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아이파크몰 6층, 도무지 올 일이 없는 이 곳에서 전시중인 '스튜디오 지브리 입체조형전'. 최근 스튜디오 지브리가 더이상의

 

창작을 하지 않고 기존 작품들만을 관리하는 형태로 사실상 제작 중단 선언을 한 게 계속 마음에 걸리던 터라 안 가볼 수가 없었다.

 

어마무시하도록 길게 늘어선 줄, 대기표와 티켓을 함께 받아들고 한시간여 근처를 배회하다가 겨우 입장.

 

지브리의 작품들이야 워낙 많고도 유려하다지만, 그 중에서도 총 여섯 개의 작품이 선정되어 일본을 제외하고는 최초로 전시되었다.

 

동선상 맞닥뜨리는 첫째 작품은 바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

 

 

 

 여긴 내 비밀의 정원이야.

 

막판에 이웃나라 왕자로 변하는 허수아비,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반전과 센스가 묻어있는 캐릭터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두번째, 모노노케 히메. 혹은 원령공주라고도 하는 작품.

 

 스크린 너머 신비로운 표정으로 숨어있는 신. 그리고 바위 틈에 붙어있는 정령들.

 

 

 

산은 숲에서, 난 다타라에서 살면 되잖아. 함께 살아가는 거야.

 

세번째 작품,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아직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전이었던 90년대말 대학교 영화동아리에서 상영할 때 봤던 영화.

 

 

 늘 변신에 실패하는 캐릭터가 저녀석이었던 거 같다. 다른 주위 녀석들은 모두 변신에 잘만 성공하는데,

 

저녀석은 아무리 레버를 돌려봐도 당황하거나 뻘쭘한 표정으로 뒷통수를 긁는 이미지인 걸 보니 기억이 맞는 듯.

 

 

 

 그리고. 역시 뭐니뭐니해도 이웃집 토토로. 그리고 저 귀여운 꼬마소녀 메이의 입체적인 뒷태.

 

 

무려 삼십여분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함께 할 수 있는 토토로의 포토존. 아이고 어른이고, 모두가 일심단결.

 

 

 

 정말 잘 꾸며져 있었던 게, 토토로와 메이가 처음 조우하는 그 신비로운 나무등걸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틈새를 통해 배가 불룩거리는 토토로를 볼 수 있었고, 메이가 뒤쫓던 조그마한 두 녀석도 훔쳐 볼 수 있던.

 

 

 이웃집 토토로의 마지막 장면. 아픈 엄마가 누워있는 병원 창문턱에 옥수수를 살며시 놓아두고 돌아가는.

 

다섯번째, 무려 홍돈! 붉은 돼지라는 타이틀로 번역되어 나온,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무척이나 좋아하는 작품.

 

어떻게 하면 당신에게 걸린 마법을 풀 수 있을까?

 

 

 

 전쟁으로 휘몰아치는 세상에 홀로 여유롭고 낭만적인 돼지 포르코, 그가 숨겨둔 조그마한 파라다이스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수상 비행기에 대한 로망, 아무도 없는 모래톱 위 삼각텐트와 파라솔, 그리고 자그마한 라디오에 대한 애정을 돋게 한 영화.

 

마지막 여섯번째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다. 지브리의 애니가 애들용이 아니라 어른용임을 다시금 각인시킨 영화.

 

이야기의 단초가 되었던 기묘한 음식점 거리가 실은 어느 홍등가를 그대로 따서 쓴 거라던가. 성인을 위한 메타포가 넘쳐난다.

 

 그 앞에 선 센 혹은 치히로. 시야를 꽉 붙드는 불룩한 온천탕 건물의 외곽선이 소녀의 뒷모습을 더욱 가냘프게 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남우주인공은 사실 소년이자 용인 하쿠, 그렇지만 모두에게 더욱 깊이 각인된 녀석은

 

역시나 가오나시. 아, 아, 거리는 이녀석의 단말마같은 의사표현은 왠지 이런 폭주에도 불구하고 미워할 수 없다.

 

 왠지 적적하고, 슬프고, 그리고 속내를 알 수 없지만 무척이나 여리고 상처투성이일 거 같은 가오나시.

 

무턱대고 사랑을 갈구하며 먹어치워버리고는 결국 고스란히 되짚어 토해내버리는 모양새가 참 딱했던 거 같다.

