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바이 시내를 돌아보며 심심찮게 부딪혔던 '물차'. 식수로 마실 수 없는 짠물이 아니라, 식용이나 생활용수로

쓸 수 있는 'sweet water'를 운송하는 차들은 한국의 유조차에 비길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의 유조차,

두바이의 식수차.

무슨 카레이싱 트랙처럼 하얗고 꺼멓고 번갈아가며 칠해진 보도블럭도 눈에 띄었지만, 그야말로 앙상하다는

느낌 그대로 듬성듬성 뜯겨진 머리칼처럼 빨강노랑꽃들이 피어난 화단이란 참.

자세히 보면 물을 공급하는 호스가 요리조리 보일러 배관처럼 화단을 커버하고 있고, 그 근처에 바싹 붙어선

운좋은 몇몇의 식물들만 꽃봉오리까지 피워낼 수 있었던 거다. 아마도 쉴새없이 저 호스로 쫄쫄쫄 물을

공급하면서 겨우 꽃들을 보듬고 있겠지.

그럴듯한 외관을 갖춘 건물 옆을 지나.

어디선가 옆에 바싹 붙어섰던 버스는 뿌연 먼지가 온통 차안으로 들어갈만큼 활짝 창문을 열어놓고 조그맣고

낡은 선풍기를 차안에서 돌리고 있었다. 고개를 완전히 팩 꺽은 채 졸고 있는, 피곤해 보이는 이주노동자.

두바이는 외국의 자본으로 지어진 옷을 입고, 외국의 노동으로 팔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것도, 도로를 청소하는 것도, 거리의 경찰같은 하급공무원도, 심지어 기업을 움직이기

위한 실무진조차 모두 외국에서 수혈되어 온 노동자들이다. 호텔의 웨이터도, 쉐프도, 호텔리어도 마찬가지.

한국에서 심심찮게 두바이 어느 호텔 근무 경력의 누구누구, 보이는 게 당연하달 수도 있는 거다.

운하도 만든 두바이. 바닷물이 들어온 거라고 설핏 들은 거 같다. 학교 다닐 때 교수님이 두바이는 하수처리

시설이니 하수배관시설이 전혀 되어있지 않아 장기적으로 자생능력이 없는 도시라고 말했던 거 같은데,

실제로 두바이 건물들은 거의 지하를 파들어가지 않고 하수배관이나 처리시설이 없어 조금이라도 비가 오면

바로 휴교령이 내려지고 도로가 온통 물바다가 된다고 한다. 최근 기후변화로 인해 예전에 비해 비가 더욱

자주, 많이 내리고 있어 이후로는 더욱 불편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뭔가 했다. 굉장히 '퓨처리스틱'해보이는 디자인의 시설물이었다. 뭔가 했더니, 전철이랜다. 여행으로 다니면

한번 실제로 타보기도 하고 그럴 텐데, 눈으로만 볼 수 밖에. 들은 바에 따르자면, 1등급칸과 2등급칸으로

나뉘어 있어 돈많은 사람은 비싸게 주고 여유롭고 쾌적한 칸에 탑승하고, 돈이 없으면 퀘퀘한 냄새와 땀냄새가

뒤섞인 바글대는 공간을 버텨내야 한다고 한다. 가격 차이도 꽤나 크다던가.

두바이의 국기를 형상화한 지하도로의 벽면그림.

다시 한번 지나치게 되었던 전철역. 딱딱하고 반짝거리는 껍데기를 가진 거대한 곤충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애벌레같기도 한 형태가 시선을 붙잡았다.



참 요란스런 껍데기다. 중국에서 판매속도가 가장 빠르다느니, 수백만 매체가 어떻고 몇십주동안 1위가 어떻고.

빌게이츠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는 규모의 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로스차일드가문이 세계 금융을 쥐고 흔든지

어언 이백여년이 되었다거나, 링컨과 케네디의 암살, 미국의 남북전쟁, 심지어는 유럽의 전쟁들과 1, 2차

세계대전까지도 그들 일부 '배후세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했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이런 식의

허무맹랑한 음모론은 이런 식의 의문을 낳는다.




