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가 공간 한가운데 떡하니 자라난 까페, 잠시 앉아 노닥거리던 중.

 

문득 트리를 따라 펜을 슥슥 끼적거리다가 장난삼아 엉성한 트리 하나 완성.

 

 

 

아무래도 벽면의 이 장식이 가장 맘에 드는 까페.

 

 

카메라의 화이트밸런스와 세팅을 이리저리 조정해가며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대 보기도 하고.

 

 

 

송글송글 피어오른 잎사귀를 얼마나 블러블러하게 표현해야 이쁘려나 화분 하나 갖다놓고 이리저리 찍어보기도 하고.

 

 

 

@ 커피와 사람들.

어렸을 적 백원, 이백원을 쥐고 달려갔던 곳은 으레 허름한 공터에 엉성한 천막으로 지어졌던 '덤블링장'.

 

앞으로 엎어지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쉼없이 튕겨올라오는 그 탄력 넘치는 그물망이 좋아서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

 

온몸이 흠뻑 땀에 젖을 때까지 뛰었던 기억이 있다. 문득 너무 높게 뛰었다 싶을 때의 짜릿한 공포감 역시 생생하다.

 

 

예기치 않게도 주문진의 어느 골목 귀퉁이에서 만난 '덤블링장', 정식이름은 트램폴린이란 건 이제야 알았다.

 

아직도 이런 곳이 있구나, 하는 신기한 마음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덤블링을 하며 까르르 웃음을 사방에

 

흩뿌리는 중이었다. 연령대에 따른 1점프대, 2점프대로 구분이 된 건 나 어렸을 적에도 그랬던가. 기억이 안 난다.

 

자전거를 대충 주차해놓고 그물망 위에서 온몸에 힘을 주어 발을 튕기고 엉덩방아를 튕기며 쑥쑥 키가 크는 아이들.

 

허름한 천막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건지 어설프게 걸쳐진 지붕천 사이로 봄볕이 함께 튕겨들었다.

 

무시하다 다치면 주인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무시무시한 안전수칙판의 낡은 상태를 보니, 내 어렸을 적에도

 

저런 거 하나쯤은 옆에 세워져 있었겠구나 싶다. 그런데 다 좋지만 6번은 대체 뭐지. 음주후엔 올라가지 못한다는.

 

그리고 11번도 웃긴다. 크게 소리지르거나 심하게 장난치는 어린이는 퇴장도 감수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룰이라니.

 

 

 

 

경쟁에 반대한다 - 10점
알피 콘 지음, 이영노 옮김/산눈

제목부터 도발적인 책이다. "경쟁에 반대한다"

경쟁에 반대한다고? 시장 논리와 무한경쟁을 통한 효율성 제고의 신화가 경제 영역을 벗어나 교육, 정치,

문화 전 분야로 뻗어나가는 이런 시기에, 예컨대 '불공정한 경쟁'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경쟁' 그 자체에

반대한단 제목이다. 이런 책은 둘 중 하나 아닐까,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제목으로 '낚아보려는' 책이거나

혹은 작심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려보겠다는 결기 어린 책이거나. 둘 중 어떤 걸까, 이왕이면 후자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처음 집어들었다.


부제는 더욱 웃긴다. "왜 우리는 이기기 위한 경주에 삶을 낭비하는가?"

누구는 낭비하고 싶어서 하나? 그리고 나라고 지기만 한 경주는 아니었단 말이다, 라고 저쪽에서 루저 1이

울컥 핏대세워 이야기한다. 이번엔 졌지만 다음에 이기면 된다고, 더 큰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거라고

저쪽에서 또다른 루저 2가 자신없이 중얼거린다. 이건 낭비가 아니라 '두걸음 전진을 위한 한걸음 후퇴'라고

해병대 팔각모자쓴 저쪽 루저 3은 강단진 표정으로 이를 악문다. 1%의 인재가 나머지 사람들을 먹여살려

준다는 이야기는 이런 식의 경쟁, 줄세우고 비교하고 99%를 '비인재', 루저로 모는 무한경쟁 무한찬양의

극단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당장 이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싫어도 경쟁 속으로 뛰어들고,

