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인생', 현실까지 넘쳐들어온 강릉의 로맨스.

 

영화 '맛있는 인생'에선 차를 타고 슬쩍, 그야말로 옆동네 가는 기분으로 강릉에서 주문진으로 옮겼다는 느낌이었는데,

 

실제로도 강릉에서 주문진 건너가는 건 그런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던 거다. 경포 앞바다를 떠나 길을 잠시 달리다간

 

어느새 다시 나타난 바다는 좀더 본격적으로 항구도 두어개 끼고, 아저씨들은 그물을 정리하고.

 

 

 

방파제의 두 팔 안에 조심스레 안겨있는 주문진항에서 둥실둥실 여유로운 배들, 그리고 그물을 정리하는 분들.

 

그리고 항구 코앞에 바다를 바라보며 주차된 자전거와 자동차, 수면에 기댄 채 출렁이는 배까지. 탈거리 셋이 모였다.

 

주문진에서 출발하는 크루즈호의 선착장. 크루즈라곤 하지만 글쎄, 그다지 호화스러워 보이진 않던데.

 

 

주문진항 근처의 수산시장을 돌다가 만난,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가오리 떼들.

 

골목골목 누비다가 만난 '성인나이트'의 숨겨진 간판, 그렇지만 입구도 숨겨진 거 같구 지금도 하는지는 미지수.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단단한 선언조의 문구가 눈을 확 잡았던, 마치 무슨 공산당 테제같은 느낌의 광고.

 

 

골목을 한꺼풀만 열고 들어가도 재미난 풍경들이 숨어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얼기설기 얹은 허름한 집 앞 자전거.

 

 

수산시장 골목마다 김을 펄펄 피워올리며 새빨갛게 익어가던 가뜩이나 빨간 대게들, 저 녀석들은 물구나무를 서있는 건가.

 

 

주문진항의 상징물 오징어는 왠지 울트라맨에서 자주 나오던 크라켄이던가, 거대괴물이랑 비슷하게 생긴 듯.

 

수산시장 입구에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다가 아무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그들처럼 회는 먹고 가야겠다는 다짐만

 

갈수록 단단해지던 차에, 생선을 따로 사고 회를 따로 떠서 어디던 바다가 보이는 곳에 앉아 먹기로 결심.

 

광어랑, 청어였던가 제 이름으로 못 불리고 '잡어'로 통칭되는 생선들 몇 마리, 그리고 개불이랑 멍게까지.

 

그리고 주문진 앞바다. 드문드문 바닷가 깊숙하게 쳐들어간 바위 덩어리들은 이렇게 자그마한 금강산 코스프레중.

 

일만이천봉우리가 하나하나 살아나선 뾰족뾰족 하늘을 이었다.

 

 

바위들 위로 기어올라가 제법 뜨끈하게 달아오른 햇살 바라기 좀 해주고, 덥다 싶으면 아이스크림 하나 베어물고.

 

 

멀찍이 보이는 등대 아래춤에선 사람들이 낚싯대를 드리운 채 정지화면처럼 멈춰 있고. 움직이는 건 바람결에

 

살랑살랑 잔물결을 이어나가는 주문진 앞 바다뿐.

 

조금은 흐린 날씨탓에 하늘과 바다가 분간하지 어려워서 문득 망연해지는 시선을 붙잡아 주는 건, 문득문득

 

생각났다는 듯 날개를 펼치고 하늘과 바다를 가르며 날아가는 갈매기 한마리.

 

 

 

 

 

 

'맛있는 인생', 현실까지 넘쳐들어온 강릉의 로맨스.

 

영화를 따라왔다곤 하지만, 이미 '보헤미안'은 워낙 유명해진 까페가 되고 말았다. 강릉의 까페거리가 있다곤 하지만

 

보헤미안은 이미 강릉을 넘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드는 까페가 되고 말았으니.

 

영화에서 보헤미안은, 호텔 커피숍에서 에스프레소를 찾는 그의 모습에 약간의 허술함과 허세스러움을 덧칠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기껏 명인 박이추 선생이 내려준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서 마셨던가. (아닌가, 그건 테라로사에서

 

한 행동이었던가, 기억이 그새 가물가물해져버렸다.)

 

 

여하간 보헤미안에 입성. 조그마한 건물 3층에 있는 까페는 이미 사람들이 바글거렸고, 박이추 선생을 비롯한

 

세네명의 직원들은 모두 잔뜩 기합이 들어가서 주문받고, 커피내리고, 서빙하는 중이었다.

