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반양장) - 10점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문학동네


솔직히 그런 책들이 있다. 제목을 워낙 많이 들었거나 그 핵심 아이디어라며 쉽사리 인용되는 한두가지 개념에

워낙 익숙해진 탓에 미처 읽기도 전에 이미 읽었다고 착각하고 마는 책. 예컨대 '빅브라더'같은 단어가 그런

착각을 일으킨다. 하루키의 1Q84를 두고 '아이큐84(IQ84)'라며 이상하게 읽어대는 어떤 문학평론가를 조소하다가,

그러고 보니 나 역시도 하루키가 1Q84라며 비튼 제목의 원전 격이랄 조지 오웰의 '1984'를 여태 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정말정말 굉장히 멋진 책이다. 하루키를 무지 좋아라 하지만, 그의 1Q84는 조지 오웰의 1984과 매우 '다르다.'

그리고 아마 2984년쯤에도 살아남아 찬사를 받을 작품은 조지 오웰의 1984일 거라는 데 걸겠다. 물론 두 작품은

제목 빼고는 별로 주제도, 내용도 겹치지 않으니 굳이 두 작품을 비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굳이 1Q84를

제목으로 내건 하루키가 1984의 문학적 성취를 의식하고 호승심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뭐랄까, 두 번째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 불현듯 마오쩌둥의 '영구혁명론'이 떠올랐다. 사회주의가 성취되기

위해서는 한번의 혁명, 한번의 전복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애써 이뤄낸 성취가 무위로 돌아가거나 후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모든 분야에 걸쳐 근본적인 변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그 '영구혁명론'의 대강인데,

이 책에서 그려지는 1984년의 세상은 그런 영구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세상인 거다. 다만 그 혁명은 위로부터의

혁명, 그러니까 기득권층, 더 적나라하게는 지배계급의 '영구혁명'이라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겠다.


1984년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권력, '빅브라더'는 역사의 흐름을 이해했다, 혹은 이해했다고 믿는다. 권력을 쥔

상층계급에 대항해서 자유와 평등, 정의 따위의 수식을 내건 중간계급이 하층계급을 끌어들여 그들을 전복시킨다.

그리고 중간계급은 상층계급으로 자리이동하고 다시 새로운 중간계급이 생성되어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한다는

식의, 커다란 순환을 무한반복한다는 것이다. 이제 권력은 그 역사의 흐름을 이해했으니 그 지식을 활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영구히 보유하려 한다. 중간계급이 성장하기 위해서 집적되어야 하는 부를 족족 소진시키고,

중간계급을 각성시키기 위한 지식을 황폐화시키겠다는 황당하지만 살벌한 전략. 그게 지배계급의, 지배계급을

위한, 지배계급에 의한 '영구혁명'의 목표다.


듣기엔 우습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다. 온 인류를 먹여살리고 노동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만큼 경이로운 수준에

오른 생산력은 주변국과의 쉼없는 전쟁을 위한 총과 대포를 위해 소모된다. 현재의 세상을 비교하고 평가하기

위한 나침반이자 전거로서 기능해야 할 과거의 역사, 과거의 지식은 매시간 새롭게 씌여진다. 늘 전시체제 하에서

동원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제 전쟁이 없던 시기를 기억하지 못하며, 배급되는 신발과 면도날의 질과 양이

불과 일년 전에 비해서도 양호해졌는지를 따지지 못한다. 그들은 전쟁의 광기에 불현듯 휩싸이면 빅브라더를

위해 만세를 부르며, 집안 화장실마저 감시하는 사상경찰 하에서 억지웃음을 지을 뿐이다.


권력이 자원을 무익하고 비생산적인 쪽으로 소모해버리고 적극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건 2010년 지구에서는 이미 익숙해져 버린 풍경이다. 한국만 해도, 온 국민을 먹여살리고 북녁의 주민들까지

먹여살릴 수 있을만큼의 풍요한 자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굳이 희소하게 만들어 버린다. 전쟁무기를

구매하고 국외와의 불공정한 경쟁에 노출시키며 4대강 같은 무익한 사업에 쏟아부으며 '소모'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와 이데올로기를 만들기에도 게으르지 않다. 권력과 언론간 '반복과 차용'의

근친교배를 통해 사실로 굳어져버리고 마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들. 천안함 사태가 그렇고, G20가 그렇고,

사대강 사업이 그렇고, FTA옹호론이 그렇다. 그 와중에 국내이슈를 덮어버리는 애국 마케팅도 절묘하다.


