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aw. 아마도 싱가포르의 정류장, 공공시설물, 까페 등등에서 제일 자주 접했던 문구인 듯 하다.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는.

처음 왔던 싱가포르, 어렸을 적 어마어마한 벌금과 엄격한 법집행에 기반한 공중도덕과 청결한 도시의 화신처럼 배웠고 대학 때도 리콴유의 아시아적 가치 운운하는 이야기에 쎄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내가 사는 한국과 멀지 않다. 츄잉껌을 수입하거나 만들지 않고, 온갖 것에 벌금을 매겨놓고 있는 싱가포르라지만..., 이미 우리는 큰사거리 건널목마다 주춤주춤 문워크중인 차들과 골목마다 눈에 불을 켠 씨씨티비의 천국에서 살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또 갑갑하기만 하다. 이번에 들고 온 책이 김세균 서울대 정치과교수의 고별강연집, '사상이 필요하다'였는데 발간된 시점은 박근혜 당선직후쯤. 공저자인 홍세화 전 진보신당대표나 손호철 교수, 계간 문화과학 발행인이었던 강내희 교수 등등 필진은 내가 좋아하는 분들이었고 책도 사둔지 오래건만 여태 펼쳤다 덮길 수차례. '다른 세상을 꿈꾸는 정치적 기본기'란 부제가 무색하도록 세상은 역진중이다.

진보 대 보수, 란 페이크 프레임이 끝내 다른 가능성들을 전부 막아버린 꼴이다. 안철수에 기대한 건 단지 제3의 공간을 열어주길, 양당제로 고착화되는 추세를 조금은 지연시켜주길 바랬던 것 뿐이나 역시. 싱가포르와 한국. 아시아적 가치에 기반한 민주주의, 그러니까 민주주의의 형식을 빌린 천민자본주의사회란 건, 어쩌면 압축성장을 경험한 풍요로운 경제와 천박하고 미발전한 시민사회 및 지평을 가진 나라의 귀결일지 모른다.

이제 점점 거대해지는 자본권력과 심화되는 사회적 불평등은 누구의 입으로 어떤 공간에서 이야기될 수 있을까. 제3당으로 표상되는 새로운 가능성과 사상이 들어설 자리는 봉쇄되고, 삿된 영웅-안철수-는 그나마 민주당과 새누리당 사이에 공간을 벌려 스펙트럼을 결과적으로 넓히나 했더니 투항해버리고, 민주당도 안철수도 결국 파이를 키우기보다 있는 파이를 지키는 현실적 선택을 해버린 것 같다.

그저 노무현이 읊조렸듯 말한마디로 치우고 넘기면 편하려나.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이미 모든 것이 소비일진대 정치 역시 일인일표의 소비행위 그이상도 이하도 아닌게 뭐가 이상하냐고. 싱가포르, 한국의 근미래에서 한국의 현재로 워프하기 직전, 한발 재겨 딛을 수 밖에.

 

(2014. 3. 2. from FB note.)

 

진보집권플랜 - 6점
조국.오연호 지음/오마이북

노무현은 삑사리로 들어간 뽀록구


노회찬 진보신당 전 대표가 말했다. "1948년 이래 가장 나은 정부가 1987년 이래 가장

나쁜 정부를 탄생시키는 배경이 된 이 역설을 고민해야 한다"고. 노무현 정권이 어쩌다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키는데 가장 크게 공헌했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이야기일 거다.


왜일까. 왜였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노무현의 사후 1년이 지나고 어느 잡지에서

'우리시대 노무현의 정의'를 모으는 기사에 내가 썼던 한 줄이 여전히 난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재임 시절에도 늘 생각하던 것.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


@ytzsche "노무현은 삑사리로 들어간 뽀록구다."

그를 대통령으로 앉혀놓고 진보적인 정책을 강제할만큼 그도 우리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덜컥 그가 대통령이 되고, 돌아갔죠. 삑사리로 들어간 뽀록구, 실력은 금세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 “노무현은 마라톤 42.195Km이다.”(2010.5.23, 시사IN)



이 책의 내용보다 더 궁금했던 것


사실 이 책을 읽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나름 2000년을 전후해 대학에서 '돌과 빠이'를

쥐었던 데다가 '진보신당의 (페이퍼)당원'이 내 정체성 중의 큰 부분이라 생각하는 '좌파'로서,

이 책에서 다루는 사회/경제민주화, 교육과 남북 문제, 권력 등의 내용은 내게는 너무

'상식'적인 내용이었던 거다. 진부하고 심심했다.


꾸역꾸역 읽어나가며 다른 곳에 관심이 쏠렸다. 왜 이 책일까. 왜 갑자기 이 책이 대중의

관심을 얻게 된 것일까. 대담이란 형식의 특성상 정식화하고 나면 몇 페이지에 불과한

팜플렛 밖에 안 될 내용인데, 딱히 새로운 발상이나 아이디어도 없는데, 이런 정치 서적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란 쉽지 않은데, 대체 왜 사람들은 갑자기 '진보집권플랜'을 집어들었을까.


