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초, 정신이 번쩍 나는 맑고 차가운 공기를 부드럽고 새침한 봄볕이 살짝 뒤흔들고는 모른 척 돌아서는 그런 시기의 경주 대릉원.

 

천년을 버텼던 왕국의 천년 전 무덤들이 엄마 가슴처럼 봉긋하게 솟아오른 곳에는 어느새 세월을 먹고 자라난 나무들이 자리를 잡았다.

 

 

경주 시내의 고즈넉한 야경을 책임지는 가로등 갓 속에는 첨성대도 들어있고 초승달도 들어있고.

 

아마도 천마총에도 같이 묻혔었을 법한 신라 왕족의 금관 장식도 들어있다.

 

담백한 기와담벼락을 따라 걷다가 대릉원 입구로 접어드니, 살풋 물오른 연두빛 버드나무가 휘영청.

 

 

파란 하늘, 황금 잔디, 그리고 아직은 덜 깨어난 겨울나무들의 짙고 투박한 검은 빛깔.

 

 

제법 커다란 공원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는 대릉원을 둘러싼 야트막한 담벼락 너머 이어지는 기와지붕들이 보인다.

 

물론 신라시대 때의 가옥 양식이 저렇지는 않았겠지만, 콘크리트 네모 반듯한 건물들이 아니라 다행이다.

 

 

대릉원 안에는 천마총이 있는데, 무덤의 주인을 명확히 알게 되면 '릉'이라고 부르고, 누구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높은 신분의 무덤이라고 판단되면 '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천마 그림이 인상적인 무덤이라 해서 천마총인 셈.

 

내부 촬영은 금지, 주요 유물들은 경주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여기에는 모조품을 진열해두었다고 한다.

 

빨간 옷을 따뜻하게 여며입은 꼬맹이 하나가 동동거리는 걸음걸이로 무덤 안에 들어서는 모습이 귀엽다.

 

 

 

저 야트막한 언덕 같기만 한 무덤들 하나하나에 주인이 있고 부장품들이 있을 테지만, 그 안에 혹 품고 있을

 

보물들이나 금은보화 같은 것들보다도 저 무덤의 곡선이 참 탐난다. 사막에 갔을 때 반해버렸던, 바람이 만들어낸 듄 같다.

 

바람이 모래를 하릴없이 헤치고 깍고 부어내며 만들어내던 그 자연스럽고 우아하던 곡선,

 

아마 대릉원의 곡선들 역시 조금 더 시간이 걸렸을 뿐, 자연의 손길은 마찬가지였으리라.

 

 

 

어떤 각도에서 보면 마치 이전에 대유행했던 텔레토비의 동산이 중첩되어 보이기도 하고,

 

어떤 각도에서 보면 사방이 온통 둥그스름하고 풍만한 언덕으로 둘러싸인 안온한 공간 같기도 하고.

 

 

그 사이를 이렇게 구비구비 휘여지는 산책로로 휘감아 돌아가는 모양새도 참 좋다.

 

딱히 어디를 꼭 찝어서 봐야겠어, 라거나 꼭 한바퀴를 전부 걸어봐야겠어, 라는 하릴없는 욕심 부리지 않아도

 

그저 눈앞에 펼쳐진 곡선의 풍경들과 곡선의 길들을 따라 흘러다니는 것만으로 행복해지는 공간.

 

 

경주의 가로등 만큼이나 눈길을 붙잡던 건, 기와지붕을 얹고 있던 경주의 버스정류장들.

 

대릉원을 나와서, 황남빵을 우물거리면서도 가슴 높이의 돌담길 너머 풍경에서 눈길이 떠나지 않았다.

 

왠지 대릉원은 경주를 갈 때마다 빼놓지 않고 꼭 한번씩 들르게 되는 거 같다.

 

 

 

 이번 시간은 합정역에서 걸어서 찾아갈 수 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역.

 

1890년대 외세의 개화 압력에 나라의 빗장을 연 후, 이 땅에서 사망한 서구의 선교사와 정치가, 사업가 등이

 

묻혀 있는 외국인 묘역을 찾았다.

 

 

 

 

 합정역에서 외국인 묘원까지 걷는 길은 찻길도 아닌 것이 인도도 아닌 것이 묘한 느낌이었고,

 

그 묘한 길의 한켠으로는 벌건 벽돌담 너머로 슬몃 고개를 내민 기와지붕이 숨어있거나 아니면

 

아예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시커먼 속을 온통 드러낸 조그마한 서점이 놓여 있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흔히 좀비가 일어선다거나 귀신이 나타나는 장면에서 보이던 두꺼운 대리석 십자가와 석비들이

 

즐비한 공간, 서울 한복판에 이런 느낌을 자아내는 풍경이 있었는줄은 몰랐다.

 

 

 

 이 곳은 말하자면, 바로 옆에 인접한 가톨릭 교회의 성지인 절두산성지에 비견될만한 기독교계의 성지화 작업이

 

한창인 그런 곳인 거다. 참배객, 순례자, 부담스런 어휘들이 미처 준비되지 않은 마음을 자꾸 찔러왔다.

 

 

 

 

 

 그래서 조용히 카메라만 들고 주변 풍경을 담기 시작..

 

 

 

 팔 하나가 떨어져나간 돌십자가도 보이고.

