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전인가, 어느 시사잡지에서 '통인시장'의 상인분들이 미대생들의 재능기부를 받아 각자의 상점을 나름대로

이쁘게 꾸몄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생선가게에는 생선의 테마로 한 참신한 간판이나 장식들이 내걸렸고

옷가게는 옷을 가지고 꾸며서 사람들의 이목과 발길을 붙잡는다는 컨셉이었던 던 거 같은데, 직접 가서 보니

정말 시선을 확 붙잡을 만큼 독특하고 재미있는 것들이 여전히 깔끔하게 손님들을 끌고 있었다.

'여기 속옷집이 있다, 비와이X'. 가게 앞에 속옷만 입은 사람 형상의 판넬이 둥둥 공중부양중이다.

건어물가게, 주렁주렁 엮인 명태가 매달려 있는 옆에는 눈이 부리부리한 오징어가 매달려 있다.

'반찬과 함께 사라지다', 오래된 영화포스터를 연상시키는 간판과 함께 LP판을 활용한 메뉴판.

두부와 콩나물국과 만두, 새하얀 천과 금박이 입혀진 빨간 천이 번갈아 널린 장식이 제법 단정한 분위기.

어느 생선가게, 겨울이라 조금 춥게도 보이지만 생선들이 신선하다는 느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바다수영의 포스.


미용실 앞에 있는...음...용도불명의, 그렇지만 스케일도 그렇고 모양새도 그렇고 딱 미용실을 나타내는 (아마도) 간판.

과일들이 으레 그렇듯 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진열된 것 뿐 아니라, 가게 위쪽에도 맛나보이는 과일들이 그득하다.

어느 분식점, 과자 포장지를 활용해서 찢어붙이기를 한 듯, 곰인형 한마리가 둥둥 떠있다.

어느 고깃집 유리창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댕기머리 총각. 티비를 훔쳐보는 건가 싶은 재미있는 풍경.

생선가게 앞에 '천하대장군'처럼 우뚝 선 물고기 한마리. 심심하게 서 있던 기둥에 표정이 생겼다.

그리고 심심찮게 보이는 SINCE 천구백몇년, 생각보다 연륜이 오랜 가게들이 많이 있었다. 50년이 넘은 떡집도 있고.

자하문길로부터 들어가는 통인시장 입구. 쭉 한길로 이어지는 심플한 시장통이 필운대길쪽까지 뻗어있다.


전통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한번 가서 오뎅 하나 집어먹고 뻥튀기 하나 산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이렇게 시장을 정비하고 꾸미고, 이야기를 얹는 등 다양한 노력이 있어도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이렇게 고객만족센터도 만들고, 통인시장에서 파는 반찬거리나 부식재료로 만든 도시락 까페도 만들어 운영하고,

통인시장은 나름 재래시장으로 살아남고 부흥하기 위한 서비스 마인드와 아이디어가 통통 튀고 있었다.

일회용 우의를 판다는데 포즈는 왜 저리도 시크한지. 우산을 슬쩍 쥐고 있는 두 손가락이나 푹 눌러쓴 모자도 완전 시크하다.

김치마을, 가게 주인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게 '마을'의 분위기가 물씬하다. 통인시장, 통인마을이랄까.

심지어 상점에도 이렇게 손이 많이 들었을 아치가 세워져 있었다. 가게에서 파는 맛소금이니 밀가루니 따위의

포장재를 하트모양으로 잘라서 달아놓으니 뭔가 가게에서부터 하트가 뿅뿅 날아올라가는 분위기.

분식 집 앞에서 방긋 웃으며 손님을 기다리는 김밥 내외.

전집 간판에 달라붙어 놀고 있는 몇몇 살찐 졸라맨 버전의 아이들은 '전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신발이 전시된 모양 그대로 이미 이쁘단 느낌을 자아내는 신발가게의 간판은 화려한 색감을 더했다.

식당의 메뉴가 그림과 글씨가 묘하게 뒤섞인 캘리그라피로 문짝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떡집의 '떡'자는 화려한 꽃그림으로 치장이 되어 시선을 붙잡는다.

어느 만두집 간판 위에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감긴 레이스를 잡아 떼어서 돌돌 뭉쳐만든 듯한 고양이가 한마리.

