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박스의 2012 시네마 리플레이. 작년에 개봉한 좋은 영화 10개를 모아 한번씩 더 상영한다는 기획이다.

 

저번주 멜랑콜리아에 이어 봤던 건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그대로

 

영화속 영화의 소재가 되고 영화 자체의 주제가 되었으며, 끝내 감독 알랭 레네와 합일하기에 이른 거 같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못했다. You Haven't Seen Anything Yet, 2012

 


 

오르페우스 신화는 다들 알겠지만. 류트를 연주하는 예술가 오르페우스가 사랑하는 그의 아내를 죽음의 신으로부터

 

구해오려 하데스 앞에서 연주를 하곤 그를 감동시켜 아내를 구출해 오다가, 세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따라오는 그녀를

 

보지 말라는 금기를 깨버리고 영영 아내를 잃어버린다는 이야기.

 

 


거기서 취할 수 있는 지점들은 다양하다. 오르페우스와 아내의 지극한 사랑, 금기를 깨버리는 그의 불안... 혹은 불신,

 

죽음의 신까지도 감동시켜 이겨낼 수 있는 예술의 힘(혹은 끝내 아내를 구하는데 실패했으니 최종적인 실패를 말하는지도

 

모른다)...그 하나하나 영화의 주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판에, 그 이야기를 모두 아우르고 게다가 영화적 문제의식마저

 

녹여내는데 성공했달까.

 

 


기억과 상상의 힘으로 시공간을 극복해왔다는 알랭 레네는 익숙한 영화적 문법과 상식을 줄곧 파괴하며 영화속 현실의 틈새에

 

분절된 시간과 공간을 촘촘이 박아넣는다. 아마 그는 영화예술의 오르페우스가 되고 싶었던 거 같다. 자신의 영화로

 

지난 시간과 기억을 구원해내고, 그러나 끝내 실패하여 죽음이 도래하는 그런 반영웅담 혹은 비극.

 

 

 

지인의 평이 그랬듯,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비관과 좌절에 대한 영화가 이렇게 아름다울줄이야."


예술이 가진 힘이란 뭘까, 예술 중에서도 영화예술로 가능한 자유로움의 한계는 어디까지이고, 그건 과연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아마 이 영화는 그런 오랜 화두에 대한 구십살 노장의 단단한 비관에 발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두 명의 남자, 두 명의 여자가 있다. 그리고 첫눈에 반한 네 개의 사랑이 있다.

 

 

#1. 첫번째 남자. 사랑이란 '상대'라는 책을 남김없이 읽고 이해하 것이라 믿는다.

 

우선 쥬드 로가 연기한 댄. 그는 자신이 매력있다는 걸 아는 남자다. 처음 만나는 여자에게 자신의 매력을 자연스럽게

 

발산하고 상대를 끌어내는 방법을 아는 사람. 그에게 포섭된 건 두 명의 여자였다. 먼저 그가 손에 넣고 싶다 생각한 건

 

앨리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발판삼아 만나게 된 안나. 두 명의 여자 사이를 진동하며 그는 자신의 소유욕을 한껏

 

채우려 든다. 맞다. 그의 사랑은 소유욕의 형태를 띈다. 상대에 대한 자신의 관대하고 진실한 사랑을 과시하려 들면서

 

상대가 자신에게 완전히 무장해제한 채 앞에 설 것을 요구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마음 밑바닥까지 검열하고

 

타인의 흔적을 지우거나 공유하려 한다. 감내할 수 있을까. 그녀, 그리고 그가.

 

 

때로 그렇다. 끝내 견뎌내지 못할 '진실', '진심'을 알고 싶다며 지나간 사랑 이야기를 채근하거나 옛 애인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어보는 불퉁맞은 심술이 있다. 그게 심술을 넘어 내 안의 불안감과 결벽증으로 발전한다 싶을 때도 있다.

