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재밌는 게 없을까 눈에 불을 켜고 카타르 도하의 디플로머틱 클럽을 사방으로 쏘다니던 중 멋진 정원이

ㅁ자형 건물 한가운데 꾸며져 있는 걸 발견했다. 자그마한 다리도 보이고 나무들이 잘 가꿔진 게 얼핏 보기에도

꽤나 그럴듯해 보여서, 지나가는 직원에게 내가 들어가 봐도 될지 정중히 청하니 냉큼 문을 열어준다.

게다가 문을 잡고 기다려주기까지.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그의 과한 호의가 다소 민망할 정도였지만, 아무도

없는 그 공간을 혼자 거닐 수 있다는 생각에 민망함은 금세 지워버렸다.


나무에 달린 이름모를 하얀꽃들이 정원에서 희미한 별처럼 둥실 떠있었다. 저 주홍불빛 너머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스탠딩파티를 하고 있었던가. 아님 아직 카타르와 한국의 공연이 진행중이었던가.

인공으로 만들어진 동굴입구같은 조형물에, 그아래 흐르는 유유한 냇물이 아기자기하다. 밤이 되니 후끈한 열기도

어디론가 가버리고 선선한 느낌이었는데, 속삭이듯 졸졸거리는 물소리가 한결 시원함을 더했다.

하얀 산책로, 그리고 잘 관리된 잔디밭과 야자나무.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듯 아스라하던 소음이 살짝

잦아든 듯 하여, 잠시동안이나마 유유자적 산책하던 시간을 아쉬워하며 다시 정원문을 열고 들어서야 했다.

그리고 돌아온 라마다 플라자 호텔, 방 앞마다 붙어있는 방패 모양의 문패가 특징적이다. 그리고 천장에 종유석

커튼처럼 늘어뜨려진 모양의 장식도, 그에 반사되는 조명도 평범하진 않은 거 같다.

방을 함께 쓰는 일행이 씻는 동안, 우선 차나 한잔하며 잠시 쉴까 했다. 그런데 저 커피 포트 너머에 무언가가

내 눈에 자꾸 거슬린다. 뭐지? 이미 난 디플로머틱 클럽 안의 그럴듯한 인테리어와 훨씬 더 멋진 정원을 보고 온

터라, 잔뜩 지저분해지고 잔뜩 헝클어진 방 꼬락서니가 살짝 맘에 거슬리는 상태였다.

어라. 이건..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에 있는 알카바 위치를 나타낸 표식이다. 하루에 다섯 번씩, 전세계 오억명에

달하는 이슬람 교도들이 절하는 방향이 바로 이 메카 방향, 정확하게는 메카 내의 신성지역인 알카바 신전이다.

메카로는 사우디 내부에 있는 사람들도 관광이 금지되어 있다는 게 사우디에서 줏어들었던 토막 상식이었는데,

아마 사우디에서 머물렀던 호텔에도 분명 이런 표식이 있었을 텐데 그땐 미처 발견치 못했나보다. 


이 스티커 표식은 몇 번씩 겹쳐져 붙여진 듯 하다. 왜일까 생각해보니, 호텔 측에서 객실 내 소품들 위치를 조금

바꾼다거나 교체한다거나 할 때마다 다시 신경써서 방향을 잡아준 듯. 무척이나 신기해서, 마시려고 했던 커피

따위나 지저분하게 쓰고는 스스로 화가 나버린 방 따위 잊어버리고 한참이나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북쪽을 가리키는 게 일반적인 나침반이라면, 이건 어디서고 메카를 가리키고자 하는 무슬림들의 나침반인 게다.

그리고 바로 옆으로 옮겨진 시선, 사우디와는 달리 카타르는 돼지코 모양의 콘센트가 들어가질 않는다. 삼발식

형태의 콘센트가 필요해서, 미리 챙겨왔던 '거의 모든 나라에서 통하는' 국제 콘센트를 꼽고 그 위에 노트북이나

기타 전자기기를 연결해야 했다.

다시 시선을 조금 아래로. 약간 일하다 말고 문득 놀라서 찍은 사진이다. 얼마 일하지 않았는데 무슨 쓰레기가

저리도 많이 나왔는지. 카타르 현지 신문에 우리 행사들이 나왔는지를 확인해 보고 다 본 신문은 저렇게 구겨서

버리기도 했고, 다음 날 일정을 안내하기 위한 안내문을 만들고 행사 실적을 정리하는 와중에 나오기도 했고,

이미 지난 일정에 대한 자료들은 모두 그때그때 찢어서 버리기도 했고, 이래저래 맥주거품처럼 쓰레기통에서

흘러넘치는 쓰레기들.