 

 

 독특한 형태로 만들어진 무덤과 상징들이 보였다. 아마도 그 주인의 국적과 문화에 따라 다른 거였을 듯.

 

 

 

 

 

 

 

 굉장히 우람하게 생긴 비석을 머리맡에 세워둔 고인은 아마도 그만큼 영향력도, 지위도 남달랐으리라.

 

 

 혹은 이렇게 자신의 영역을 대리석으로 구획해놓은 고인들 역시 어느정도의 끝발이 있었을 테고.

 

 이렇게 특색없는 석비에 간략한 생몰연대와 이름만 적힌, 비좁게 열맞춰 선 고인들의 이야기는 늘 안갯속에 잠겨있다.

 

전체적으로 야트막한 구릉을 따라 늘어선 석비들과 몽땅한 나무들이다 싶었는데, 이 나무 한그루는 유독

 

하늘 높이 삐쭉 치솟아 발치에 짙은 그늘을 만들어냈다. 얼핏 하늘을 받치고 선 느낌이기도 하다.

 

 

 

 

 

 

 

 

 

 굉장히 딱 떨어지는 좌우대칭, 기하학적 형태의 교회. 그려볼까 하고 잠시 쳐다보았지만

 

너무나 딱딱 각이 맞고 직선들만 가득한 건물임에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석비들의 모양새, 무덤의 생김생김이 다르다며 한참을 돌아보고 나니 이제 좀 싱싱하고 살아있는 것들을

 

보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묘원의 분위기는 생기발랄함이나 밝음과는 거리가 있는 거다.

 

 

 

5월의 묘지로부터 눈을 돌려 싱싱한 초록의 나무들로, 그리고 땅거죽을 흥건히 덮고 피어나는 꽃망울들로.

 

 

 

 

ㅇ 고인돌, 교과서 밖에서 만나다.(Intro.)

강화도, 대학에 들어올 때까지 교과서에서 배웠던 강화도와 실제로 이래저래 놀러다녔던 강화도의

이미지 사이에는 꽤나 큰 갭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국사교과서 상권이었던가, 표지모델로 봤었던

이런 지석묘, 고인돌의 이미지가 강화도에 대한 대표적 이미지 중 하나였다면, 막상 강화도를

걷고 달리고 드라이브하면서 마주쳤던 풍경 중에 고인돌은 딱히 맞닥뜨렸던 적이 없는 거 같다.


의외로 이렇게 눈에 탁 뜨이는 공간에 그림처럼 놓여있는 것들이 많지 않은데다가 평소에

별반 관심이 없으면 그만큼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아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저 나만의

특수한 사례에 속할지도 모르지만. 여하간 고인돌을 실제로 본 적도 굉장히 까마득한 거 같고,

한두기 띄엄띄엄 보는 게 아니라 좀 제대로 작정하고 본적도 없는 거 같고.

그러고 보면 고인돌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탁자모양 북방식, 바둑판모양 남방식, 그리고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매장양식이란 거 정도다. 이래서야 원, 저렇게 얼추 탁자모양 닮은

벤치가 덩그마니 놓여있는 것만 보고도 '탁자모양 북방식 고인돌'이라고 생각할 지경이다.


이미 14회를 맞이했다는 강화도고인돌문화축제, 이번 기회에 단단히 작정하고 고인돌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강화도 여기저기에 산재해있다는 고인돌, 알아보고 찾아보고, 그러면

더 강화도를, 고인돌의 이미지들을 풍성하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알고 보면 고인돌은 영어로 Dolmen,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는 거석문화의

한 형태라고 한다. 큰 바위로 석상이나 무덤 등을 만들어 부족의 권위나 영광을 드러내는

문화, 어쩌면 그런 문화는 인류가 지배-피지배의 권력관계로 정립되고 나서 지배계층이

품게 되는 필연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욕망을 그대로 반영하는 건 아닐까. 이집트의 피라밋,

요르단의 페트라, 모아이의 석상들, 그 커다랗고 무쓸모하지만 위풍당당한 석조물들. 

그렇지만 한국의 고인돌이 2000년 UNESCO의 세계문화유산 인증을 받은 건 나름의 고유함과 특성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의 강화, 고창이나 화순처럼 고인돌이 밀집된 곳이

흔치 않다고 한다. 전세계에 퍼진 약 6만여기의 고인돌 중 약 2/3(4만여기)가 우리나라에 있는데,

강화도의 경우는 북한과 남한 고인돌의 맥을 모두 반영하고 있어 그 형태가 다채롭고, 고창,화순은

보존상태가 좋고 한곳에 밀집된 특징이 있어 선정되었다.


특히 강화도의 경우, 북방의 탁자식과 남방의 바둑판식이 섞여 있고, 고려산을 중심으로

고지대에 분포하고 있어 연구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강화도 고인돌에 대한 연구는 이미

1916년 조선총독부가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정도라고 하니 그 학술적 가치를 짐작할 만 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표적인 고인돌이 바로 첫사진, 그리고 강화고인돌문화축제가 벌어지는

곳인 부근리 고인돌이고, 그 외에 강화도에 산재한 150여기 중 70여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니 저렇게 다양한 고인돌 탐방로를 짜서 둘러볼 수 있는 거다.