 

우리의 사랑이 아름답기 위해서, 완전하기 위해서는 마치 백퍼센트의 순금을 정련하듯 당신과 나의 마음 속에서 티끌과

 

부스러기들을 모두 쓸어내야 한다는 강박이다. 당신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이 맹렬히 불붙었을 때, 당신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쌍끌이 어선으로 샅샅이 긁듯이 읽어내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의 발현이기도 하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게 상대를 남김없이 알아야 한단 건 아닌데, 사랑을 시험에 들게 하는 무모한 짓을 벌이고 말았다.

 

 

 

#2. 두번째 남자. 사랑이란 적당한 스킬과 경험치로 쌓아올려진 섹스와 비슷한 것이라 믿는다.

 

클라이브 오웬의 래리. 그는 여자의 마음을 잘 아는 남자다. 어떻게 해야 여자가 웃을지, 어떻게 해야 여자를

 

안심시킬 수 있을지, 그리하여 어떻게 해야 여자가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남자를 연기할 수 있는지 아는 남자다.

 

그렇게 댄으로부터 안나를 끝내 되찾아오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는 여자의 마음을 잘 아는 척,

 

사람의 마음을 잘 아는 척 하지만 정작 앨리스가 그녀의 본명을 말할 때조차 그 진심을 읽어내지 못한다. 사실 안나를

 

되찾아 온 것도, 안나의 마음을 읽어서라기보다는 같은 남자인 댄의 조바심을 읽고 상처를 예비했기에 가능했던 거니까.

 

 

아는 척 하는 남자. 선수인 척 하는 남자들, 그리고 여자들이 꽤나 있다. 연애를 많이 해봤다느니, 이럴 땐 이렇고

 

저럴 땐 저러면 된다는 식의 일반론들. 전부 시덥잖다. 래리가 그런 재기발랄한 몇 마디 말들로, 시의적절한 이벤트와

 

감동을 안길 수 있는 멘트로 상대의 마음을 얻었던 건 잠시뿐, 그조차 상대의 마음 깊은 곳은 미동도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 허랑한 지식이니 얕은 경험 따위를 양손에 쥐고 요리할 수 있는 상대란 없는 거다. 래리에게 부족했던 건 뭘까,

 

그는 여자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려고 한 게 아니라 아는 척 연기했던 거 아닐까. 그가 집착하는 '섹스'를 위한 지름길이라

 

여기며 스스로 감탄할지 몰라도 그의 옆에 남은 여자, 안나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3. 첫번째 여자. 사랑이란 자칫 방심하면 자신이 다치는 불, 어느때고 꺼버릴 준비가 필요하다 믿는다.

 

나탈리 포트만, 그녀가 연기한 앨리스 혹은 제인. 그녀는 누굴까. 그녀는 댄을 진짜 사랑했을까, 래리도 사랑했던 걸까.

 

뭐 하나 쉽지 않다. 그녀의 이름. 왜 본명을 숨겼을까. 그저 순간의 장난이었을지도, 잊고 싶던 과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이상 사랑하지 않아, 잘 있어"라는 말로 상대가 더는 말도 못 붙이게 하고 떠나버린단 말. 어떻게 그렇게 모질 수 있을까.

 

그건 흔한 말로, 이전 사랑의 상처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냥 그녀만의 사랑법일 뿐인지도 모른다. 댄에게 그녀가 이별을

 

선언할 때는 이 말을 덧붙였었다. '난 평생 널 사랑하려 했는데.' 진심일 수도 있었을 거고, 혹은 미안함의 발로였을 수도.

 

진심이라기엔 끝내 숨겼던 그녀의 본명이 걸리고 '진실'을 강요하는 댄의 익숙한 유치함을 참아주지 않은 게 걸린다.

