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와의 송년회 다음다음날, 그날 입었던 옷 주머니 안에서 소주잔과 종이쪼가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저번의 중국산 와인과는 달리 또렷한 맨정신으로 주머니에 슬쩍 넣었었는데, 어찌저찌 하다보니까

며칠 지나서야 주머니 안에서 꺼내놓게 된 거다. 왜 들고 왔는지는, 뭐, 그냥 재밌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그 소주잔과 종이쪼가리는 바로, 이효리와 함께 술을 마시기 위한 준비물. '효리주'를 불러내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인 거다. 소주병 뒤엣 라벨에 축축한 물수건을 대고 적당히 불린 후에 효리가 웃고 있는 상반신을 정교하게

오려내야 한다. 가능한 효리의 모습이 최대한 들어가서 소주잔 바닥사이즈에 꽉 차도록, 그리고 효리의 저

나부끼는 머릿결 웨이브 한올한올이 잘리지 않고 생생하도록.

(위 포스터 파일은 '고양이처럼'을 만드는 회사 홈페이지에서 퍼왔음을 알리며, 문제 발생시 자진삭제하죠 모)

참고로 효리 사진이 있는 소주 라벨지는 위의 '고양이처럼'의 뒷켠을 보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 완성품. 극도로 숙련된 손놀림으로 글자 세 개 역시 절묘하게 효리와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흔들" "더".

유리잔 바닥 아래에 붙어 환히 웃어주고 있는 효리. 비록 나와 그대가 소주잔 바닥의 두꺼운 유리벽을 격하고는

있으나, 그대가 권하는 술 한잔 내 어찌 마다하리요. 뭐, 그런 효과가 있어 따라주는 족족 술을 원샷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이게 바로 "효리주"랜다.

책상에 앉아 다시 효리주를 재연해보면서 시험삼아 다시 일순배를 해 보았다. 효리가 흔들, 더~, 흔들, 더~ 를

외치며 저 너머에서 머리칼을 나부끼며 웃고 있다. 뭐, 맨정신으로도 참 흐뭇해지는 술잔인 건 틀림없다.

# 응용편. 사실 굳이 '효리'여야 할 이유, '효리주'라 불려야 할 이유는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연예인이던 일반인이던 군인이던, 일단 사진만 구할 수 있으면 된다. 소주잔 아랫바닥의 지름은 실측 결과

3.4mm, 그 마법의 원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얼굴이면 된다. 혹은, 얼굴이 아니라 특정 신체 부위도 가능할 법

하지만 나는 도무지 순진해서 더이상은 모르겠다.

술에 엔간히 쩔었을 때의 시야는 이렇지 않을까. 앞에 있는 게 효리인지 사람인지 술잔인지도 구분이 안 되고,

흔들흔들, 더더, 이런 식의 추임새만 귀에 들어오는 타이밍. 효리주도 좋지만 술은 적당히 기분좋게~*





어느 날, 퇴근 후 송년회를 빡시게 가졌던 다음날 내 방 책상 위에서 발견된 중국산 와인. 때이른 산타클로스

놀이는 혈관 속에서 맥놀이하는 알콜 성분과 저질 체력 덕에 가능했으리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겠지만, 왠지

나는 이 와인병이 무슨 별똥별처럼 우주에서부터 내 방 책상위로 내려앉았다고 상상해 보고 싶은 거다.

중국에서도 와인을 만들었단 말인가, 새삼 중국 대륙의 힘을 느끼면서 거의 새 것과 다름없이 코르크만 한번

열렸다 닫힌 듯한 와인 맛을 음미해보기로 했다. 중국과 프랑스의 조인트 벤처 와이너리에서 만들었다는

무려 '다이너스티' 와인인 거다. 라벨지 색깔도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붉은 계열이고.

라벨 뒤, '다이너스티DYNASTY'의 중국어 표현, '왕조'. 중국 톈진지구에서 만들어졌다는데 거기가 포도 재배

그리고 와인 숙성에 적합한 지역이었는지는 미처 몰랐다. 왠지 자꾸 의심병이 도지는 이유는, 공항 면세점에서

파는 마오타이주조차 메틸알콜로 만들곤 한다는 그네들에 대한 불신과 일종의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와인은 포도로 만든 건 확실하겠지? 유통기한이 지났다거나 상한 포도로 만들었다거나 제조 과정이 지극히

비위생적이라거나 따위 온건하고 상상가능한 거 말고, 예컨대 포도가 아닌 붉은 색 돼지간으로 만들었다거나,

(그저 상상일 뿐) 알고 보니 헌혈의 집에서 폐기된 붉은 피를 재활용했다거나(워워워)...