ㅇ 고인돌 만드는 법

무릇 유행이란 돌고 도는 것. 선사시대 부족장 Style의 무덤이 언젠가 2000년대 이후 부활해서

새롭게 트렌드가 될지 모르는 거다. 당장 던져진 돌무더기가 산을 이루도록 맞아야 할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여하간 어떤 경로로던 고인돌(Dolmen) 스타일의 매장 풍습이 다시 유행할

떄를 대비하여 간단히 고인돌 만드는 과정을 보아두는 것도 좋겠다.

1. 채석하기 : 고인돌을 만들기에 좋은 편마암을 큰 바위조각으로 떼어낸다. 특히 강화도는

편마암이 풍부한 덕에 고인돌이 이렇게 많이 축조되었다고 이야기된다고 한다.

2. 바닥돌 세우기 : 땅을 파서 통나무를 지렛대처럼 이용해서 돌을 세운다. 꽤나 많은 인력과

당시로선 적잖은 물자가 동원되었을 테니, 아무래도 고인돌은 지배집단이 강력해진 징표.

3. 덮개돌 운반하기 : 흙으로 바닥돌 주위를 덮어 완만한 경사면을 만든 후, 통나무를 바퀴처럼

활용해서 덮개돌을 바닥돌 위로 끌어올린다. 커다란 고인돌의 경우 덮개돌을 옮기기 위해

천명에 가까운 인력이 소요되었을 거라는 분석도 있다고 하니, 보통일은 아니었던 거다.


4. 고인돌 축조완료 : 완만한 경사면으로 쓰기 위해 덮었던 흙을 전부 파내고, 바닥돌 사이의

양쪽 열린 공간을 막음돌로 막는다. 그러고 나면 이제 '선사시대 부족장 Style' 고인돌 완성.

그 앞에서 제사를 지내던 차례를 지내던, 아니면 굿판을 벌이던 남는 건 선사시대 매장양식을

21세기에 되살린 본인의 취향 문제랄까.


ㅇ 고인돌의 나라, 강화도를 돌아보다.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라고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수많은 고인돌을 갖고 있단다.

특히나 강화도, 고인돌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버린 이 '강화도 지석묘'의 존재만으로도

강화도는 '고인돌의 나라' 수도 서울깜이다. 이 고인돌은 얼마나 공들여 축조되었는지 바닥이

무려 수십층이나 다져진 자취가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저토록 당당한 듯.

그렇지만 사실 대부분의 고인돌들은 저렇게 반듯하고 딱 떨어지는 깔끔한 이미지로 유지되는

건 아니다. 근처에 있는 '신삼리고인돌', 논밭 한가운데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채 잔뜩 녹슨

철울타리로 둘러쳐진 커다란 너럭바위가 하나 있다 싶었더니 고인돌이랜다. 아놔. 잡초라도

좀 거둬내주고 울타리라도 좀 페인트칠이라도 다시 하던가, 나무울타리로 바꿈 좋겠고만.

그렇지만 요모조모 둘러보며 이 수천년 묵은 커다란 바위의 신비함을 느끼기에는 더없는

효과가 있는 거 같기도 하다. 좀처럼 연대를 식별할 수 없는 바위지만, 저렇게 판판하게

다듬어진 게 수천년 전의 인류 솜씨라는 걸 헤아리려면, 저렇게 잡초라도 무성하고

녹이라도 슬어야 좀 실감이 나는 거다. 바닥돌이 좀만 더 잘 보이면 좋겠지만.


지나던 주민분들, 폭삭 늙으신 할머니 농민분들이 사진찍는 걸 보더니 슬쩍 알려주시던

이야기 한 토막. 논을 넓히겠다며 주인이 저 바위를 움직이겠다고 으쌰으쌰한 적이 있댄다.

그게 언젠지, 삽으로 퍼내려 한건지 굴삭기를 동원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그날밤

그의 꿈에 머리가 새하얀 노인이 나타나서 크게 꾸짖었다나. 우가우가, 이러셨을려나.

 

그리고 좀더 차로 달리다가 문득 발견한 강화 부근리의 '점골 지석묘'. 제법 잔디도 깔리고

말끔하게 정돈된 상태로 서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70여기의 강화도

고인돌 중 하나라고 한다. 앞선 '신삼리 고인돌'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은 곳이었어서

그렇게 방치되다시피 했던 걸까.


고려산 북쪽 능선을 따르다 끝자락에 축조된 점골 지셕묘는 상석과 4개의 바닥돌이 있는

전형적인 탁자형 고인돌로, 원래 상석과 바닥돌이 기울어져 있던 것을 2009년께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준비하며 발굴조사하고 나선 해체하고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문화재를

수선하거나 관리할 때 자주 쓰이는 '해체', '복원'이란 단어가 웬지 고인돌 앞에선 웃기다.

그냥 돌들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제대로 올려놓는, 굉장히 심플한 작업이지 않을까 싶은 거다.

물론 실제론, 제대로 이가 맞았는지라거나 어디를 괴어야 할지 따위 의외로 복잡할 듯.

'강화 삼거리 고인돌군'
엔 그래도 제법 고인돌들이 우르르 몰려있다길래 놓칠 수 없다 싶어

조금 길을 헤매고 뱅뱅 돌면서도 굳이 찾아갔다. 표지판들이 꽤나 오래전 구비된 듯 많이들

헐고 낡은데다가, 그렇게 많지 않아 가는 길 내내 이 길이 맞는지 조바심을 내야했다. 게다가

저렇게 철컥 자물쇠가 걸린 채 수십년은 녹슬고 있는 듯한 장애물까지.