혹은 더 큰 과실을 위해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경쟁에 참여하고 있다. 치열한 몸값경쟁을 통해 낙찰,

낙찰가 88만원인 거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배웠네 하는 사람들도 이야기한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여태 인류의 발전 과정을

보면 끊임없는 약육강식의 갈등, 적자생존의 경쟁 상황 속에서 이런 '빛나는 문명'을 꽃피운 거랜다. 한국

사회로 스코프를 좁혀보아도 국내 기업간의 이기기 위한 경주, 뼈를 깍는 경쟁을 통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난 거 아니냐는 이야기다. 초등학교 때부터 진단평가니 뭐니 시험을 보고 경쟁을 붙여야 아이들의

학업성취도도 올라가고, 그래야 우리 지자체의 경쟁력-이라고 쓰고 명문대 합격률이라 읽는다-도 올라가고

국가 경쟁력도 올라가고 나아가 인류 전체의 복지에도 공헌할 거라는 투다.


인류의 놀이문화를 봐도, 어쩌면 경쟁은 인간의 본성일 거라는 지레짐작이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이미

우리는 고대 그리스 이래 스포츠와 놀이 문화조차 '인격 형성과 성숙에 도움이 된다며 경쟁 일편향으로

기울어져 왔으니, 지금의 축구나 야구 같은 현대 스포츠가 전쟁과 같은 양상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욱 폭력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어쨌든 경쟁적 스포츠로 인간 본성에 내재한

전투적 본능을 달랜다는 해석도 있는 거다. 스포츠맨십 따위 치장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건 굳이 승자와

패자를 가려내고 승리를 통해 쾌감을 만끽하려는 욕구다. 승패 따위 가리지 않는 게임은 솔직히 지루하지

않은가, 라고 물어보기도 우스울 만큼 재미있으려면 당연히 경쟁적이어야 한다고 모두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티비에 만연한 온갖 버라이어티에서 보이는 경쟁 구도들, 갈수록 선연해지고 말초적으로 변해가는

경쟁들이 그 단적인 사례들 아닐까.)


그렇지 않다는 거다. 경쟁을 통해 더욱 생산적이고 효율적이라는 믿음, 경쟁을 통해 삶이 윤택해지고

의미가 생긴다는 믿음, 심지어는 경쟁이 '인간 본성' 그자체에서 비롯한다는 믿음, 이 모든 것들이 잘못된

오해거나 혹은 악의적인 이데올로기라는 게 이 책의 골자다. 스스로에 대해 확신이 없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는, 자존감 부족이 바로 경쟁사회의 원인이자 결과, 그래서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는 진단. 실은 협력을 통해 더욱 재미있을 수 있고 생산적일 수 있으며, 개인의 자존감 역시 더욱 고양될

수 있는데, 충분히 그런 사실을 증명하는 연구 결과들도 이미 나와 있음에도 워낙 근본적인 문제라 꼼짝도

안 한다는 거다.


생각보다 학술적으로 깊이 들어간 책이고 책 자체가 하나의 주장을 위한 탄탄한 논문이라 해도 좋을 만큼

논리 정연하고 논거가 풍부하다. 교육 심리학자인 저자는 기존의 학문적 필드에서 '정설'이라 일반화되어

버린 설들에 대한 강력한 반박을 하고 있어서 상당 부분 '팩트' 싸움, 유의미한 해석을 도출하는 실험의 인용

여부 및 신뢰도 싸움일 수 있는 건 사실이다. 다만 총 10장으로 구성된 챕터 중 무려 아홉 챕터나 할애해서

집요하게 보여주려는 것, "승리와 성공은 다르다"라는 명제 아래 지금의 "경쟁"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키워드, "협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하게 하려는 저자의 의도와 문제제기는 정말 너무나도 무겁다.


사실 이미 경쟁을 조장하는 구조가 문제냐, 경쟁적인 마인드에 절어버린 사람이 문제냐, 하는 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같은 무의미하고 무익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예컨대 '키작은 사람은 루저'라는

말에 분개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경쟁시스템에서 '키'라는 요소로 패배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한편 '키'라는 요소조차 타인과의 경쟁구도 속에서 생각하는 멘탈리티를 이미 장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키'라는 신체적/천부적 조건조차

이 도박장이나 주식시장같은-대부분의 사람이 돈을 잃는다는 점에서-경쟁시장의 칩으로 훌륭히 쓰이고

있는 거고, 또 칩으로 이미 유통되고 있으니 사람들은 '키'를 둘러싼 경쟁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뫼비우스의 띠.


