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호 근처 '바우길'을 걷다가 발견한 보도블록 위의 잔혹한 그림, 무려 몸통이 잘려나갔다. 싹둑.


아마 어른 한사람과 뒤를 따르는 아이 한사람이 열심히 걷고 있는 그림이었던 거 같은데, 애초

인도의 보도블록 위에 저런 그림을 굳이 왜 그려놓았어야 했는지가 한가지 의문.


그리고 대체 우리나라는 보도블록을 왜 그리도 시도때도 없이 바꿔대는지가 두번째 의문, 멀쩡한

블록을 세금 소진하려고 바꾼다는 비난이 이어지니깐 요샌 아예 블록 자체를 불량으로 사는 거 같달까.


그리고 여하간 블록을 일부만 교체해서 저렇게 험한 결과물이 남았다면 왜 마저 그려넣지

않은 걸까, 세번째 질문. 담당자가 달랐으려나, 나머지도 마저 철거하려나, 뭘까.








이런 스토리로 빠질 줄은 몰랐다. 청소년보호법의 존재로 인해 유명무실한 처벌을 받을 뿐인 아이들의

범죄에 대해서 피해자의 어머니이자 가해자의 선생님인 그녀가 나름의 방식으로 응징을 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예고편 따위를 통해 접했던 이야기의 얼개였다. 그 응징이 왠지 풋풋하고 발랄한 식으로

내려지리라는 건, 어른이자 선생님이 어린이이자 학생에게 내리는 벌이리라는 안이한 기대에 더해

주연배우 마츠 다카코의 여성스럽고 선한 이목구비 때문이었던 거 같다.


영화는 계속해서 내달렸다, 이런 내 안이한 예상치를 훌쩍훌쩍 여유롭게 뛰어넘으며. 학생들이 점령한

무질서하고 소란스런 교실을 거닐며 종업식을 진행하는 시종 무기력한 그녀의 이미지도, 그녀의

아이를 죽인 살인자  A와 B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순간도, 그 살인자들에 AIDS환자의 혈액을 섞은

우유를 먹였다고 그녀가 폭로하는 순간도, 끝내 막장까지 내몰리는 살인자 두 명의 지옥과도 같은

일상의 묘사도, 그리고 등장인물들 제각기의 고백에서 수시로 번뜩거리는 가학과 살인의 충동까지.


그런 충격은, 물론 조밀하고 탄탄한 스토리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어린이', 혹은 '청소년'에 대해

한수 접어두던 사회적인 태도 탓이 큰 거 같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비슷하게,

그들을 아직 스스로의 의지와 사고를 통제하지 못하는 판단력 부족한 미완성의 인간으로 보거나,

아직 인간의 덕목이나 인간성을 다 갖추지 못한 한정치산의 존재로 보는 시각이랄까. 덕분에 그들은

'계도'나 '훈육'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동시에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도 제한된 책임만 지는 거다.


근데 영화에서 그려진 그들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아이들 중 일부는

작고 어리지만 이미 활짝 피어난 어른, 악인일 뿐이지 꽃봉오리나 씨앗의 무궁한 잠재력을 품은

'청소년'의 이미지와는 전혀 동떨어진 거다. 글쎄, 그런 아이도 있을 수 있겠다 싶다. 아이라고 해서

모두 선하고 순진무구하기를 바라는 건 어른들의 퇴행적인 로망, 자신들 멋대로 꾸며내고 믿고

싶어하는 신화니까. 아이들도 결국 백인백색이라는 사람과 같은 종(種)인 바에야 당연할지도.


영화가 딱히 '어린이는 조그만 어른이나 마찬가지'라고 강변하려는 건 아닌 거 같다. 다만 그런

악마적인 아이의 범죄와 맞닥뜨렸을 때 어디까지 잔혹하고 또 잔인한 복수가 이뤄질 수 있을지

극한까지 내달리고 싶었던 거 같다. 거의 면책에 가까운 특권을 가진 아이들의 악의적이고

의식적인 범죄로 삶이 망가져버린 사람이, 그 아이들의 흉포하고 잔인한 인간적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 반들거리는 눈빛을 마주하고 난다면 어떻게 변할까. 어떻게 복수할까.


