로 "맛있는 찐빵&오뎅"을 선전하기로 결단을 내린 건지도 모른다.

(이로써 종업원은 '게으름'의 오명을 벗고 세상 역시 조금 덜 무신경해진다.)


네번째 생각.

화살은 이제 저 동그란 글자판을 만들어 배포했을 업체에게로 향한다. '찐빵&오뎅' 제조업체이던

아니면 주문받고 제작한 디자인업체이던 간에, 이런 불상사가 일어날 줄 모르고 무신경하게

만들었단 이야기다. 사실 제작할 때 '오'자 뒤에는 '뎅'자, '찐'자 뒤에는 '빵'자를 적도록 조금만

주의했어도 편의점 주인과 종업원과 세상은 게으르거나 무신경하다 타박받지 않았을 거다.


다섯번째 생각.

어라, 근데 조금 고개를 틀어서 생각하면 달라진다. 만약 애초 업체는 저 동그란 글자판을

가로 배열이 아니라 세로 배열이 되도록 생각했던 거라면. 신문도 가로쓰기로 굳혀진지가 워낙

오래고 세로로 쓰인 옛 책들을 보다 보면 고개가 조금씩 꺽일만큼 가로 배열에 익숙한 시대라지만,

이런 시대에도 세로쓰기의 운치와 멋을 살려보겠다는 업체의 강단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게다가 글자판 앞뒤로 다른 글자를 인쇄하려면 아무래도 복잡하고 인력도 더 소요될 테니,

그것까지 감안한 세로 배열이라면 센스와 경제관념까지 갖춘 업체인 거다.


여섯번째 다시 첫번째 생각.

그럼 뭐가 문제지. 누가 잘못한 건가. 아니 어쩌면 아무도 잘못한 게 없는 거다. 굳이 이걸 시시콜콜

따지고 있는 내 잘못이다. 한글은 꼭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야 한다는 법 따위 없는데, 저렇게

오른쪽부터 왼쪽으로던 아래에서 위로던 읽히고 뜻만 전달되면 되는 거다. '찐빵'이던 '빵찐'이던,

눈있는 자가 알아보고 돈까지 있는 자가 사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말이다.


여섯번째 다시 두번째 생각.

혹은, 어쩌면 이 모든 쓰잘데기없는 생각들을 무너뜨리는 근본적인 취약점을 되짚어봐야 할지도

모른다. 편의점 밖에서 저 흥미로운 글자판들을 보고 덜컥 이런 생각들을 내달리곤 있지만 정작

편의점 안에서 저 글자판들이 어떻게 보일지는 확인해보지도 않은 거다. 실제로 안에 들어가면

올바로 보이리라던 예상과 달리 여전히 '는있맛, 뎅오&빵찐'으로 읽힌다면 종업원이 아랍인일지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을 해야 한다. 아니면, '신묘년, 해피뉴이어' 따위 전혀 다른 글자가 반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다.


첫번째 행동.

그대로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 물건을 사고 계산하며 당당히 확인하던, 빼꼼히 문 사이로

고개만 넣어 멋쩍게 확인하던 어쨌건 이 난잡한 사고 흐름의 결론을 봤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난, 그냥 버스를 계속 기다리다가 올라타고 말았다.





어제 '공기인형'을 보고 나서부터 기네스 맥주가 무지하게 땡겼었다.

[공기인형] 짤그랑대는 기네스 병맥주,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퇴근하고 나서 장보러 가신다는 부모님을 따라 코스트코로, 농협으로. 코스트코엔 병맥주가 없었고 농협엔

수입맥주라곤 호가든과 버드와이저 뿐이었다. 농협에 수입맥주가 있단 사실에 더 놀랬다.

집앞 편의점도 두군데 들렀다. 한군데에서 드디어 기네스 캔맥주와 조우해서, 분명 다음 편의점에선 짤랑대는

기네스 병맥주를 만날 수 있으리라 가슴이 벅차올랐었다. 웬걸, 아예 기네스는 보이지도 않았다.


하여 다시 처음 편의점으로 돌아가 두 캔 사버렸다. 캔이지만 살짝 달그락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져서, 타협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엔 맥주캔 두개를 한 손에 계주 바통처럼 옴쳐쥐고는 내달렸다. 캬~ 소리내어 마시고 싶었다.