 

 

문득 비약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사랑에 빠지길 겁내고 있는 건 아닐까. 언제라도 한발 뒤로 뺄 구석은 남겨두고,

 

본명 뒤로, 사랑하지 않는단 야멸찬 선언 뒤로 숨을 준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남자와 희롱하거나 댄과 이야기할 때의

 

그녀는 사랑을 비웃고 쿨한 척 굴지만, 그건 일종의 징후다. 그녀는 분명 사랑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 영리한 척 어리숙한

 

남자 둘보다 훨씬 더. 첫눈에 반한 사랑이 숙명이라며 안나와의 '바람'을 정당화하려는 댄에게 그녀가 한 말, '사랑은 순간의

 

선택'이란 말의 노회함이라니. 그렇지만 정작 그녀야말로 사랑을 많이 아는 만큼 겁내게 되어버렸고, 끝내 뜨뜻하게 즐길 수

 

있는 정도의 사랑만 취하고 떠나는 사람이 된 건 아닐까. 여전히 마음은 시리고 문득 눈물로 무너져내릴지언정.

 

 

 

#4. 두번째 여자. 사랑이란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면 그뿐, 운명이라 믿는다.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한 안나. 그녀가 댄과 래리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을 보고 살짝 답답증이 일었던 것은, 대체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 건지 분명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댄에게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을 느꼈으며, 또한 래리에게서

 

또다른 매력과 호감을 느꼈다. 어떤 걸 사랑이고 어떤 건 사랑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약간은 도발적이고 위태로운

 

관계, 그리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관계로부터 비롯했을 뿐 두 가지 모두 사랑이라 하면.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두 개의

 

사랑 중에서 무엇을 택하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그저 둘다 갖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데 혐의를 두는 게 낫겠다.

 

 

어쩌면 그녀는 앨리스(혹은 제인)와 정반대의 애정관을 가진 인물, 그녀에게 사랑은 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자연스레

 

다가온 운명이며, 감히 먼저 거부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운명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렇게 두 조각난 자신의 세계를

 

가까스로나마 보호할 수 있을 거다. 댄의 세계와 래리의 세계, 두 세계가 합쳐져야 그녀에게 완전하니까. 그 두 세계

 

어디에도 완전히 투신할 수 없는 그녀, 선택을 강요받는 지경에 이르러 댄이건 래리건 누군가의 옆에 머물게 되었지만

 

이미 그녀는 조각난 세계 앞에서 자신의 사랑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                                                             *                                                           *

 

그래서, 두 명의 남자, 두 명의 여자가 만들어낸 네 가지의 사랑이야기는 모두 비극이다. 그게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

 

첫눈에 반한 사랑이었다 믿어지던, 혹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누군가를 향해 열었던 마음이었던, 결국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방식의 사랑을 쌓아올리다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사랑이 어디에 이르러 하트 모양의 공을 터치다운해야

 

비로소 성공하고 완성된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모든 건 사랑에 빠지기로 '순간의 선택'을 하고 나서 '당신'이라는 거대한 블랙박스 앞에서 자신이 가진

 

최대한의 지식과 지혜와 경험치를 살려서 그 드문드문한 신호들을 해독해 보려 애쓰면서부터 예정된 비극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침묵이, 당신의 웃음이, 당신의 손짓이 가진 알 수 없는 뉘앙스와 의미에 겁먹지 않고 내게 친숙하고 익숙한

 

것으로 바꿔보려는 시도는 대체로 오해와 균열을 낳고 만다.

 

 

사랑을 한다는 건 서로 완강히 뻐팅긴 채 멀어지려는 직선 두개를 잡아매두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한땀한땀, 두꺼운 무명실을 대바늘에 꿰어 직선 두개 허리춤에 둘둘 묶어서 촘촘하게 바싹 붙여두는 식이랄까나.

 

그건 시지프스의 신화에 비견될만큼 지난하고 고단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어쩌나.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게 사실이고

 

사람이 사랑없이 살 수 없는 게 사실이라면, 허리춤이 아니라 속고쟁이라도 잡고 늘어져야지.