 

하릴없이 한쪽에 앉아 자리가 나길 기다리는 중. 한쪽 기둥에 박이추 선생이 일본에서 취득한 교육이수증과

 

뭐라뭐라 막 일본어로 적힌 증서같은 것들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위에는 누군가 그려준 캐리커쳐. 여유롭게

 

커피를 쥐고선 부드러운 눈매에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맘에 든다.

 

그리고 이 스위치 박스도. 여러번 테이프를 붙였다 떼었다 했는지 까맣게 때가 남았다. 뭔가 커피색으로 칠하거나

 

눈에 잘 안 띄게 치장하는 것도 괜찮았겠다 싶으면서도, 또 저렇게 테이프가 까맣게 때묻은 채 너덜거리는 , 살짝은

 

허술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다.

 

커피 원두를 사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한 옆에서 비닐 진공 포장을 해서, 이런 종이박스에 담아주기도 한다.

 

원두만 사가서 집에 가서 수동 기계로 갈 때 풍기는 그 냄새도 참 좋은데, 조금 사갈까 싶은 마음이 불끈.

 

생각보다 금방 자리가 났고, 받아든 메뉴판에는 예멘이나 페루의 커피도 있었다. 커피마다 간단한 설명이 있었는데

 

괜히 어렵거나 고상하게 꼬아서 표현하지 않고 '산뜻한 신맛'이라느니 '부드러운 맛'이라느니 '스모크향'이라느니

 

한두가지 특징만 잡아서 평이하게 써두었다.

 

 

잠시 문틈으로 구경한 배전실. 커피 원두를 볶는 배전실에서 박이추 선생님이 뭔가 분주히 움직이고 계셨다.

 

주문했던 건, 고로케 세트랑 브런치 세트였던가. 일본에서 배우신 분이라 역시 고로케 맛이 남달랐다.

 

 

감자 고로케는 따로 나왔는데, 고기 고로케는 이렇게 빵 사이에 아예 양배추처럼 포개져서 나왔다. 완전 대박 맛있던.

 

그리고 카푸치노. 커피가 다르니 당연하겠지만 카푸치노 맛도 확 다르다. 잔도 이쁘고.

 

'커피의 여왕'이라는 예멘 모카마타리. 원래 이전에 맛봤던 커피 중에 흙맛이 나는 예멘 커피가 굉장히 기억에 남아서

 

그건가 하고 주문했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니었지만 역시 만족. 아무래도 모든 커피를 하나씩 다 마셔보고 싶어지던.

 

 

나오기 전에 계산대를 아무생각없이 훑어보다가, 빼곡하게 늘어선 찻잔 접시들이 눈에 들어왔다. 종류별로, 아마도

 

만들어진 나라도 다 다르지 싶은데 저렇게 모아둔 건 아무래도 바로바로 서빙할 수 있도록 한 편의를 따진 거겠지만

 

보는 입장에선 그 자체로 이쁘다 싶다.

 

 

3층에서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중간에 있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산속 풍경. 정말 보헤미안 오가는 길이란

 

대중교통으론 오지도 못하겠다 싶도록 험하고 외딴 동네였던 거다.

 

 

주말에 줄기차게 쏟아지는 사람들 때문에 엄청 힘들겠다 싶었는데, 그래도 주4일 근무인 셈이다.

 

월화수를 쉬는 주4일라면 그래도 나머지 목금토일, 열심히 일할만도 하지 싶은데. 전국에 전파가 시급하다.

 

 

보헤미안 앞에서 어딘가로 이어지는 꽃길. 사람이 좀만 덜 찾아오기만 하면 참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곳일 텐데.

 

그러고 보니 왜 건물 3층에 까페를 차렸을지도 슬쩍 짐작이 간다. 박이추 선생의 속내를 알 것 같달까.

 

번잡함이 싫어 서울 대학가에서 강릉, 하고도 외딴 곳을 찾아 들었을 텐데, 그리고도 굳이 3층에 까페를 만든 걸텐데

 

맛 좋은 커피와 장인의 솜씨에 기갈이 든 사람들은 거기까지도 꾸역꾸역 잘도 올라간다.

 

 

나 역시 그곳을 찾아 그 번잡함과 소란스러움에 일조한 셈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렇게라도 한켠 박이추 선생과

 

보헤미안의 분위기를 차지해 보고 싶은 거다. 모두들 그런 생각으로 어깨를 부비며 이곳에 찾아드는 거겠지만.

 

 

'맛있는 인생'에서 그가 보헤미안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한적함과 여유로움의 편린일망정. 인생을 즐기고 싶어서.

