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시내와 불국사가 이렇게 떨어져 있다는 감이 전혀 없었다. 수학여행의 기억은 몇 장 사진으로만 남았을 뿐.

 

시내에서 적잖이 차로 달려야 도착하는 불국사, 그러고 보면 불국사 안의 풍경 역시 깜깜하니 기억 하나 남지 않았었다.

 

 

산문을 들어서자마자 나타나는 구름다리. 우아한 아치를 그리고 선 돌다리가 정문과 불국사 본전을 잇고 있었다.

 

남쪽부터 슬슬 봄바람이 일기 시작하는지 연못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 능수버들엔 연두빛 물이 올랐다.

 

 

너무 새빨갛거나 새파랗지 않게 적당히 세월을 머금은 단청의 빛깔이 녹록치 않은 불국사의 역사와 위상을 말해주는 듯. 

 

 

그러고 보니 여기는 생각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다짜고짜 저 높고도 날렵한 계단 앞에서 고등학교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던 기억.

 

경내에 들어서면 좌우로 복도가 있는데, 울긋불긋한 그 단청이 적당히 까뭇한 그늘에 반쯤 가리운 풍취가 참 좋다.

 

 

그리고 어디랄 것도 없이 적당히 녹슨 듯, 적당히 이끼가 스민 듯한 분위기의 불국사 풍경이라니. 사실 불국사는 1900년대

 

중반까지 몇 채의 건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몰락해가는 낡은 절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후 복원을 거듭하며 현재의 위용을

 

되찾았다는 건데, 그 시절 역시 적잖이 소요되어 이렇게 건물의 맵시나 색감이 자연스러워졌나보다.

 

불국사, 하면 빠질 수 없는 것 두 가지. 석가탑과 다보탑..인데, 근데 다보탑이 이렇게 컸던가. 새삼스레 놀라고 말았다.

 

아쉽게도 다보탑과 마주한 석가탑은 그 탑신을 볼 수가 없었다. 2010년 기단 덮개돌에 균열이 발견되었다나, 하여

 

지금은 완전히 해체해서 수리 중이라고 한다. 2015년이 되어야 다시 공개될 예정이라고 하니 잘 보이지도 않는 가림막에

 

아무리 고개를 들이밀고 이리저리 눈알을 굴려봐야 보이는 게 하나도 없다. 석가탑의 다른 이름이 무영탑이라더니,

 

아크릴로 된 가림막에는 과연 다보탑의 그림자만 비칠 뿐, 석가탑은 그림자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는구나.

 

 

그리고 불국사 심장부에 위치한 대웅전, 살짝 이르지만 나른하니 기분좋은 봄볕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파르라니 깍은 머리를 반짝거리는 스님은 어딘가로 총총걸음을 옮기고 계셨고.

 

 

대웅전의 청록빛이랄까 청동빛에 가깝도록 바랜 나무창살문을 보며 대체 이런 데를 내가 온 적이 있던가, 다시금 패닉에 빠지고.

 

도무지 단청을 화려하게 드리운 이런 오랜 사찰에 들어서면 눈을 사방으로 돌리느라 여념이 없으면서도 뭔가를 늘 놓치는

 

기분이다. 워낙에 오밀조밀한 구석까지 디테일을 챙겼던 옛 선조들 덕분에 전후좌우 위아래로 열심히 고개를 돌리는 중.

 

 

 

휘영청 하늘을 향해 말려올라간 처마의 곡선을 따라 푸른용 한마리가 고개를 들고 금세라도 뛰쳐오를 듯한 기세로 이빨을 드러냈다.

 

금세라도 콧김으로 불기운을 내뿜을 듯한 이 형상은 날카롭고 커다란 이빨 사이로 문고리를 꽉 움켜물었다.

 

 

 

도무지 사진으로 담기가 쉽지 않은, 수평하거나 수직한 직선도 아니고 사선도 아닌 처마의 저 율동감 넘치는 은근한 곡선미.