꼴꼴꼴...맥주가 흘러나오면서 짙고도 자욱한 안개 덩어리를 만들다간 조금씩 검정 액체와 뽀얀 거품의 형체를

만들어 간다. 진한 커피같이 쌉쌀하면서도 굉장히 부드럽고 매끈한 느낌의 갈색 거품이다.

그리고, 마음. 공기인형 그녀가 백 안에 넣고 방울처럼 흔들어대던 그런 짤랑짤랑 소리가 아니라 조금은 탁성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던 이유다. 캔 속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탈탈 털고 나니 기네스의 마음이 얼핏 나타났다.

이리저리 굴려가며 자세히 살피니 하얀 플라스틱 탁구공같이 생겼다. 세련된 검정색의 중후한 알루미늄 외양

속에 저런 가뿐한 느낌의 플라스틱을 굴리고 있었다니, 다시금 공기인형을 생각한다.


텅 비어있는 속을 채우지도 못하면서 도리어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그 결락감만 더욱 또렷이 떠오르게 만드는.

그런 게 마음. 하찮은 플라스틱 한 조각일 뿐인데도, 그게 이렇게 다르다.

무려 "기네스 고유의 맛인 크리미 헤드(부드러운 거품층)을 생성시키"는 능력을 가진 거다. 공기인형에게

마음이란 게 덜컥 생겨버리고 나서는 마냥 쓰잘데기없고 가슴 아픈 일들만 있었던 게 아니듯, 기네스 캔을

덜그럭덜그럭 귀찮게 부딪혀댔던 녀석도 마냥 쓸데없이 굴러다닌 건 아닌 셈이다. (물론 위젯 때문에 기네스는

일단 흔들거려서 흥분하고 나면 쉽게 가라앉지 않는 것 같다. 풍요로운 거품이 팝콘처럼 튀곤 하는 거다.)

마시고 나면 꼭 아쉬워지는 거품. 맥주라곤 마신 적이 없다는 결백함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 깔끔이 주걱으로

싹싹 야무지게 닦아낸 것만큼 거품이 한점 남김없이 모조리 내게 흘러들어온다면 참 좋을 텐데. 게다가 기네스,

비싸단 말이다. 편의점에서 무려 캔 하나에 3,500원.

복부 절개를 시술했다. 그녀의 마음이 보고 싶었다. 주둥이에서 흘깃흘깃 비치는 마음조각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불끈 힘줄이 선 손가락이 껍데기를 와그작, 찌그러뜨려 버렸더니 거품범벅의 '마음'이 잔뜩 당황한 채

배회하고 있었다.

기네스의 마음을 얻으려면 마법의 성을 지나 숲을 건너..어둠의 동굴 속 멀리멀리 나아가야 한다. 날카로운

알루미늄제 이빨을 조심조심 어루만지며, 달그락달그락 떨고 있는 매끌한 마음이 튕겨나가지 않도록 손끝에

감각을 집중한 채 섬세하게 쥐어야 한다. 너무 세게 쥐어도 안 되지만 너무 약하게 쥐어도 안 된다. 너무 많은

손가락들을 들이밀어도 빼내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최소 두 손가락은 집어넣어줘야 한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얻어낸 기네스의 '마음'. 일곱개를 모아서 소원을 빌면 기네스의 신이 나타난다나.




*                                                     *                                                     *

기네스 드래프트. 알콜 4.2%, 원산국은 아일랜드.

안에는 '위젯'이라 불리는 조그마한 플라스틱공이 들어가서 제멋대로 휘젓고 있어 기네스 흑맥주 특유의

풍성하고 부드러운 거품을 만들어 준다.


개성엔 편의점이 있을까? 공업단지 내의 도로를 돌아다니다 보면 불쑥 어디 모퉁이에선가 나타난다.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바로 옆쯤에 있는데, 무려 '개성공업지구점'이란 거창한 지점명도 갖고 있었다.