 

그렇게 총 여섯 개의 작품, 그 배경과 캐릭터들의 조형들을 꼼꼼히 둘러보니 대략 한시간반. 토토로와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린 시간을 포함해서니깐, 얼추 한시간이면 내용을 둘러보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싶다.

 

 바깥에는 하얗고 동그란 스티커를 자유로이 쓰도록 해서, 이렇게 지브리의 캐릭터들이 각자 알아서 그려서는

 

벽면에 붙여 넣도록 해놨는데, 은근히 잘 그리는 사람도 많고 몇장의 스티커를 활용하는 창의력 돋는 사람도 많고.

 

 제2롯데월드몰에 지브리 캐릭터상품샵이 들어선다는 거 같은데..여긴 왠지 언제 무너지지나 않을까 싶어

 

나중에 가보게 될지는 모르겠다. 언제고 무너지거나 가라앉거나 물이 들어차거나 비행기와 부딪히거나.

 

현실에선 그럴 때 나타나 구해줄 하쿠도 없고, 낭만돼지 포르코도 없고, 토토로도 네코버스도 없으니.

 

 

 

몇가지 새롭게 발견한 캐릭터 상품들. 그 중에서도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엔진이 되었던 저 악마 녀석이 그려진

 

후라이팬이 은근히 탐나던데, 계란후라이도 왠지 더 맛나게 구워질 거 같고 말이지.

 

 

블로그를 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열리는 때가 있다.

올해 여름 떠났던 도쿄 여행 중에 '에도도쿄건축공원'에 대한 내 포스팅을 보고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책을

집필중이신 저자분이 사진을 부탁해오신 것도 그런 사례 중 하나..

* 참고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그 배경이 모여있는 에도도쿄건축공원

기꺼이 수락하며 사진을 닥닥 긁어 보내드리고 나니 블로그도 한 페이지에 걸쳐 소개해준다하셔서, 끄적끄적.


끄적끄적대놓은 글 모아둘 곳이란 역시 이곳밖에 없어서, ctrl+c, ctrl+v.


뭐, 실제로 출간된 책에 얼마나 어떻게 반영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괜한 설레발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써놓은 게 새삼스레 내 블로그를 소개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는데다가, 미야자키 하야오를 내가 왜

좋아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는지라 일종의 팬레터라 치기로 한다.



“다른異 색깔彩을 지켜낼 자유”

제가 2008년 여름쯤부터 차곡차곡 특정 시간과 공간에 얽힌 글과 사진들을 쟁여 모으고 있는 작은 가상 공간(ytzsche.tistory.com)에 붙여놓은 이름이니까 일종의 ‘책제목’이라 해도 될 듯 합니다. 대학에 들어와서부터 줄곧 쓰다가 급기야 군대에 있을 때 전투모에도 단단히 오바로크쳤던 이채(異彩, ytzsche)라는 필명을 ‘여행 블로그’에 어울리게 살리려다 보니 조금 꿰어 맞춘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씩 새삼스런 눈으로 읽어보며 몸과 맘을 돌이켜보게 하는 효과는 있는 듯 하니 다행이랄까요. 여행은, 자꾸만 일상 속으로 녹아들어가 잔뜩 늘어지고 진부해지고 둥글둥글 남들과 닮아만 가게 되는 ‘어른병’을 멀리하기 위한 하나의 치유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 사진 속 ‘절대반지’를 구하러 이집트 룩소로 떠났던 이야기에서부터 서울 이태원 골목, 심지어 소소한 집 앞 골목에서의 이야기로 차츰 제 ‘여행기’를 제 ‘삶’의 이야기로 넓혀가고 싶습니다. 모든 게 낯설고 설레는 여행자의 눈과 마음을 지키면서, 그렇게 다른 색깔 異彩를 지켜내면서요.