조지 오웰의 상상력은, 그렇지만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괜히 그를 '디스토피아'의 무시무시한 재현자로

이야기하는 게 아닌 거다. 이들, '빅브라더'를 전면에 내세운 채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춰버리려는 이들은 사회를

통제하고 구조를 고착화시키려 안간힘을 쓸 뿐만 아니라 아예 인간의 사고 자체를 개조하려 든다. 기계에서

자동으로 배열된 몇가지 단어로 짜맞춰진 시와 노래만을 유포하고, '섹스를 더럽게 변질시켜' 억압된 성욕을

전투적인 증오심과 지도자 숭배로 전환시키는 거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사고능력을 둔화시키고 제거하기

위해서 언어 그 자체를 새롭게 정리한다. 어휘를 계속 줄이고 줄여서 생각의 폭을 좁히고, 결국에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기계인간을 만드는 것이 빅브라더가 생각하는 혁명의 완수.


빅브라더의 생각대로 될까.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다양한 동사와 형용사들, 깊은 사고와 반성을 가능케 하는

관념어들이 없어지면, 정말 인간이 변화할까. 그리고 신발깔창처럼 제작되는 노래와 시들이 재래의 예술을

대체하면 인간의 문화는 황폐해지고 말까. 성욕을 억압하면 인간들이 까칠해져버려서 전투적으로 변하고

전시상태의 비인간성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되는 걸까. 전통적 가정을 하나의 상호 감시단위로 변화시킬 정도의

강력한 감시와 통제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수락할 수 밖에 없게 될까.


모르겠지만, 조지 오웰은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고 말한다. 이미 그의 주인공 윈스턴조차 찢겨진 시체의 팔목을

무심히 발로 차내어 버릴만큼 황폐해졌고,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을 곡괭이로 살해하고 말겠다 다짐할 만큼 살벌하다.

결국 지독한 고문과 자기 부정을 거쳐 윈스턴이 빅브라더를 사랑한다 고백하는 최후의 순간에 이르면, 오웰의

예측은 옳은 것이었다고 동의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고 마는 거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런 상황에까지 몰리면

인간은 멸종하고 말겠구나, 역사는 멈추고 말겠구나, 기껍지는 않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게 단순히 조지 오웰의 '사고 실험'이었으면 좋겠다. 아직 어떤 권력도 빅브라더만큼 철저하게 국민들을

통제한 바 없으며, 언어를 조직적으로 퇴화시키는 건 고사하고 문화와 사생활과 사고방식을 규율하고 억압한

적은 없다고 믿고 싶다. 그렇지만 불길하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간 신체에 대한 구속력-생체권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해졌고, 국가와 자본주의의 동학 내에서 대중문화는 스스로 천박해진지 오래다. 전신을

스캐닝하고 개인정보와 생체정보를 집적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란 너무 쉬워졌다. 민주주의의 이름을

팔아 하향평준화를 강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자기 성찰과 반성적 사고를 단련하기 위한 시간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슈들에 선점당한다고 느낀다면, 너무 시니컬한 건가.


다행히 아직은 그렇게까지 위태롭지 않다고 해도, 조지 오웰의 이 암울하고 염세적인 이야기는 여전히 값지다.

자연스런 흥망성쇠의 역사 흐름을 멈춘 채 현재의 지위와 특권을 영원히 장악하겠다는 그들 권력자들의 욕심은,

조지 오웰이 그 결과로 그려낸 세상은 낯설지언정, 그 욕심 자체는 지독히도 진부하고 익숙한 거다. 그들은

언제고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며, 그들을 위해 유리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를 강권한다.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 아닌가. 4대강은 운하가 아니고, FTA는 모두에게 유리하며, 아랍인은 테러리스트이고, 미국은 영원한

우방이자 세계경찰이고, 그리고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란 이야기.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다. 2+2=5, 라디오헤드의 이노래가 1984의 이 대목에서 비롯한 건 아닐까.

이제 끔찍해질 거야, 도망칠 곳은 없어.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쳐도 이제 너무 늦었어.