 

 

왠지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소라의 노래 가사 한 대목이 떠오른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바람이 분다, 2004)

 

네 명의 사랑 이야기가 비극적이란 점에서 이렇게도 한결같을 수 있구나, 싶어서일까. 또 이야기의 처음과 끝이

 

이렇게도 다를 수 있구나, 싶어서일까. 또, 결국 Hello, Stranger로 시작한 영화가 Bye, Stranger로 끝나는 거 같아서일까.

 

 

영화는 짧았지만 생각이 한없이 늘어진다. 한번 보고, 다시 또 보고, 그러고 나서도 할 말이 정제되지 않아 이렇게

 

길어지다니. 영화의 여운도 여운이지만 노래 탓도 크다. 요새 잠들기 전 꼭 한번은 듣고 잠드는 노래.

 

 

 

 

 

And so it is
Just like you said it would be
Life goes easy on me
Most of the time
And so it is
The shorter story
No love, no glory
No hero in her sky

당신이 말한 대로 되어 버렸죠.

대부분의 시간, 나는 인생을 편하게 받아 들이게 되었죠.

그건 아주 짧은 이야기죠.

사랑도 없고, 영광도 없고,

그녀의 하늘에는 영웅도 없는,

짧은 이야기..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당신에게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당신에게 눈을 뗄 수가 없어요.


And so it is
Just like you said it should be
We'll both forget the breeze
Most of the time
And so it is
The colder water
The blower's daughter
The pupil in denial

그래요.

당신이 말했던 것 처럼,

대부분의 시간에는

우리 둘 다 그 소문들은 잊어야 할 거예요.

그래요.

차가운 물.

허풍쟁이의 딸.

부정하는 눈동자..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당신에게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당신에게 눈을 뗄 수가 없어요.

 

Did I say that I loathe you?
Did I say that I want to
Leave it all behind?

당신이 싫다고, 내가 얘기 했었나요?

내가 말했었나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나 버리고 싶다고..


I can't take my mind off o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o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you
I can't take my mind..
My mind...my mind..
'Til I find somebody new

내 마음을 당신에게서 뗄 수가 없어요.

내 마음을..내 마음을..

새로운 누군가를 찾을 때 까지는요.

 

 

 

 

#0. 하녀의 탄생.

광고전단을 나눠주던 아주머니는 한 걸음에 한 장씩 바닥에 슬쩍슬쩍 '흘리기' 시작한다. 싸구려 수족관같은

노래방 건물 안의 여자아이들은 마이크를 꼬나쥐고 담배를 꼬나물었고, 막다른 골목길에서 담배를 숨가쁘게

땡겨 피우던 아주머니는 서둘러 손을 털고 가게로 돌아간다. 건물 옥상에서 아래까지의 높이를 가늠하던

여자는 담뱃재나 광고전단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시 아주머니는 광고전단을 흘렸고, 아이들은 마이크에

소리소리 질렀으며, 담배는 빨갛게 타올랐다.


어지러이 바닥에 엉겨붙은 광고전단들과 함께 그려진 그녀의 빨간 흔적. 아마도 그게 '하녀'의 탄생 배경.


#1. 아더메치+유, 돈과 뻔뻔함으로 지탱되는 세상.

거대하고 견고한 성 안으로 편입한 그녀는 기꺼이 스스로의 의지를 반납하곤 몸과 마음을 내맡긴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 찾아든 그 곳 어딘가에선, 자신 역시 그 성의 성주인 주인 내외와 같이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단단하게 반짝이는 대리석 마루바닥을 밟고, 우아하게 입을 헹구듯 고급 와인을 맛보며,

모든 사람들을 한껏 내려보며 살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또 그렇게 살고 싶단 욕망에 충실하고자 한 거다. 이미 전례가

있지 않은가. 국자를 쥔 채 주방을 점령한 조여사 말이다. 주인 내외가 장악하지 못한 공간을 차지한 채 그들을

흉내내는 재미에 흠뻑 빠진 '아더메치+유'의 아주머니. 당장 전도연 그녀의 삶도 주인 내외와 닮아간다.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꺼우며, 치사하다. 그렇게 외치면서도 그 성을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다. 가오잡힌

스탭이 엉켜 볼품없이 비틀거릴지라도, 검사 아들을 만들어낸 '인간승리의 조여사'가 하잘것없는 시정잡배 아줌마로

천대받을지라도.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사람들, 이라고 뒤에서 욕할지언정 앞으로는 공손히 봉투를 건네받는다.

