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마석에 있는 모란공원묘지, 추석이 채 일주일도 남지 않은 때 찾았던 묘지분위기는 그렇지만

정말 썰렁했다. 공기에 짓눌린 채 바싹 말라버린 꽃가지 하나가 화석처럼 대리석 제단 위에 고여있었다.

이전 포스팅 ( 
이소선 여사 마지막 가시는 길. )에서 올렸던 사진들은 이소선 여사의 안식처가 될 공간

중심이어서 그나마 사람들이 북적북적, 공기를 흩어놓고 있었지만 다른 수많은 묘소들은 무겁게 공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더욱 기분이 울적했던 건, 묘소 곳곳에 붙어있던 이런 관리비 독촉 스티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그들이 가고 나서 재산이나 가족이 제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도 대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데,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이들 역시 묫자리 하나 맘편하게 쓰지도 못하고

죽고 나서도 편히 쉬지 못하는 건 아닌지. 없는 사람들, 재산도 없고 가족도 없는 사람들이 그래도

민주묘역에 묻힐 수 있었던 게 다행인 걸까. 추석때 찾아와 무성한 잡초라도 끊어줄 사람은 있을까.

모란공원묘지에 들어가기 전 입구에서 만난 꽃가게. 한지에 붓으로 엉성하게 써둔 문구가 굉장히

담백하면서도 왠지 호소력 짙어보였다. "아름다운 생화 사시오 여기로 오시오"

모란공원 입구는 야트막한 돌기둥 두개, 그리고 기둥 사이로 녹슬고 성긴 초록색 철문으로 열리고

닫히고 있었다. 철문에 페인트칠은 벗겨지고, 개방시간을 알리는 철판은 글씨가 낡고 삭아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고. 그 와중에 눈에 띄던 건, 아마도 남양주에서도 트레킹코스를 개발한듯 어딘가로부터의

코스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점 시점' 표지판. 인생이 끝나는 묘역에서 맞는 트레킹 코스의 종점이라.

입구를 들어서니 바로 묘소들이다. 뭔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준비하기도 전에, 촘촘하게 모셔진 무덤들이

눈앞으로 확 달려들었다. 나름 겉에서 보기엔 색색의 꽃들도 꼽혀있어 색깔도 다양하고, 검고 하얀 대리석

조형물들도 묘소 옆을 지키고 있어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지만, 꽃들은 전부 빛바랜 조화.

민족민주열사 묘역도가 묘소로 들어가는 길 앞섶에 세워져있었다. 많다. 그리 넓은 않은 부지에 꽉꽉

채워진 느낌이다 했더니, 묘역도를 봐도 그 느낌 그대로다. 그리고 중간중간에는 미처 그림에 반영되지

못한 새로 모셔진 분들의 위치가 사인펜으로, 볼펜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중에 눈에 띄던 표시, 용산참사 철거민 민중열사. 이명박정부는 이미 만원이 되어버린 모란공원묘지의

밀도를 더욱 높이는데 일조하고 있다. 하긴, 이명박정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노무현 때라고, 김대중

때라고 태평성대도 아니었거니와, 사람들의 피와 땀을 쉼없이 요구하는 괴물이 어딘가에 버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더 크고 넓은 묘역이 필요한 거다.

민주열사 묘역으로 올라가는 길, 문득 머릿속을 맴돌던 노래 하나가 계속 무한도돌이표를 그려냈다.

꽃다지가 불렀던 '열사가 전사에게'라는 민중가요.

꽃무더기 뿌려놓은 동지의 길을
피비린 전사의 못다한 길을
내 다시 살아온대도 그 길 가리라
그 길가다 피눈물 고여 바다된대도
싸우는 전사의 오늘있는 한
피눈물 갈라 흐르는 내 길을 가리라

동지여 그대가 보낸 오늘 하루가
어제 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
동지여 그대가 보낸 오늘 하루가
내가 그토록 투쟁하고 싶었던 내일
복수의 빛나는 총탄으로 이제 고인 눈물을 닦아다오
마침내 올려질 승리의 깃발 힘차게 펄럭여다오

민주열사 추모비.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새겨진 글이 뜨겁다.

"의로운 것이야말로 진실임을, 싸우는 것이야말로 양심임을 이 비앞에 서면 새삼 알리라."

"지나는 이 있어 스스로 빛을 발한 이 불멸의 영혼들에게서 삼가 불씨를 구할지어니."