 

 

 

그러나저러나, 도대체 고등학교 2학년짜리들이 우르르 불국사에 몰려와서는 대체 뭘 보고 갔던 걸까. 이토록 아무 기억이 없다니.

 

 

아마도 천년은 훌쩍 넘었을 부처님의 모습을 수호하고 있는 붉은 나무울타리. 저 나무들이 모두 삭아 스러진대도 돌에 새긴

 

부처님은 다시금 천년을 버티고도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먹먹하다.

 

 

음..절에 갈 때마다 눈에 밟히는 건 저런 크고 작은, 높고 낮은 돌탑들. 다른 돌들의 균형을 흐트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돌 하나를

 

그 위에 얹는다는 행위가 갖는 기묘한 주술적 효과라거나 기복적인 요소를 인정하더라도, 여기만큼 대대적으로 벌어진 발원과

 

욕망의 탑쌓기는 처음 본 거 같다. 멀쩡한 마당도 모자라 기와가 오른 담장 위에도, 쪽문 위에도, 빗장 위에도 온통 돌탑이다.

 

 

 

워낙 사방으로 문이 나있어서 대체 어디로 어떻게 가야 전체를 한 바퀴 돌아보게 되는 건지 주춤거리게 된다. 게다가 한두개의

 

문만 지나와도 같은 듯 하면서도 또다른 실루엣과 풍경이 전개되는 판이라 마치 작은 미로 속에서 헤매이는 느낌이 들기도.

 

그 와중에 만난 복돼지상. 돼지라기보다는 살짝 쥐를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삐죽삐죽 묘사된 털도 그렇지만 저 얍실한 눈빛.

 

 

 

 

그리고, 무려 신라시대 화장실 유구란다. 저렇게 돌을 깍아만든 두 발디딤대 사이로 장차 비료가 될 것들이 보관되었단 이야기.

 

 

다시 돌아내려오는 길, 왠지 들어가던 길과 다르다 했더니 역시. 그러고 보니 불국사로 드나드는 길이 꼭 한 개가 아니었던 거다.

 

이렇게 넓은 부지, 넓은 정원과 수많은 전각들. 대체 난, 고등학교 2학년의 나는 친구들과 어떤 길을 어떻게 밟았던 걸까 싶다.

 

그림자 없는 석가탑과 십원짜리 다보탑의 이미지조차 온전히 간직하지 못했던 걸 보면, 아마도 친구들과 떠들고 뛰어노느라

 

정신없지 않았던가 싶기도 하고. (아마도 전날밤에 몰래 마셨던 술의 뒤끝에 잡혀서 비몽사몽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으려는데, 선잠에 취한 듯 나른한 표정의 아주머니가 창구 안에서

겸연쩍은 듯이 반색을 한다. 며칠전 눈이 오고 나서는 평일에 사람 구경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데 어쩐 일이냐며, "학생, 밥은 먹고 다니나" 했다. 경주시내를 돌고 오릉을 거쳐

남산 서북쪽의 포석정까지 걷느라 조금은 지쳐있었는데 그 따뜻한 말 한마디에 금세 훈훈.


에이 그냥 슬쩍 들어갈 걸 그랬네요, 하며 입장권을 받아든 내가 슬쩍 눙치니까 아줌마는

웃으면서 그랬다. 조그마한 공간에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그랬으면 바로 잡혔을 거라.

사실 경주는 고등학교 2학년때 수학여행으로 찍고찍고 돌아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이들과 놀고 장난치기 바빠서 어디에 뭐가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도 안 나지만 워낙

교과서나 다른 곳에서 많이들 보이는 것들이라 대표적인 이미지들은 익숙하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포석정 내에 이렇게 아지랑이처럼 꼬물꼬물 피어오른 소나무라거나, 다른 그림들이

더욱 신선한지도 모르겠다.

이게 포석정의 대표 이미지랄까, 몇 그루 나무가 장승처럼 버티고 선 공간 안에 구불구불한

수로같은 것이 한바퀴 원을 얼추 그리고 있는 형상.