Are you such a dreamer
To put the world to rights?
I stay home forever
Where two and two always makes up five

I lay down the tracks
Sandbag and hide
January has april′s showers
And two and two always makes up five

Its the devil′s way now
There is no way out

You can SCREAM IT, you can shout
It is too late now

Because...
You′re not there!

payin′ attention
payin′ attention
payin′ attention
payin′ attention
You have not been paying attention

paying attention
paying attention
WHEN I SAY SOON oohh

I try to sing along
But I get it all wrong
′Cause I’m not
′Cause I’m not

I swat ′em like flies but like flies the buggers keep coming back NOT
But I’m not

All hail to the thief
All hail to the thief

But I′m not
But I′m not
But I′m not
But I′m not

Don′t question my authority or put me in the box
′Cause I′m not
′Cause I′m not

Oh go and tell the king that the sky is falling in

When it′s not
But it′s not
But it′s not
Maybe not
Maybe not

'공기인형' 리뷰는 기네스 병맥주를 사서 마시고는 그 딸랑이는 것의 정체를 찍은 사진을

포스팅할 때까지 미뤄둬야겠다, 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런 영화를 보고 나서 바로 잠드는 건

역시 못할 짓이다.


노조미가 처음으로 밟은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발견한 달그락대는 병, 아마도 기네스 병맥주일

그 이미지만으로 이 영화는 응축될 수 있다. 별 다를 거 없는 그 유리병은 조그마한 구슬 하나를

안에 꼭 품고 있다. 고작 조그만 구슬 하나가 더 들어있을 뿐인데, 그 존재로 인해 오히려 유리병

속이 텅 비어있음이 더욱 부각되는 거다.


유리병을 꽉 채우지도 못하고 절겅절겅 소리만 내는 구슬, 사람의 마음이 딱 그렇다. 존재를 꽉

채워주지도 못하면서 그 '결락감'만 더욱 부각시키는, 도무지 쓸모를 모르겠는 '맹장'같은 녀석.


마음이 생긴 공기인형이 바라보는 세상은 누군가가 누군가의 대용품이 되는 세상이다. 그것은

그녀가 늘 스스로 '나는 공기인형,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대용품'이라고 아프게 되뇌여왔다는

점에서, 스스로의 처지로부터 비롯한 날카로운 시선이다. 그녀가 그렇게 보이는 세상에 마음

아파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옛 여자친구를 잊지 못하고 섹스돌에 그녀 이름을 붙인 채 인형놀이에 열중인 아저씨,

자동응답기에 녹음해둔 자신의 목소리와 대화하며 스스로를 위안 중인 아가씨, 젊은 시절

학교에서 대리교사로 일했던 할아버지, 자신의 가게에서 일하는 여직원을 세탁기 위에서

겁탈하는 사장님..심지어는 공기인형 그녀가 마음을 주려는 남자조차 그녀를 옛 여자친구의

대용품으로 여기고 있다.


어쩌면 그녀의, 또 나의 과잉한 반응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집에 여전히 간직된

옛 여친의 사진들, 옛 여친이 썼던 헬멧의 긁힌 자국, 자신도 공기인형과 비슷하다는 그의 고백,

그녀의 바람을 뺐다가 넣었다가 하고 싶다며 그가 아무 설명없이 요청해왔던 것들 모두

'공기인형 그녀는 그의 옛 여친 대용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공기인형 그녀의 바람을 뺐다가 넣다가 하는 건, 그야말로 옛 여친에 대한 그의 욕구를

극적으로, 그리고 지독히도 이기적으로 해소하는 방식 아닐까. 떠난 옛 여친에 대한 복수심

-죽어라죽어라 하는-인지, 반대로 아마도 죽어버린 옛 여친을 살려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야말로 공기인형을 통해서만이 해소할 수 있는 그의 욕구. 적어도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배려하는 행위는 아니었다. 그걸 왜 하고 싶은데, 라는 그녀의

질문에 우물쭈물 답하지 못했던 그의 흐트러진 눈빛만 봐도 뻔하다.


그녀가, 인간의 마음이란 게 꼭 '대용품 or not'으로 칼처럼 갈리는 게 아니란 걸 깨달은 후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쉽게 분별증류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게 마음이란 걸 깨달아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이미 훌쩍 자라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를 품어줄 만큼, 비록 그녀의 숨으로 그를 살릴

수는 없을지언정, 그녀가 어쩌면 그보다 성숙한 마음을 갖게 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는 아직

미처 인정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공기인형 그녀에 대한 '사랑'을 그녀는 그의 마음 속에서 발견해냈다.


한때 그녀의 주인이었던 남자는 말한다. 마음이 없던 때가 좋았어, 그때로 돌아와주지 않을래.

글쎄. 그저 자신의 욕망을 쏟아붓고 돌아서 화장실에서 씻어내면 그만이었던 그때를 말하는 거라면,

당신이 쭈그려앉은 모습은, 섹스돌을 껴안고 말을 거는 모습은, 왜 그리도 불행해 보였던 걸까.