‘센’의 세계와 ‘치히로’의 세계가 섞이는 곳

에도도쿄건축공원은 박물관 속 유물처럼 사람과 유리된 채 차갑게 식어버린 ‘민속촌’은 아니란 느낌이었습니다. 아마도 가마지기 영감의 손때가 반질반질 묻은 문구점의 빼곡한 서랍들하며, 녹은 슬었지만 금세라도 삐걱대며 달릴 듯 거리에 서있는 자전거 달구지, 치히로의 부모가 아니라 누구였대도 자리에 앉아 술을 한잔 청할 듯 사람의 온기가 풀풀 나던 주점까지. 하야오가 작품을 구상하며 이곳으로 자주 산책을 나왔던 것도 이곳의 그 묘한 분위기, 1900년대 어느 어간의 도쿄와 2010년의 도쿄가 마구 뒤섞인 채 만들어내는 새로운 느낌과 묘한 에너지에 자극받았던 건 아니었을까요. 웃는 얼굴이 아기같던 안내원 할아버지가 건넸던 바람개비를 공원 돌아다니는 내내 들고 다녔던 것도, 그리고 어느 나무엔가 바람개비를 꼽아두며 주렁주렁 열매맺길 기원했던 것도 모두 그곳이 ‘센’의 세계와 ‘치히로’의 세계가 섞여있는 마법같은 공간이라고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놓칠 수 없는 여행,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은 늘 그런 식입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붕 떠서는 어딘가 낯익은 듯 하면서도 생전 처음 보는 시공간에 내려앉아 등장인물들과 어깨를 맞대게 만드는 마법인 거죠. 쌍발 수상비행기가 기관총을 쏘는 시기의 유럽인가 싶다가도 뭔가 낯설어지고, 근대 개화기 즈음의 일본인가 싶다가도 또 뭔가 낯설게 이지러져 있고. 어쩌면 그의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여행’을 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가 열어주는 소리에 쫑긋 귀를 기울이고, 그가 보여주는 세상에 눈을 떼지 못하며, 그가 상상해낸 이야기에 가슴 두근거리며 잔뜩 설레고 마니까요. 모든 게 낯설고, 흥미롭고, 끝내는 감탄하게 만들어 모든 사람을 ‘여행자’로 변신시키는 그의 재주는 역시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요. 그가 상상해낸 세계로의 여행은, 그래서 여행자로 살기를 꿈꾸는 제게는 언제든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 사실은 사진 한 장 더 넣고 싶던 게 있었는데, 이 것들이 전부 반영될지 아닐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 괜히

책에 누를 끼치는 건 아닐까 싶어 포기했던 게 있다. 누군가; 해맑게 바람개비를 들고 놀이터의 목마를 탄 채

흔들거리는 사진 하나. 하야오 영감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지브리 스튜디오는 도쿄에 있다. 정확히는 도쿄의 JR선 '기치조지(Kichijyoji)' 역과 '미타카(Mitaka)' 역 사이,

거의 그 중간에 걸쳐 있다고 해야 하려나. (참고 : 낡고 더러워진 도쿄 JR선 전체지도.)

해서 코스 잡기가 상당히 애매한데, 나는 기치조지 역에서 내려서 지브리 스튜디오까지는 (늦어서) 택시로

이동, 지브리에서 보고 나오는 길은 미타카 역까지 산책길을 걸어서 이동, 그리고 에도도쿄건축공원으로 향했다는.


아, 지브리 미술관은 한국에서 미리 표를 예약해야 입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빠뜨릴 수 없다. 성수기 때에는

2주 전쯤엔 해야 안전할 듯. http://ghibli.ktbtour.co.kr/ 여기에서 하는 게 한국에서 사전 예약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들었다.
 

열심히 기치조지역으로 가는 길, 전철 끝에 탔더니 시원하게 앞창이 전부 트여있다. 물론 보이는 거라곤 깜깜한

지하 터널뿐, 그리고 매 역마다 마이크를 잡고 프로의 솜씨로 역 안내방송을 하는 철도운전사 아저씨도 빼놓음

섭하겠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매주 화요일과 국경일에 휴관하며, 그외의 날엔 10시, 12시, 14시, 16시에만 입장할 수 있다.

입장 후에는 언제 퇴장해도 상관이 없으나 입장시간만은 지켜달라던 간곡한 부탁이 사전에 있었는데도 늦고

말았다. 사실은 기치조지역에서 살살 걸어보려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잡아탄 택시 안에서 사진 한장.

생각보다 기치조지역은 꽤나 도쿄 외곽에 있어 멀기도 했고, 생각보다 기치조지역과 지브리 스튜디오 간의

거리도 솔찮이 떨어져 있었던 탓.

일본 택시도 한번 타 볼만하다 싶던 게,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더라는 사실. 기사분은 영어를 전혀 못하시는

할아버지셨지만, '지브리스튜디오'하니까 한 큐에 알아들으셨다. '하야꾸하야꾸'하며 조금 채근해볼까 하다가

그게 '빨리빨리'란 말이 맞던가 문득 혼란스러워져서 조용히 창밖만 바라보았다.