포석정 입장권에도 조악한 화질로나마 나와있는 사진이 바로 그거다. 왠지 10여년전 내가

고2때 받았던 입장권도 이것과 똑같았던 것 같은 아슬아슬한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입장권,

그 안에 그려진 포석정의 계절은 가을이다.

원래는 포석정을 둘러싼 형식적인 울타리 안을 넘어 들어가면 안 되었지만, 아무도 없는

텅빈 포석정에 나를 따라하다가 문화재를 파손시키거나 망가뜨리는 사람은 없겠지 싶어서

슬쩍. 가까이 찰싹 달라붙어서 봤더니 다소 멀찍이서 보던 것과는 달리 경사진 게 보인다.

수로 위쪽에서 잔에 술을 채워 찰박이는 물 위로 띄우면, 자연스레 아랫쪽으로 내려갈 듯.

그렇게 구불구불 미묘한 동감을 살리면서 술잔이 내려가다가 저 아래쯤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그 술잔을 받았을 사람들이 떠오른다. 재미없게 밋밋한 수로를 내려가는 게 아니라 이리저리

물결치며 내려가도록 만들어진 수로가 슬쩍 돌아서 한 바퀴.


사실 옛날에는 이보다 훨씬 길었을 거라고 한다. '유상곡수연'이라는 이런 수로의 형태는

한중일 삼국에서 공통적으로 조성했던 형태지만 그 일부나마 남아있는 건 이 곳이 유일하단다.

비단 포석정이 없었어도, 이 곳의 숲이 신라인들이 이곳에서 노닐던 그때도 이렇게 아름드리

나무들이 울창하게 서서는 가지로 하늘을 가려주었다면 정말 풍류를 즐기기에 딱 좋았을 듯.

돌아나오면서 뭐랄까, 참 좋은 공간인데 포장이 엉망이란 느낌이 들었다. 최근 1박2일에서

경주 '스탬프찍기' 여행이 알려지면서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관광지

앞에 선 안내문이나 동선 안내가 워낙 부실한 거다. 게다가 그 장소의 얼굴이랄 수도

있겠고 계속 그 공간의 기억을 남길 만한 기념품이랄 수도 있는 입장권이 이렇게 부실해서야.


한자가 어영부영 섞인 한글로만 설명이 있어 외국 관광객들에게 불친절할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읽기에도 참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글로 적혀있을 뿐이다. 디자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 공간에 대해 필요한 정보가 다 들어갔는지도 의문이다. 경주 시내 문화재들을

시간순으로나 장소순으로 읽어내릴 통합이미지나 번호라도 있으면 훨씬 좋지 않을까.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으로부터 '백제의 미술'을 주제로 강연을 들었다. 세계대백제전, 그리고 부여나 공주의

백제 문화유산들을 돌아보려면 우선 백제 문화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가 있어야 훨씬 깊게 보일 것 같았으니

정말 좋았던 기회였던 셈이다. 여행 그 자체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준비하는 재미가 더 크다는 말도 있듯이,

그곳에 대해 사전 지식을 쌓고 일정을 잡아보고 어떤 문화적 배경이나 특징이 있는지 하나씩 알게 되는

재미를 놓치고 봐서야 영 밍숭맹숭하기만 하기 십상이다. 백제를 돌아보기 전, 그야말로 든든한 가이드로서

부족함이 없으신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한국미술사는 고사하고, 백제미술사에 대해 정리된 책 한권이 없다." 강연 말머리는 그렇게 시작됐다.  고분이니

회화니 조각을 개별적으로 다룬 책들은 있지만 총체적으로 백제의 미술은 이렇다, 라고 정리한 책이 없단 거다.

백제 문화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게 고작 중고등학교 때 배운 단편적 지식과 몇 개 이미지에서 멈춰

있는 중요한 이유겠다. 사실 그렇다. '백제'의 이미지란 어슴푸레하고 희미한, 불분명한 뉘앙스일 뿐이다.

사실 삼국시대의 세 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대개 그렇다. 고구려는 강인하고, 백제는 우아하며, (통일전)신라는

소박하다는 정도.