과일가게의 하얀 벽면에는 제법 섬세한 필치로 그려진 과일나무가 한 그루.

무와 배추와 양파를 파는 가게에는 허공에 무가 매달려 있는가 하면 가스통은 꽃무늬 옷을 입은 배추아줌마로 변신했다.

옷 수선점의 간판은, 크고 작은 각종 모양의 실패를 이어달아서 커튼처럼 드리웠다.


필운대길쪽으로 빠지는 통인시장의 입구. 천장이 유리 지붕으로 덮여있는 아케이드 형태인지라 날씨가 궂거나 춥거나

비가 오는 날에도 살짝 들어가서 둘러보기 좋은 재래시장이다. 아이디어가 통통 튀는 통인시장.




퇴근길에 선릉역 앞, 어느 아저씨가 가로수처럼 위장하고 얼음, 한 채 서 있었다. 아무래도 시선이 쏠리는

옷차림에 어색스런 쭈뼛거림인지라 가만히 주위 지형지물을 살피니 옆에 나즈막한 잡지 매대를 세워두고

같이 얼음, 하고 있었던 거다. 지하철 바닥에 닭둘기 털날리듯 쏟아져내리는 무가지 중 하나겠거니, 하고

심상히 지나가려다가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저게 혹시 그건가.

비닐에 한부씩 곱게 싸인 채 주인을 기다리던 몇 권의 잡지들 앞에는 골판지에 유성매직으로 '빅이슈3,000원'이라

적혀 있었다. 냉큼 삼천원을 꺼내들고는 아저씨에게 '땡-!'을 외치며 잡지를 건네받고는 예상보다 얄포름한

그 두께에 놀랬고, 또 한부씩 비닐포장되어 있음에 놀랬다.

빅이슈코리아, 뭐라더라...홈리스들, 그러니까 한국에서 흔히 '노숙자'라 불리는 사람들의 재활과 자립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잡지라고 얼핏 들었던 기억이 있다. 외국에서 이미 존재하는 잡지가 한국에도 이제 창간되었다는

소식에 살짝 궁금증이 일었었고, 보통 사람들로부터 '재능'을 기부받아 컨텐츠를 채운다는 이야기에 조금 더

살짝 궁금증이 동했었다. 표지에 No.002라고 적힌 걸 보니 이번달로 두번째 발간했나보다.


그나저나, 표지모델은 정말 노숙자를 모델로 삼아서 사진을 찍은 걸까 아님 누군가가 분장을 한 걸까. 시선을

확 잡아끄는 데는 확실히 성공한 듯 하다. 취직했단 건, 빅이슈코리아에 취직했단 걸까. 여러 궁금증이 몽실몽실.

표지 아래쪽에는 잡지값 3,000원 가운데 1,600원이 홈리스에게 간다는 안내문구가 씌여 있었다. 그래, 표지포함

고작 36페이지 짜리 잡지가 삼천원이나 할 리는 없을 줄 알았지만, 뭔가 절반 이상 이렇게 의미있게 쓰이는 건

내 기꺼이 뿌듯하게 인정할 수 있다.

이번 달 빅이슈의 '스타 스토리'는 안젤리나 졸리. 빅이슈 영국 북부판, 그리고 빅이슈 일본판에서 제공한 컨텐츠를

한국에서 번역하고 살짝 글을 얹은 기사였다. 자신의 영화를 홍보하러 한국에 왔던 졸리는 기자회견석상에서

"수차례 '빅이슈'의 무료 표지모델을 했다"고 밝혔다던데, 이왕임 컨텐츠 자체가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면 더욱

의미심장했을 듯. 이런 재능을 기부하는 기자는 없는 걸까. (졸리도 만나고 사진도 찍고 겸사겸사, 나라도 좋다면.ㅋ)

세계의 빅이슈 중 하나, 영국의 '빅이슈'에서는 빅이슈코리아가 한국에서 드디어 창간되었음을 알리며 무려

네 페이지나 할애하는 관심을 보였다고. 오...영국에서도 이 잡지는 서른여섯 페이지일까. 글탐 정말 굉장한 비중.