그래서 유치하다. 어쩌면 그들, 주인 내외를 떠받드는 그들이 더 나쁜지도 모른다. '아더메치'에 더해 유치하기까지.

아더메치유, 란 단어는 그런 식의 호가호위에 어울린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주인 내외에 대한 비난은, 그래서

뻔뻔하다.


#2. 아더메치, 그렇지만 뻔뻔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녀는 차츰 돈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에 익숙해진다. 원했던 원치 않던 그녀는 과거의 너저분한 광고전단같던 그녀의

삶을 떠나버렸다. 새로운 삶의 방식은, 선택이랄 것도 없이 하나 남았을 뿐이다. 그녀가 모시는 주인 내외야말로

약육강식 세상의 정점에 선 사람들, 그런 그들과 같은 저택에 머물며 '보통 사람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그들의 삶을

지탱하며, 돈으로 해결되는 세상 속에 한 배를 타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 세상은 결국 그녀를 배반한다. 그녀가 그 세상을 배반한 게 먼저일지 모른다. 처음엔 마냥 고압적이고

근엄하게만 보이던 대저택과 주인 내외가 조금씩 우스워지고 허술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고처럼 덜컥

생기고 말았던 아이 때문만도 아니고, 남편의 외도로 인간적인 흔들림을 보이고 만 아내의 잘못만도 아니고, 주인집

아이의 맑은 눈망울 때문만도 아니다. 그저 어느 순간 그들이 죽어라고 손에 꽉 쥔 가면이 보였을 거고, 결코 그다지

즐겁다고만 할 수는 없는 가면놀이가 보였을 거다. 완벽해 보였던 남자가 하룻밤을 무마하는 화댓값을 건냈을 때처럼.

그래서 배신감을 느끼고 동시에 우습고 역겨워졌을 거다.


#3. 저택, 사람들의 일용할 허영심.

우스운 세상, 그녀는 횃불이 되고 말았다. 뻔뻔하지 못해서 횃불이 되었다. 자신 역시 진흙탕에 뒹굴렀으니 순교자는
 
아니었으되, 최소한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스스로를 되찾는 방법이었다. 그녀 역시 '아더메치'에 더해 '유치함'까지

갖췄던 그 저택의 부속이자, 호가호위의 여우였다. 다만 끝까지 뻔뻔하지 못했다는 게 그녀가 허물어진 이유라면

이유일 거다. 그래서 주인집 아이의 눈망울을 이겨내지 못했고,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모성애적(?)' 본능을

이겨내지 못했고, 돈 몇푼으로 쇼부쳐 보겠다는 알량하고 빤히 보이는 주인집 사람들의 속내를 알고도 모른 척
 
넘겨내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 횃불이 되어 그 거대한 저택을 정화한다. 저택, 그 저택은 주인 내외의 욕망을 남김없이

만족시키고 과시하기 위한 거대한 전시장이자 그들을 뒷받침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용할 허영심이었다. '허위의식'

그 자체라고 칭할 수도 있을 만큼, 저택은 단단한 실체감을 가진 채 숭배자들의 동경심과 동일시되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 횃불이 되어 그 허위의식을 불사르고자 한 건지도 모른다.


#4. 악성 종양처럼 건재한 그들의, 우리들의 욕망.

감독은 시니컬하다. 충격적 결말 이후에 더욱 씁쓸한 에필로그를 굳이 덧붙인다. 주인 내외의 이전 저택은 전도연의

세례로 온전한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악성 종양처럼 다른 곳으로 옮겨와 건재하다. 그들의 저택은

돈으로 사면 되고, '조여사'의 대용품 역시 돈으로 사면 되고, 그들에게 필요한 뻔뻔함 역시, 돈으로 사면 되고.