옆으로 돌아 계속 앞으로 걸으니 점점 산길이 깊어지고 경사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산 꼭대기를 오르는 길인가 싶어, 어느 순간부터 끊긴 인적을 찾아 되돌아가야 하나 걱정이

스물스물 일기 시작할 무렵. 문득 저런 조그마한 표지판이 땅에 박힌 걸 발견했다.

그 표지판 옆에는 저런 제법 커다랗고 판판한 바위가 땅에 박혀있었다. 저게 설마, 고인돌인가.

그저 바위라고 생각하기에는 은근히 인공의 손길이 가해진 느낌으로 판판한데다가,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표지판이 앞에 이름표처럼 붙어있을 리가 없으니깐.

역시 그런 거였다. 계속 오르는 길 양편으로 제법 크거나 많이 크거나 조금 큰 바위들이 누워

있었고, 그게 좀 눈에 띄게 편편하다 싶은 것들엔 저런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이곳 강화도

삼거리 고인돌군에 크고 작은 고인돌들이 십여기나 모여 있다더니, 이런 것들이 이제 그

예고편이나 전조처럼 가는 길에 늘어서 있는 건가보다.

오르막길이 끝나고, 제법 평평해진 중턱에 올랐더니 표지판이 나타났다. 수천년 전에도 여긴

지금처럼 평평한 지형으로 양지바르게도 햇빛을 담뿍 받는 그런 곳이었을까, 수기의 고인돌이

주르르 늘어서 있다니 뭐랄까, 그때의 선사시대인들과 약간의 동질감이 느껴진다. 저들도, 지금

내가 쬐는 이런 햇살을 쬐었겠구나, 오르막길 걷다가 이 평지에 탁 올라서니 기분좋았겠구나.

'강화지역에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고인돌이 산재해 있으며, 특히 이들 중에

10-20여기에 달하는 군집을 이루는 고인돌군이 5개가 있다. 이 중 하나인 삼거리고인돌군은

고려산 북쪽 능선에 위치하며, 모두 10여기의 북방식 고인돌이 3개의 소군집을 이루고 있다.

삼거리 고인돌 중에는 덮개돌에 '성혈'이라고 하는 작은 구멍이 패여있기도 하는데 이를

별자리와 연관짓기도 한다. 2000년 12월 2일 고창, 화순의 고인돌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덮개돌이 미끄러져 내려간 걸 제외하면 형태가 제법 온전히 남은데다가

덮개돌이나 바닥돌이 고른 두께로 납작하게 다듬어진 게 꽤나 공력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가히 삼거리고인돌군의 대표선수라고 해도 될 거 같은데, 무너져 내리지 않았으면 최근에

만들어진 석조 탁자라고 해도 믿었을 거 같다. 차라리 무너지며 뒤틀려서 아마도 부족장의

유해가 뉘여졌을 그 내부 공간이 드러나고 나니까 고인돌스러운 거 같다.
 


누군가가 옆에 굴러다니는 납작한 조그만 돌들로 고인돌을 만들어놓고 떠났다. 뒤로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수천년 전의 커다란 진품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자잘한 고인돌 모형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대부분 덮개돌이 미끄러져 내린 채 낙엽이 두껍게 덮이고, 잡초가

자라고 자잘한 돌들이 틈새를 메우고 있었다.


십여년 전에 조성된 무덤은 무섭지만, 수천년 전에 조성된 이곳 고인돌 무덤은 전혀 무섭지 않다.

그들의 팔다리가 놓였을 공간은 이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머리가 놓였을 곳에는 특히나

불쑥 뾰족뾰족한 잡초가 자라났다. 그네들의 양분을 빨아먹고 자랐을 거다, 라고 간단하게

치부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차이가 그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이미 그들은 흙으로 돌아갔다가

지렁이에 먹혔다가, 물에 섞여 하늘에 올랐다가 다시 땅위로 흘러내리고 바다로 번져서,

온세상에 흩어져 있을 거다. 
 

그래서 이렇게 싱싱하고 원기왕성한 덩쿨이 되어 나무를 기어 오르기도 하고, 이미 죽어버린

나무등걸들이 때마침 바닥돌처럼 11자로 늘어선 가운데에서 부울쑥, 새싹을 틔우기도 하는건

아닐까. 수천년 전의 인류가 지금의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대체 얼마나 길고 오랜 시간이

그 사이에 놓여있는지 가늠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네들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공간인 고인돌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그 망연한 수천년의 시간이 바싹 땡겨지고 조여지는 느낌이다.
 

비록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는 수천년동안 깨지지도 녹슬지도 변색되지도 않는 돌처럼

단단하고 완고한 그들의 거석문화가 아니라, 이렇듯 금세 녹슬고 낡아지는 슬레이트 같은 세상은

아닌가 더러 걱정스러워지긴 하지만 그래도. 수천년 전 고인돌을 만들어 지금까지 이렇게 전하는

그들의 본능적인 지혜랄까 원초적인 에너지를 우리도 갖고 있으려니 믿고 싶어지는 거다.


아까 신삼리 고인돌이 덩그마니 놓여있던 논밭을 지나 강화도를 빠져나오는 길.