그런 음모론에 경도된 책의 앞머리 절반쯤을 읽으며 한 댓번은 "그래서 어쩌라규~"를 외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불태환화폐가 고작 몇십년의 역사밖에 지니지 못한, 아주 특이한 경우임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듯 하다. 태초부터 그랬던 듯 단단하고 완전무결해 보이던 지금의

시스템이 실은 역사적인 구조물에 불과하다는 인식, 그리고 변경가능하다는 상상력의 자극. 그게 지금 시스템의

문제점을 바꾸는 단초일 테니까.


지은이가 말하는 대로, 금본위제가 폐지되고 은행들의 지급준비금제도에 기댄 불태환화폐제도가 그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돈'을 출현시켰다. 금이나 은과 같은 진정한 부(wealth)를 증거하는 화폐가 아니라, 은행으로부터

액면가만큼을 빌렸음을 의미하는 차용증서로서의 화폐. 그리고 그러한 화폐의 발행이 점차 팽창하면서 이른바

'인플레이션 택스(Inflation Tax)' [각주:1]효과로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며, 그에 더해 전지전능한 '그들'의 입맛에

맞는 타이밍과 성과를 기한 세계적 차원의 경기변동이 유도되어 특정국의 자산과 부를 고스란히 가로챈다고 한다.

그게 지은이가 말하는 '양털깍기'의 의미이다. 경제가 호황을 이루고 급속한 성장을 이루다가, 어느 순간 거품이

잔뜩 끼었다 싶을 때 훌떡 경제를 말아버리고는 싼값에 주요 기간산업과 기업들을 차지하는 것.


결국 이 책의 요지는, 제9장 달러의 급소와 금의 일양지 무공, 그리고 제10장 긴 안목을 가진 자, 요 두 챕터에 전부
 
담겨 있는 듯하다.(제목도 참...중국스럽다.) 중국이 금융시장을 개방하기 전에, 황금에 기반한 화폐제도로 조금씩

위안화를 바꾸어나가며 미국의 국채나 달러 대신 금을 중국내에 쌓아두라고. 그렇게 서서히 세계의 기축통화로

등극해서 중국이 다시금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워낸 패권국으로 등장하라는 민족주의적 메시지다.


근데, 한국의 경제위기 당시에도 나왔던 이야기지만 국내자본과 해외자본이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지은이는

'중국'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중국 내의 금융자본도 역시 자기증식을 통한 이윤 추구라는 논리에 충실할 뿐 아닐까.

지금이야 세계 금융시장에서 수세를 점하고 있기에 방어에 급급할 뿐이지만 그들 역시 언제든 '로스차일드가문'이

그랬듯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바꾸고 국가를 변형시킬 집단인 거다. 그러니까 거기에서는 '국내자본' 대

'해외자본'의 구도 혹은 '중국' 대 '외부의 적'의 구도라기보다는, '공공영역의 수호자인(여야 하는) 정부' 대

'자본'의 구도가 더 설득력있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금태환화폐 시스템으로 변환시키기 위해서라도, 중국 내

자본과 협력하는 것보다는 타국 정부들과의 협조가 더욱 중요하고 효과적일 것 같다.


하나 더, 중국은 패권국을 추구한다고 치고, 한국에는 어떠한 함의가 있는 걸까. 이책. 중국 정도 되는 나라니까

외부 금융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던, 로스차일드가문이 전세계를 집어삼키겠다고 음모를 꾸미던 말던 그에 대항해서

뭔가 해보려고 하는 거지, 우리 나라는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중국에서야 이 책이 뭔가 대국인으로서의 역사적

책무라거나 괜히 어깨 으쓱하는 사명감을 느끼게 했을지 몰라도, 그래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해도, 한국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태환화폐 시스템의 역사적 형성과정이나 그 문제점들이란 건, 사실

이 책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많이 접할 수 있을 텐데...? 한국의 CEO들이 추천하는 책이라는데 왜 그럴까.