필요하다면 언어 역시 언제든 한국어에서 영어로 바꿀 수 있다.


더욱 나쁜 건 전도연에게 울림을 전했던 맑은 눈망울의 주인집 아이가, 서투르게나마 샴페인 잔을 쥐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점. 전도연이 마지막으로 마음을 담아 이야기했던 그 아이 역시, 저택으로 '용해'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마음이 철렁했다. 이미 그 아이의 눈매는 텅 비어 있었다. 돈을 의식하고, 뻔뻔함을 장착하고.


결국, 전도연에게 부족했던 건 돈 뿐 아니라 뻔뻔함이었던 걸까. 돈으로 세워진 그들만의 리그, 그 옆에 바싹 붙어

호가호위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스스로에 돌아올 칼날같은 자책을 피하려 허공에 대고 빈주먹을 흔들며

'아도메치' 따위 외쳐보아도 마음 한구석쯤은 찜찜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다. 같이 '아도메치'해지며 더군다나

'유치'해지고 있음에 대한 자각 증상 따위, 끝내 눈돌리고 모른 척 할 수 있는 자만이 살아 남는다.


#5. 다시금 하녀의 탄생을 되짚다.

하녀는 광고전단지의 운명을 거부하려고 했다. 하룻밤 구역질처럼 토해지고 다음날 아침이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광고전단과 같은 삶이 아니라, 피둥피둥하고 축 늘어진 '프롤레타리아'의 살과 비비적대는 삶이 아니라, 팽팽하고

잘 관리된 '부르주아'의 살을 맞대고 그들과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누가 뭐랄 수도 없고 딱히

잘못되었다 말할 수 없는,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울 욕망이다. 그렇다면,


전도연 그녀의 비극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단지 그녀가 단단치 못하여, 뻔뻔치 못하여 스스로 몸을 던진

것 뿐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영화를 보기 전 가급적이면 그 영화에 대한 정보를 피하려는 성향이 언젠가부터 생겨버렸다.

위드블로그에서 있었던 이 영화에 대한 시사회 신청을 하면서도, 여주인공 이름이 (아기공룡 둘리의 그)

'둘리'라니 왠지 더 보고 싶다느니, 희미한 기억 속 친구의 멘트를 팔아가며 신청은 했지만, 사실 시놉시스나

평가같은 것들에 대해선 일부러 눈을 감고 신청했던 거다.


광화문 인근에 이런 영화관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음식물 반입이 일체 금지된 데다가 전후좌우로 넓찍한

좌석공간, 그리고 세련된 마감재로 신경쓴 듯한 영화관 내부의 은근히 호기로운 분위기. 시네큐브에 도착해서야

내가 보게 될 영화의 제목을 확실히 각인했다. 그전까지는 블랙 스노우였는지 블랙 아이스였는지 계속 헷갈렸다.




알고 보니 여주인공은 둘리가 아니라 툴리였고, 영화는 그리스 비극과 같은 느낌을 풍겼다.

이렇게 발랄하게(!) 시작했던 영화, 시사회가 끝나고 심영섭 평론가님과 함께 했던 '씨네토크' 자리에서 누군가

지적했던 것처럼 '놀랍게도' 이 둘은 부부다. 주름살이 패이기 시작하는 마흔살 나이의 아내지만, 그 둘은

뜨겁고도 농염한 사랑을 나눈다. 나도 저랬으면 좋겠다, 고 잠시 생각할 만큼 행복해 보인다.