수천년전 그때처럼 태양이 새빨갛게 떨어져내리고 있었고, '고인돌의 나라' 강화도를

빠져나오면서 내 안 어디에선가 틀림없이 각인되어있을 수천년전 인류의 흔적이 새삼

도드라져 보였다.







하늘 끄트머리에서부터 슬몃 붉은 빛이 감겨 올라오는 시간, 손바닥만한 경주시 한 복판의

노서, 노동고분군 옆에 자리를 잡았다. 노랗게 변색한 잔디가 이쁘게도 입혀져서는, 경주시를

감싸고 있는 산들처럼 완만하고 복스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왕족들의 안식처는, 천오백여년

시간을 시위하듯 커다란 나무들을 키워 올리고 있었다.

누가 감히 왕들의 안식처에 올라가 저 나무들을 심고 키우고 손봐줬을 리는 없고, 그저

자연스레 바람이 옮겨다준 씨앗을 이 자그마한 언덕이 품고서 물을 주고 양분을 줬을 거다.

그렇게 싹이 트고 키가 자라 저렇게 커다란 나무가 되어 더욱 단단히 고분의 가파른 옆구리를

움켜쥐게 되었겠지.

빨갛게 지던 해는 저 너머 나무 뒤로 가뭇없이 숨어버렸고, 고분은 온통 깜깜해져서

이제 그 곱던 갈빛 잔디의 부드러운 질감도 지워져버렸다. 한결 단단해지고 완강해진 느낌.

고분의 주인은 이제 완전히 분해되어 다시금 나무와 흙으로 변신했겠지만, 신라를 지배하고

백성들의 왕으로 군림하던 그 '의지'만은 남아서 태양을 응시하는 듯 하다.

노서, 노동 고분군은 고속버스를 타고 경주시에 내리면 어찌됐건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유적지인 거다. 그만큼 시내 복판에 있는 셈이지만, 막상 그 주변은 적당한 음식점이나 카페

찾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하나,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기어이 발견해낸 멋진 까페.

토토로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창가자리에 앉아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며 길 건너 봉긋하게

올라선 고분과 주위 풍경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유리창이 통유리가 아니어서 조금 아쉬웠지만, 사실 그렇게 스펙타클하고 거대한 풍경을

마주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왕복 2차선인 도로 너머 야트막하고 둥실한 고분 두어기를

조용히 바라보는 거니까. 고분의 실루엣이 저 너머 산들의 실루엣과 겹쳐보이는 풍경.


이 까페에서만 한두시간 있었던 거 같다. 경주에 도착하자마자 부서진 카메라를 대신해서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찍어대느라 급 방전된 아이폰을 충전하고 바깥 풍경도 구경하고,

까페도 구경하고 다이어리도 끄적대고. 담에 경주를 들르면 꼭 다시 한번 들르고 싶은 까페.

그리고 꼭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신라 옛 왕들의 석양바라기 풍경.





투르크메니스탄이란 나라가 생겨난 건 1991년 10월 27일, 무너져내리는 구 소련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한 날이다.

이후 15년간 니야조프 초대 대통령의 독재가 이어져왔지만, 정치적 반대세력도 많지 않고 국민만족도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2006년에 니야조프가 사망한 뒤 그의 자리를 이어받은 건 그의 주치의였던

치과의사 출신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 투르크메니스탄의 모든 건물 로비, 건물 내 사무실들, 심지어는

투르크메니스탄 국적 항공기에도 티비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의 커다란 초상화가 붙어있는 나라다.

그런 나라인지라, 초대 대통령의 묘소가 으리으리하게, 마치 파리에 있는 나폴레옹의 무덤 앵발리드를 떠올리게

하듯 금빛 번쩍이는 돔 형태의 지붕과 대리석 뻑적지근한 건물로 꾸며져있는 건 새삼 이상할 것도 없을지

모르겠다. ([파리여행] 나폴레옹의 휴식처, 앵발리드) 사진 촬영조차 금지된 채, 니야조프 초대 대통령과

그의 부모, 그리고 두 형제를 위한 다섯개의 대리석 관이 봉안된 그 곳에서 가이드 압둘라는 낭랑한 목소리로

죽은 이의 안식을 비는 코란을 노래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유해도 못 찾았고, 어머니와

두 형제는 45년인가, 투르크메니스탄에 있었던 대지진때 전부 돌아갔다고 한다. 압둘라는 그가 대통령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망자에 대한 무슬림의 예의로 코란을 읊었다 했다.

그리고 이 건물, Ertogrul Gazy 모스크가 그 묘소 바로 옆에 있었다. 1998년 터키가 건설해서 투르크메니스탄에

선물했다는 건물, 남자 5천, 여자 2천이 한꺼번에 수용가능한 거대한 모스크라고 한다.

현대에 만들어진 모스크라 그런지 전통적인 모습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면서도 뭔가 현대적인 느낌이 드는 거 같다.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새하얗게 반짝이는 대리석과 화려하게 번쩍이는 금박이 아직 그 풋풋함이랄까 신선함을

잃지 않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빼곡히 세워진 채 미나렛 첨탑을 따라 위로 쭉쭉 솟은 가로등들 때문일지도.

황금빛과 나무색이 섞인 기하학적 문양이 가득한 문을 지나면 바로 모스크 안으로 입장, 더이상 사진촬영은

불가능한 공간에서 잠시 내부를 둘러보았는데 1층은 남자를 위한 기도공간, 2층은 여자를 위한 기도공간이라고.

