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호미곶,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돋이를 볼 수 있다는 이 곳을 가본 사람이던 안 가본 사람이던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바로 이렇게 바다에서 불쑥 솟아오른 커다란 손의 형상. 갈매기들이 쉬어 가는 다섯 개의 봉우리이기도 하다.

 

 

사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생각보다 작아 보일 수도, 혹은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는 이 청동 조각상은 '상생의 손'이라는 이름으로

 

새천년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99년 12월에 완공된 상생의 손, 호미곶 해맞이 축전을 기리는 상징물로, 육지에선

 

왼손, 바다에선 오른손 이렇게 두 손이 함께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 손이 육지에도

 

하나 더 있다는 사실. 처음 알았다.

 

 

 

성화대에 있는 화반은 해와 달을 의미하고, 두 개의 원형고리는 화합을 의미한다던가.

 

바다에 있는 오른손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로 만들어진 육지의 왼손. 그 앞에는 독도 일출과 피지의 일출에서 얻어온 불씨가

 

2000년 1월 1일 이래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히고 있었다.

 

새천년 기념관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본 왼손과 오른손, 상생하라는 두 개의 손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공을 쥐고 있는 듯

 

살짝 움켜쥔 모양새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호미곶에 와서야 알게 된 손 조각상의 진실이랄까.

 

호미곶에 도착하면 딱 보이는 꽃마차들. 말갈기를 쉼없이 희롱하고 있던, 제법 쌀쌀한 바닷바람에도 말들은 꿈쩍없었다.

 

상생의 왼손을 에둘러 바다쪽으로 훅 들어가는 전망대. 바다 쪽에서 육지를 배경으로, 미친 듯이 날아다니며 시야를 가리는

 

갈매기들 틈새로 상생의 오른손을 볼 수 있다.

 

 

전망대 걸어들어가는 길에 한번씩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거대 문어상. 포항이 문어로도 유명한 데다 심지어 문어축제도 있다는 사실.

 

 

더이상 나갈 곳 없는 전망대의 끝단에 서면 정확히 동쪽을 가리키고 선 꼬마 아이의 동상이 있고, 호미곶의 위치가 잡혀 있는

 

한반도 지도와 나침반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분분히 날아다니며 상생의 손을 향한 시야를 여지없이 가리는 정신사나운 갈매기들. 사람들이 자꾸 과자를 던져댄 탓이다.

 

이쪽에서 보이는 상생의 오른손 측면샷. 아무래도 육지의 왼손보다 크기도 크거니와 그림도 훨씬 이쁘게 잡힌다.

 

다시 광장으로 돌아와서, 미처 보지 못했던 가로등에 눈길이 간다. 포효하는 호랑이 형태의 한반도가 장식된 가로등이다.

 

같은 형태로 동해를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상 , 검고 노란 줄무늬가 선연하던 가로등 호랑이와는 달리 흰색과 하늘색의 줄무늬를 가졌다.

 

그리고 파란 하늘에 둥싯 떠있는 하얀 달을 움켜쥐려는 듯 내뻗은 육지의 왼손상.

 

 

광장에는 지난 새천년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전국 최대의 가마솥이라거나 각종 기념물들. 그 와중에 수쳔년 전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를 기념한 기념탑이 하나 숨바꼭질중.

 

 

새천년 기념관 전망대로 가는 길은 엘레베이터와 계단. 계단으로 갔더니 대충 4층에서 5층 정도 높이가 되는 거 같다.

 

 

옆에 나란히 선 풍력발전기 한 대. 시험삼아 돌리는 건가 싶기도 하고, 뭔가 효성의 광고판 같아보이기도 하고.

 

 

확실히 바닷바람이 매우 세게 몰아치기는 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얼레를 하나씩 손에 쥐고 연을 날리고 있었고,

 

호미곶에 갓 도착한 아이들은 일단 부모손을 끌고 연 하나씩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으니. 그나저나 바닷가의 소도시답게,

 

혹은 바닷가의 명소답게 저런 연들을 담은 종이박스에 새겨진 글자가 눈에 잡힌다. 돌자반.

 

 

 

 

광주 망월동, 국립 5.18민주묘지(신묘역) 앞에 선 안내판에는 의미심장한 문구가 있다.

 

"손수레나 청소차에 실려와 5.18 구묘지에 묻혀야 했던 분들을 이곳에 모셔와 안장했다"는 문구다.

 

(광주 망월동 신묘역, 이 곳에 선 문재인과 안철수는 무엇을 보았을까.)