안 들어가 볼 수 없어서 얼른 들어가 봤더니, 북한 아가씨인 듯한 젊은 처자가 카운터를 보고 있다. 엷은 화장에

남측 기준으로 평범한 복장이어서, 순간 여기가 개성 맞는지 의심스러운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이곳은 개성, 북한이 외화벌이를 위해 위험한 시장경제 실험을 벌이고 있는 곳 아닌가. 모든 상품은

달러로 가격이 표시되어 있었고, 그 점원누님은 아마도 16년동안 편의점 알바를 뛰어온 알바의 달인인 듯 능란하게

손님들을 받고 있었다. 다만 다소 들떠 보이고 리드미컬한 북한 사투리가 도드라졌다는 점을 빼면.

이곳에서 파는 담배나 술 종류는 면세가 되기 때문에 가격이 상당히 싸진다고 한다. 이 곳에 주재하며 일하는

남측 직원들은 2주정도마다 남쪽으로 돌아갈 때 애용하기도 한단다.


이 곳에서 쓰이는 돈은 달러, 최소단위는 1달러지폐라는 것이 북한에 넘어오기 전 방북 교육의 내용이었다. 그렇담

저 센트 단위의 거스름돈은 돌려 주려나, 아님 그냥 올림하려나. 편의점을 떠나는 순간부터 궁금했지만 끝내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혹시 모두들 기를 쓰고 센트 단위 거스름돈을 안만들기 위해 머리를

쓰며 상품을 고르려나. 0.9달러짜리를 샀다면 꼭 1.1달러짜리라도 하나 골라서 같이 사는.

그 옆에는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라는, 남측의 관리 주체가 있다. 지금 현재 이곳은 2번째 포스팅에서 이야기한

판-옵티콘으로 입주하기 전까지 임시로 머물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자동차들에 붙어 있는 번호판들을 보면, 흰색

번호판은 이쪽에서 상주하며 쓰이는 차량이거나 잠시 넘어왔던 차량, 그렇게 남쪽 차량을 의미하고, 노란색 판은

북한 차량이다. 노란색 번호판을 단 차량을 꼭 사진으로 남겨놓고 싶었지만, 대부분 그런 차들은 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찍을 수가 없었다.

개성공단 내에는 병원도 있다. 그린 닥터스라는 단체에서 운영하는 병원인데, 1층짜리 건물에 남과 북의 의사와

간호사가 다소 섞여서 남, 북한의 환자를 각기 치료중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남쪽 소속의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병원 한쪽 공간에는 남측 의사와 간호사가 주가 된 채 두세명의 북측 의사, 간호사가 함께 진료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병원의 다른쪽 공간에는 북측 의사와 간호사가 주로 포진하여 북쪽 소속의 환자를 치료한댄다. 그 두 공간

사이에는 반투명한 유리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꼭 항상 열려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남측에서 은행도 건너가 있었다. 다소 작다 싶은 지점 수준의 규모였는데, 창구가 두 개 정도 되었던 거 같다.

한쪽 벽면에는 그간 다녀간 귀빈들의 방문 사진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임시절 개성공단을

한번 쭈욱 둘러본 듯 하다. 여기저기서 그의 사진을 볼 수가 있었다.

참 심플한 메뉴판이다. '안내표'란 말은 글쎄, 북한에서 고친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어색한 느낌은 없는데

메뉴판이란 단어 대신 바꿔봄직한 거 같다. 그래봐야 영어+한자를 한자어로 바꾼 거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어느

건물인가에는 이런 찻집도 있다. 다시 한번, 참 심플한 안내표다. 1달러, 1달러, 2달러, 2달러, 1달러. 여기선

최하 1달러지폐를 통용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듯한 느낌이다.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가 현재 소재하고 있는 건물 한 켠엔가 붙어있는 한반도 지도. 출입증에 보였던 것처럼

명백하고 과장스럽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저기 얼룩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의도된 두 개의 점을 볼 수 있다.

참 드문 경험이지 싶은데, 독도에 대한 한국정부의 명쾌하고 단호한 입장을 이렇게 쉽사리 마주칠 수 있단 건.

'소방대'도 있다. 이 사진을 찍어도 될지 안 될지, 그리고 저 옆에 살짝 찍힌 아저씨의 츄리닝이 '제복'에 포함될지

안 될지..백만분의 일초 사이에 머릿속에 온갖 걱정과 근심이 어른거렸다. 북한, 개성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단

사실도 놀랍고 슬펐지만, 내가 스스로 이렇게 개성에 다녀왔노라 글을 쓰면서도 단어와 표현, 뉘앙스를 스스로

정제하고 가다듬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슬픈 것처럼. 아, 그러고 보니 이 사진 안의 차들은 모두 노란색 번호판을

달고 있는 북한측 차량이다.