여느 모스크들과 다를 바 없이, 기도를 바칠 때 메카 방향을 알 수 있도록 살짝 움푹 패인 '키브라'가 꾸며져

있고 천장의 커다란 돔에는 알라를 의미하는 아랍어가 쓰여있고, 우상숭배가 금지된 그들의 교리 덕분에

발달한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빼곡하게 채워진 공간.

다만 이집트나 다른 아랍국가의 모스크에서 느꼈던 편안함이나 여유로움이 느껴지지 않았던 건 아쉬웠다. 아무래도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특별한 '과시용' 모스크이기 때문이겠지만, 사람들의 일상에 콕 박힌 채 누구라도 편히

와서 기도하고 쉬고 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어서 그랬을 거다. 더구나 바로 옆의 초대대통령 묘소와 맞물려서

더욱 경건하게 위엄을 부리려는 탓도 있을 테고.

사막의 나라 투르크메니스탄, 그곳에서 이런 분수를 넓게 조성해 놓고 또 저렇게 녹색 정원을 잘 관리하는 것은

꽤나 많은 돈과 시설을 필요로 할 거다. 중동의 여러 아랍국가들에서 그렇듯, 이곳 역시 정원과 분수는 부와

권력의 상징. 이 사원은 그런 점에서도 역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소망교회'쯤 위상을 차지할 거 같다는.

무슬림들은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 손발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계율이 있다고 한다. 보통 다른 모스크들은

입구 앞 정면에 몇 개 수도가 설치되어 있어서 거기에서 손발을 씻고 들어가는데, 여기처럼 칠천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대한 모스크는 고작 몇 개의 수도시설로 택도 없는 거다. 하여 지하에 목욕탕처럼 잔뜩

설치된 수도꼭지들. 왠만한 사이즈의 목욕탕은 훌쩍 뛰어넘는 거대한 공간이다.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의 조명, 그 등불이 천장에 그려내는 격자살 무늬 그림자가 인상적이었다.

Ertogrul Gazy 모스크에서 돌아나오는 길, 사실은 여기에서 초대 대통령 묘소를 향해 사진을 찍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고 했다. 그새 살짝 움직인 태양, 덕분에 잔뜩 역광을 받고 선 모스크를 향해 사진 몇 장을 더

찍으며 압둘라에게 물었다.


투르크 사람들은 이번 대통령이 죽고 나서도 저런 화려한 대통령 묘소를 지으려고 할까. 그는 아마 그럴 거라고

했다. 대통령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님 그만큼의 애정인 건지 모르겠지만 조금 착잡했다. 십여년

독재를 해온 대통령에 대해 불만없이 수긍하며 죽고 나서도 계속 그의 죽음을 기리는 사람들. 물론 엄청난

부존량을 자랑하는 석유가스 자원이 가져다 주는 '먹고사니즘'의 해결이 그 일등공신이겠지만, 그게 다일까.







어렸을 적 48색 크레파스를 쓰면서, 금색과 은색 크레파스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곤혹스러워 했던 기억이 있다.

다른 것들과는 달리 반짝이는 색깔이 특별하고 귀해 보여서 아무 그림에나 쓰기는 아까워 했던 기억과, 그렇게

아끼다가 어딘가 그림 구석에 금색이나 은색칠을 할라치면 정작 생각만큼 이뿌게 나오지 않아 맘상했던 기억이다.

물론 정확히 이런 식으로 의식하지는 못했겠지만..다루기 까탈스러운 금/은색 크레파스는 대개 다른 아이들이

몽당이가 될 때까지도 공장천연의 끄트머리 각이 그대로 살아있곤 했다.
앵발리드의 반짝이는 금빛돔을 올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추적추적 나리는 빗발이 눈에 들이쳤지만, 섬세하면서

부드러운 장식이 금박의 사용으로 인해 자칫 천박해 보일 수 있는 외관에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이집트에

갔을 때 밋밋한 돔 형태에 빤짝이는 금박을 쳐발랐던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모스크를 본 적이 있는데, 어찌나

싸구려스러워 보이던지 차라리 담백한 벽돌색이 그대로 남아있는 모스크에 눈이 갔더랬다.

그치만 이건 그렇다. 금색 크레파스를 딱 적당하게 썼네, 싶다. 파리 시내 어디서고 반짝이는 황금빛이 부드럽게

시각을 자극할 만큼 충분히 눈에 띄면서도, 그렇게 야하지 않은 수준.

앵발리드에는 두 개의 문이 있다. 황금빛 돔의 교회가 바로 보이는 남쪽 문과, 정원을 안고 서 있는 북쪽 문.

남쪽 문으로 바로 들어서려다 보니 어라, 자그마한 해자가 파여 있고, 사진에서 보이듯 뭔가 다리를 세팅하기 위한

기계장치가 보인다. 애초 나폴레옹의 묘소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군사 시설이었다고 하던데, 그래서 방어 목적의

시설물이 구비되어 있는 게 아닐까. 덕분에 살짝 에둘러 가야 했지만 쌀쌀한 추위마저 느껴지는 현재 시간은 9시 반.

여긴 대부분의 관광지가 오전 열 시에 개관을 하나보다. 샤요 궁전의 박물관도, 앵발리드도, 오랑주르 미술관도

모두 10시에 개장한다고 했다. 매표소에서 돌아나와 정원을 거닐었다.