허세욱 열사. 2007년 한미 FTA를 반대하며 분신하신 택시운전 노동자였다. 운전을 하며 틈틈이 얻은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각종 집회와 진보정당 모임에 빠지지않고 나가기까지, 그렇게 스스로

세상을 공부하고 의견을 말하시던 분. 한미FTA가 지고의 가치인양 치장하는 건 2007년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지만..스스로 빛을 밝힌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안타깝던 건, 묘비나 이런 안내문 위에 언제 떨어졌는지도 모를 새똥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던 모습.

조금만 신경써서 관리해줘도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을 텐데, 햇빛에 하얗게 바래어가는 종이만큼

녹슬고 더러워진 시설물들이 너무 아쉽다.

그래도, 묘비 머리마다 둘린 머리띠가 팽팽하다. 열사정신 계승, 단결투쟁, 이명박정권 퇴진까지. 생전에

그렇게도 자주 둘렸을 머리띠가 이제 묘비에 둘린 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어느 노동자의 무덤 앞에는 백기완 선생님의 헌시가 새겨진 돌도 서 있었다. 정말 비장하고 무거운,

새들마저 부리를 여미는 그런 분위기가 꽉 들이찼던 곳.

그리고 전태일. 수없이 고문당하고 고통받고 죽어간 노동자들, 민주투사들의 대명사이자 상징처럼

되어버린 그의 묘소는 제법 색색의 꽃들이 화려하게 놓여있었다. 그 이외에는 다른 묘소들과 크게

다를 바 없던. 그런데 그는 '기독청년'이란 앞머리를 달고 누워있었구나, 갈수록 대형화, 상업화되며

심지어 정치까지 넘보는 교회세력이 들끓는 시대의 눈으로 보니 좀 낯설다.


전태일 추모비. 납작하고 그리 크지 않은 검정 대리석 네면에 빼곡한 글씨로 전태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신념을 적어두었다. 네 면을 순서대로 찍어두었으니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돌아나오는 길, 곳곳에서 눈에 띄는 관리비 납부 독촉장이 석상 위에 차례 음식이나 꽃 한송이 대신

모질게도 찰싹 붙어있는게 맘에 걸렸다. 이번 추석에는 무성한 잡초도 좀 정리하고 먼지와 독촉장만

내려앉은 대리석 차례상 위에 그래도 조금은 풍성해도 좋을 음식들이 올라앉아 있으면 좋겠는데.






마석 모란공원묘지, 어제(9/7)가 이소선 여사 발인날인지는 몰랐다. 이미 이 곳 전태일 열사 옆자리에

모셔진 줄로 알고 있었고 마침 휴가를 내었기에 찾아가 봤던 것. 그런데 그곳에 이렇게 모셔질 곳이

마련되어 있었다.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민주사회장. 식은 네시부터라고 했으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전태일 열사의 묘소보다 한줄 뒤로, 한칸 왼켠으로 모셔지게 되는 이소선 여사. 그녀의 민주사회장을

준비하는 장례위 소속 사람들이 식을 준비하다가는 전태일 열사의 묘를 바라보고, 바라보고 했다.

정리해고 철회! 라고 쓰인 소금꽃나무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철회 투쟁위원회라 적힌 티를 입은

그분들의 뒷모습이 문득 굉장히 무겁고 답답하게 다가오던.


전태일 열사가 스스로 불꽃이 된 게 스물두살, 70년 11월의 그날 이후로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노동운동의

한복판에서 모든 억압받고 박해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했었다. 근로기준법을 안고 몸을 불사른 70년 그때와

2011년 지금은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르겠다고 비감해하던 그녀, 마지막 유언처럼 남은 말은 '희망버스'를

타고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러 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했다.

장례식은 추모예배 형태로 진행될 예정이었고, 색소폰 등 약간의 추모공연이 있다고 했다.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점점 늘어나는 현수막들. '어머니'란 단어 일색인 게 조금은 맘에 걸렸다. 여성에 대한

경의나 존중을 표하기 위해서는 꼭 '어머니'의 이미지가 씌워져야 하는 것일까. 그저 이소선 그녀,

한 사람의 위대했던 삶 그 자체로 존경하고 사랑하기에도 충분할 텐데. (물론 그녀가 전태일을 보낸

이후 모든 노동자들을 아들딸처럼 여겼다거나, 연배상으로 그게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점은 있겠지만.)

이소선 그녀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거하는 곳. 인부들이 들어가서 땅을 고르고, 그녀를 맞이할 준비를

마친 땅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어머니로서, 여자로서, 사람으로서, 비로소 행복하게

쉴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전태일의 불꽃을 이고 지고 살아온 한평생, 그 자체로 지난한

투쟁의 기록이었을 테니까.