유홍준 전 청장으로부터 한 두시간 반, 강연을 듣고 나서 바로 부여박물관의 유물들을 보았다. 뭔가 조금은

눈이 뜨이는 느낌, 이래서 백제의 문화를 두고 "儉而不褸,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 :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음)"이라고 표현한 거구나 싶었다. 그야말로 문화의 고상함과 우아함을 표현할

극상의 표현 아닌가. 검소와 누추 사이, 화려와 사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내는 미감이란.

부여박물관은 주로 백제의 사비(부여) 시대의 유물을 품고 있다. 백제의 수도는 한성과 공주를 거쳐 부여로,

그렇게 옮겨 다닌 게 백제의 유물이 신라 유물에 비해 적게 발견되는 하나의 이유라고 했다. 물론 계속된

전란과 정복자의 역사 왜곡/지우기 노력도 한 몫했겠지만.

아마 교과서에는 한 줄 이렇게 실렸을 게다. '백제는 활발한 해상활동으로 국제적으로 왕성하게 교류했다.'

박물관에서 만나는 유물들은 그 '왕성한 교류'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중국의 영향, 고구려와 신라와의

공통점, 왜와의 교류 흔적 등등. 나름 도식화되고 형식적인 그림 하나가 박물관에서 보였다. 설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적대관계와 교류관계를 선명히 구분했겠지만, 사실 당시의 외교란 게 오늘날 미국 편향의 외교같지도

않은 외교보다도 훨씬 정교하고 복잡해서 저렇게 국제관계가 굳어있었을 리 없는 거다. 뭐, 근초고왕 때의

분위기에 한정한 그림이라니 단순화를 무릅쓰고 저렇게 표현했겠지만.

전시품 중 동선의 앞머리에서 눈에 띄던 전시품 하나. 백제시대에 이걸 어떻게 세워놓고 활용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후대의 '장승'이 어쩌면 여기서 기원한 걸 아닐까 싶어졌다. 어느 지역이나 고대로 갈수록

남근이라거나 성적 뉘앙스가 잔뜩 담긴 예술품이 많아 보인다. 그게 왕성한 생명력의 근원 혹은 상징처럼

고대인들 사이에 공유되는 이미지였을 거다.

최근 발견되어 기사에도 꽤나 심심치 않게 떴던 백제시대 면직물의 유물이 여기에 있었다. 고려시대 문익점이

붓뚜껑에 담아왔다던 목화씨 신화 이전에도 이미 면직물을 한반도에서 직조했다는 증거인 셈이다. 유홍준 청장이

말한 것처럼, 유물 하나가 발견되려면 정말정말 억세게 운이 좋아야 한다. 하필 그 자리에 떨어져서, 우연찮게

보존을 위한 환경이 조성되고, 이후 수백수천년간 전란이나 화마, 홍수 따위 자연재해를 이겨내고, 근래에

들어서는 제대로 조사도 없이 갈아엎고 콘크리트를 부어대는 우악스런 손길을 벗어나야 하는 거다. 그리고도

발견되기란 더욱 기적과도 같은 일.


그래서 그나마 우리에게 남겨진 문화유산은 '죽음의 문화', 고분이나 무덤에 고이 매장된 것들이라 한다. 아무래도

'삶의 문화', 일상 생활에서 쓰이고 계속 변화하는 것들은 일상생활 중 파괴되거나 소모되기 십상이니까. 뭔가

궁금증 하나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백제금동대향로. 이것이 처음 발굴되었을 때 백제에서 만든 게 아닐 거라는 학계의 주장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그전까지 우리가 갖던 백제의 이미지란 막연하고 어설픈 것이었다. 발톱이 다섯개 달린 용이 연꽃봉오리를

입에 물고 버티고 있는 모양새라거나, 연꽃 위에 나타난 산수문양과 음악가들, 동물들의 형체, 그리고 맨 위에

버티고 선 봉황의 날아오르려는 듯한 모습까지. 이렇게 화려하고 우아한 대향로에 걸맞는 공간을 꾸미고 있었을

온갖 장식품과 치장들은 또 얼마나 화려했을까. 이 향로만 덜렁 놓였을 리 없는 거니까.