개성공단 내의 도로를 달리면서 보면, 서울이나 어디 남녘 소도시를 다니는 것과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친숙하고 낯익은 풍경들에 놀라게 된다. 단순히 남과 북의 민족적 일체감...운운이 아니라, 개성공단

내 도로나 가로등, 도로표지판까지 모두 한국 측에서 제공한 것이기 때문인 거다. 파란색 도로표지판의 색도나

그 글씨체까지 모두 남측에서 통일되어 있는 바로 그것들이다. 


우리가 탄 차 앞에서 달리는 트럭에 빼곡히 탄 북측 인부들. 사실은 저것도 애초의 룰과는 벗어나는 일이다. 애초

약속하기로는, (노랑 안전모를 쓴) 북측 사람들은 (노란 번호판을 단) 북측 차에만 타고, (흰색 안전모를 쓴) 남측

사람들은 (흰색 번호판의) 남측 차에만 타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게 어디 되겠나 싶었다. 아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얼굴 맞대고 한공간에서 일하고 이야기하며 '살고' 있는데, 편의적인 이유에서든 심리적인 이유에서든

그런 불편한 룰은 금세 지워질 수 밖에 없었을 거다.

노란색 안전모들이 몽글몽글 뭉쳐져 있던 그 계란판같은 트럭 위에서 살짝 드러난 얼굴. 나이를 가늠하긴 힘들지만

꽤나 연로해 보이시고 피곤해 보이시는 표정이다. 아님 단지 코가 간질거려서 잠시 재채기를 하려고 하셨는지도.

저런 식으로 유려하게 씌여진 한글 간판이 이 개성공단을 꽉 채울 수 있다면 그것도 꽤나 멋진 광경이 되지 않을까.

이미 몇가지 서체, 그것도 대부분 일본에서 유래되었다는 서체에서 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남측의 한글디자인

그리고 한글문화에 조금은 자극을 던져 주면서, 북한이 남한이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례가 될 수 있을지도.

현대아산 사무실에 들어왔더니, 개성상황실이 있다. 벽면에는 시베리아횡단철도와 중국횡단철도와 연계해서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개성을 보여주기 위한 온갖 도면이 붙어있었고, '복스럽게' 생긴 북한아가씨가 우리에게

개성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개성은 유명한 박연폭포와 한석봉이 판액을 쓴 걸로 유명한 남대문, 그리고

정몽주가 피살당한 선죽교 등의 문화유산을 품고 있습니다..운운. 어라? 피살? 단어가 상당히 세다고 느꼈는데,

나만 그렇게 느꼈던 걸까. 설명중인 아가씨는 여전히 피냄새가 풍기고 훈김이라도 오를 듯한 그런 단어를 발음해

놓고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이런저런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별반 반응이 없었다.

저 디오라마 한가운데 있는 붉은 기둥 같은 건 아마도, 거대한 김일성 동상인 듯 했다. 개성 시내 한가운데에는
 
저런 게 서있나 보다. 설마 조명까지 저 섬뜩한 붉은 색으로 비추는 건 아니겠지.

현대아산의 개성상황실에서 능숙한 말투와 자세로 흐트러짐없이 개성의 현황, 개성공단의 향후 계획에 대해

설명하던 아가씨. 내가 카메라를 들고 멈칫거리는 걸 센스있게 눈치채곤 한마디 해주었다. 자유롭게 사진찍으셔도

됩네다. 그 말 듣고 당장 찍은 그녀의 발표 모습. 겉모습만 보곤 남한과 북한의 처자를 구분하기가 그리 용이하진

않은 듯 하다. 남측보다 결혼이 빨라서 20대 초중반에 결혼을 한다고 하는데, 그 이전까지는 남측과 비슷하게

연령대에 맞는 외양을 유지하다가,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나서는 같은 나이의 남측 여성에 비해 한 10년쯤 더 나이가

들어보인다고 한다. 아무래도 출산을 위해 모체의 영양분을 모두 아이에게 넘겨주고 나서 그를 보충할 충분한

영양이 공급되지 않는 환경이니까 그렇지 싶다. 산후조리, 그리고 산중 영양섭취의 중요성이랄까.

