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jmes, 차임스라고 읽어야 하지만 자신있게 발음하기 쉽지 않은 이 곳은 1980년대까지 수녀님들이 고아들을 돕기 위해 이용한

 

일종의 보육시설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웨딩 촬영이 곳곳에서 성행하는 데이트 코스이자 이름난 레스토랑들이 집결한 곳.

 

 

아르메니안 교회 정원, 시내 한 가운데에 있지만 굉장히 조용하고 시내의 소음에서 뚝 떨어진 느낌의 하얗고 자그마한 교회

 

주변으로는 이렇게 십자가로 고행하는 예수를 담은 십자가의 길이 3D로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싱가포르의 중앙 소방서. 건물이 아기자기 귀엽게 생긴 게 소방서의 급박하거나 긴장감 넘칠 업무와는 영 딴판.

 

멀라이언 파크에서 싱가포르의 서쪽으로. 남쪽 해안으로는 온통 술집과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군락을 이루고, 뒤에는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고층빌딩들이 한무더기.

 

무더기째 뭉쳐져 있던 건물들로 한발 재겨딛으면 이렇게 활짝 열리는 미지의 뒷골목.  

 

마리나베이 샌즈 쇼핑몰 중앙에서 수시때때로 기획되어 있는 듯한 라이브 공연. 나름 시스루를 입고 나오셨다.

 

 

그리고 헬릭스 브리지. 싱가포르의 다민족, 다인종성을 상징하듯 DNA 나선구조가 거침없이 꽈배기로 용틀임하는 모습을 담았다나.

 

 

물론 다리가 온통 불밝히는 밤도 좋지만 낮에도 걷기 괜찮은 다리,

 

다리가 잇고 있는 마리나 베이 샌즈 쪽과 싱가포르 플라이어 쪽의 풍경도 좋다.

 

 

 

다리 중간중간에 불쑥 튀어나와 있는 전망대. 저기에서 마리나 베이 저끄트머리의 멀라이온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두리안, 이라는 별칭의 에스플러네이드. 일종의 복합 문화공간으로 미술 전시나 공연이 이어진다고 한다.

 

잠시 둘러보려 들어갔는데 싱가포르 전통악기 공연이 있다길래 삼십여분 무료 와이파이를 즐기다가 연주를 감상.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할 때더라, 택시를 탔더니 온통 불상과 힌두교 신들, 혹은 무조건 복을 빌어주는 각종 잡신들, 심지어

 

손님을 빌어주는 일본 고양이인형까지 모아둔 정신사나운 모양새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독일 맥주가 굉장굉장굉장히 맛있었던 어느 바. 특히나 더웠던 날 점심부터 맥주를 대차게 마셔줬다.

 

이건 센토사, 동남아 최초의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있는 것으로 유명한 싱가포르 남쪽의 리조트 월드 공간이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이미 로스앤젤레스에서 오리지널로 경험했으니 패스, 대신 택한 건 실내 스카이다이빙 체험.

 

 

 

이게 뭘까. 직경이 지름 1미터쯤 되는 거대한 기둥 6개가 뻗어나가고 삼사층짜리의 자그마한 건물같은.

이런 비슷한 용도모를 건물이 원시인들이 살던 약 오천년 전에 세워졌었다면 거의 중세시대 성이라거나

요새의 초고층건물에 비견될 만한 거 아닐까. 에도시대부터 유명했다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기다리는

일본 아오모리현에 있는 산나이마루야마(三內 丸山) 유적군에 있는 대표적 유적이다.

그러니까 이곳은 이런 가죽옷을 입고 원목 몽둥이를 휘두르는 원시인 500여명이 일본 본섬의 북동쪽끝에서

대략 오천년 전부터 천삼백년쯤 살았다는 대규모의 집터 유적이 보존되어 있는 곳인 거다. 약 2천여 점의

유적이 대량 출토되었다는 이곳은 사실 야구장을 건설하기로 되었던 부지였는데, 1994년 아오모리현 지사가

유적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보전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덕분에, 원래 계획대로라면 철제 펜스가 높다랗게 세워진 채 삥 둘려있어야 할 이곳 야구장 건설부지는

일본의 국가사적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등재를 기다리는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남은 셈이다.