 

 

 

 

'맛있는 인생', 현실까지 넘쳐들어온 강릉의 로맨스.

 

영화 '맛있는 인생'을 보고선 겨울에 혼자 강릉으로 여행을 갔다던 사람이 있었다. 혼자 떠났던 여행은 슬펐다 했다.

 

그이에게서 영화를 추천받았고, 강릉을 추천받았으며, 어느날은 나 역시 혼자 영화를 좇아 강릉으로 떠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번엔 다소 잿빛이었던 둘의 기억에 몇가지 빛깔을 더하는 여행. '맛있는 인생'을 따라잡는 여행이 되었다.

 

 

영화에서 그와 그녀가 처음 만나는 호텔, 경포대 현대호텔은 마침 이날이 영업 마지막날이었다. 아예 다 부수고

 

새롭게 다시 신축을 한다는 이 건물, 그래도 마지막으로 돌아볼 수 있어 참 다행이었다.

 

영화 속에서 남자는 문득, 서울에서의 번잡하고 불쾌하고 난처한 일들에서 탈출하듯 강릉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강릉, 그가 묵었던 곳이 바로 현대호텔이었다.

 

그와 그녀가 처음 만났던 건 호텔의 까페 카리브. 밤이었던가 아침이었던가, 그는 메뉴에 나와있지도 않은 에스프레소를 찾으며

 

여점원을 괴롭혔고, 그녀는 귀찮은 손님의 난처한 질문에도 겸연쩍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었다.

 

그녀가 이 곳에 묵었을 때는 미처 까페까지는 못 둘러봤다 했었다. 여기서 앉아 차라도 한잔 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지만 이렇게 다시, 이번엔 함께 왔다는 걸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기를.

 

 

어디였더라, 경포 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였던 건 확실한데, 정확히 어디라고 딱 집어서 이야길 못하겠다.

 

사실 어디인들 뭔 상관인가.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경포 앞바다가 이렇게 이쁘다는 거, 그리고 이 공간에서 그들이

 

영화를 만들며 이렇게 저렇게 동선을 짜고 구도를 잡았으리라는 상상 자체가 재미있는 거니깐.

 

호텔 앞 로비에 있던 푹신해보이는 쇼파들. 저기 어딘가에 앉아서 그는 그녀가 일이 마치길 기다리기도 했었고,

 

그녀는 일이 없는 날 강릉 구경을 함께 나가기로 한 아침, 그를 기다리기도 했던 거다.

 

어라, 그런데 현대호텔의 마지막밤을 아쉬워했던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던 걸까. 어느 프로축구팀 선수들도,

 

그리고 지방순회 공연중인 듯한 강부자 어르신도 체크아웃을 하곤 호텔을 떠나고 있었다.

 

호텔이야 부수거나 말거나, 옆에 있던 나무에서 쪼르르 내려와 고인 물을 할짝거리며 마시는 청설모 한마리와

 

딱 눈이 마주쳤다.

 

영화 속에서 그가 그녀를 좇아 스토킹하듯 뒤를 밟던 그 산책로, 그리고 언젠가는 그 혼자 술에 잔뜩 취해서

 

욕지거리를 우물거리며 호텔방으로 되돌아가기도 했었고, 언젠가는 둘이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도 했던 길.

 

호텔에서 내려오는 길, 차들이 말줄임표처럼 띄엄띄엄 늘어선 아스팔트 찻길 너머로 노란 모래사장, 그너머 푸른 바다.

 

그와 그녀, 그리고 또다른 그녀는 이런 풍경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호텔 앞 입구. 제법 운치있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맘에 드는데, 이제 없어진다니 왠지 더 아쉬워서 쉽게 못 뜨겠다.

 

경포 해수욕장을 거닐며, 하나둘 켜지는 가게 불빛들을 보고 있는데 문득 해풍에 잔뜩 움츠러든 해송 너머로 새하얗게

 

질린 거대한 불빛 하나가 저물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의 사진 속에서 보았던 모래사장 위 흔들의자가 저거였을까. 노랑 풀꽃이 점점이 피었다.

 

경포대를 따라 이어지는 길 위에서 불쑥 나타난 꽃마차. 세상에, 청계천변에도 꽃마차가 달리더니

 

경포해수욕장에도 이런 게 있었구나 싶다. 말을 보면 기분좋게 달그락거리는 그 말굽소리를 꼭 듣고 싶어지는데

 

아쉽게도 아직 꽃마차 장사엔 제철이 아닌지 말들은 모두 가만히 서서 자는 듯 쉬고 있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