 

 

1980년 5월이 무려 17년이나 지난 1997년에야 비로소. 그리고 나서 구묘역은 잊혀지고 버려지다시피 했다.

 

정치인들도 찾지 않고, 아마 2004년이던가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 찾았던 게 거의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전례다.

 

 

그렇지만 구묘역은 여전히 5.18의 기억들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으며, 광주의 비극을 초래한 학살자 전두환과의

 

관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장치'가 있다는 점에서 지난 2012년 9월말의 다음 기사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문 후보는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 열사 등 의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문 후보는 또 정치인들이 잘 찾지 않는 옛 묘역을 찾아 87민주항쟁 때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의 묘역도 참배했다.

문 후보는 "이분들 덕분에 오늘의 민주주의가 있는데 자꾸 후퇴하니 볼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문 후보는 구 묘역 참배를 마치고 나오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민박기념비'가 이곳에 묻혀있다는 얘기를 듣고 되돌아와 이 비를 발로 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민박기념비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2년 전남 담양군 마을을 방문한 뒤 세운 것으로 광주·전남 민주동지회가 1989년 이 비를 부순 뒤 구묘역 입구에 묻어 사람들이 밟고지나가도록 한 것이다...

 

 

* 오마이뉴스, 2012. 9. 28. 기사 발췌.

 

 

 

문재인이 이 곳을 굳이 찾았다는 것, 그리고 굳이 전두환 기념비를 밟고 나왔다는 건 어쨌든 유의미한 퍼포먼스다.

 

게다가 망월동 신묘역 안의 민주 열사들 영정 앞에서 저리도 해맑게 웃고 치우는 누군가와는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신묘역의 후문, 그러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열사들의 영정 앞에서 파안대소를 했던 곳을 지나 조금만 더 걸으면 나타나는

 

후문을 나와서 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 구묘역이다. 전두환 정권의 회유책과 묘지 이장 책동에도 불구, 여전히 5.18 희생자가

 

119분이나 안장되어 있으며 이후의 민주화 투쟁 중 살해된 열사들이 함께 모셔져 있는 곳이다.

 

이 곳이다. 제대로 다져지지도 않은 땅, 틀도 잘 갖추지 못한 채 제각기 색다르고 형이 다른 비석을 명패삼아 모셔진 분들.

 

그리고, 올라서는 곳 들머리에는 아스팔트가 커다랗게 구멍이 난 채 뭔가를 물고 있었다.

 

대충 식별되는 글자는, 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마을...

 

옆에 선 안내판의 내용을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 놓기로 한다.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의 현장.

 

민족의 반역자요 광주민중 학살과 자주 민주 통일의 원흉 전두환이 자기 죄를 은폐하고자 학살현장인 광주를

 

방문하지 못하고 1982년 3월 10일 담양군 고서면 성산마을에 잠입하여 민박 기념비를 세웠다.

 

이에 복받쳐 오르는 분노와 수치심을 참을 수가 없어 1989년 1월 13일 이 비를 부수어 이곳에 묻었나니

 

5월 영령의 원혼을 달래는 마음으로 이곳을 짓밟아 통일을 향한 큰길로 함께 나아갑시다.

 

영령들이여! 고이 잠드소서!

 

1989년 1월 13일

 

 

광주, 전남 민주동지회"

 

저런 허름하고 낡은 '흔적'들이 아니었다면, 이 곳은 그저 여느 동네 야산의 공동묘지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을 뻔 했다.

 

그만큼 더욱 안타깝기도 하고, 무언가 이 나라의 현실이 잘못되었다는 신호를 강렬히 보내는, 그야말로 세계의 끝이다.

 

인혁당과 민혁당을 헷갈렸던, 프롬프터에 오타가 났던 박근혜의 진정성 없는 사과는 그들에게 상처만 더한 건 아닐까.

 

인혁당 유가족분들이 최근에 다녀가신 듯 싱싱하고 새하얀 화환 하나가 제대 위에 놓였다.

 

(그 옆에는 최근에 다녀간 문재인 대통령후보의 화환도 있었지만, 바람이 불었는지(?) 엎어진 채 꽃이 모두 시들어있었다.)

 

'진보적 정권교체'의 붉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열사들, 이름이 있고 없고간에, 이 땅의 정신적 영토와 면면한 흐름을

 

지켜내온 그들은 총칼로 나라를 지켜낸 사람들만큼은 최소한 존중받고 기억되고 기려져야 하는 거 아닐지.

 

그렇기는커녕 거꾸로 흐르는 세월 탓에 저들은 무덤에 누워서까지 붉은 머리띠를 동여맸다.