우선 마을 유적부터 둘러보기로 하고 박물관 건물 밖으로 나와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지나니 왠 샛노란

민들레 꽃밭이 먼저 나타난다. 그럴 리 없겠지만 오천년 전에도 여기 살던 사람들이 같은 꽃밭을

보고, 밟았던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일었다.

그렇지만 오천년 전의 기후나 지형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거다. 당장 그때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2-3센티 높았는지라 바로 이 마을 코앞까지 바다가 들이찼을 거라고, 퇴직하기 전까지 학교에서

근무하는 선생님이셨다는 '산나이마루야마 응원대'라는 자원봉사자 할아버지가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음식으로 삼았던 생선이나 해산물등의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고도 한다.


사실 이 나무 구조물이 무슨 용도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이런 형체가 확실한지에 대해서도 뚜렷이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한다. 자원봉사자 할아버지가 여기가 '번지점프대'였는지도 모른다고 농하셨듯이.

그래도 여러 정황상 여섯 개의 대형 기둥이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그 위에 저런 형태의 구조물이

설치된 채 아마도 망루의 기능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모든 유적 복원물에는 합당한 추정과 근거가 있는 법. 이 '망루' 추정 유적에는 뚜렷한 근거가 있었다.

토목, 건축, 고고학자들이 망라된 발굴조사 중에 무려 2미터 깊이, 2미터 직경의 구멍이 이렇게 뽕뽕

규칙적으로 박혀있는 걸 발견했다는데 그 중 일부 구멍에 지하수에 잠긴 밤나무 기둥조각이 온전히

남아있었다는 거다.


이곳이 그 복원된 '망루' 옆에 있던 실제 건물터. 이렇게 깊고 큰 구멍에 걸맞는 두껍고 튼튼한 기둥이

여섯개나 박힌 건물이라면, 글쎄 아무리 원시시대였다고 해도 꽤나 그럴듯한 건물이 지어지지 않았을까.

지금 복원해 놓은 건 가장 보수적이고 냉정한 상상력을 동원해 지어놓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상은 다른 마을 유적들을 둘러보면서 더욱 퍼져나갔다. 길이가 30미터가 넘는 커다란 집터의

우람한 덩치라거나 뒤로 이어지는 많은 주거지들의 흔적들을 보자니 여긴 정말 꽤나 커다란 마을을

이루고 있었겠구나, 그만큼 일손(노동력)도 많고 집짓고 망루짓는데 동원할 나무니 끈이니 자원도

많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무려 500여명이 살았다고 추정되는 마을이니만큼.

가장 큰 건물에 먼저 들어갔다. 길이가 32미터, 폭이 10미터에 이르는 이 커다란 건물은 무려 19개나

되는 밤나무기둥으로 지탱되고 있었다는데, 용도에 대해서는 공동작업소라거나 마을 집회소, 혹은

겨울철을 나는 공동가옥이었을 거란 여러 설들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런 설명들을 듣는 사이에

계속 코를 찌르던 연기 냄새가 거슬려 뭔가 물었더니, 건물을 구성하는 나무들을 튼튼하게 오래

보전하기 위해 원시인들이 처리했던 훈증 작업을 재연한 결과라고. 아닌게 아니라 나무들이 다 탔더라.

여기는 마을의 남쪽에 위치해있던 흙을 버리던 장소. 대량의 토기와 석기, 토우와 장신구들이 흙과 함께

버려지고 버려져서는 약 천년동안 언덕처럼 불룩 솟아올랐다고 한다. 말하자면 '난지도' 같은 곳이었을라나.

깨진 장신구, 못쓰게 된 토기 등을 생활쓰레기랑 함께 모아서 버리던 곳이랄까. 그런 곳이 수천년이 지나니

유물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유적의 보고가 되어버렸다.