그리고 방 안. 디플로머틱 클럽의 잘 정리되고 깔끔하게 다듬어진 정원이나 내부 인테리어의 세계와는 영 딴판인,

일하기에 최적화된 돼지우리다. 에효...사실은 일하는데 최적화된 환경을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니고(당연하지만ㅋ),

그냥 일하다 보니 저렇게 자연균형상태를 찾았달까.

청소를 깔끔하게 해주시고 주름 하나 없이 쫙 펼쳐주었을 이불보 위에는 사람 자국부터 남아야 하는데, 온갖

서류 뭉텡이들과 가방, 여권, 호텔 키 나부랭이들만 엎어져 있다.

그 와중에도 어지럽혀지지 않고 깔끔하게 사수되고 있는 공간은 역시, 노트북 인근 지역. 휴대용 프린터와 마우스,

USB까지 꼽혀있으면 마음이 든든하다.

카타르에서 내가 들고 다녔던 현지 휴대폰, NOKIA에서 만들어진 폰이었는데 정말 심플한 디자인에 기능도 심플,

전화, 문자 외에 별다른 기능이 없었다. 카타르에서 전화는 일정액을 충전하는 방식으로 쓰는 가 보았다. 심카드를

쓴다고도 했는데, 그런 기계 쪽에는 전혀 약한지라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었을 뿐이고, 3일간의 일정동안

충분히 쓸 만큼 충전해놨다는 이야기에 역시,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다.

이 핸드폰은, 정말 무지 간단한 기능들 만큼이나 간단하게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저 문자판이 아예 분리되어 버렸었는데 알고 보니 말랑말랑 고무판이다. 다시 끼고 버튼을 시험삼아 눌러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길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사실 잡다구레한 기능이 껴들어가지 않은 바에야 별로 고장날

구석이 애초부터 없는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랍어로 문자를 작성해 보았는데, 글자가 역시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씌여지는 게 참 신기했지만 뭔말을 쓰고 있는지는 나도 모르고.

다음날 아침, 호텔 창밖으로 내다보인 도하의 거리 풍경. 불쑥 솟아있는 뿔들은 모스크의 미나렛들이다. 저기서

하루에 다섯 번씩 종을 치면 사람들은 기도를 한다.

비슷한 높이의 비슷비슷한 모습의 집들이 비슷비슷비슷하게 열을 맞춰 늘어서 있는 게 신기하다.
카타르에서의 숙소는 라마다 플라자(Ramada Plaza), 사우디 호텔에서 미처 찍지 못하고 놓쳤던, 그래서 무척이나

아쉬웠던 사진부터 후딱 찍었다. 이 곳 역시 화장실 풍경이 사우디랑 똑같앴던 것. 욕조와 좌변기 사이에 놓인

저것의 정체는..뭘까. 나중에 알고 보니 비데란다. 그치만 그렇게 알고 나서도 저걸 어떤 자세로 쓸지, 그리고

대체 어디에 쓰는 건지, 게다가 왜 저렇게 따로 만들어져 있는지..좀체 이해가 쉽지 않다.

카타르에서 만난 비즈니스맨들은, '비즈니스퍼즌'이란 젠더중립적인 단어가 이미 넓게 쓰이고 있는 세상임을

새삼스레 의식시켰다. 이전 사우디에서 만났던 한량 복장의 남성 일색의 상담회장이 아니라 히잡도 안 쓴 이런

당당한 여성기업인이 더러 눈에 띄었던 거다. 물론 이곳에서도 비슷하게 한량스런 전통 복장을 한 턱수염 복실한

아랍 아저씨들이 압도적으로 많기야 했지만, 저 여성이나 다른 여성들도 그저 유럽 어디메쯤의 아줌마 같은

느낌으로 충만해 있는 '비즈니스퍼즌', 혹은 당당한 '여성CEO'.

행사장이 있는 호텔 안을 종종걸음치다 발견한 구두닦는 이를 위한 의자. 저 높은 의자에 올라앉으면 구두닦는

아저씨가 양 발을 번갈아 올려가며 구두를 닦기 시작한다. 우아한 주름이 줄줄 흘러내리는 전통의상을 입은 남자가

올라앉아 왠지 중세시대 하인 복장을 떠올리게 하는 호텔 구두닦이에게 척하니 발을 맡기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사실은 아랍 전통의상을 입은 남성은 모두 맨발에 슬리퍼나 샌들을 신고 있다. 대부분 닥스니

루이비통이니 하는 명품 슬리퍼. 해서..그런 적나라한 그림을 볼 수는 없었다는.