유홍준 청장에 따르면, 이런 백제의 공예 문화가 발달한 건 장인에 대한 예우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종을 만드는 주종(鑄鐘) 박사, 기와를 만드는 와(瓦)박사, 그렇게 기술인을 우대하고 적극 지원하는 정책,

오늘날 한국의 기술이나 디자인이 고전해온 이유도 그렇지 않을까. 장인 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장인 정신을 북돋을 정책적, 사회적 토양이 없어서.

서산 마애삼존석불은 매 계절, 매 시간, 매 순간 표정이 달라진다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씌여있었다.

그걸 보여주려는 걸까, 사방에서 조명이 움직이며 그에 따라 변하는 표정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마터에서 발굴되었다는 거대한 좌대. '상현좌'라 하여 부처님의 옷자락이 좌대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사이즈가 거의 킹사이즈 침대만하다. 부처님상까지 다 남아있었다면 정말 멋졌을 텐데,라고

유홍준 청장이 탄식했던 그 유물이다.

이 파격적이고 생생한 얼굴 묘사라니. 그런데 제목은 무려 '나한(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달은 성자)'랜다. 문득

현대미술을 전시한 미술전에 온 건지, 고대 문화유산을 전시한 박물관에 온 건지 헷갈리는 순간.

고대 삼국이 고분을 축조하며 왕의 안녕을 기원하던 시대에는 부장용 금관, 불교가 국교로 자리매김한 시대에는

사리함, 그렇게 일국 차원에서 문화적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내는 대상이 바뀌었다고 한다. 신라의 出자형 금관이

전자의 예라면 백제의 이런 사리함이 후자의 예. 권력층이 자신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문화적

역량을 총동원한다는 궤는 같지만.




백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이런 연꽃무늬 기와. 그렇지만 연꽃도깨비무늬니, 산경치도깨비무늬니

하는 것들도 굉장히 익숙하면서도 신선하다. 그전까지는 '연화귀형문전', '산경귀형문전'이란 함축적인

한자어로 표현되어 있어 딱딱하고 어려워보였는데, 그렇게 우리말로 풀어서 설명하니 훨씬 정감이 간다.

칠지도.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해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키워드들을 담고 있어 이를 소재로 하여 상상력을

마구 발휘한 소설들도 나왔던 바로 그 '칠지도'다. 진품은 일본의 왕실에 보관한 채 비공개를 고수하고 있다고

하던데, 칼에서 뻗어나온 가지들이 인상적이다. 뭔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흠뻑 서려있다.

나뿐 아니라 이 박물관을 둘러본 아이들의 눈에도 역시 그래보였나보다. 박물관 한쪽 벽에 전시된 아이들의

그림들엔 칠지도를 그린 그림들이 참 많았다. 문화시설이니 볼만한 전시회니 따위가 모두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2010년 한국, 그렇지만 1400여년 전 백제의 고대문화유산을 둘러보기엔 이 근처사는 아이들이 오히려 꽤나

유리한 점도 있겠다 싶어 조금은 다행이다.

대학에서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유홍준 청장의 말솜씨도 그렇고 이런 편안한 분위기도 그렇고. 그리고

듣고 나서 뭔가 세상에 뿌려진 흔적들을 조금은 더 새삼스런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겠구나 하는 유쾌함도 그렇고.

비록 그게 당장 살아가는 데 도움은 안 되는 거라 할지라도, 막연하기만 하던 '백제'에 조금은 더 단단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다면 꽤나 멋진 일 아닐지.



*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하니 선택과목으로 하니 말이 많지만, 어쩜 그런 건 정말 중요한 논점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몇가지 형식적이고 막연한 설명과 문화에 대한 표현어구를 외울 뿐인 식으로

공부시킨다면 그건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계승하고 느끼도록 하는 데는 실패하는 거다. '우아하다'라는

표현방식에 맞추어 백제의 유물 사진 몇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백제의 문화유산들을 둘러보고 본인이

'우아하다'라는 표현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역사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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