이 곳에 당장 복원되어 있는 집터들도 꽤나 많다고 느꼈는데 이게 전부가 아니란다. 바닥에 땅을 파서

만든 집터도 있고 기둥을 세워 땅 위에 세운 집터도 있다는데 도합 600기 가까운 주거터가 발견되었지만

복원한 건 그 중에서 불과 20여기 남짓이라고. 땅에 대한 소유권이 없던 시절이었을 테니, 그들은 그저

원하는 장소에 스스로의 힘으로 나무 뼈대를 세우고 움막같은 집을 지었으면 땡이었을 거다. 그럼 굳이

여러 채 갖겠다고 과잉하게 노력해서 집을 지어놓지도 않았을 거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화려한 집을

짓겠다고 난리치지도 않았겠지. 뭐 단순비교하긴 그렇지만, 오천년 후 지금은 그때보다 행복할까.

이게 땅바닥을 파서 만든 주거터. 슬쩍 들어갔더니 암사동 선사유적지에 복원되어 있는 움집처럼 별 거 없다.

뭐 원시인들이 '일본땅' '한국땅' 출신이란 자각을 갖고 있지도 않았을 거고, 뭔가 고유하거나 특징적인

문화적 차이점을 주거 형태에 구현하기에는 아직 집 한채 짓기도 급급한 수준이었을 테니깐. 중앙에는

화로가 하나, 이때는 아직 쌀을 재배하기도 전이라 주식으로 도토리, 그리고 연어니 오징어니 생선과

해산물을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땅에 구멍을 파서 기둥을 세운 주거터. 하나 재미있는 건, 이곳에 살던 원시인들이 먹었을 음식의

흔적 중에서 생선 머리뼈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러가지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는데

토막내서 머리는 바다에 버리고 몸통만 먹었을 거다, 혹은 머리에 붙은 아가미가 공기에 닿아 쉽게

부패하면서 머리뼈까지 삭혔을 거다, 혹은 머리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썼을 거다, 라는 정도가 있다고

할아버지가 설명을 해주었다. 글쎄, 어차피 씌어지기 전의 역사, '선사(先史)'시대니까 상상하기 나름,

머리뼈는 몸에 좋다며, 아님 머리가 똑똑해진다며 다 먹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외에도 마을에는 어른들의 무덤, 아이들의 토기 무덤이라거나 북쪽에 조성된 쓰레기장들이 복원되어

있었는데, 오천년 전의 마을이라기엔 정말 생생하게 한 마을 풍경을 망라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대규모 마을 유적에서 발굴된 다량의 토기, 석기, 목제품이나 골각제품들은 2002년에 개관된 박물관에

전시해두고 있다고 하니 이젠 뙤약볕을 피해 박물관 내부를 관람할 차례. 그 전에 화장실을 가려고

표지를 찾았더니, 저렇게 귀여운 남/녀 화장실 사인이라니.

일본에서 까마귀가 길조로 여겨져서 많은 걸까, 아니면 워낙 많아서 길조로 여겨지게 된 걸까. 마치

닭과 달걀의 선후를 따지듯 골치아프고 애매모호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생각도 없지만, 이곳

산나이마루야마 마을 유적에도 까마귀가 참 많았다. 그러고 보면 일본 소설에서 까마귀는 길조이면서

동시에 죽은 자와 산 자를 잇는 메신저 역할도 하고, 아니면 죽은 사람의 영혼 그 자체라고 표현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왠지 오천년 된 유적지에서 만난 까마귀라 더욱 상서롭달까.

박물관, 정확히는 조몬지유칸(時遊館) 내부에 미니어쳐로 전시되어 있는 산나이마루야마 마을의 유적.

실제 마을에 선사시대 원시인들이 꼬물거리는 모습이 모형으로나마 시각화되니까 훨씬 그럴 듯 하다.

마을을 둘러싼 숲, 그리고 그 너머의 바다는 이 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을까. 외적이 쳐들어올 수도, 예기치 못한 짐승들의 습격이 있을 수도, 혹은 대규모의

자연재해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니만치 저렇게 불쑥 튀어나온 '망루'의 쓰임이 더욱 실감나기도 하고.

'망루' 유적의 커다란 구덩이 밑에서 보존되어 있던 1미터짜리 두꺼운 밤나무 기둥의 잔해 진품.

무려 오천년쯤이나 땅 속에서 썩지도 않고 이렇게 버텨왔다는 게 대단하다. 역시 진짜를 보니까

모조품을 보는 것과는 또 느낌이 다른 듯.