몇가지 음흉한 음모론이 있을 수 있다. 노회찬의 사상이 섹시하다며 그를 문화적으로

소비하던 이들에게 잘 생기고 젠틀하며 사상도 섹시한 조국 교수는 가히 팬덤을 몰고 올만한

인물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학교에서도 그랬으니까 새삼스럽지도 않다.) 때론 경악스러운

트렌드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와아~ 하며 우르르 달려가는, 최근 '정의란 무엇인가' 따위

책들에 달려간 새삼스럽고 집단주의적인 구매 성향의 일환일지도. 너무 시니컬한가.



'진보'정권의 집권을 위한 공부 열풍

조금은 희망적이고 싶다. 사람들이 노무현을 거치면서, 준비되지 않은 집권이 결국

그를 죽이고 우리 모두를 질곡에 몰았음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기적이나 요행처럼 대통령 하나 바뀌어서 될 일이 아니었다고. 그저 구습에 대한

부정이나 분노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고. 그리고 우리 모두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고.


새로운 비전과 플랜이 필요한 거다. 뽀록구도 실력이라지만 그런 거 금방 바닥이 드러나고

마는 거니까, 다행히도 이제는 '진보'라 자처한다 하여 '빨갱이'로 등식화되는 지경은

벗어난 거 같으니까 좀더 본격적이고 시끄럽게 이야기를 할 때가 온 거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국과 오연호가 말을 주고 받은 이 기록은 '진보'를 위한 최소한의 상식선,

최소한의 공유 가치를 품고 있으니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실 진짜 리뷰는 여기부터.


그렇다. 이 책은 '시작점'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교과서같은 이야기만 있는 듯

보이면서도 현실정치에 적용이 가능해보이는 수준의 정책적 구상과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치적 제언들이 들어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 책은, 조국 버전의 '진보'와 조국

버전의 '집권플랜'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그건 또다시 민주당 위주의 일치단결,

한나라당 말고 될놈 찍자는 '비판적 지지'의 망령을 불러내기 십상이란 점이다.


조국의 통큰 '진보'는 누구인가

그는 계속해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통칭해 민주정권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리고

현재의 야권을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 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 있지만, 그런 전제가 옳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두 정권을 두고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급격히 이루어진 시기라 평하기도 하고, 현재의 야권 중 민주당의

적잖은 의원은 수구/보수와 별반 다르지 않은 DNA를 갖고 있다 평해지기도 하니까.


게다가 그의 입장 중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도 적잖이 보인다. 한미FTA를 비롯한

자유무역협정 일반에 대한 그의 긍정적인 입장이나, '친미'와 '반미'를 넘어선 '용미'를

하자는 그의 그럴듯하지만 모호한 입장-이미 외교학과 하영선 교수가 익히 말해온

개념이지만 역시 알맹이를 알 수 없는- 따위가 그렇다. 그리고 북한의 3대세습이나

인권 문제에 대해 할 말은 해야 한다는 것도 다른 '진보'와는 균열을 그을 거 같다.


'진보'의 가치를 어떤 정치세력에게 의지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집권,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 자체가 정당을 기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했기에

수구/보수의 집권기라고 말하듯 특정 정당이 집권해야 '진보'가 집권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거다. 내가 조국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그거다. 현재의 민주당이 집권하면 진보가

집권한 건가. 민주당을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대통령 김대중과 대통령 노무현을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조국 버전 '진보집권플랜'의 한계

물론 조국은 이 책에서 이야기한 여러 이슈에 대한 진보적이고 전향적인 입장을 밝히는

정치세력이 집권하도록 대중이 강제할 수 있다고 말할 거다. 현재의 민주당은 부족함이

많지만 나름 '복지'니 '무상급식'이니 좌향좌하는 기색도 있으니 지켜보자고 말할지도

모르고 연정의 가능성을 이야기할지 모른다. 이 책에서 제기된 진보적인 의제들을 받아서

어쨌든 다음 정권에선 '진보'가 집권하자는 게 그의 취지이고 충정이라는 건 이해한다.


그렇지만, 현실 정치에서 돌아가는 판세는 이미 (당연하게도) 이 책에서 언급된 교과서적인

모범답안을 뛰어넘은 것 같다. 그는 고작 두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으로 일반론 차원에서

언급하고 만 '복지를 위한 증세' 부분에 대해 지금 얼마나 많은 논란이 일고 지향이 갈라지고

있는지만 봐도 그렇다. 그밖에 해외파병이나 다문화사회에 대한 원칙적인 답변도 막상 현실에

닥쳐 결정을 해야 할 시기에는 크게 도움이 될 수 없는 이야기다.


책의 말미에는 굉장히 긍정적이고 희망차게 이야기했지만, 과연 그럴까. 지금의 민주당이

보여주는 노선, 행태, 리더십을 진보 쪽에 가깝게 끌어갈 수 있을까. 그의 표현을 빌어 개혁

담당 민주당과 진보 담당 소수 정당들이 서로 이해를 조율하여 하나의 진영으로 단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진보가 밥먹여준다'는 걸 보여주고 '밥의 품격'을 논하는 게

사람들의 표로 되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기도 하다. 그나마 노무현의 정책 이상으로

진보적 가치에 접근한 적이 없는 나라에서 이 책의 진보정책 구상들이 실현될 수 있을까. 
 

