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초, 정신이 번쩍 나는 맑고 차가운 공기를 부드럽고 새침한 봄볕이 살짝 뒤흔들고는 모른 척 돌아서는 그런 시기의 경주 대릉원.

 

천년을 버텼던 왕국의 천년 전 무덤들이 엄마 가슴처럼 봉긋하게 솟아오른 곳에는 어느새 세월을 먹고 자라난 나무들이 자리를 잡았다.

 

 

경주 시내의 고즈넉한 야경을 책임지는 가로등 갓 속에는 첨성대도 들어있고 초승달도 들어있고.

 

아마도 천마총에도 같이 묻혔었을 법한 신라 왕족의 금관 장식도 들어있다.

 

담백한 기와담벼락을 따라 걷다가 대릉원 입구로 접어드니, 살풋 물오른 연두빛 버드나무가 휘영청.

 

 

파란 하늘, 황금 잔디, 그리고 아직은 덜 깨어난 겨울나무들의 짙고 투박한 검은 빛깔.

 

 

제법 커다란 공원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는 대릉원을 둘러싼 야트막한 담벼락 너머 이어지는 기와지붕들이 보인다.

 

물론 신라시대 때의 가옥 양식이 저렇지는 않았겠지만, 콘크리트 네모 반듯한 건물들이 아니라 다행이다.

 

 

대릉원 안에는 천마총이 있는데, 무덤의 주인을 명확히 알게 되면 '릉'이라고 부르고, 누구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높은 신분의 무덤이라고 판단되면 '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천마 그림이 인상적인 무덤이라 해서 천마총인 셈.

 

내부 촬영은 금지, 주요 유물들은 경주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여기에는 모조품을 진열해두었다고 한다.

 

빨간 옷을 따뜻하게 여며입은 꼬맹이 하나가 동동거리는 걸음걸이로 무덤 안에 들어서는 모습이 귀엽다.

 

 

 

저 야트막한 언덕 같기만 한 무덤들 하나하나에 주인이 있고 부장품들이 있을 테지만, 그 안에 혹 품고 있을

 

보물들이나 금은보화 같은 것들보다도 저 무덤의 곡선이 참 탐난다. 사막에 갔을 때 반해버렸던, 바람이 만들어낸 듄 같다.

 

바람이 모래를 하릴없이 헤치고 깍고 부어내며 만들어내던 그 자연스럽고 우아하던 곡선,

 

아마 대릉원의 곡선들 역시 조금 더 시간이 걸렸을 뿐, 자연의 손길은 마찬가지였으리라.

 

 

 

어떤 각도에서 보면 마치 이전에 대유행했던 텔레토비의 동산이 중첩되어 보이기도 하고,

 

어떤 각도에서 보면 사방이 온통 둥그스름하고 풍만한 언덕으로 둘러싸인 안온한 공간 같기도 하고.

 

 

그 사이를 이렇게 구비구비 휘여지는 산책로로 휘감아 돌아가는 모양새도 참 좋다.

 

딱히 어디를 꼭 찝어서 봐야겠어, 라거나 꼭 한바퀴를 전부 걸어봐야겠어, 라는 하릴없는 욕심 부리지 않아도

 

그저 눈앞에 펼쳐진 곡선의 풍경들과 곡선의 길들을 따라 흘러다니는 것만으로 행복해지는 공간.

 

 

경주의 가로등 만큼이나 눈길을 붙잡던 건, 기와지붕을 얹고 있던 경주의 버스정류장들.

 

대릉원을 나와서, 황남빵을 우물거리면서도 가슴 높이의 돌담길 너머 풍경에서 눈길이 떠나지 않았다.

 

왠지 대릉원은 경주를 갈 때마다 빼놓지 않고 꼭 한번씩 들르게 되는 거 같다.

 

 

경주 안압지, 주말에는 10시까지 개방한다는 이 곳의 주차장은 (관리인 아저씨 말로는) 이천 대까지 수용가능하다지만

 

그야말로 시장통이나 유명가수의 콘서트 직후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격전지가 되어 꽉 막혀 있었고,

 

그런 전쟁을 벌이고 들어가니 이런 고요한 수면 위로 안압지의 정자들이 의뭉스럽게 둥실둥실 떠올라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세 채의 정자. 온통 들어차있던 사람들은 흔적만 어렴풋이 남았다.

 

그 틈새에서 용케 삼각대를 소심하게나마 펼칠 공간을 잡고, 이리저리 두리번두리번.

 

안압지 수면에 비친 정자의 잔잔한 그림자. 아직은 쌀쌀한 겨울바람도 저렇게 말간 수면을 뒤흔들 힘은 잃었나보다.

