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 어떤 철학이 담겨야 할지, 어떤 역사적인 맥락과 주변과의 조화가 고려되어야 할지에 대한 많은 문제의식을 불러일으켰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흔히 DDP로 줄여부르는 것 같은 그 건물이다. 사실 이 생뚱맞고 이질적인 건물을 설계한 자하 하디드를

 

둘러싼 논쟁보다는, 원칙적으로 제기되는 건축의 철학성, 역사성, 그리고 주변과의 심미적인 조화에 대한 문제가 과연 한국에

 

현대 건축에 얼마나 배어있는지를 곱씹어보는 게 더 재미있는 것 같다. 그런 기준을 충족시키는 건축이라면, '말하는 건축가'

 

고 정기용 건축가씨의 건축 정도려나. 몰개성한 아파트더미들과 스틸과 유리로만 처바르면 미래지향적이라 생각하는 건물들이 천지다.

 

하여간,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깔고 앉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그래놓고 보호하자는 이 낯짝두꺼운 표지판 보소.

 

 

 

동선이 굉장히 기괴하다고 느꼈는데, 층수와 현재 위치에 대해 계속 헷갈리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위풍당당한 외양에 집중한 건물.

 

음...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아기자기하다거나 눈높이가 낮은 건물은 아니어서, 전시나 슬쩍슬쩍 보고 빠져야 할 듯 하다.

 

아니면 옆에 전태일교에서 노랑리본을 단 채 21세기의 이땅을 바라보는 그 청년의 곁을 지나쳐 동대문 시장통을 거닐거나.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보급판 문고본) - 10점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동아시아

신화란 뭘까. 고대인들에게 신화가 뭔지를 알려면, 신화와 함께 그들이 세계를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프레임을 제공했던 종교와 비교해 보는 게 필요하다. 종교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세계, 삶의 고단함 혹은 무의미함을 버티어낼 수 있는 환타지의 세계를 그려내

왔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 온 대로다. 당위론적이고 목적론적인, 인간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재구성된 세계는 비록 그들에게 맑스가 말한 것과 같은 '마약'이 되어줄지언정 날 것의 현실

세계를 파헤치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대면하고 탐구하는 걸 두고 과학이라고도 하고 철학이라고도 하지만,

저자는 다름아닌 신화에 그 근본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다고 한다. 별들과 자연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라거나 자연의 질서, 인생의 의미 등에 대한 현실적인 통찰력과 분석이 신화 속 은유와 이미지에

담긴 채 후세로 전달되어 왔다는 거다. 그 안에는 먹기 좋게 설탕으로 코팅되거나 듣기 좋게 위로와

소망이 뒤섞인 환상이 존재하지 않으며, 더러는 냉혹하고 잔인하게 인간의 욕망과 어두운 이면까지도

까발리기도 하는 게 신화. 그래서 저자는 아마도 인류의 역사를 '신화 VS 종교'의 큰 그림으로
 
파악하는 것 같다.


이미 고대인들이 폭넓게 공유했던 신화로부터 오늘날 인류가 꽃피운 과학과 철학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 전세계의 신화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복잡한 사유와 사고 논리의 원형이랄 수 있는

것들이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은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신화래봐야 특정 지역의 특정 부족에서나

공유되는 애매모호하고 흐릿한 민담 비스무레한 거겠거나 생각했던 '곰의 자손'이 무식했던 거다. 

일본의 철학자이자 종교학자인 저자는 이에 대해 북아메리카와 유럽, 일본과 아시아의 여러 신화들에서

공유되는 이미지와 상징들이 어떻게 연관되고 동일한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다름아닌 '신데렐라' 이야기.


신데렐라 이야기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전파되기 이전에도 이미 다양한 버전의 이야기로

유럽 곳곳에 남아있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나 뉴기니, 중근동, 심지어

중국에서도 신데렐라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왔다는 건 어떨까. 물론 조금씩의 변형이나

강조점의 차이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야기가 전승되는 사회 배경의 차이라거나 사람들 관심사의

차이에서 비롯될 뿐 신화적 상징과 정연한 사고와 메시지를 분명히 갖고 있다는 거다. 중국에서의

신데렐라, '섭한' 역시 신발 한짝을 놓고 도망나오며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신데렐라 패러디 '누덕누덕

기운듯한 피부의 소녀' 이야기 역시 신발에 대해 세심한 묘사를 공유하고 있는 식으로 말이다.