'마음이 생겨난다'는 표현, 그야말로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는 거다. 어느날 문득 공기인형이 눈을

깜빡이며 몸을 움직이듯, 누군가를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이란 건 한순간에 번쩍

생겨난다. 비록 그 마음이 꼭 충만하고 행복한 순간을 약속하는 건 아니라지만,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괴롭고 쓰디쓴 경험만을 불러 오겠지만, 그건 텅빈 유리병들 틈에서 스스로를 구분짓는

'가능성'이자 '축복'에 가까운 무언가다.


영화를 보는 시각에 따라서, 영화는 밝을 수도, 혹은 지독히도 어두울 수도 있을 거 같다.

아마도 그게 '마음'이란 녀석이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할 거고. 그 녀석은 그저 그림자도 투명한

'공기인형'들 틈에서 잘그랑잘그랑, 나 여기 있다고 소리내고 있을 뿐이다.



수십명 남녀의 난교, 여성의 자위, 남성의 아크로바틱한-스스로의 입을 사용한-자위, 남자들/여자들의 동성애, 남자들의

쓰리썸, 관음증에 S/M까지. 왠만한 성인영화나 포르노물에서도 한꺼번에 다루기 힘든 소재들이다.

그런 이슈들을 한꺼번에 다룬 '발칙한' 영화, 그래서 한국에 수입될 때 이런저런 말들도 많고 제약도 적잖았던 영화,

숏버스. Short Bus. 숏버스란 '능력있고 결함있는' 자들을 위한 뉴욕의 어느 모임 공간의 이름.


제이미와 제임스를 넘나드는 주인공 남남 커플의 이야기가 중심축이랄 수도 있겠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겨졌던

장면은 스무살 어간의 뽀송뽀송하고 아름다운 청년-그것도 모델출신-이 숏버스에서 어디선가 많이 본, 낯익은 할배와

조우하는 장면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요?" "그럴 수밖에, 내가 뉴욕시장이었으니까."


희끗희끗 헐벗은 머리에 쭈글쭈글한 얼굴을 가진 그 뉴욕 전 시장 할아버지는, 알콜 기운도 없이, 맨 정신으로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물론 한쪽 방에선 벌거벗은 젊은 남녀의 난교가 질펀하고, 대마 연기 자욱하게 피어올려지는

공간에선 여지없이 남녀/남남/여여/혹은 '창의적인 방식'의 교합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와중이긴 하다.) 자네는 무슨

잘못을 하고 여기에 왔는가. 별거 아닌 거였겠지. 고향이란, 자신의 정서적 보금자리라 여겨지는 고향이란, 때론 무지하게

가혹하고 냉엄해질 수 있다네. 그게 뉴욕처럼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오랜 것을 존중할 줄 아는, 세상에

몇 남지않은 해방공간이라 해도 말일세.



잘못이란 건, 자신이 저지른 것일 수도, 혹은 누군가 무엇인가 자신에게 각인시켜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뇌와

클리토리스를 연결해 오르가즘을 만들어낸다는 일종의 마법회로처럼, '나'와 '내가 느끼고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알기
 
힘든 블랙박스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제임스(혹은 제이미)는 어렸을 적 아버지의 성적

가혹행위나 매춘의 트라우마 때문에 사랑을 돌려주지 못한다. 외견상 문제될 게 크게 없는 커플 상담가/섹스 카운셀러

유부녀는 엄격한 동양적 가정교육과 아버지의 도착적이다시피한 감시로 인해 정작 오르가즘을 못느끼는 석녀란다.

새디즘을 만끽하며 가죽옷과 채찍에 탐닉하는 '제니퍼 애니스톤'은 정작 자신의 이름조차 철저히 숨겨온 여리고

상처투성이인 영혼일 뿐이고, 주인공이랄 남남 커플의 일상을 쉼없이 따라가는 스토킹행위로 관음증적 욕망을 해소하는

맞은 편 집의 남자는 사실 사랑하는 남자의 손을 잡는 것조차 숨막혀 하는 순둥이다. 그런 식이다. 뭐 때문에 뭐, 이렇게

단선적으로 말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백퍼센트 자신의 모자름이나 부족함 때문이라 말하기도 힘든 상황,

그래서 블랙박스, 마법의 회로일 게다.


섹스야 제각기 침대 속의 내밀한 이야기이듯, 사실 이 영화에서 각자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블랙박스'의 해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은 자살시도라는 격하고 돌출적인 행위를 통해,

혹은 반편향의 과도하고 도발적인 성적 탐닉을 통해, 혹은 스스로 흘러내리는 껍질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등의 방식이 있겠지만, 해결책이야 각자가 꼬여있는 방식이 다른 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고, 심리적인 문제가 으레 그렇듯

겉으로 드러나는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거다. 제각기의 방식으로 제각기 맞닥뜨려야 할 문제.