지브리 스튜디오 입구! 결국 10시를 십분여 넘기고 말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줄을 선 채 입장 대기 중.

내부에서는 카메라 촬영 금지, 음식물 반입금지, 흡연 금지, 그리고 휴대폰 금지. 휴대폰? 아무래도 요새

휴대폰에 사진 촬영 기능이 기본으로 들어가있으니 그걸 막고자 함인 듯. 스튜디오 내부의 분위기가

외부로 새나가는 걸 꽁꽁 막겠다는 의지가 결연해 보였다.

결국 내부 사진은 한 장도 없고, 그저 하야오가 그린 너무나도 감격적인 원화들과 금세라도 그가 동료들과 함께

다시 앉아 작업을 계속할 것만 같은 작업실의 재현공간, 그리고 곳곳에 수북하게 꽃처럼 피어났던 담배꽁초들의

이미지만 가득한 채 완전 가슴먹먹해져서 옥상 정원으로 올랐다. 옥상 정원에 오르는 길, 마치 아이들 놀이터에서

흔히 보이는 우주선 모양의 뱅글뱅글 계단을 따라 올라야 했다. 온통 담쟁이가 휘감고 있던 그길을 오르는데,

무슨 '천공의 성 라퓨타'를 탐험하는 거 같기도 하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둘러보는 거 같기도 하고.

옥상 정원에 오르면 바로 눈에 띄는 게 바로 '천공의 성 라퓨타'를 지키던 로봇 병사의 모형. 이 녀석이 큰 팔과

다리를 흐느적대며 금세라도 새둥지를 품어주고 아이들의 머리를 친근하고 섬세하게 쓰다듬어줄 것만 같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주위에 대한 사려깊음을 잊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 그의 고개가 사뭇

수그러져 있어서 그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옥상 정원에서 내려다본 지브리 스튜디오 입구. 저기 아까 가슴 두근거리며 줄서 기다리던 그 천막이 보인다.

그리고 한층한층 눈을 뗄 수 없이, 그야말로 온 벽면 전체를 핥듯이 꼼꼼하게 살필 수 밖에 없었던, 여기 그냥

죽치고 자리깔고 살고 싶었던 지브리 스튜디오의 건물. 사방이 온통 초록빛 식물로 가득하다. 이런 곳이라면

지브리가 만들어온 그 온갖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쉼없이 졸졸대며 쏟아져도 이상할 게 없겠다.

하늘 높이 펄럭이는 지브리의 깃발. 하야오와 지브리, 그들의 작품에는 '반딧불의 묘' 정도만 제외하면 국적이

불분명한, 그리고 시대도 불분명한 시공간이 배경이 된다. 갈색머리와 검은머리가 공존하는, 그리고 기계문명과

녹색의 '원시문명'이 공존하는 세상. 지브리 스튜디오의 그 중세 성을 본딴 듯한 깃발이나 온통 녹색으로 휘감겨

있지만 내부에는 나름 기기묘묘한 것들이 숨겨져 있는 것들 역시 그런 것들의 반영일까.

공중 정원은 생각보다 그렇게 크진 않다. 로봇 병사를 지나 몇 걸음 걷다 보면 나타나는 조그마한 오솔길,

그길 끝에는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등장했던 비행석 실물 사이즈의 모형이 나타난다.

만화로 먼저 나타나고 그걸 현실세계에서 실물로 다시 재현한다. 그리고 그렇게 실물로 눈앞에 나타난 비행석의

모형을 보고 나면, 이 세상 어디엔가 천공의 성 라퓨타가 거대한 나무를 의지한 채 둥둥 떠있을 것만 같다.

그 밖의 다른 캐릭터, 다른 공간들 역시 어디엔가 숨어 있을 뿐, 미처 발견치 못하거나 잃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공중 정원에서만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고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건물 내에서만 불가능하다. 공중정원으로

오르는 테라스에 놓인 이런 신기한 벤치라거나, 다른 것들은 찍을 수 있다는 이야기. 이건 그나저나, 다리가

달라붙어 있는 생선이라고 해야 하나, 생선처럼 생긴 강아지라고 해야 하나, 혹은 프로펠러 꼬리가 붙어 있는

4족보행 탈 것이라고 해야 하나. 언젠가 지브리의 만화에서 등장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연예지망생인지도.