저자가 그 이야기들을 어떻게 풀어갔는지, 어떤 부분을 주목했는지에 대해서 시시콜콜 반복하는

것보다 책을 읽고 싶은 맘을 동하도록 여백으로 남겨두는 게 나을 거 같다. 다만 다짜고짜 그의

흥미로운 결론으로 점프해 들어가자면, "신데렐라가 춤을 춘 곳은 저승 세계였으며, 그녀가 놓고 간

신발 한 짝은 그녀에게 새겨진 저승세계의 각인이고, 그것을 찾기 위해 왕궁에서 저승사자를 보낸 것"

이란 거다. 글쎄, 이렇게만 적어두면 뭐가 이렇게 황당해, 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로서는 저 결론이 꽤나 합리적이고 일리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더구나 신화라는 것이 갖고 있는

깊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으니, 그 정도로 머릿속을 흔들어놓을 수 있는 책이라면

강력 추천함직 하지 않은가.



또 하나, 요새 이런저런 식으로 동화를 뒤집어 패러디하거나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교정하는 시도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책에서는 정말 제대로 된, 게다가 재미까지 보강한 패러디가 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신데렐라 이야기의 경박함이나 현세적 속물성, 여성의 수동성, 외모지상주의 같은

부분까지 굉장히 비판적인 시각에서 재구성한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이야기는, 그전까지 알아왔던

신데렐라 이야기를 뛰어넘는 깊은 감동을 남긴다. 패러디라기보다는 오히려 신화의 원형에는 훨씬

가깝게 접근한 거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p.s. 검은괭이2님께서 문득 선물해주셨던 책 한 권. 왠지 내가 좋아할 거 같아 검괭이님께서 좋아하는

책을 선물하셨다 했는데, 대체 어딜 보고 그런 판단을 내리신 건지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매우매우

정확한 판단이셨다는. 역시 '웃고 즐기는' 별자리 이야기꾼이신지라, '물병남자'인 내 취향이나 흥미를

잘 파악하고 계셨던 걸까나. 다시한번, 고맙습니다~^-^*




* 알라딘 11월 이달의 TTB에 선정되었습니다.






#0. '장 그르니에'라는 섬에 대한 조각지도.

그의 글들은 쉽지 않다. '글'이라는 것이 뭔가를 묘사하고 구체화하는 거라면, 그의 글은 그의 내면 세계와

사고 과정을 묘사하고 스케치하는데 치중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자칫 난해하다거나 사변적이라는, 어렵게

쓰려고 참 애썼다, 라는 비아냥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의 짧은 단편들은 그의 내면, 그 구석구석에 대한 부분 지도와도 같다.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누구라 생각하는지, 여행이란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행을 왜 떠난다고 생각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런 굵직굵직하고도 근본적이랄 문제들에 대해 '장 그르니에'라는 이름의 섬을 조금씩 드러내는

지도인 것이다.



#1. 묘하게 빨려드는 헛된 유희의 중독성, 삶.

'이것'과 '저것'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게 삶이다. 두 가지 다 영판 아니다 싶고,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런 게 삶"이고, 일정 시간 후에는 죽음으로 흘러가도록 정해져 있다는 건 억지로라도

잊으려 애쓴다. 생일이 다가오면 한 살 더 먹었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뒤집어 살 날이 한 해 줄었구나,

라고 생각해도 안 되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터무니없는 공포심과 터부, 그 이외엔 없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은

'비인간적'이라 거부당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더욱, 유희에 말려들어 덧없는 것 속에서 있지도 않은 것을 찾아 헤매게 되는지 모른다. 이 세상에 항상

좋고 완전한 것이란 없음을 알면서도, 일단 이 세상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악마'의 유혹이 귓전에 맴돌게

되는 거다. "목숨이 붙어 있는데 왜 안 살아? 왜 제일 좋은 걸 안 골라? 왜 좀더 낫게 살지 않아?" 라는. 그말에

따라 달리기를 시작하고 여행을 떠나고. 집 한 채 마련하려고 수십년을 바치고.


니체가 '동일자의 무한반복'이라는 세계의 이미지를 견디어내는 자를 일러 칭했던 '위버멘쉬', '초인'이란

단어는 유사한 현실인식을 궁구하면서도 끝내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장 그르니에에 붙음직한 칭호인지 모른다.

그는, 그렇게 무한한 밀물썰물의 진퇴를 반복하는 세상 가운데에서도 어느 순간 충만함을 맛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무 의미도 없는 파도의 움직임에 문득 의미가 깃드는 순간. 그 한 순간이면 된다. '행복하다'는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는 자는, 어쩌면 그 '한순간'이란 게 생각보다 인생 곳곳에 숨어있음을 알기 때문일지도.



#2. 여행의 대용품, 섬 찾아나서기.

어딘가로 떠난다는 건, 일상의 더께 속에 깊이 파묻혀 있던 감정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툭툭 먼지를 털고

다시금 탱탱하게 충전시키고자 함이다. 그렇지만 장 그르니에의 말을 빌건대, "여행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결국 절대로 끝이 없을 것이고.."