코스모스. 한국에도 같은 종자의 꽃이 있겠지만, 이렇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는 건 순전히 이게 파리이기 때문이다.

원래 코스모스의 꽃잎맥이 저렇게 팽팽하게 조여졌던가..괜시리 새삼스런 시각으로 꽃을 바라본다.

화사한 형광빛의 꽃잎이 빗물을 잔뜩 움키고 있었다. 그 물방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꽃이파리가 처질지언정,

끝내 빗물을 받아내겠다는 꽃잎은 하늘을 바라본다.

이게 북쪽 문으로 들어가는 앵발리드의 입구. 앵발리드는 네모난 마당, 아니면 사열대를 둘러싼 ㅁ자 형태의

건물과 남쪽의 교회로 이루어져 있었다. 티켓은 자그마치 6유로,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 돔교회와 ㅁ자 건물내의

군사박물관 입장료를 포함한 금액이다. 황금돔 교회에서 해설용 라디오기계를 대여하면 저런 돔 모양을 본딴

도장을 찍어주곤 무료로 빌려준다.

나폴레옹은 19세기의 영웅이었다, 그것도 마치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나 봤음직한 그런 영웅. 앵발리드, 곧 그의

무덤은 하나의 신전과도 같았다. 그리고 보면 오벨리스크, 피라밋, 옛 거석문명의 자취를 좇는 기념물들을 보건대

유럽이나 미국이나, 그다지 그 문화유산들은 새로운 건 아니지 싶다. 민주주의의 가치와 이념을 설파하는 동시에

그 '민주주의'라는 허울 위에 높게 쌓인 국가 권력을 새롭게 찬양하고 신화화하려는, 과거의 재탕.

마당에서는 아마도 나폴레옹의 군대가 열병을 하고, 발걸음을 맞추어 군가를 불렀으리라. 포석에 울리는 군홧발

소리와 절걱대는 쇠붙이 소리들은, 사방으로 비산되며 건물벽에 부딪히다가는 한참이나 애쓴 후에야 하늘로

퍼져 나가지 않았을까. 그 광경을 잔뜩 힘준 눈으로 오만하게 지켜보는 나폴레옹의 동상.

사열대 한쪽 켠에는 과거부터 프랑스가 써왔던 각종 포신이 진열되어 있었다. 사실 이 때 눈치를 채고 군사박물관

따위 갈 생각은 애당초 깨끗이 잘랐어야 했던 거다. 딱 보면, 대포 잔뜩 진열해 놓고 총기와 군복 전시해 놓고,

멀게는 말과 사람의 전신용 갑옷에서부터 가깝게는 방독면까지 전시해놓고 치열했던 전투지역 디오라마 펼쳐놓고.

그런 느낌인 게 뻔했는데, 마치 전쟁을 기념한다는 용산의 전쟁'기념'관처럼. 내가 살짝 관대해졌었다.

어디선가 갑작스레 새가 날아올랐다. 날아오른다..는 이미지에 덧씌워지는 인간계의 단상이란 정신의 고양, 보다

높고 근본적인 것으로의 비상, 뭐 그런 것들 아닐까. 지상에 발딛고 선 인간의 영혼이 하늘에 가닿기 위해서는

새의 날개를 빌어야 할 것처럼.
 
꼭 그런 건 아니더라도 음울한 날씨에 음산한 건물..왠지 새의 궤적을 눈으로 좇으며 망연해져 버렸다.

입장. 사람이 좀더 많아지기 전에 나폴레옹의 무덤을 한가로이 구경하고 싶어서 우선 돔교회부터 들어갔다.

먼저 눈에 띄인 건, 나폴레옹의 이미지로 어느샌가 각인되어 버린 저 모자와 코트. 실제로 썼던 건 아니겠지만

그 물품들과 나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정교한 유리상자와 몇개의 할로겐 조명이 만들어낸 진지한 분위기에 젖어선,

그것들을 쓰고 걸친 나폴레옹을 상상해 보았다.

다른 한 켠에 잇는 그리스도 상. 꼬불꼬불한 대리석 기둥이 사면에서 그리스도상 위의 차양을 받치고 있는 형태가

특이하다. 이런식으로 비비 틀어진 기둥 형태는 처음 봤기도 했지만, 검정얼룩 대리석과 담백한 금빛이 아주

세련된 느낌을 자아냈던 게다. 나폴레옹의 안식을 빌기 위해 세워진 교회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지만, 나중에

가이드북을 참고해보니 교회 자체는 17세기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새롭게 덧붙여 지어진 건 나폴레옹의

커다란 대리석 관이 놓인 지하 성당.

그 황금빛 돔의 안쪽 벽면이다. 벽화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살피고 싶었지만 너무 멀고 높아서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높이가 107미터라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그보다 아랫쪽에 놓인 나폴레옹의 관이 더욱 관심이 갔기

때문이기도 했다.

얼핏 보면 무슨 베개 같기도 하고, 발받침대 같기도 하고, 다소 클래시컬한 의자같기도 한 저 생김새지만, 자그마치

6중으로 짜여진 저 붉은색 대리석-나무가 아니다!-관 안에 나폴레옹이 잠들어 있는 거다. 레닌이나 김일성 같은

현대 정치인들의 유해가 포름 알데히드에 절여져 대중에 공개된다고 새삼스러울 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그런 아이디어는 나폴레옹의 죽음 이후에도 그를 이용하려는 의도에 따라, 땅 속에 묻히지 않은 관짝 그대로

대중에, 혹은 프랑스 국민에게 노출됨으로써 구현되고 있었던 거다. 1850년대의 일이다.