'반MB' 명분 하의 진보개혁 진영의 소통합 결과는.

결국 우려스러운 지점은 그거다. 이 책의 온갖 장점과 '진보'정책 일반의 지향을 세워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전파하는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보집권플랜이 결국

지극히 현실정치적인 차원에서 '반MB'로 뭉치게 되는, 혹은 뭉쳐야 한다는 절박하고

긴급한 요청으로 수렴되는 건 아닐까. 그의 '통큰' 진보는 MB와 한나라당으로 대변되는

'수구/보수'를 뺀 여집합과 같기에, 쉽게 말해 한나라당 말고 될 놈, 민주당 찍으란

이야기로 돌아가는 건 아닐지 우려스럽다.


조국도 그런 걸 원하는 건 아니리라고 생각한다. 2012년이던, 2017년이던, 언제가 되었건

진보진영이 집권했을 때 제대로 해서 더이상 후퇴하지 않는 단단한 기반을 만들자는

게 그의 반복된 주장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과잉대표되고 승자독식하는 한국의

선거제도에 대해서도 깊이있는 통찰과 제안이 있어야 했지 싶다. 그리고 '진보'라는

단어를 그렇게 느슨하고 통크게 써서 '진보/보수'의 구도로 한국 정치를 보는 것보다

'(진보)/중도/보수'의 구도로 읽는 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그의 '진보집권플랜'은, 그래서 시작점이다. 여기로부터 논의가 만발해서 다양한 집권플랜이

짜이고 더욱 가다듬어지도록 맨처음 부어진 마중물의 역할이라면 부족함은 없어보인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 아쉬하바드를 돌아다니며 눈에 띄었던 건 버스 정류장이 곳곳마다 참 다르게 생겼더란

사실, 그리고 그 모양들이 어떤 건 굉장히 공들여서 만들어졌는가 하면 다른 건 그냥 쇠파이프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듯 만들어진 것처럼 천태만상이더라는. 게다가 그런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투르크인들의

옷차림이나 행색 역시 꽤나 인상깊었다. 그런 서로 다른 버스정류장과 그 풍경 만을 찍은 것만도 수십여장에

이르는 사진들 퍼레이드.

버스정류장에 멈춰서는 버스들 역시 대개는 저런 신품의 쌔끈한 버스들이곤 했지만, 가끔은 앞 유리창이 온통

먼지낀 채 거미줄같이 사방으로 금이 가있는 그런 버스도 다니곤 했다.

약간명이 앉을 수 있는 벤치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과 (아마도) 태양을 가리기 위한 지붕이 얹혀 있다는 점만

같은 특징으로 공유하고 다른 것들은 제각각인 버스 정류장들.

사람 하나 없이 텅빈 정류장이 있는가 하면, 아저씨 하나가 쓸쓸히 벤치를 지키는 정류장도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빨간 투르크 전통의상을 입은 아가씨들이 우르르 버스를 기다리고 있기도 했고. 여긴 무슬림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오랜 공산주의 정권 치하에서 젊은 사람들은 대개 무신론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덕분에 히잡을 쓰고

있는 모습도 거의 볼 수 없었다.

투르크메니스탄의 버스정류장에서 볼 수 없는 또 하나의 풍경, 담배를 피고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 투르크에선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물론 외국인이 상대적으로 많이 모이는 호텔 로비나

정문 밖에서는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피우긴 했지만, 내국인들에게는 나름 철저히 지켜지는 룰인 듯. 그렇게

법적으로 아예 금연을 시켜야 할지는 좀 생각할 문제지만, 적어도 담배연기가 제멋대로 날아들지 않는 버스

정류장은 생각만 해도 꽤나 쾌적하다.

밤이 되었다고 버스 정류장이 어둠에 먹혀버리는 건 아니다. 전기 아까운 줄 모르고 펑펑 써대는 이 곳에서는,

아마도 아쉬하바드의 이 동네는 일종의 대외용 '쇼윈도우'일 테니 더 심하겠지만, 버스 정류장 역시 화려하다.

실제로 밤에도 버스가 다니는지, 이용할 사람들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달리는 차 안에서 찍은 몇 장 더, 아무래도 동네마다 특징을 잡고 그 모양대로 버스 정류장을 만드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님 그 정류장의 특징에 맞춰서, 예컨대 커다란 재래시장 앞의 정류장은 좀 커다란 간판처럼, 관청들

앞의 정류장은 좀 화려하고 럭셔리하게 만드는 거 같다는 이야기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모든 게

획일화되어 있고 몰개성화되어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하던 '중앙아시아의 북한' 투르크에서 이렇게 다채로운

버스 정류장들을 헤아려 볼 수 있었던 건 꽤나 흥미롭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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