잡지를 슬슬 보다가 눈에 띈 건 빅이슈코리아 자립지원 프로그램, 그 중에서도 돈 드는 거 말고, 자원봉사 교육

지원이라거나 전문 재능기부 봉사단 모집이라거나..그런 것들에 눈이 휙휙 꽂혔다. 오...재미있겠다...!!!

나도 뭔가 할 수 있는 거 없을까, 싶은 생각이 마구마구.

몇 가지 재미있던 꼭지들, 이라기보다는 사고(社告)가 맞겠다. 빅판 도우미를 모집한댄다. 자원봉사인증서도

발급해 준다는데, 아직 방학 중인 학생들 괜찮지 않을까 싶다. 한 달도 안 되어 사천부 가까이 팔려나간 잡지면

꽤나 준수한 성적이지 않나. 앞으로 더욱 많이 팔려나가면 좋을 거 같다.


'빅이슈 판매사원'이라는 게 아까 선릉역 앞에서 만났던 '얼음땡' 놀이 중이시던 아저씨같은 분들일 텐데,

아무래도 조금씩 익숙해지다 보면 조금은 더 신나게 판매하실 수 있을 거라 기대도 된다.

그런 분들의 행동수칙도 잡지에 떡하니 적혀있다. 음주나 흡연 중 빅이슈를 팔지 않는다, 미소를 지으며 당당히

고개를 들겠다, 하루 수익의 50%는 저축한다...사소해 보이지만 정말 그분들을 위한 세심한 조항들인 거 같다.

아무래도 궁금해져서 홈페이지를 검색했다. http://www.bigissue.kr/

'빅이슈'로 찾았더니 더불어 뜨는 연관검색어는 '노숙자 잡지', '빅판(빅이슈 판매사원)' 등이다.

그저 어렴풋이 노숙자를 돕는 잡지겠거니, 혹은 노숙자가 만드는 잡지겠거니 더듬어 생각했을 뿐이었다. 근데

사실은 이런 메커니즘으로 노숙자들의 자립을 돕고 있었던 것. 우선 10권을 무료제공하면서 시작되는 수레바퀴는

그분들의 주거와 주소를 확보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찾는데까지 나아가는 거다.


빅이슈코리아는 이런 잡지라는 내용, "재능 있는 청년이 만들고 홈리스가 판매하는 소셜 엔터테인먼트 매거진'을

추구한다는 내용이다. 지속적으로 노숙자들의 목소리를 담는데 노력하며, 동시에 일반 독자들의 관심분야까지

아우르겠다는 그들의 비전은 사실 조금 이상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일반 독자들의 컨텐츠 참여나

봉사활동이 필요한 거겠지만.

8월호를 훑어본 느낌은, 날것의 느낌이 있긴 하지만 굉장히 신선하고 발랄하다는 것. 아직 2호밖에 안 되었는데도

나름의 체계가 잡혀가는 것 같고, 독자들의 피드백도 꽤나 열렬한 듯 하다. 기분 좋은 일이다.

Working! Not Begging! 한때 홈리스였던 사람들이 '커밍아웃'을 해서 '빅이슈 판매사원'으로 얼음땡 놀이부터

시작한다는 건 정말이지 꽤나 의미심장한 출발선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이 잡지로 수많은

노숙자들이 전부 자립할 수 있게 된다거나 그들의 삶의 질이 비약적으로 도약하리라 믿지는 않지만, 그건

정말 굉장히 과도하고 불공평한 기대지만, 그래도 노숙자들의 목소리와 움직임이 하루하루 스러져 버리는 게

아니라 이렇게 활자화되고 남아서 사람들 사이에 유통된다는 게 대단하다.

이번 호 기사 중에 제일 재미있었던 것, 꼭 그렇다고 내가 '이래도 안 볼테냐'하고 들이대는 건 아니다. 그치만

뭐, 다이어트나 교육 관련 이슈에 대한 조금 '섹시한' 컨텐츠가 뜨면 단숨에 각종 포털 사이트 대문에 큼지막히

걸리는 상황이니, 이정도 매력적인 제목의 다이어트 기사라면 어디 한번 사보고 싶은 맘이 솔솔 들지 않으려나.


무려 '누드 셀카놀이 다이어트' 비법이란 말이다. 당장 선릉역 8번 출구 앞으로 뛰어가시길. 혹은

홈페이지 (http://www.bigissue.kr/)로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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