개성은 저기다. 강화도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금방 닿을 수 있는, 아마 서울까지 가는 것보다 개성에 가는 게

더 가까울 거 같다. 참 가깝다. 이렇게 남측에 최근접한 곳을 공단시설부지로 내놓을 수 있었던 건 확실히 김정일의

일인독재에서 기인한 결단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북한 군부에서는 격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김정일은 이를

모두 물리치고 기어코 이곳을 남측과의 경협사업에 내어준 거라고 들었다.

이게 개성공단 1단계 공장구역, 백만평에 이르는 부지라고 한다. 현재 노동집약적 업종 중심의 개발사업은 완료된

상태로, 남북경협의 기반을 구축하는 단계라고 한다. 약 250여개 업체가 들어가서 실제 50여개 업체가 공장을

가동중이라고 하는데, 주로 봉제, 신발, 가방 등의 상품이 만들어지고 있다.

2단계 공장구역은 250만평에 이르며, 기계, 전기, 전자 등 기술집약적인 산업을 발전시켜 세계적인 수출기지로의

육성을 꾀하고 있댄다. 배후지역에는 골프장도 두세개 건설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음...골프장이랜다.

3단계 사업은 IT, 바이오 등 첨단산업 중심으로 550만평을 개발하여 동북아 거점 생산기지로서의 역할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이게 2012년까지의 계획이라고 했는데..글쎄, 현재까지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으로 보아서는

다소 지연될 가능성이 크지 싶다. 그리고 다소 지연되더라도 좋으니 그런 청사진대로 개발이 될 지에 대해서는,

글쎄, 지켜보는 수밖에 없지 싶다.

1단계 공장구역과 3단계 공장구역 사이로 고속도로와 경의선 철도가 놓여 있을 텐데, 그 부근에 상업구역을 만들어

저런 고층빌딩을 잔뜩 올릴 계획도 갖고 있다고 했다. 저 반달 형태의 호수는 남북한의 화합과 번영을 상징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너무 먼 이야기인 거 같아 사실 흘려들었다.

빨간 선이 고속도로, 노란 선이 경의선 철도. 지금도 도라산역에서는 북측으로 하루에 한 차례씩 철도가 운행중에

있다고 한다. 딱히 무언가를 싣고 옮길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모처럼 놓인 철로가 못쓰게

되고 수명도 짧아진다고 했던 것 같다.


놀랬던 건, 설명을 하던 북한 아가씨의 입에서 '세계적인 경쟁력', '가격경쟁력', '세계 일류', '세계 시장'같은

자극적인 단어들이 잔뜩 튀어나왔다는 사실이었다. 아..북한도 변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던 순간.

현대아산 건물 위에 올라 개성공단을 조망했다. 아침부터 하늘이 잔뜩 의뭉스럽게 꾸물꾸물하더니 기어코 눈발을

뱉어놓고 있었다. 황량한 공사현장이 산재해 있고, 저 기분나쁜 판-옵티콘은 어디서나 잘 보이지만, 그래도 올해

첫눈을 개성에서 맞게 되다니 기분이 색다르다. 처음에는 딱딱하게 뭉쳐진 싸리눈이 투둑대며 떨어지더니, 조금씩

부드러운 눈발로 바뀌어 나리고 있다.

눈이 내리는 걸 보면서,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든 생각은 머리에 바른 왁스물 흘러내리겠다는. 어느순간 눈내리는

것이 싫어진다면 나이를 먹었다는 증표라고 했지만, 단지 머리에 뭔가를 바르지 않던 시절과 멋 낸답시고 뭔가를

바르기 시작한 이후라는 차이가 아닐까 싶다.

시계가 순식간에 잔뜩 움츠러들어 버렸다. 거대한 감시탑 혹은 망루처럼 세워져있는 저 관치냄새 풀풀 풍기는

건물도 슬몃 눈발이 만들어낸 장막 뒤로 한 걸음 숨어들었다. 그리고 여긴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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