그렇게 보면 참 공고하다. 아무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경쟁하는 동물이 아니며, 경쟁 말고 협력을 통해

보다 나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떠들어봐야, 마치 맑스주의를 오늘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그래, 니말은 다 알겠는데, 참 논리정연하고 그럴 듯하고 멋져보이는데, 그래서 어쩌라구. 그런 차갑고

단단한 벽에 부딪히는 느낌 때문에 책을 읽어내리다가 덮어버리기를 몇 번. 단순히 경쟁 말고 협력에 의한

문화, 경제, 사회가 가능하겠구나 정도 고개 몇 번 주억거리고 말 일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뭔가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 지, 기업 구조, 경제 시스템, 학업 시스템 따위 거대한 것들 말고 당장

경쟁에 길들어버린 '내 입맛'은 어떻게 바꿔야 할지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저자는 치사하게 자기

전문분야인 '교육'에 대해서만 몇 마디 아이디어를 던져주고 말았다.


그냥, 계속 생각해 볼 만한 책이고 어쩌면 좀 확장해서 읽어보아야 할 책일지도 몰라서, 정리가 채 되지

않은 상태로 글을 쓰고 있다. 아니, 정리해 버릴 책이 아닌 거다. 계속 책상 위, 머릿속에서 ing로 남아있어야

할 책, 남아있어야 할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외부의 자-타인이 되었건

그들이 정해둔 기준이 되었건-를 빌어 스스로를 재어 보며 위축되거나 과시하지 않고, 스스로 혼자 설 수

있도록 좀더 애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취직 시즌이라 알게 모르게 또 마음속의 자를 가동해보는 자그마한

모터 소리가 윙윙 들리는 거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어디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어디쯤, 이런 식의 등수

놀이를 피하려면 다소간 '도 닦는 마음'이 필요한 거다. 스포츠에 비기자면,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려는

축구를 하기보다는 자신의 신기록을 갱신하려는 역도나 높이뛰기쯤에 임하는 마음이랄까.
 

책을 보면서 문득 떠올랐던 대학교 2학년 때의 기억 하나. 학과 신입생들을 맞이하는 새내기준비위원회

회장을 맡아서는 오리엔테이션에 뭐하고 놀지, 뒷풀이에선 뭐하고 놀지, 새터가서는 또 뭐하고 놀지

나름 열심히 고민고민했었다. 뭐 결과물이야 통속적이고 보잘것 없었지만, 만약 내가 '경쟁'과 '협력'을

감별해낼 만큼의 미각을 갖고 있었다면 좀더 신선하고 즐거운 놀이들을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다. 함께 즐겁고, 서로의 얼굴을 기억해내고 이름과 쉽게 매칭시킬 수 있게 만드는 게임들.

누구보다 앞서고, 누굴 제치고 이기려고 바둥바둥대느라 잔뜩 지치고 상처받았을 녀석들하고 굳이

또 그런 게임을 할 필요는 없었던 건데.


신라시대의 안압지는 조선시대로 따지자면 경회루랄까, 국가적인 행사나 연회가 베풀어지던

공간인 셈이니까 그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하다. 사실 조선 시대 이전의 건물이나 사적들이

거개가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유물과 문화재란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들이란 점에서 때로는 조선시대의 무엇무엇과 닮은 점과 다른 점을 찾아내 식별하는 게

조선시대 이전 문화재들의 기능과 위상을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인 듯.

입장권 뒷면에서 발견한 (여전히 한자가 난무하는 딱딱한 말투의) 설명은 왜 그리도

안 읽히는지, 조금은 더 독자 입장에서 읽기 쉽고 재미있게 풀어 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여하간 이 '안압지'는 12봉우리를 가진 3개의 인공섬을 꾸며놓은 신라의 대표적 인공정원.