호텔 정문에는 역시 금속 탐지기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사우디보다는 훨씬 작은 사이즈의 탐지기였다는 점,

그리고 호텔 경비원들의 인상이 훨씬 부드러웠다는 점 이외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풍경이었다. 그렇지만 잔뜩

귀찮아하며 이러저런 서류뭉치와 가방, 카메라, 카타르 현지에서 쓰던 핸드폰 등을 여섯번째쯤 탈탈 털어놓고

맨몸뚱이로 금속탐지기를 통과하려던 내게 빙긋 웃어보이며 그냥 가라고 손짓해 줄 만큼의 여유가 있다는 건 역시

엄청나게 큰 차이를 불러일으킨다. 카타르, 우호도 5점 상승↑.

황금빛으로 번쩍거리는 라마다 플라자 호텔의 위용. 그리고 그 앞에 꼬리물고 늘어선 황금색 고급차들의 행렬.

하루종일 예정된 상담회가 중반으로 치달으면서 점점 몸이 뒤틀린 나는, 살짝 자리를 벗어나 바람을 쐬러 나온

참이었다. 밤 두시정도까지 일하다가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는 일정이 반복되면서 구두가 꾸덕꾸덕해져 있었다.

발은 언젠가 목욕탕 열수탕에서 깜빡 잠들어 세네시간동안 푸욱 삶아졌을 때처럼 팅팅 불어있었지만, 살짝

벗은 발로 허공을 휘휘 저어봐도 바람기운이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늘 하나 만들어지지 않는 뜨거운 태양

아래, 조그만 미동조차 없이 굳어버린 듯한 대기.

호텔 한 켠에는 높은 분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북한에 김일성, 김정일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얼마전까지 박정희니 이승만이니 사진을 걸어놨던 것처럼, 그리고 사우디에서 초대왕과 선왕, 현재 국왕의 사진을

삼위일체로 걸어놓는 것처럼. 표정도 얼추 비슷하다. 무척이나 현명해보이고 부드럽다 못해 자비로워보이기까지

하려는 눈매에..그렇지만 왠지 느껴지는 삼엄하고 강단진 기운. 혹자는 카리스마라 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부려짐'보다는 '부림'에 훨씬 익숙한 데서 비롯한 체취같은 거 아닐까.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로 충만한 거야

더 말할 것도 없고.

아랍에서 손님을 맞는 전통적인 방식은 저런 곳에서 느긋하게 뒤로 누워앉아서는,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것이라고 한다. 나도 잠시 앉아 봤지만 뭐랄까, 사람을 무척추동물처럼 만드는 자리같았다. 아무리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 보려해도 영 어색하고 불편해서 스스로 타협하게 만든다. 조금만 뒤로 기대 볼까.

그렇게 조금씩 엉덩이는 앞으로 쭈욱 미끄러져내리기 시작하고, 아예 온몸이 흘러내리겠다 싶은 순간 자연스레

양팔을 걸침으로써 그 효용을 다하는 팔걸이=몸걸이. 무지하게 편해서 한번 눌러앉으면 일어나기가 싫어지는

마력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호텔 로비에 떡하니 버티고 한번 맛이나 봐라~ 라고 있는 거 같다. 왜 그 난로와 이불과 테이블이

붙어있는 일본의 코타츠..던가, 내가 꿈꾸는 겨울나기 MUST HAVE 아이템인 그것보다는 못할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나름 이것도 사람을 마비시킬 만큼의 중독성은 있는 듯 하다.

그 곳에 앉아 바라본 호텔 인테리어. 어쩌면, 내가 좀더 여유롭고, 이게 좀더 폐쇄적이고 사적인 공간에 놓여

있었다면, 아마 하루종일 딩굴댔을 거라 생각했다.

어느덧 이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숨 돌리러 다시 나온 호텔 창밖 풍경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태양은 조금씩 이지러지면서 건물 뒤로 숨고 있었고, 한낮엔 내 발을 쌩까던 바람도 어디선가부터 불어오고

있었다. 왠지 순식간에 가버린 하루, 그 느낌만큼이나 순식간에 저물어버리는 태양.

부드러운 살구색 빛살이 풀어져내리는 하늘 아래서 구두는 꾸덕꾸덕하고...

햇님은 번데기처럼 몸을 뒤틀며 쉬러가는데 난 아직도 오늘의 일정이 절반 가까이 남았고...

카타르 도하를 달구던 태양은 이제 불이 나가버렸다.

상담회장을 정리하고 우선 방으로 짐들을 올려두러 가는 길, 금세 나와서 만찬 행사장에 가야 한다.

호텔이야 어느 나라건 은은하다못해 침침한 조명에 다소 응큼한 분위기가 있다지만, 이날따라 침침했던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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