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바람이 불어닥치는 여름의 문짝이 활짝 열린 것만 같던 5월초의 어느 일요일.

 

광화문광장에서 쫄쫄거리고 흘러내리는 물가에 아예 두다리 걷어붙이고 뛰어든 아이들. 

 

 무릎 위까지 걷어젖혔으니 저렇게 잘박거리는 물에는 젖을 리가 없을 텐데, 아이들은 놀라운 존재.

 

아이들 따라 두발 벗고 물장구치며 놀고 싶던 마음이 순간 들었지만 꾸욱 눌러 한턴 쉬고.

 

어디선가 뾰롱뾰롱 비눗방울이 날아오면 손으로던 발로던 터뜨리지 않고선 참아낼 재간이 없다.

 

물가에 철퍽 뛰어드는 건 애써 참아냈지만 비눗방울을 날려대는 꼬맹이한테는 항복.

 

 

 

그 유명한 광고카피, "개구장이여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가 이곳의 어린이집 교훈임에 틀림없다.

거의 언덕 위까지 108계단을 밟아 올라야 어린이집 현관에 도착할 거 같은 이곳, 통학만 하다보면

자연스레 아이들의 신체발달이 촉진되고 체력이 증진될 거 같다.


아이들 체력단련에 최고인 어린이집을 찾는다면, 목포의 구X 어린이집에 문의해 보시길 권하며, 지리적 여건상

목포까지 통학이 어려운 경우에는 가까운 어린이집에 조심스레 벤치마킹을 유도해 보시길.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사고 방식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건, 까칠한 사고방식을 예비한다. 예컨대 티비에서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이 어쩌구..'하면서 멘트를 하는 건 아이들을 수단으로 바라보는 거 같아 싫을 수 있다.

아이들이 왜 소중한데? 우리의 미래라서? 우리 사랑의 결실이라서? 우리의 역사를 이을 거라서?

굳이 아이들이 소중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온통 '우리'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한국어에 그토록 즐겨쓰이는

'우리'란 단어는 '나'의 욕망을 집단 속에 숨기고 자신의 모난 구석을 숨기려는 피해의식의 오랜 발현일지

모른다.) 결국 소중한 아이들일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들에 갖는 이해관계 때문이다. 작아서 이뿌지 않냐는

항변에도, 이뿐 그림이나 조각 장식처럼 최소한 당신 눈이 보기에 이뿌기 때문 아니냐,라고 까칠하게 대꾸해 줄

수 있다.


방금 티비에서 '우리 소중한 아이들에게 더러운 불량식품을 먹이는 어른들에겐 엄한 처벌이 필요하다'란 멘트를

보고 문득 생각났지만, 차라리 아이들에게도 특별한 아우라를 덮어씌우지 않고 솔직히 돈벌기에 몰두할 뿐인

그들이 정직한 건지도 모른다. 정직하다기보단, 그들은 사람을 무차별하게 대한다는 거다 최소한.

그들의 무차별함이 한쪽 극단에 서있다면, 다른 한 극단의 무차별함은 역시, 종교적일 수도 있을 만큼, 사람을

이름으로 인식하는 거다. 아이라서 좋고, 여자라서 좋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용준이라 좋고 소희라서 좋고 뭐

그런 거여야지 않을까 싶다. 아나운서가 갑자기 성인군자라도 된 양 어린이들의 수호천사라도 된 양 우리 소중한

아이들..어쩌구 하는 게 무지 역겨워져서 까칠해져버렸다.

장갑차에 치이고 민족의 순결한 딸아이들이 되는 것처럼.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좋은 게 좋은 거고 분위기 망치기 싫다고 좋게좋게 가고 그러는 건

아니라고 까칠하게 생각한다. 좋은 게 좋다는 말은, 중력처럼 사람을 짓누르는 효과가 있는 데다가, 관성까지

더해져서 좀처럼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가족, 학교, 회사, 선배, 후배, 동기, 친구, 애인..

그 모든 것들에 때론 정당하고 때론 부당한 무게를 실어버리는 말이 바로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래서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계속 가는 거다'라는 귀결. 관성처럼 이어지는 관계, 상대의 쓰임을 감안하고 목적과 수단이

혼동되거나 온통 수단화되어 버린 관계. 희한한 건, 대부분의 집합명사들은 그러한 수단으로서의 관계를

정당화하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가족. 학교. 지역. 기수...그런 것들.


여기까지. 이곳에서 순치되고 '정화'되어서 말랑말랑해져버리는 게 아닌가 싶어 뭔지 모를 것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영육의 펄떡임은. 까칠까칠. 그녀가 잘 잡아주고 있던 내 까칠한 부분은 이런 식의 푸닥거리로

씻겨내려간다.

다시 고쳐 생각하면 사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모든 인간관계는 매 순간 그

관계를 리셋하며 다시 완전히 풀었다 매는 신발끈 같아야 할 거다. 한발 내디딜 때마다 신발끈을 다시 풀고

조여야 한다면 미쳐버릴 거다. (그게 날 줄곧 괴롭혀온 문제인지도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좋은 게 좋은 거여야

하는 그런 지반 위에서 살고 있다. 일년, 반년, 한달, 일주일 단위로 적당히 끈의 매무새를 고쳐주는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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