 

정자 뿐 아니라 연못 주위의 인공섬들과 조경들에도 이쁜 조명이 고르게 비춰지고 있었다. 뱃놀이하기 딱 좋은 인공연못.

 

바글바글 정자가 미어지도록 올라선 사람들 쪽의 분위기와는 반대로.

 

굉장히 고즈넉하고 신비감마저 불러일으키는 안압지의 밤 풍경.

 

 

밤이 깊어가는데도 사람들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들어오고, 대형관광버스가 사람들을 쉼없이 토해내는 걸 보곤

 

이제 여길 떠날 때로구나, 싶어서 떠나기 전 마지막 컷.

 

아, 안압지 연못 바닥에서 발굴했다는 신라시대 귀족들의 술자리 장난감 모형도 한 장 담았다.

 

십이면체 주사위에 면면마다 적힌 술자리 벌칙들. 크게 웃기, 옆사람 간지르기, 술 원샷하기 등등.

 

숙소로 돌아오는 길, 경주의 고즈넉한 밤길 한가운데 서서 고고히 불을 밝히고 있던 첨성대 모형.

 

 

 

겨울비가 제법 대차게 내리던 지난 1월. 포항을 지나 경주의 대릉원 앞 까페 골목에 잠시 멎었다. 겨울비도 잠시 멎은 그 때.

 

 

천년고도라는 진부한 호칭에도 불구하고 경주에는 뭔가 있다. 까페 인테리어에 이런 담백한 창살이 자연스러운 분위기.

 

 

커다란 새장 같은 전등갓에 불빛이 하얗게 스며들었다. 어느새 다시 캄캄해진 하늘.

 

야외 테라스에 내어놓은 테이블과 의자들은 흠뻑 빗물을 머금다 못해 뚝뚝 뱉어내는 중.

 

 

까페에서 단팥죽을 파는 것 역시 경주니까 그럴 만 하겠다 싶은데, 의외로 굉장히 맛있어서 깜놀. 에스프레소 꼼파냐도 달콜달콤.

 

이런 느낌의 룸, 마루보다 한층 올라간 높이가 조금 어색하지만 그래도 안에 들어가 있으면 막 아늑해지고 그러는 분위기.

 

 

그리고 이 까페 앞에 웅크린 천년 전 왕들의 무덤들, 조금 너머 하늘을 받치고 있던 야트막하지만 단단한 첨성대,

 

그런 것들과 함께인 듯 따로 그럴 듯하게 서있던 나무들 같은 풍경이 참 아름답던 경주 대릉원 너머 이차선도로 맞은편.

 

 

 

 

 

 

경주 대릉원에 도착했을 즈음 기대와는 달리 겨울비는 한창 기세를 올리던 중이었다.

 

자욱하게 내려앉은 안개 너머 첨성대와 봉긋한 선대의 능들이 찢겨지는 게 아닌가 싶도록 수천수만의 빗방울이 드세던 그 때.

 

 

켜켜이 내려앉은 시간이 무겁게 가라앉은 경주만큼이나 수백년을 산다는 천개의 가지를 가진 나무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이 땅을 누르고 있는 건 천년의 시간만이 아니었다.

쁘리아 꼬(Preah Ko)는 씨엠립 동남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롤루오스 유적군 중 하나다. 롤루오스 유적군은

앙코르 왕조의 초기 유적, 대개 900년대를 전후한 유적지여서 훼손도 그만큼 많이 되었고, 또 기교도 전성기만

못해서 여행객들이 많이 찾지는 않는 듯 하다.

'쁘리아 꼬'란 말의 의미는 '신성한 소'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목걸이도 하고 커다란

코를 위풍당당하게 벌름거리는 듯한 제법 그럴듯한 소 조각. 뒤로 피어오르는 한 줄기 버섯같은 흰구름도

놓칠 수 없는 풍경이다.

쁘리아 꼬는 크메르 왕국의 시조부터 세 쌍의 왕/왕비 부부를 모셔 놓은 사원이라 한다. 그래서 탑도 총 여섯개

쌓아올린 거라고 하고, 탑마다 계단 아랫쪽에는 이런 특이한 모양의 기단을 받쳐놓았다. 부부의 금슬을 좋게

한다는 '월장석'이라 하여 달을 형상화한 돌조각이라 하는데, 저게 왜 달일까 한참 고민하게 만들었다. 왜

보통 '달'이라 하면 똥그랗거나 반달이거나 이지러졌거나 여하간 동그란 원의 형태로 상상하기 마련인데, 이건

무슨 말미잘처럼 너울너울 달빛이 퍼져나가는 것까지 형상으로 잡아낸 건가. 그때의 사람들은 달을 그리라하면

저렇게, 똥그란 원이 아닌 달빛 파장까지 반영된 그림을 그렸지 않을까. 아니면 어쩜 그때는 정말 저렇게 생긴

달이 이 '쁘리아 꼬' 사원을 비쳐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래 된 만큼 손대어 복원할 곳도 많은가 보다. 아예 탑 맨 아랫단부터 촌스럽도록 신선한 새 벽돌로 괴어나간