심영섭님은 일종의 나비효과라고 했지만, 이걸 나비효과라고 부를 수 있을지까지는 모르겠다. 다만 행복하던

어느 한순간 기타케이스에서 갑작스레 떨어진 다섯개 들이 콘돔 한 통, 그 안에 내용물이 세개밖에 없었다는

데서 최초의 충격이 가해진다. 신뢰를 잃은 남편, 그렇게 살얼음판 위에 콱 내리찍힌 후에는 남편의 자잘한

거짓말을 타고 균열이 사방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녀, 사라가 의도치않게 '남편의 애인', 툴리를 만나면서 찌지지직, 손쓸 수 없는 속도로 번지기

시작한다. '남이 하면 불륜, 자신이 하면 멜로'라는 손쉬운 한마디는 모종의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 남이 하는 

'불륜'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것도 역시 사랑이구나..라고 인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 모든 사람이 자신의

내부에서 들끓었던 감정의 흐름들, 그 복잡하고 미묘한 것들을 알아주길 바라는 건 무리라 해도 때로는

그런 것들을 설명하지 않고서도 이해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나 보다. 사라가 툴리에게 그랬다.

그게 심지어는 자신의 남편에 대한 사랑이라 할 지라도. 남편을 빼앗긴 상처받은 사라는 남자를 빼앗고

불안해하는 툴리를 어떻게 죽이면 좋을지 수백번씩이나 생각하는 동시에, 가면 쓴 사라, 크리스타는 툴리와

은밀한 이야기를 공유하며 "함께 웃고 함께 우는" 관계이기도 하다. 이제 사라는 신뢰를 저버린 남편을

미워하고, 툴리에게도 불성실한 남편을 미워하며, 그럼에도 사랑하고, 깨어진 자신의 사랑을 슬퍼하고,

툴리를 정말 좋아하며, 남편을 뺏은 툴리를 증오하고, 툴리의 젊음을 시기하며, 스스로의 위선과 가식을

혐오하고, 툴리의 행운을 빈다. 이 모든 혼란스런 감정은 그대로 '진심'이다.


그런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사라와 툴리의 내면에서 들끓으며 더더욱 복잡하고 모순적인 그림을 보이면서도,

'남편의 외도를 알아챈 아내 vs 아내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통속적인 구도에서 비롯한 갈등은 또 자체의

동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속내야 어떻든 그녀들 둘은 서로 맞부딪혀야 하는 사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결론으로 치닫게 되는 인간의 운명을 그린 그리스 비극들처럼, 그 둘은 예정된 파국으로 치닫는다.

균열이 극대화되는 순간, 핀란드의 백야는 끝나고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를 벗어난 자동차는 나무둥치에

들이박는다.


미워하는 사람을, 신뢰를 잃은 사람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결국 이 영화는 신뢰와 사랑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남편과 아내 간의 문제기도 하지만,

그보다 초점을 맞추는 건 오히려 사라와 툴리의 문제다. 어느 순간 (조금 많이 꼬아진) '델마와 루이스'가

왠지 연상되기도 하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비극을 떠올리게 했지만, 그래도 그 둘은 비극적 결말로 끝나지 않을

진부하지 않은 희망의 메시지를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었다.


스토리를 요약하려 해도 참 쉽지 않다. 영화가 인물들의 행동이 아닌 감정과 심리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덕분에 딱 떨어지는 느낌은 전혀 없이 혼란스럽고 지저분한 느낌마저 들기도 하고, 구불구불한 스토리 전개도

뭔가 폭발적인 한방을 바랬던 관객에게라면 어지러울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원래 사람 맘이란 게 그런 거

아닐까. 말로 하나하나 설명해내기엔 참 구구하고 재미없고 설득력도 없기 십상일 텐데, 이렇게 흡인력있고

짜임새있게 풀어낸 감독이 대단하다 싶다.


영화를 다보고 생각한다.

블랙아이스란, 당신과 나의 둘도 없이 친밀한 관계에마저 끼어있는 자그마한 살얼음판. 잠시 방심한 한순간이면

관계의 통제력을 잃게 만들어 한껏 감정을 휘젓다가 어디론가 꼬라박히게 만드는. 안전운전..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기엔, 저 멀리서 비웃고 있는 '운명'이란 녀석의 썩소가 맘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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