중국에 대한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고량의 냄새를 좋아하고 고량주를 좋아하며 중국제품도 사실 굉장히

품질이 높고 좋은 제품이 많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그냥 상상해 보면 그렇다는 거다. 중국에서 나온 와인,

한국에서 복분자니 뭐니 이러저러한 것들로 와인을 빚어놓은 것도 꽤나 의심스러울 때가 많은데 더더욱

요모조모 생각해 보고 조심하게 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사실 맛만 좋으면 된다. 그치만 코르크 마개를 따고 확 풍기는 냄새는 살짝 매콤한 냄새, 어릴적 우뢰매를 보러

자주 갔던 어린이대공원 근처에서 곧잘 맡았던 최루탄을 백분지일 정도로 희석시킨 냄새랄까. 잔에 따라서

비춰본 와인의 색깔도 그닥...살짝 갈색이 도는 붉은 빛, 게다가 공기와 닿아 향이 좀더 숙성되면서 매캐한

냄새는 좀더 강해져 버렸다. 맛 역시, 라벨에 소개된 것처럼 light하고 fruity하다기보다는 그냥 가볍게 맵다.


좀 많이 실망해서, 담부터는 술에 취해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걸 챙겨오자고 대오각성.








#1.

왠지 모르게 요새 몸이 여기저기 축나는 느낌이다. 얼마전까지는 허리가 어쩌니 저쩌니, 결과적으로는 십대의

그것과 같이 몹시 튼튼하다, 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물리치료를 열흘정도 받았고, 그러고 나니 갑자기 치아가

바스락, 크래커처럼 깨져버렸다. 더군다나 어금니라서 당분간 고기도 못 먹고 술도 못 먹겠구나, 암담한

전망을 섣불리 내놨지만 웬걸, 임시처방만 받고서도 잘만 술 퍼마시고 고기도 씹고.


#2.

한달에 한번이지만, 꾸준히 봉사 중이다. 처음 갔던 이상하고 가혹한 보육원 말고 역삼역 인근에 있는 영유아

일시보호소에서 채 백일도 안 지난 애기들을 봐주고 있다. 기저귀 같은 거 한번도 갈아본 적 없었는데, 의외로

처음부터 잘 해내서 깜짝 놀랬다. (주위에선 품절남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평가까지도..ㅋㅋ) 한 방에 애기들이

열두세명씩 침대안에 누워있는데, 다음에선가 했던 애기보기 플래시게임이랑 정말 비슷하다. 여기서 우는 애

똥기저귀 갈아주고 안아주고 젖병 물려주다 보면 저기서 또 울고, 난이도가 올라가면 한번에 세네명이 같이

울어제끼기도 한다. 몇시간 안되지만 애기들을 보고 나면 완전히 지쳐버리고 마는데는 이유가 있다.


애기들은 모두 귀엽다, 는 말은 절반은 맞지만 절반은 틀렸다. 올해 구시월께 태어난 비슷한 또래의 애기들도

발육상태도 다 다르고 생긴 것도 성격도 이미 다 다르다. 모빌에 눈을 맞추고 몰입하는 애가 있는가 하면, 눈만

마주쳐도 방글방글 웃어주는 애기도 있고 젖병을 빨면서도 쉼없이 짜증내는 애기도 있는 거다. 굉장히 이쁘게

생긴 애기도 있고 어린애답잖게 벌써부터 눈빛이 흐려진 애기도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백프로 온전히 나의

존재를 필요로 해주는 아기들은, 그래서 그 자체로 축복인 거다.


#3.

치과를 갔다가, 봉사를 갔다가, 종로에서 송년회를 했다. 매년 그렇지만 미친 듯이 웃고 떠들게 되는 한무리의

사람들. 결국 작년에도 그랬듯 종로에서 흔치않게 24시간 영업을 하는 순대국집으로 흘러들어가 밤이 새도록

달리고 말았다. 떠들썩한 분위기, 뒤숭숭하던 마음자리가 차라리 한번 터지고 나니 정리가 조금 되는 거 같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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