 

구묘역 바로 앞에 있는 조그마한 꽃집. 색색깔의 꽃다발과 여러겹 펼쳐진 파라솔의 색감이 꽤나 화려하고 이뻤지만

 

왼쪽으로 시야에 걸린 '광주'라는 두 글자가, 그리고 묘역의 스산하고 비극적인 분위기가 모두 잠식해버리고 말았다.

 

떠나기 전. 여전히 떵떵거리며 호의호식중인 문어 대가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꺼이 즈려밟고 침을 뱉어주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그, 피해자 중 한명이었던 정치인으로부터 사면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나머지로부터는 아니다.

 

게다가 스스로 뉘우침이 없이 29만원이 전재산이라며 불법 축재물에 대한 추징조차 피하고 있는 그런 괴물은 사람도 아니다.

 

 

 

 

 

영광 원전에서 배출되는 온배수로 운영하고 있다는 아쿠아리움, 그곳에서 만난 해양 동물 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이 샛노란 해마. 생각보다 활달하게 물 속에서 톡톡 몸을 튕기며 돌아다니고 있었던 모양새도 흥미롭고, 울룩불룩한

뿔이 돋아난 형태의 노란 몸뚱이도 재미있고, 좀더 눈여겨보면 등쪽이나 배쪽에 지느러미가 하늘거리는 모습도

보이는 거다.

그리고 지들끼리 몸을 엮어서 둥둥 떠있기도 하고, 물살에 몸을 맡긴 채 휘휘 돌기도 하고. 잡담하듯 서로 나란히

붙어선 사이좋게 흘러가기도 하고.

아쿠아리움 안에 있는 저 하얀색 스쿠터도 눈에 들어왔다. 진짜 스쿠터를 칠해서 갖다 놓은 건지 아니면 그냥

조형을 만들어 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 아래에서 가만히 제자리 헤엄질중인 물고기들.

호랑이 갈기처럼 생긴 지느러미를 너울거리는 이 물고기는, 어떻게 보면 이쁘고 어떻게 다시 보면 징그럽고.

사실 이런 열대어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샛노랑 색깔이 이쁘다 싶기도 하지만, 저렇게 총천연색의 몸을

갖고 있단 건 징그럽기도 한 거다. 


 그리고 별 두드러진 특징은 못 잡아내겠는 횟감같은 생선 몇 마리. 


아싸 가오리.

아쿠아리움 건물 위에 올라있는 거대한 문어도 맘에 들었다. 문어인지 낙지인지, 꿈틀거리는 다리의 표현이 참.

아쿠아리움을 나서다가 신기한 열매가 달린 퍼러딩딩한 나무를 보고 한 컷.





* 한국원자력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에너지체험 블로그기자단'의 일원으로 떠난 출사 여행이었습니다.


* 19세 이하에게 유해한 정보(사진 등)가 포함되어 있다 하여 강제 비공개처리된 후, 약간의 수정과

사진 자체 검열을 통해 재발행하는 '유르겐 텔러' 사진전. 그의 전시는 19금이 아니었다.



대림미술관의 전시를 언젠가부터 빠짐없이 보고 있다. 최근만 해도 폴스미스, 디터람스, 이번에

유르겐텔러의 전시까지. 그는 무려 10년동안 마크 제이콥스의 광고사진을 찍기도 하고 각종

다큐멘터리 작업도 하는 등, 딱히 상업사진가라거나 예술사진가라는 식의 단순한 도식에

포섭되는 인물은 아닌 거다. 원래 전시를 보러가서 작품을 찍어오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그의 사진들을 보며 내가 다시 재촬영하고 싶다는 욕구가 무럭무럭 생겨버렸다. 

유르겐텔러의 이번 전시회, 'Touch Me'를 소개하는 브로슈어의 소개된 두장의 그림은

위의 마크제이콥스 광고사진과 이 문어 사진. 아마도 마크제이콥스의 상품들을 탐닉하다못해

쇼핑백 안에까지 박박 긁어들어간 빅토리아 베컴을 보여주고 싶었던 듯한 첫째 사진과

침대 위에서 여덟개의 다리를 흐느적대며 쉼없이 꼬아대는 문어를 보여주는 두번째 사진은

묘하게 겹치는 구석이 있는 거 같다. 침대 위 문어는 굉장히 섹슈얼하면서도 강렬한 느낌. 