그의 관 주위를 둘러싼 (아마도) 12명의 여신들은 영웅의 죽음을 기리며, 그의 평안한 사후를 지키는 수호신이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에는 지상의 통치권을 뜻하는 왕관과 손 모양의 왕홀을 바치는 왼편의 노인과, 하늘의 영광을

뜻하는 신물을 들고 있는 오른편의 노인을 마주하게 된다. 그 입구 위에는 써 있는 문구는 나폴레옹의 유언으로,

"나는 내가 깊이 사랑한 프랑스 국민에게 둘러싸여 세느 강에서 쉴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무덤으로 내려간다는 게 실감이 날 만큼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에서, 나폴레옹의 시신이 사후에 운구되는 과정을

묘사한 조각을 보았다. 울음을 참지 못하는 나폴레옹의 군인들, 그리고 왠지 깊이없이 묘사된 왼쪽의 정치인들..

나폴레옹의 군대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깊은 눈매와 감상적인 표정은, 단지 촬영 각도로 인한 우연인 걸까,

아니면 작가의 의도인 걸까.

밑에서 바라본 그의 무덤은 더욱 크다. 이제는 발받침이나 베개라기보다는, 무슨 기묘한 트로피같기도 하고,

보물상자같기도 한 모양새다. 아마 그는..저 안에서 앙상한 먼지로 남아 있지 않을까. 그의 죽음은 더이상 아무런

실체나 흔적 따위 남기지 않고, 그저 저 커다란 관이라는 이미지로만 남아 있다.

이건 나폴레옹이 아니라, 나폴레옹 3세의 조각상이라고 했던 것 같다.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의 동생의 아들,

간단히 조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나폴레옹의 이름을 이어받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황제로 변신하는 식의

모습도 이어받았으나, 외교적 수완이나 군사적 능력은 그리 신통치 못하여 프랑스를 유럽에서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하고 결국 비스마르크에게 패해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지 표정이 좀...어릿하다.

영웅 나폴레옹의 치적을 열두개로 나누어 장면장면 해설한 부분이다. 상업을 번창시키고, 시민의 권리를 옹호하고..

글쎄, 얼마나 수긍해야 할 지는 모르겠으되, 다만 그가 이렇게까지 신적으로 추앙받고 있는지 미처 몰랐던 점을

알게 된 것만으로 만족이다.

관을 둘러싸고 마치 한바퀴 순례라도 하라는 듯 이어져 있는 원형의 통로. 그리고 벽면을 채운 나폴레옹의 업적과

반대쪽 풍경을 가득 채운 큼지막한 나폴레옹의 관.

돔교회랄까 아니면 거대한 돔 묘지랄까, 그곳을 벗어나 군사박물관 쪽으로 향했다. 고대에서 현재까지 이르는

전쟁무기나 장식품, 전쟁의 불가피성과 자국의 순수성과 정당성을 강변하는 프로파간다를 보여 줄 게 뻔했지만,

그런 것들보다 난 나폴레옹의 데드마스크만 보고 나오려고 했었다.


영어가 짧은 가이드 아저씨는 데드마스크가 현재 전시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정확하게 그는 'no'라고 했을 뿐이지만

내 질문과 그의 제스처로부터 그의 심중을 유추해보면 그러했다는 얘기다. 중간에 만난 한 이탈리아 아저씨의

말대로, 전쟁박물관은 so stupid things로 가득찬 공간, 데드마스크도 없다니 별 아쉬움 없이 앵발리드를 나섰다.


사실 잠시 2층의 전시관 몇 개와 1층의 중세시대 전시관을 둘러봤지만,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질려버리는 바람에

얼른 뛰쳐나오고 말았다. 파리까지 와서 그간의 '전쟁'이 자랑스럽게, 또 자세하게 보관되어 있음을 떠올리는 건

그다지 유쾌한 기억은 아닐 듯 했달까.

저런 식으로 바닥에 깔린 포석, 세월의 더께를 담뿍 머금은 건물의 누런 벽, 희끗희끗 색이 바랜 듯한 짙은 회색빛

지붕, 그리고 이 모든 탁색을 순식간에 생명가득한 풍경의 일부로 바꾸어 버리는 녹색 정원. 선명한 연두빛 잔디와

보들보들해 보이는 녹색원통뿔 모냥의 작은 나무.

앵발리드의 금빛 돔 아래엔 나폴레옹이 쉬고 있다. 그의 유언은 사실, 세느 강에서 사랑하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둘러싸여 쉬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글쎄...앵발리드의 금빛 돔 지하교회가 그가 원했던 휴식처일까.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불편한 대리석 6중 관 안에 누워있는게 과연 그가 바랬던 사후의 모습일까.


그의 유언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둘러싸여 쉬고 싶다는 말은 그를 인간 그 자체가 아닌 일국의 영웅으로 기억하게

했다. 그리고 앵발리드의 군사박물관과 더불어 그의 무덤은, 프랑스의 옛 영화, 군사적 자부심의 원천을 퍼올리기

위한 마르지 않는 샘물로 활용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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