두 살인마에게 복수를 마치고, 그녀의 마지막 대사가 굉장히 섬뜩했다. 이제 아무 희망도

남지 않은 절망의 구렁텅이를 느껴봐, 거기서부터 갱생이 시작되는 거야. 아니, 장난이야.

대충 이런 식의 이야기. 절망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삶이 온통 부서지고 난 이후에는, 갱생이고

뭐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폐허만 계속되었다는 그녀의 고백. 그리고 또 너 역시 그런 폐허를

거닐게 될 거라는 처절한 저주. '파리대왕'과 '올드보이'의 교집합, 그 어딘가쯤 이 영화가 있다.




이웃 띠보님께서 [이벤트] 14회 한겨레문학상 <열외인종 잔혹사> 리뷰어 모집이란 포스팅에 "예쁘게 귀엽게 섹시하게
 
당황스럽게 유머러스한 댓글"
을 달면 '열외인종 잔혹사'라는 책을 배려해 주시겠다 하였다. 전혀 예쁘지도 귀엽지도

섹시하지도 당황스럽지도-아마 1그램쯤 당황스러우셨을까-유머러스하지도 않은 댓글을 달았지만, 경쟁률이 1:1이 되지
 
않았던 예기치 못한(나로서는 기적적인!) 사정이 도래하여 책을 받아 보았다. 봉투에 찍힌 도깨비 그림 도장이 귀엽다.


이야기는 단숨에 읽혔다. 책을 받아보고 잠시 몇장 펼쳐볼까 했던 게, 세네 시간만에 다 읽어버렸다. 그런데 읽고 나니

뭐랄까..너무 허했다. 이야기의 구조나 전개가 무슨 골다공증 마냥 구멍 숭숭 뚫린 엉성한 모양새여서가 아니라, 아주

매력적이고 스피디하며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은 지독하고 잔혹한 현실에 대한 지독한 은유였기 때문이다.


뫼비우스 띠의 앞면.

주위에서 너무 쉽고 익숙하게 접하던 캐릭터와 공간들에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천만명이 사는 서울에선 딱히 희소할 것도 없는 10대 불량청소년 하나, 눈에 밟히고 발에 채이는 30대 남성노숙자 하나,

고만고만한 대학을 나와 인턴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며 수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정규직이 되려는 20대 여성 하나와

매일 군복을 갖춰입고 탑골공원에서 온갖 빨갱이들이 등장하는 시국연설에 열을 올리는 60대 할아버지 하나라는 등장

인물들 말이다. 그리고 마치 길안내하듯 자세하게 그려지는 압구정역 3번 출구 옆 맥도널드와 코엑스 배스킨라빈스와

푸드코트, 혹은 홍제동과 독립문역의 풍경까지.


어쩌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들이다. 노숙자에, 구직자에, 완고한-시니컬하게 표현하자면 '시대의 부산물'이랄-

친미보수우익 노인네, 그리고 번쩍거리며 재탄생한 용산역과 한국 자본주의경제의 상징, 코엑스몰과 압구정까지.

코엑스몰은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잊지 않고 순례하는 명소 중 하나로 자리잡은 지 오래기도 하다.


그런 공간이 어느 순간 전쟁터로 변한다. 방화용셔터가 전부 내려가 외부로부터 격리되며, 대량의 인질극이 발생하고,

여차하면 당겨진 방아쇠로 많은 사람들이 총살당하는 공간이 되는 순간, 내가 아는 구체적인 지역에서 벌어진다는

생생한 현실감에 되려 서늘한 날이 서면서 그 공간이 낯설어진다. 어라. 마찬가지다. 지하철 안에서, 혹은 버스 안에서

한번쯤 마주쳤을 동시대인들이 문득 괴물같은 상황에 떠밀려 '모처럼 심장터져라 뛰는' 지경에 이른다. 낯설다.

그러고 보니 저렇게 아드레날린이 폭주하는 상황이란 건 얼마나 드문 상황인가. 머리끝까지 열이 뻗치거나 강렬한
 
열망에 의해 쉼없이 뛰어다니는 상황이라는 건. 혹은 스스로의 괴물같은 내면을 마주하게 되는 건.