지브리 스튜디오의 입장권, 입장권으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지하1층에 있는 조그마한 영화관의 영화표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에서만 볼 수 있다는 지브리의 단편 네 편을 번갈아가며 상영한다는데, 한 20분간의

그 짧은 영화를 보고 또다시 하야오를 우러러보게 되고 말았다. 아 그의 상상력이란. 상상력과 통찰력이란.

그 아름다움이란.

지하 1층에 있는 조그마한 앞마당에 있던 빨간 지붕을 가진 낡은 펌프. 잔뜩 우그러들은 채 정감가득한

물잔이 두 개 놓여 있는 게 너무 귀여웠다. 펌프도, 끽끽 작지만 분명하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조금

펌프질을 하면 물이 진짜로 쏟아져 나온다.

지브리 스튜디오 건물 외벽에서 발견한 조그마한 창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그녀를 도왔던 검둥이

요정들이 바글바글 창문밖을 내다보겠다고 아우성 중이다.

풍경이 매달려 있고, 땔감으로 쓰려는 듯 한 구석에 차곡차곡 쟁여둔 나뭇가지들, 누군가 저 커다란 나무등걸에

땔감용 나무를 대고 도끼질을 신나게 해댈 것만 같다.

끝까지 감탄하게 만드는 지브리. 아, 지브리와 하야오 정말이지 당신들 최고. 마당 가운데의 하수구 뚜껑마저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챙겨주다니 당신들은 정말.

정말, 돌아나오기 싫었다. 이번 도쿄 여행은 사실 지브리 스튜디오를 가고 싶다는 오랜 소원에서 시작되었더랬다.

기념품샵을 이잡듯 뒤지며 지브리 스튜디오에서만 살 수 있을 법한 걸 골랐다. 그의 제작실 벽면을 빼곡하게

장식하던 원화들 복제본이 있으면 아무리 비싸도 한 점쯤 사가겠다 맘을 굳게 먹었는데, 정작 그런 원화를

활용한 엽서나 그림 따위는 보이지 않아 조금 실망. 그렇지만 한국에선 그다지 찾아볼 수 없는 붉은 돼지 관련

아이템들이 좀 보여서 그걸로 얼추 만족하다. 하야오의 작품 중 내가 손꼽는 작품 중 하나, 붉은 돼지.

돼지는 국가나 전쟁 따위 인간의 일에는 관심없어, 라는 붉은 돼지의 시크하면서도 단단한 한 마디.

그리고 지브리 입장권과 마찬가지로 필름을 일부 잘라내어 만들어낸 책갈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몇 컷이

담겨 있었다. 대충 여섯 컷쯤 들어가있는데 이건 뭐 거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아 첫 씬과 마지막 씬의 모습이

뭐가 다른지 모를 정도. 그만큼 부드럽고 섬세한 모션을 구현한단 얘기겠지 싶다.

마지막으로 산 건 지브리 스튜디오 옥상정원을 지키고 있던 로봇 병사의 모습, 미니어처 형태로 명함 따위를

꽂도록 만들어둔 주석 장식품. 사무실에서 날 지켜주셈, 병사님.ㅋ

돌아나오려는데 지브리 스튜디오 앞의 안내원이 머무는 조그마한 안내데스크에 놓인 장식이 눈길을 끈다.

붉은 돼지같기도 한 모양에, 입에서 모기향을 담배연기처럼 울컥울컥 뱉어내고 있던 모습.

돌아나서기가 어찌나 아쉽던지,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공중 정원으로 올라서는 우주선 모양 동글뱅이

계단 위에서 나부끼는 깃발이 보였고, 온통 짙푸른 녹음으로 덮인 고풍스런 건물이 보였고, 그리고

그 안을 가득 채운 하야오와 지브리의 꿈같은 이야기들이 보이는 듯 했다. 말하자면 이 건물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가 새로운 세계와 인물들을 창조해내는 마법의 솥 같은 존재랄까. 그런 경외감.
 
일단은, 당분간 안녕, 토토로. 지브리 스튜디오를 떠나는 길을 배웅해주는 토토로의 뚱하지만 믿음직한 표정.

저만한 사이즈의 토토로라면 눕혀두고 그 배 위에서 잠들어도 될 거 같은데 정말.