그 연못 주변에서 여러 연회용 건물이 지어졌던 것도 확인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연못 안에서

이러저러한 유물들이 발굴된 것이 더 흥미로웠다. 이 낯선 주사위는 신라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기 위해 놀았던 놀이기구의 하나로, 총 14면이나 된다고 한다. 육각형이 8면, 정사각형이

6면이나 되는 형태도 신기하지만 그 각 면에 씌여진 내용들이 더 신기하다.


칼 같은 걸로 새겨진 글씨에 따르면,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마시기' (오늘날의 어휘로

바꾸자면 혼자 노래부르고 자작해서 원샷하기 정도일까), '술 석잔 한번에 마시기' (삼배주...;; ),

'여러 사람이 코때리기' (이건..다구리?;;;; ), '소리없이 춤추기' 등등 재미있는 벌칙들이 있는 셈.


당시 신라 왕실과 귀족들이 연회 중에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문득 주사위를 꺼내어서는

차례로 주사위를 굴리며 벌칙을 수행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비어져나왔다. 벌칙이란 것도

원샷에 삼배주에 다구리, 노래시키고 춤시키고, 오늘날의 음주 문화가 새삼 지탄받을 일은

아니구나, 싶기도 하고 한국인 DNA에 이때부터 각인된 건가 싶기도 하고.


근데 저 벌칙은 뭘까. '더러운 것을 버리지 않기'. 똥이나 오줌을 참으라는 걸까, 그니까 화장실을

가지 말라는 거거나, 혹은 잔뜩 사발주를 들이키곤 토하지 못하게 하는 건지도. 뭐가 됐건 간에

참 신라 왕족들 평소 술자리가 무료했나보다.

그래, 우리 조상들이 (개인적으로는 그저 '10세기즈음 한반도 주민들은'이라고 좀 멀찍이

표현하고 싶지만) 마냥 음주가무에만 몰입했던 건 아닌 거다. 이 그럴듯한 외양의 가위는

그 생김새도 훌륭하지만, 가위날에 붙어있는 동그란 받침이 독특해서 눈여겨봤다. 뭔고

하니 촛불의 심지를 자를 때, 뜨거운 촛농이 묻어있는 그 심지가 아무데나 떨어지지 않도록

받치기 위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감탄했다.

사실 중학교 때부터 단군 중의 한 명이라는 '치우천황'의 이름을 알았던 사람으로,

붉은악마들이 치우천황의 얼굴이 묘사되었다는 귀면와의 도안이 그려진 깃발을

흔들고 옷에도 그려넣고 하는 걸 보면서 조금 기분이 묘했다. 저들이 치우천황을

전면에 내세우는 건 자칫 굉장히 배타적인 민족사관과 더불어 한민족과 한국을

떠받드는 국가주의를 조장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싶기도 하고, 80년대 제대로

학자 대접도 못받던 재야사학자들의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반향을 받나 싶기도 하고.

민족사관의 시각에서 다소 아이러니할 수 있는 점은, '치우천황'의 이미지가 이어진 것은

다름아닌 신라의 기왓장들을 통해서였다는 사실. 민족사학이나 민족사관을 가진 학자들은

으레 고조선과 고구려의 기상과 패기를 강조하며 대륙을 정벌하고 지배했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외국 당나라를 끌어들여 조국 통일의 대업을 망치고 겨우 한반도 남단에 그치고 만

만고의 역적 신라라는 공리를 갖고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전쟁의 신'이라는 치우천황의

이미지가 신라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덕분에 오늘날까지 이어졌다는 건 좀 웃기는 일이다.


어쨌거나 그 무시무시하면서도 정겨운 표정이 그대로 살아있는 기와가 이 안압지 연못

바닥에서 많이 출토되었다고 했다. 오늘날의 미적 감각으로 보아도 천년이나 지난 디자인이라

홀대하기엔 너무 귀중한 것 같다. 부리부리한 눈이나, 수염을 길게 빼문, 으르렁대는 듯한 입,

그리고 양미간 사이에 잡힌 굵은 주름까지. 무서운 와중에 유머러스함이 솟아나오는 부분이

바로 그 양미간 사이의 주름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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