사실, 모란공원묘지엔 '전태일'이나 '전태일의 어머니=이소선'과 같은 널리 알려진 사람들 이외에도

수많은 민주열사들이 잠들어 있다.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노동운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네들의 삶이나 행적 역시 사람이 이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경외스럽다. 전태일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투쟁하고 산화해갔고, 이소선 전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굽힘없이 싸워왔던 거다.

4시가 좀 넘은 시각, 청계천을 지나 서울 곳곳을 들른 이소선 여사의 운구행렬이 드디어 마석 모란공원묘지에

도착했다. 만장이 길목 양켠으로 빼곡히 들이찼고, 그녀의 영정사진을 앞세운 사람들이 끝도 없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마이크를 쥔 그녀의 모습, 개인적인 기억은 전혀 없는 내가 아는 유일한 그녀의 모습이다.

영정사진 뒤 풍물패가 지나가고, 그리고 이소선 여사. 아..어머니. 그렇게 몇 번 집회에서 뵌 적이 있었던 거

말고는 늘 전태일의 그림자에 가려있던 분이었다.

부디..돌아가실 곳, 하늘나라란 게 있다면 40년 넘게 가슴에 묻어오셨을 전태일 열사 꼭 만나서

함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시민장례위원을 포함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묘역까지 함께 했다. 행렬의 앞섶에서 보이던 정치인들,

유명인사들이 있었지만 특히 노회찬 전 진보신당대표..최근 진보신당과 민노당의 통합이 결렬되고나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으실까. 권영길 전 민노당대표도 마찬가지.

좁다란 모란공원묘지 중앙길을 따라 양쪽으로 펼쳐진 만장들, 하나하나 씌여진 문구들을 읽어보았다.

시대의 어른이 또 한분 이렇게 떠나시는구나, 어려운 시기, 야만스러워지는 시대에 중심을 잡아줄 사람들이

떠나는가 싶어 왠지 울컥하고 말았다.

이소선 여사가 떠나기 직전까지 목소리를 높이던 한진중공업 사태, 비정규직 문제, 그런 수많은 난제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간의 의견차라거나, 노조로 조직되지조차 못한 수많은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분리,

진보 진영 내에서 노선차라거나 비전의 차이로 힘을 모으지 못하는 상황..그 모든 것들도 그녀의 죽음

앞에서는 한순간이나마 극복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Vice versa. 남은 자들의 몫.

민주사회장이 시작되려는 찰나. 그녀를 보내는 늦은 여름날 날씨가 이렇게 선선한 것은 하늘이 내려준

큰 부조라고 어느 아주머니가 그랬다. 그 아주머니는 말하면서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누구였을까.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녀를 떠나보내고, 다시 각자의 일터와 생활 공간으로 들어와

평소처럼 살아가게 될 사람들은. 아니, 어쩌면 대부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들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정리해고당하고, 철거당하고, 그렇게 삶의 가장자리로 불쑥 떼밀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고

격려하고 도와주던 이소선, 그녀가 돌아갔다.



▶◀ 이소선 여사의 명복을 빕니다.



* 이소선 여사 마지막 가신 곳.



‘눈물바다’ 된 85호크레인 앞, 가로막힌 ‘어머니의 영정’ (민중의소리, 2011.9.7)


다음으로, 전화연결을 통해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의 눈물의 추도사가 울려 퍼지자 이내 추모제 현장은 울음바다를 이뤘다. 김 지도위원은 “희망버스 타고 가서 진숙이를 만나고 싶다하시더니 결국 이렇게 오셨냐”며 “희망버스 타고 가서 해고된 한진 노동자들 보고 싶으시다는 말씀이 결국 유언이 되고 말았다”고 울먹였다.

그녀는 “노동자들이 싸우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시던 어머니였고, 마지막 가시는 길마저 싸우는 노동자들을 이 먼 곳까지 찾아오신 분”이라며 “노동자는 단결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던 말씀은 어머니 삶에서 나온 평생의 철학이었고 지혜였다”고 말했다.

“이제 편안히 가세요.
배가 고프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아들 만나셔서
이승의 고통일랑 다 내려놓으시고 못다 한 얘기, 못다 나눈 정, 맘껏 나누세요.
어머니로 인해 스스로 노동자임을 자각하고 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지키지도,
달라지지도 않는다는 걸 깨달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어머니를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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