마을 유적에서 발굴되었다는 수많은 토기 조각들을 일일이 짜맞춰서 복원한 토기들. 토기를 어떻게

제작하는지를 마네킹이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저 푸른 초원 위에 복원된 십여기의 움막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지를 보여주는 모형.

무엇보다 흥미롭던 건 십자가 형태로 정형화되다시피 빚어지는 사람 모양의 토기, 토우였다.

아무래도 다산을 상징하고 싶었는지 불룩 튀어나온 두 가슴과 둔덕이 세 뿔을 이루고 있는

십자가 형태의 사람 흙인형은 얼핏 보면 노릇노릇 잘 구워진 쿠키같기도 하고, 초기 기독교시대의

십자가 원형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오천년 전 선사시대를 살던 사람들에 대한 편견 아닌 편견을 좀 수정해야 할 것 같다. 각 토우들에

그려진 문양들은 이렇게 숫자를 나타내는 표식이기도 했다는 것. 그냥 거의 동물에 가깝거나 두뇌 활동은

미미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고쳐 생각하면 지금의 인류보다 훨씬 생존력도 강하고 적응력도 강하고,

심지어 저런 것을 보면 두뇌 수준도 훨씬 우수했던 건 아닐까. 막말로 요새 사람을 그들이 맞닥뜨렸을

환경에 떨궈놓는다고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은 거다.

그리고 토기에서도 이런 인물 문양이 발견되기도 했단다. 사람의 형체가 뚜렷하게 나타나서 얼굴과 손,

그리고 발의 모양이 쉽게 구별되긴 하는데, 손에 든 건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태 토기에 그려진

문양들은 대개 빗살무늬니 아라베스크 무늬니 하는 간단하고 기하학적인 것들 아니었던가. 아님 아예

아무것도 그려넣지 않은 민무늬거나. 꽤나 이례적인 토기 문양 같아서, 일본어는 모르지만 제법 중요하게

생각하고 비중있게 전시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 진짜, 이런 캐릭터 맘에 든다.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의 마스코트 캐릭터라는 '산마루', 십자가형

토우에 호피가죽옷을 입히고 똥글똥글한 눈을 가진 귀여운 캐릭터로 마스코트를 삼다니. 게다가

박물관 입구에 도토리로 만들어둔 저 귀여운 녀석들은 어떻고.


* 교통편.





* 이번 여행은 하나투어 '겟어바웃' 필진의 일원으로 다녀왔습니다.
Get About - 당신의 여행이야기

순교자 (양장) - 10점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문학동네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순교, 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굉장히 사람을 숙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누군가의 죽음이

여하간에 대의를 위한 죽음으로 포장되는 순간, '순교'로 불리우는 순간 더이상 그 죽음의

전후 맥락을 따지거나 정확한 팩트를 판별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만다. 심지어는,

그렇게 죽어간 사람이 어떠한 고민과 생각을 거쳤고 어떤 죽음을 맞았는지조차도.


고은 시인 이전에 한국계 작가가 이미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김은국이란 작가, 함경도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전쟁때 해병대 근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그의 프로필이나 이 책의 심상찮은 제목 '순교자'를 보고 처음에는 꽤나 거부감이

생겼더랬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도의 시각으로 본 미국, 남한 만세 이야기인가 했다.


'그래, 언제 이 병신같은 전쟁놀이를 그만둔다지?'
'전쟁은 천지창조 이후 계속되어온 거 아닙니까?'

아니었다. 그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이 전쟁 역시 짐승같은 국가들과 썩은 정치인들 사이의

눈먼 권력 투쟁이 빚어낸 구역질나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미 죽었고 앞으로

죽어갈 수많은 사람들은 정말이지 개죽음이며, 무고한 제물로 희생된 것이며 냉혹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국제 정치 무대에 꼼짝없이 붙들린 죄없는 볼모들이다'라는 거다.


한국전쟁에 대해 이토록 냉정한 평가, 그리고 뜨거운 평가는 꽤나 인상적이다. 그렇지만

더욱 강렬한 건 정작 이 다음이다. 그러한 배경 하에서, 주인공 이 대위는 갈등하고 있다.