귀퉁이. 저렇게 '난 새 벽돌이요~'라고 티내는 것들이 대체 이 천년묵은 돌탑하고 융화될 수 있을까. 만약

진품 부분과 복원된 부분을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일부러 그러는 거라면, 차라리 자연스레 무너진 부분에서

더이상의 붕괴를 막되 저렇게 어줍잖은 복원은 안 하는 게 차라리 보기 좋지 않을까 싶다.

사원 한 귀퉁이에서 길다란 목줄을 질질 끌며 유유자적 풀을 음미하고 계신 하얀 소님. 힌두교의 영향권 하에서

소는 파괴와 창조의 신인 시바의 현현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인도에서 소를 신성시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하는데, 여기 캄보디아는 이제 힌두교의 영향력에서 완전 벗어났다고 해야 하나. 식당에선 쉽게 소고기

음식을 찾아 볼 수 있고, 딱히 소를 존경하지도 않는다. (캄보디아는 소승불교가 95%를 차지하는 불교국가다.)

오랜 세월을 견딘 인간의 건축물들은 조금씩 '인공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어느순간 그냥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자연'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인간의 것으로 본다면 정말 남루해지고 퇴락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또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신비로운 느낌이 피어오르는 바윗덩이같은 거다. 저렇게 이삼천년 더 지탱해낸다면

이제야 기자의 피라밋처럼 그냥 '산'이 되고 '언덕'이 되어 버릴 거다.

지금도 벌써 드문드문 초록 이끼가 끼어 있는 바윗돌 같은 느낌이 드는 거다. 바윗돌 깨뜨려 자갈돌, 자갈돌

깨뜨려 모래알, 모래알 깨뜨려, 뭐 그런 식으로 나가면서 차츰 닳아빠지고 없어져 버린다. 어떻게 보면 허무할

수도 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정작 신비로운 게 그런 가차없는 풍화, 무화의 과정 자체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건 왠 오동통한 참새냐, 했는데 가이드북 상으로는 '사자상'이랜다. 뭐 입도 쫙 찢어졌고 가슴에 불룩한 저게

탄탄한 근육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왠지 참새 몸뚱이에다가 괴물딱지 머리를 갖다 붙여 놓은 느낌은 피할

수가 없다. 아마 앙코르 문화의 초기니만치 조금은 서툴렀던 것일까.

이 다소 현대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건물은, 위에 구멍이 뽕뽕 나 있다는 것에 주목해 '화장터'로 여겨진다고

하지만 왠지 믿음이 안 간다. 아무런 기록도 없다고 하니 좀더 재미있는 상상을 해 보는 건 어떨까. 사실 경주의

'첨성대'를 두고도 수많은 설들이 오가고 있는 상황인 거다. 실용적 천문관측대였다느니, 하나의 상징에

불과했다느니, 커다란 기준표지였다느니, 주술적 의미가 담겨있다느니 등등. 그런 종류의 '여지'가 남아있어야

흥미로워진다. 현대의 시각으로 과거의 것을 대면하고 있을 때의 낯섦, 생경함 따위의 감정이 살아나는 거다.

쁘리아 꼬 옆에는 캄보디아의 유수한 사원들을 자그마한 사이즈로 줄여서 전시해둔 미니어쳐 전시관이랄까,

그런 게 있었다. 제대로 구색을 갖춘 건 아니고 그냥 마당 한복판에 앙코르왓이 있고 반띠아이 쓰레이던가

그런 유명한 사원들의 모형이 놓여 있었던 곳이다. 아이들은 그 옆에서 무심하게 자기들끼리의 놀이에 열중해

있었다. 어이 이봐, 나는 이런 거 보겠다고 한국에서부터 몇 시간씩 날아온 거란 말이다. 왠지 저런 걸 보면

억울해질 때가 있다. 피라밋 옆에서 나른하게 파리를 쫓거나 졸고 있다거나, 에펠탑엔 눈도 안 주고 시크하게

걸어가는 파리지앵들, 혹은 9/11 전 쌍둥이 빌딩 전망대를 오르는 여행객들에게 웃어주던 뉴요커들..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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