정작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건 그들이 문제에 직면하는 방식이었다. 뉴욕의 시장이었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중후한 연세의 '아저씨', '아줌마'이든, 남녀노소 미추를 불문하고 각자의 '계급장'과 '사회적 자본'들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막혀버리고 뒤틀려버린 감정선을 되찾겠다 나서는 것, 그리고 전 뉴욕시장 할배가 그랬듯 얼마나

나이가 들었고 외부의 평판을 쌓아놨던 간에 스스로의 결핍과 부족함을 자인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 그건 '여태 경험치

못한 오르가즘을 되찾는 모험'일 수도,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는 무작정한 몸부림(자살까지 감수하는)'일 수도,

'한평생 쌓아올린 경력과 평판보다 스스로의 가치와 취향을 지켜내려는 자존감의 싸움'일 수도 있는 거다.


그럴 수 있을까. 성적 쾌락에 대한 탐닉과 '비정상'적인 성적 취향, 성적 흥분의 인과를 차갑게 이야기하기 이전에, 그렇게

벌거벗은 상태로 스스로를 응시하고 자신의 감각에 충실한, 결국은 스스로의 자존을 지켜낼 수 있는 용기를 지켜내고
 
있을까. 그 시험대가 대마초 연기 자욱하고 아마도 땀내와 정액냄새 질펀할 그런 공간이란 건 딱히 중요치 않다. 오히려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억눌리고 비틀린 욕망을 마주할 수 있는 근본적인 곳이란 '그럴듯한 포장'도

가능할 거고, 간단하게는 그저 '어디라도 상관없었다'라는 식의 빗겨나감도 가능할 거다. 어디서든, 그게 성당의 고해소가
 
되었건 사랑하는 이의 품속이 되었건 온갖 욕망과 희열이 둥둥 떠다니는 성적 해방구가 되었건, 스스로를 외면하거나
 
치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면 되는 거다.


아마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을 의식한 듯한 그 할아버지 캐릭터는, 그런 혼몽하고 '난잡한' 분위기에 자신을 맡겨버리고

멍하니 휩쓸리지 않고 되려 중심을 잡은 채 스스로를 건져내고 지켜내러 그곳에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에서 그 궤적을

좇는 다른 몇몇 젊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단순히 살색 그림-검은색이던 분홍빛이던 노란색이던-만

노출되었던 다른 수많은 영혼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중심을 잡으러 왔는지 휩쓸리러 왔는지. 그것 역시 실은 지극히도

개인적인 영역,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왈가왈부할 수 없는 영역인 게다.


다만, 나이가 몇이 되었건 사회적 지위와 성취가 어찌 되었건, 그들은 뭔가를 찾으러 왔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찾으러

움직일 만큼의, 그리고 필요하다면 이것저것 다 벗어제낄 만큼의 용기와 결단력이 있다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게 꼭 섹스여야 하는지, 동성애나 SM이나 관음증이나 쓰리섬이나 난교여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스스로의

결핍과 결락감을 인정하고 새롭게 (되)찾으려 드는 그들의 움직임은 단순한 육체의 리드미컬함은 아니었다.


사실 또 개인적으로는 그렇게도 생각한다. 꽤나 멀리, 그리고 이상적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인간의 이른바

'시초축적'이 시작되고 역사가 시작된 건, 자유로운 성욕을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이데올로기로 비끄러매면서부터

비롯한 건 아닐까 하고. 사랑할 만큼만 먹고 살면 되었을 세상이, 누군가를 먹여 살리고 안정적이고 반영구적인 잉여를

남기기 위해 사랑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어 버린 건 일종의 비극일지 모른다고.


총구에 장미꽃을 일일이 꽂아주었던 68혁명의 정신, 히피의 정신이란 게 그런 건 아니었을까. 생명살상을 위한 총알이
 
발사되는 총구가 상징하는 차갑고 흉폭한 남성성에 여리고 섬세한 장미꽃, 사랑이 피어나는 순간. 그걸 가능케 하는

세상의 몇 남지않은 해방공간, 개인적으로도 직면하기 쉽지 않은 자각의 순간, 다 벗어던지고 알몸의 스스로를

새삼스럽게 쳐다볼 수 있게 해주는 '숏버스'.
 

거긴 머물러 살 곳은 아니지만, 최소한 잊지 않고 가끔씩 들러줘야 하는 공간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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