다들 마찬가지 심정이었던 게다. 좀처럼 사람 없는 순간을 포착하기 힘들 만큼, 다른 관람객들도 이곳을

떠나기 아쉬워하며 어떻게든 토토로와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려 애쓰고 있었다.





전등사 들어서는 길,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떠올리게 만드는 자그마한 돌문을 사이에 두고 풍경이

바뀐다. 양켠에 즐비한 음식점의 번다하고 소란맞은 풍경에서 싱싱한 초록빛 물감냄새 물씬한 그것으로.

대학다닐 때 수업은 듣기 싫고 어디던 떠나고 싶은 마음에 다 째버리고 혼자 여까지 꾸역꾸역 기어왔던 적이

있었다. 이번 주말처럼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잔뜩 가물어 쩍쩍 갈라진 논바닥같은 소나무 둥치 고랑에

초록빛 이끼가 촘촘하게 올라붙었다.

이걸 한 바퀴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은 효과가 있다지만, 문맹자를 위한다는 명목이 사라진 지금은 아무리 봐도
그건 야매에 가까운 무엇이다. 종교가 현세와 내세의 안녕과 축복을 지켜내는 세련된 기복 시스템으로

타협하면서 일그러진 부처의 메시지는 심지어 그걸 '야매/short-cut' 공덕쌓기용 시주함으로 전락시킨

사람들에 의해 조금 더 상처받은 거 같다.

전등사에 도착. 빤딱빤딱하는 것들보다는 불투명하고 담백한, 그런 이미지의 것들이 왠지 절이라는 공간에

맞춤한 거 같아서, 저런 식으로 반짝거리는 유리창 대신 한지라거나 간유리 느낌의 창이 아쉽다.

시원하게 활짝 제껴진 창문들 사이로 공을 몰고 질풍처럼 드리블하는 바람을 그려보는 걸 보면, 월드컵 시즌.

적당히 보기좋게 퇴락한 단청을 얹은 처마 끄트머리에서 풍경이 짤강거린다. 비온 후 갠 참이다.

목도리처럼 염주를 감고 있는 부처, 학업성취를 다짐하는 동자승, 소림사에서 수행중인 동자승들 틈에서

은근슬쩍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저 洋夷의 아이는 누군고.

전등사 경내의 찻집,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혹해 뒤로 돌아갔더니 장독들이 팀파니처럼 앉아있다.

갈 길을 잃어버린 개미 한 마리. 두 개도 아니고 여섯 개나 되는 더러운 발로 꽃잎을 희롱해대더니 갈 길을 잃고

그대로 멈췄다. 얼음.

너른 꽃잎 벌판을 지나 탱글하게 감긴 채인 꽃송이들 사이를 덜컥거리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개미 녀석의

몸크기에 비기자면, 지금 녀석은 비포장의 시골길을 달려가는 마을버스같은 율동감을 느끼고 있을 듯.

문득 도예 수업 시간에 내가 만들었던 도자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졌다. 굉장히 이쁜 것들 많았는데.

두툼하고 튼튼해 보이는 부리, 다소 우글쭈글하지만 쭉 뻗은 각선미. 휘영청 감아올라간 허리까지.

그냥 초록빛이 넘 좋아서.

빛 조절에 실패한 사진이지만, 왠지 살짝 환타지스런 느낌이 있다. 낡고 오랜 성벽을 꾸역꾸역 말아올리는

악령의 손아귀처럼 덩굴식물이 시커멓게 잠식해 들어가는.

원래 요렇게 밝은 색감이어야 하는데.

이 사진만 보면, 그냥 돌바닥에서 잎사귀들이 하늘을 향해 나무처럼 자라오른 느낌이다.

무더기무더기, 소원을 빌며 사뿐하지만 조심스레 올린 돌멩이탑이라기보다는 그냥 돌무더기.

이건 더 심하다. 쪼개지고 토막난 나무 위로 빼곡하게 돌멩이들이 들어차 있는데, 그냥 누가 포대 가득 차있는

돌멩이를 탈탈 거꾸로 털어서 쏟아부은 듯. 올라앉을 놈 올라앉고 굴러떨어질 놈은 굴러떨어지고. 지 팔자지.

토요일 쏟아붓던 비는 적어도 일요일까지는 문제없다는 기세더니 웬걸.

돌아나서는 길. 누군가는 새롭게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의 '행방불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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