왠지 Snob effect란 단어가 오랜만에 떠오르는 듯.ㅋ


화폐전쟁 - 6점
쑹훙빙 지음, 차혜정 옮김, 박한진 감수/랜덤하우스코리아







  1. 인플레이션 택스(Inflation Tax)란 내가 기억하는 한도내에서 설명해 보자면 이런 거다. 화폐공급량이 늘어나 물가가 상승하게 되면 보유하고 있던 자산의 가치가 하락하게 되는데, 그 자산의 하락한 가치분만큼을 화폐발행의 책임이 있는 정부에 세금으로 낸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정부가 초래한 인플레이션에 따라 사람들의 부가 스물스물 정부로 이전되는 효과랄까. [본문으로]

김수행 교수님의 아카데미시즘

김수행 교수님은 아직 상대평가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부터 수강생들에게 엄격한 학사관리를 한다는

평판이 높았다. 수업에서 듣는 내용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다고 생각했던 일부 사회대 학생들은 이른바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님께서 그런 것도 몰라주고 엄격한 출결관리와 냉정하고 야박한 학점을

고수하는 데에 섭섭함을 느끼기도 했었지만, 사실 '상대평가'와 '사회주의적 가치'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할 이유 따위는 찾지 못했었다. 교수님은 특히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하고자 수업을 듣는 학생이라면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씀했었다.


이 책에서 교수님은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명확히 고백한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자면 자신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탐색을 하는 데서 그칠 뿐, 예컨대 '김수행노믹스' 식의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현실

정책이나 개별 사안에 대한 디테일한 평가가 가능할 만큼 공부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는 것. 지승호와

인터뷰할 때의 교수님은 때로는 시사 이슈에 대한 대중적 이해 수준에 머물거나, 혹은 솔직히 '그 부분은

공부를 안 해서 모르겠다'고 한 발 물러선다. 농업 경제학의 문제, 영국 복지정책 후퇴에 대한 해석의 문제..


그렇지만 한국 사회와 같은 황량한 지형에서 '자본론'에 기대어 한국경제를 읽어낼 만큼의 공력이 있는

경제학자가 있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김수행 교수님에게 구체적인 경제정책을 내놓으라거나,

혹은 개별 사안에 대한 입장과 논평을 요청하는 건, 일개인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선,

서울대학교에서조차, 그분의 퇴임과 함께 마르크스 경제학은 주류 계량경제학의 틈바구니에서 또다시

밀려나 버리는 상황인 거다.


자본론의 부활을 말할 때

누군가 진보 세력의 특징은 개인이나 요소가 아닌 구조와 동학을 주목하고, 반대로 보수 세력의 특징은

개인과 요소에 우선적인 책임과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동의하는 말이다. 맑스도 그랬지만

김수행 교수도 개별 사안이 아닌 구조 자체를 천착하고 있다. 케인즈도 '구성의 모순'이라며 개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전체로서의 합리적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을 했으니, 꼭 빨갱이만 구조적

모순과 시스템의 불합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아닐 거다.


실제로 주류 경제학이 'Ceteris Paribus'(다른 모든 조건이 일정하다면)이라는 비현실적 전제 하에서 완전

경쟁을 상정하는 것과 달리 정부가 시장판 자체를 유지, 존속시키는 역사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가능성을 최소한 이전에 그랬듯 지금 굴러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반성적

역할에 한정하더라도, 시장의 역사성이나 생산의 원천 및 분배에 대해 풍요로운 시사점을 충분히 던질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마르크스와 그의 경제학을 아예 도외시하고 있는게 문제다.