빨갱이들에게 죽은 열두명의 목사와 살아남은 두명의 목사, 그 생사의 스토리에 얽힌 진실이

무엇이던간에 '순교'의 금칠을 하려는 군대와 기독교인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다.


'목사들의 신성한 복장 밑에 더러운 속옷이 숨겨져 있었다고 폭로하기보다는 열두 명 순교자들의 영광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자네들 기독교에 더 큰 봉사가 되지 않는가?'

그런 금칠을 단순히 사기극이라고 치부할 건 아니다. 군인은 지켜야할 국가와 그 명분이 있는

거고 목사도 또한 지켜야할 교회와 교회의 명예가 있는 거니까, 전면전의 상황에서 그런 둘의

이해 관계나 목적은 굉장히 단단하고 뚜렷하며 현실적이다. 거기에 대고 진실은 모두가 알아야

한다느니, 순교자는 하나님의 뜻에 봉사하는 거지 인간의 일시적 필요로 만들어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물론 옳지만 다소 한가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열두명의 목사가 끝까지 종교적 신념과 신앙을 지키며 죽었건 아니면 서로 헐뜯으며 살려달라고

애걸하다 죽었건, '목사들의 신성한 복장 밑에 더러운 속옷이 숨겨져 있었다고 폭로하기보다는

열두 명 순교자들의 영광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자네들 기독교에 더 큰 봉사가 되지 않는가?'하는

대령의 말에 군종목사가 입을 닫고 마는 게 딱 그런 논박의 한계다. 탈영병 백명을 백명의 영웅으로

둔갑시키는 것과 신앙의 영웅을 만드는 게 다를 바 없다는 것. 조직 보위와 프로파간다의 논리다.

 
 '신성하게 미친 가련한 젊은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조롱과 미움의 대상이 되고 로마 병정의 창끝에 온 몸을 찔리고, 적들의 시선 앞에서 그를 구해줄 기적 하나 없이 무력하게 헐떡이고 땀을 흘리고 피를 쏟고 있는 젊은이, 신의 아들이라는 사람의 그 가련한 육신의 절규'를 구원의 동화로 만드는 것. 그런 동화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을 경멸할 텐가, 사랑할 텐가. '

그런데 이렇게 치열한 세속의 고민에서 작가는 한발 더 내딛는다.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종교와 신앙의 역할에 대한 질문, 특히 전쟁과 인생에 지쳐있는 그야말로 절망적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러한 '동화'를 주어 위로하는 종교에 대한 폭넓고 깊은, 극한까지 밀고 들어가는

고민인 거다. 고난에 시달리고 고문당하는 불쌍한 사람들, 그들의 비참한 생에 달콤한 환상을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줘야 하는가.


이 대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들을 잘 보살펴주시고 국가는 그들의 운명을 진지하게

걱정해주고 있으니 만사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는 모든 고상한 거짓말,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위한다며 저질러지는 이 모든 것들이 역겹게만 느껴진다. 그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동정하면서도 종교나 신이 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 거다.

하여 계속 묻는다.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그와 다른 축으로 모여선 사람들, 신목사와 박 대위는 그저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진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삶을 의미있게 하고 고난을 값진 것으로

해줄 그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련하고 유약한 사람들이라는 거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자신의 신과 신앙을 모두 의심하고 무너졌던 열두명의 목사가 '순교자'로 불리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라는 거다. 정의에 대한 약속, 신에 대한 약속 없이는 모두 무너질 테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당하는 고통은 고통일 뿐, 거기에는 우리가 이승 너머에서 찾아낼 어떤 정의로움도 없습니다.'

작가는 두 가지 입장을 첨예하게 밀고 나간다. 수백만명이 죽어가는 한국전쟁의 와중이라는

혼란하고 부조리한 상황 한복판에서, 아무런 희망과 약속을 얻을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근대의 낙관주의처럼 모두가 차갑고 냉엄한 현실 앞에서 당당하진

못하더라도 괴로운 진실을 떠안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입장과 불의하고 무의미한

삶을 견디지 못해 무너져버리고 말거라며 '환상'을 쥐어준다면 그것자체가 희망 아니겠냐는

입장, 그 두 입장은 끝까지 머리맞대어 고뇌하며 이리저리 약점을 찾아 타격하며 투쟁한다.