(사진)


그의 사진들은 거침이 없다. 주저없이 드러내고 거침없이 희롱하는 느낌이다. 심지어 그는

임신한 부인의 만삭의 배 위로 자신의 성기를 드리운 채 사진을 찍는다. 그의 몸을 사진으로

담아내며 그는 스스로 포토그래퍼의 '권력'을 내려놓고 피사체로 평등해지는 건 아닐까.

 

(사진)

여성 모델이 그럴듯한 그랜드 피아노에서 연주를 하는 사이, 그는 또다시 옷을 벗고 피아노

위에 올라가 넓은 등판을 통해 피아노 소리를, 울림을 듣고 있다. 자신의 적나라한 신체를

아낌없이 보여주면서, 귀로 듣는 게 아니라 온 몸으로 듣는다는 게 어떤 건지를 보여주려는 듯.



(사진)


도슨트의 설명에 따르자면, 이 사진은 어린아이의 돌사진 같은 포즈를 요청하여 찍은 것이란다.

비슷한 포즈, 비슷한 표정이라지만 너무도 이질적이고 위화감마저 조성되는 풍경, 아마도 그는

이런 식의 불편함을 불러일으키고 좋아하는 건 아니려나. 뭔가 쿨하게 드러내고 표현에 거침없다

싶으면서도, 그의 사진은 은유와 유머가 가득하단 느낌이다.

아무래도 사진을 찍으면서 모두가 바라는 건 그런 거 아닐까. 이미 잔뜩 소모되고 익숙해져버린

풍경에서 뭔가 새로운 느낌, 낯선 시선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이런 사진인 거다.

지상에 존재할까 싶은 생명체의 모습같기도 하고, 영화 '괴물'에 나왔던 녀석의 모형같기도 하고,

그런데 알고 보면 바나나를 긴 혀로 휘감아 삼키려드는 순간의 코끼리였다는 반전.

이번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touch me', 그 제목은 사실 이 사진 어디엔가 숨어있는 그 문구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터치 미. 옷을 전부 챙겨입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팬티만 입은 한 남자가 다소

멍하고 방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다. 그리고 그의 팬티에 그려진 손모양과 간단한 문구.

묘한 광기가 떠도는 듯한 눈빛 위로 거꾸로 쓴 왕관, 길가의 가로수 나무라도 꺽은 듯 엉성하고

약해보이지만 구부정한 자세를 용케도 버텨주는 나무지팡이, 옆에 변기와 맞물려 왠지 냄새나고

더러운 오물일 거라 짐작-기대되는 거뭇거뭇한 흔적들이 묻는 그의 몸. 


(사진)


그녀의 강렬한 눈빛에 이끌렸던 시선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차츰 내려가는 순간, 또다른 눈이 하나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외설적인 느낌보다는, 활짝 열린 그곳으로부터 도리어 관찰당하는 느낌.

엄마아, 엄마아, 엉덩이가 뜨거워. 정도? 다큰 성인의 몸뚱이라지만 다 벗은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한없이 유약하고 부드럽고, 또 추워 보이는 거다. 난로를 들이대니 오히려 더

추워보이는 느낌이 더해진 걸까.

저런 생생한 표정, 맥주가 터져서 거품이 질질 흐르는 순간이다. 할아버지는 당황한 듯 입을

벌린 채 병을 쥐곤 (공교롭게도) 그의 노쇠한 성기가 있을 위치에서 두 손이 굳었고, 할머니는

그야말로 경악하며 한 손으로 그 광경을 가리려 애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림미술관 2층, 3층을 한 바퀴 돌고, 몇몇 맘에 들던 작품들 다시 한번 보고 나서 도착한 곳은

유르겐 텔러와 함께 작업했던 모델, 유명인들이 그에게 던진 질문들이 벽면 가득 적혀있던

미디어룸. 원래는 하나하나 답하려 했다고 하나, 무려 102개의 질문이라 그러지 못해 미안하단

유르겐의 쪽지가 가운데에 적혀있었지만 질문들이 전부 유르겐을 비춰주는 거울 같아서

찬찬히 읽어보는 재미가 있었다.

1층에 전시되어 있던 유르겐 텔러의 그 거대한 쇼핑백. 사람들에게 일종의 포토존 역할을 하는

저 쇼핑백 뒤에서 해보고 싶던 건 사실 물구나무를 서던가 해서 다리 두개만 번쩍 노출시키는

거였는데. 보는 눈이 많아서 참았다..랄까. 여하간, 사진을 나도 저렇게 멋지게 찍고 싶다고

잔뜩 파이팅을 충전해서 돌아왔던 전시였다. (2011. 4. 15 - 7. 31, 대림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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