"뭐 이런 카니발도 나쁘진 않네요. 사람 죽어나가는 게 좀 끔찍하긴 해도, 서울에서 하루에도 수백명씩 교통사고와 암으로 송장이 되어 죽어나가는데 이깟게 뭐 대수겠어요.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뭐랄까? 이번 정규직 사원 인사 발탁 건 말이에요. 음..."


뫼비우스 띠의 뒷면.

연미복에 양머리를 뒤집어쓴 '최악'의 멤버들. 양털이 복슬복슬한 그 양머리는 단정하지만 과장스런 연미복 차림과

기괴한 매치를 이루며 왠지 이 땅위에 있어서는 안 될, 혹은 있으리라 상상할 수 없는 기괴한 생명체로 나타난다.

그들의 '양머리 카니발'이란 게 시작되는 순간 더더욱 비현실적으로 변해가는 공간. 노숙자들의 서툰 쿠데타가

가십처럼 벌어졌던 용산역에서처럼, 그치만 그보다 훨씬 강력하고 전면적으로 세상이 낯설어진다.


그런 낯선 것들은 어느 순간 온전한 지금 이대로의 모습과 겹쳐져 보이니 또 이상한 노릇이다. 양머리를 뒤집어

쓰고 사방에 총을 난사하는 그들, 그리고 그들의 잔혹한 살인행위와 웅얼대는 혁명선언도 묘한 기시감을 수반한다.

그러다 보면 번쩍이는 은빛 총을 움켜쥐고 양머리들을 하나씩 쓰러뜨리는 게임중독 10대 청소년이 양머리들보다

괴물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에 봉착하기도 하고, 양머리들의 난동이 되려 인간적이랄까, 안쓰럽달까, 그런

동정 혹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게다.

"그런데 우리들은 모두 양머리들뿐이야. 목자가 없어. 그래서 불안해지기 시작한 거지. 모든 게 혼란스러웠어. 그래서 우리는 목자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지. 그런데 왠걸. 우리가 목자라고 믿고 싶던 대상들이 하나같이 우리의 기대를 배반했어. 또 어떤 얼어 죽을 사이비 목자들은 우리를 썩은 오물통 속으로 밀어넣기도 하고 말이야."


띠의 앞면에도, 뒷면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 "열외인종"

그렇게 띠의 앞면과 뒷면, 각기의 흐름을 타고 일상에서 비일상을, 비일상에서 일상을 퍼올리던 흐름은 어느순간

하나로 합쳐진다. 그야말로 뫼비우스 띠처럼. 양머리를 쓴 노숙자는 더이상 띠의 앞면에도, 뒷면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가 낑낑대며 끌어올렸을 거대한 돌덩이가 거친 소리와 함께 산비탈을 달려내려가듯

차라리 호쾌하게 내려닫는 이야기의 결말이라니. 그전까지 가벼운 조증에 걸린 듯 시니컬하면서도 신나게

이야기하던 화자는 갑작스레 브레이크를 밟고는 완전히 시니컬해진다. 혹은 어리둥절해하는 독자를 보며

가학적인 쾌감이라도 느끼듯, 돌연 잔혹하고도 엄연한 현실을 불러낸다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제의 일을 다 알고 있다!"라는 외침. 그 외침이 누구의 관심도, 누군가로부터의 반향도 얻지 못하고

헛헛하게 공중을 맴돌다 사라져버리는 기분은 어떨까. 아니 사실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10대, 20대, 30대,

아니 세대를 막론하고 뭔가 스스로의 의지나 행위와는 달리 제알아서 돌아가고 있는 거대한 세상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당장 치솟는 어리둥절함과 분연한 의기, 그 뒤를 바싹 좇는 무기력감과 소외감, 억울함과

열패감까지. 이런 결말이라니 잔혹하다. 이런 세상이란 걸 깨닫게 해주는 이런 결말이라서 잔혹하다.

"어떻게 천만 인구가 아웅다웅 모여사는 서울특별시에서 적어도 오십 명 이상 죽어나간 이 대대적인 인질극에 대해 한마디도 없냔 말이다. 별 볼일 없는 연예인 부부의 이혼 소식조차 탑 이슈로 보도하는 이 판국에."


열외인종 잔혹사 - 10점
주원규 지음/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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