그는 여행이 꼭 필요함을 말하는 동시에, 또 부질없음을 말한다.


더구나 영상 매체와 온갖 미디어를 통해 세상의 낯선 풍경들, 내 멱살을 잡고 흔들어 정신을 번쩍 들게 해줄

그런 풍경들의 파괴력은 반의 반의 반쯤으로 줄어버린 게다. 이미 어디선가 한번쯤 본 풍경, 어디선가

보았던 구도를 답습하고, 꼬리를 문 관광객들의 뒤를 이어 화살표를 따르는 여행이란, (여행을 테마로 했다

주장하는 블로그를 채우려는 사람 입장에선 많이 아이러니하지만) 자칫 티비 다큐멘터리 하나 보는 것만

못한 지루하고 진부한 경험일 수 있다.


다행인 건, 우리 사이엔 아직 신대륙이 남아있다는 것. 남아있는 정도가 아니라 실은 매우매우매우 무궁무진

하다는 것. 장 그르니에의 단편들이 모인 이 단편선의 제목이 '섬'인 이유는, 그가 허무하고 부질없다 느끼는

삶에 애정과 온기, 열정을 불어넣게 되는 이유가 바로 '섬'에 대한 이해, 유대의 욕망이기 때문일 거다. 그는

본질적으로 삶이 무의미하고 공(空)한 것이라는 인식을 양보하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작은 고양이 한 마리,

두 그루의 나무, 한 번의 악수, 어떤 눈길, 그런 것들로 충분히 삶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섬. 점에서 조심스런 말줄임표로, 기어이는 선으로.

김기덕 감독의 '섬',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사람들이 제각기의 해안선으로 외곽을 단단히 둘러친 '섬'같다는

이미지가 단단히 굳어져 버렸다. 망망대해에 혼자만 존재하는 듯 덩그마니 놓여 있는 자그마한 땅덩어리.

사실 그런 이미지는 많은 선인들이 차용했던 것이었고, 그르니에 역시 그 궤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제각기 떠들고는 있지만, 사실 어느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이해받지 못한다는, 게다가 결국은 그 섬에서

굶어 죽던 나이들어 죽던 제각기의 삶을 소진하고 제각기 죽어갈 뿐이라는 식의 이미지.


다만 그는 '섬'이 갖는 폐쇄성, 소통불가능성, 본원적인 고독, 외로움 따위의 이미지에 더해, 그 복수의 '섬들'에

대한 여행의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저기 저 섬, 한번 여행하듯 떠나보지 않을래? 조금씩 지도를 읽어나가듯

이해하고, 소통해보지 않을래? 육체를 먼 곳에 내동댕이치는 여행이 아니라, 지독히도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다른 육체와 정신들에 대해 여행을 떠나보지 않으련, 하고 그는 권하는 것이다.


장 그르니에의 '섬'이란 그래서 동떨어진 하나의 점 같은 것이 아니다. 그 점들이 하나하나 이어져 조심스런

말줄임표로 서로를 탐색하고, 결국은 갸냘픈 '선'에까지 이르러 탄탄하고 의지함직한 '관계'를 만들어가려는

움직임의 시초, 일종의 씨앗. 그에겐 '보로메의 섬'이었던 그것은 아직 서로에 뿌리를 뻗지 못한 우리들이다.



#4. 글쓰기. '섬'으로의 친절한 초대장.

글쓰기란 그래서 내겐, 일종의 '작도(作圖)'다. 2009년 10월 20여일 어디메쯤의 나라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품고 있고, 이런 내면을 갖고 있음을 전하려는 지도 그리기나 다름없다. '블로그'라는 도구가 새로운 양 하여

뭔가 그에 걸맞는 뾰족한 수가 있지 않겠나 했지만, 그건 전혀 핵심을 놓치고 있었다. 블로그가 문제가 아니라,

글쓰기가 문제다. 그러고 나면 온갖 광고성 리뷰와 내키지 않는-고역스럽고 '일'이 되어버리는-포스팅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장 그르니에의 '사변적이고 난해한' 글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거다. 그의 글을 읽는다는 건, 전혀 경험치 못한

하나의 세계, 섬 안으로 걸어들어간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비록 그가 니힐리즘과 실존주의 철학의 역사적

궤적 하의 인물이고, 까뮈를 예비한 인물이란 정도의 배경지식이 있다 해도, 그래서 일정 지역에 몰려 있는

'군도'에 속해 있다 해도 그는 여전히 '섬'인 채로다. 그런 글조차 없었다면 대체 어디에서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또 대체 어디에서부터 그에게 '들어갈' 수 있을까 싶다.



- 10점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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