90년대 'IT 경제' 혹은 '지식경제'가 유행하면서 실물경제의 중요성이 약화되었다느니, 노동-자본의 구도

자체가 무화되었다느니, 혹은 비정규직 문제가 주목받으면서 '노동'을 덩어리로 보는 기존 시각과

맑시즘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느니 많은 지적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금융경제의 거품이

급속히 꺼져들어가는 세상에서 맑스와 김수행 교수가 주목하는 날것의 구조와 시스템, 실물 경제 그리고

강고한 노동-자본의 구도는 요요히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미상 열려있고 내용이 굳어지지 않은 '새로운 사회'

김수행 교수님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일으키는 종말론적인, 목적론적인 '닫힌 미래'를 항상

경계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에 '조응'한다고 했던, 그 '조응'이라는 애매한 단어에

기대어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식, 그러니까 경제가 발전하면 자연히 사회가 발전한다는 식의

'경제주의'도 경계하고자 했던 교수님은, 그래서 '새로운 사회'를 말한다.


그건 어떻게 올 지, 어떠한 형태가 될 지, 언제 올 지 아무도 모른다. 마르크스도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그의 단편적인 아이디어들을 여기저기 흘리고 있을 뿐, 기계적인 도식 따위 그린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는 건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교수님도 이야기하듯)

새로운 사회를 그릴 수 있는 상상력과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런 면에서 책 마지막 장의 우석훈교수가

말했던 좌파 경제학의 정의가 와닿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지키는 것은 (주류)개발경제학이고, 말 못하는

사람-소외 받은 쪽이나 소수자나 약자들-을 지키는 것이 좌파경제학이라는 이야기.


얼마 전 만났던 기자 선배가 했던 이야기가 오버랩되었다. 자신이 되고 싶은 기자란 건, 항상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는 기자라고. 그렇게 지금 사회의 약자들을 지키고 그들과 함께 보고 이야기하면서

문제를 가다듬어 나가고, 또 그에 대한 반응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첩경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이미 그 의미와 내용이 가득 차 굳어버렸거나, 심지어

오염되어 버린 면이 없지 않다.


남북 경협에 대한 새로운 시각, 그러나.

개성에 출장을 다녀오면서 느꼈던 것이지만, 남북 경협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개성공단에 진출한 기업들은 남북관계가 너무 호전되면 임금이 인상되고 노동자 관리하기도 힘들거라

염려하고 있었다. (물론 이는 지금처럼 최악으로 경색되기 이전의 '배부른 고민'이었다.) 김수행 교수도
 
지금과 같은 식으로 투자해서 바로 자본주의적 이윤만을 좇는, 값싼 노동력만을 착취하는 경협은

별 의미도 없고 남북통일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물론 경협 자체만으로도 남북간 합작의 훈련이 될 수 있고, 자본주의의 이식을 위한 훌륭한 시험대가

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 반대편 시각과 그 근거에 대해서도 충분히 논의해 볼 만한 내용 아닌가.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데 필요한 훌륭한 자극이 될 수 있는 꼬투리가 될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그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여전히 웃기지도 않는 '불온도서' 운운하는 세력이 굳건하다.


덧붙임. 인터뷰의 미학.

마구잡이로 치고 빠지는 '합이 짜이지 않은' 날것의 싸움이 막장으로 가는 개싸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그럴 듯해 보이거나 심지어 아름다워 보이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액션 영화나, 토론회, 혹은

'리얼'을 표방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조차 기본적인 '합'을 짜두기 마련이다. 내가 이렇게 치면

넌 이렇게 막고, 니가 이렇게 반격하면 난 저렇게 피한다는 식의 '합' 말이다.


지승호와 김수행의 질문과 답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김빠진 문답도 아니었지만, 어느 한쪽의 기세가

등등한 위압적인 문답도 아니었다. 둘다 최선을 다해 질문하고, 최선을 다해 답하고 있다는 느낌, 

그들은 질문과 답을 함께 만들고 있었다. '합'을 미리 짜두어서라기보다는, 서로가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충실히 알고, 또 아는 것을 최대한 노이즈없게 전달할 만큼 충실히 숙성시킨 사람들이어서 그런 게다.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 - 10점
김수행 지음, 지승호 인터뷰/시대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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