사실 한국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아니어도, 사람들은 종종 자문하곤 한다. 이걸 지금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내 삶은 어딜 향하고 있을까, 죽고 나면 다 끝나는 건가. '죽음'이나 '사후'에
 
대한 그런 숱한 질문은 더러는 사회적인 터부가 되어 자물쇠가 채워져 관리되고, 개인적으로도

애써 힘내보자는 자기계발류의 이야기나 생에 대한 이야기로 집요하게 돌려버리곤 하는 거다.

그런 걸 보면 인간은, 끝내 스스로 삶과 죽음, 영원한 소멸과 사라짐을 긍정할 수 없는 걸까.


'교인들은 이 무의미한 세계에서 그들의 생을 지속시키는 그 무언가를 갖고 있어. 한데 우리에겐 그게 없지. 그들이 가진 그것을 우리가 꼭 동화라고 불러야 할까.'

소설에선 신 목사가 그런 '경지'에 이른 거 같다. '스스로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스스로 그 십자가를 짊어질 수

없는 사람들을 삶에서 보호하는 거다. 그들을 위해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지켜주는 목자.

소설 제목인 '순교자'는 이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신을 위해 봉사하고 목숨까지 바친

사람이 아니라, 신을 믿는 사람과 삶에 의미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사람인 거다.


그건 어쩌면 매트릭스 식으로 말하자면, 빨간 알약을 먹어버리고도 이 세계에 남아있는 존재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깨닫고도 아직 피안으로 넘어가지 않은 채 중생을 계도하는 존재,

보디사트바(보살)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난 궁금하다. 이 대위도 궁금했던 거다.

'국외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애초에 신을 믿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에 기댈 수 있을까.

신으로 엮인 목자와 양떼의 관계가 아니라, 신의 개입없는 개인과 개인이라면.


분명 그건 더욱더 힘든 싸움일 거다. 십자가뿐 아니라 온갖 기도와 염불과 예배 소리로

가득한 땅에 살면서 그런 '종교'라는 마약에 취하지 않고 눈 똑바로 뜨고 아연하게

짖쳐들어오는 온갖 희로애락과 불행들을 맞닥뜨리고 온전히 감내하려면. '순교자'에

기대어 삶의 의미를 보증받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회의와 두려움 속에서 한치 앞도

알 수 없고 의미조차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니까. 신 없이 살아간단 건 그런 거다.


* 굉장히 인상깊었던 대목 하나. 이 작품과 이 작가가 한국 사회에서 잊혀진 이유 아닐까.

기독교에 대한 굉장히 전향적이랄까 혁신적인 해석, 그리고 기독교 교리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랄까 새로운 시각이란 것들을 품기에는 한국사회가 너무. 여전히.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그러나 내가 찾아낸 건 고통받는 인간...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그리고 죽음의 다음은?"
"아무것도 없소! 아무것도!"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주어야 해요. 영광과 환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희망이라는 환상을 준단 말입니까? 무덤 이후의, 죽음 이후에 대한 환상을 주란 말입니까?"
"그렇소!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이오. 절망은 이 피곤한 생의 질병이오. 무의미한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삶의 질병입니다."

..."목사님은요? 당신의 절망은 어떡하고 말입니까?"
"그건 나 자신의 십자가요. 그 십자가는 나 혼자서 짊어져야 하오"
"다른 사람들은?"
"많은 이들이 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건 아니잖소? 그들은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이오. 우린 그들에게 그들의 그리스도와 그들의 유다를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부활도?"
"그렇소, 육체의 부활도!"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도?"
"그렇소, 그 천국도!"
"정의는?"
"물론이오. 정의, 얼마나 그리운 이름이오? 그렇소. 정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궁극적인 정의를 주어야 하오."
"목사님은?"
"계속 괴로워해야겠지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얼마 동안이나? 얼마 동안이나 괴로워해야 하는 겁니까?"
"죽을 때까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없을 때까지!"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떻게 내려져야 하는 걸까.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기로 한

목사가 여전히 말로 답하기를 거부하는 그 질문.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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