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봐야 총알받이밖에 더 되나요?" 연평도 사건이 딱 터졌을 때, 사무실에서 나이 좀 있으신

분들이 내게 그랬다. 너도 총 들고 나가서 싸워야 하는 거 아냐? 순간적으로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분위기는 조금 싸해졌고, 요새 젊은이들 애국심이 어쩌고 후렴구가 들려오길래 조금은 수습해야

되겠다 싶어서 '요새 전쟁을 어디 총으로 하나요' 운운, 얼버무리고 치웠지만, 그리고 들려온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사망 소식에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조차, 국가가 지켜야

할 국민의 생명을 저토록 무책임하게 내버려두다니. 전쟁나면 도망가야겠구나.


서해5도에 군사령부를 창설한다느니, 세계최고 수준의 무기를 갖다 놓는다느니, 국방비 예산이

6% 가까이 증액된다느니, 심지어 미국의 핵 항공모함이 중국 코앞까지 들이쳐 군사훈련을 한다느니

연일 들려오는 소식은 점점 무서운 소식 뿐이다. 전쟁 무기의 쓸모라곤 오로지 전쟁을 벌이는데

있으니 거기 들어가는 돈은 아무 생산유발효과도 없을 뿐더러 언제고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전쟁 위기만 고조시키는 거다. 심지어 중국땅에까지 이미 수송된 북한의 수해

구호물자를 다시 한국으로 회수해 오겠다는 통일부의 발언까지.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있고 나서 평화를 이야기해야

한다
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국가가 존립할 수 있고 외적을 격퇴할 수 있는 능력이 유지되고 난

이후에야 평화공존이든 뭐든 이야기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런 점에서 조갑제가 이명박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당신이 대한민국 대통령 자격이 있는가'라고 까지 이야기한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보/보수를 떠나서 현 정부는 대북 정책과 국방 정책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아마추어스럽단 거다.


문제는, 지금 마구 쏟아내듯 국방비를 증액하고 접경지역에 군사적 대결구도를 강화하는 걸로

과연 요새 드러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군대의 허약함과 무질서함이 해결될까
하는 점이다.

우리의 군사력이나 국방비 예산, 무기 수입 비중 따위들의 수치가 보여주듯 우리 나라는 강국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절대적 견지에서는 군사 대국에 가깝다. 이미 돈과 무기와, 한달에 몇 만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싼 '총알받이'까지 충분히 보유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나라가 부족한 건, 내게 총이 쥐어졌을 때 '이쪽'의 대가리들이 아니라 '저쪽 인민'들을

살해해야 하는 이유
아닐까 싶다. 근본적으로 '전쟁'에 나가는 쫄따구들은 상대 쫄다구의 몸에

총구멍을 내고 목숨을 빼앗으러 가는 것, 그런 살해행위의 비도덕성과 야만성과 죄악을 국가의 이름으로

사해 줄 수 있는지, 기꺼이 살해에 동참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고민해야겠지만, 전쟁이 일단 벌어지고

내 손에 총이 쥐어졌을 때만 생각해보면 그렇다. 내게 이쪽 대가리나 저쪽 대가리 밑에서 고생하는

쫄다구 '인민'들 사이에서 꼭 저쪽을 쏴죽여야 할 필요나 정당성이 있는가.


비단 병역 기피의 문제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쫄따구로

전쟁에 임하는 내 위치에서, 나의 생명과 재산에 대해 이토록 박하게 대하며 함부로 내팽개치는 '이쪽

대가리'들의 책임 방기에 대해 나 역시도 파업을 선언하겠다는 거다. 전쟁을 불사하고 내 목숨이라도

내걸겠다는 의지가 생길만한 국가가 아니다. 사실 저쪽 대가리 밑에서 고생하나 이쪽 대가리 밑에서

고생하나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인데, 굳이 그들의 장단에 발맞추어 내가 손에 피를 묻히고 목숨을 그들

손에 내맡기지는 않겠다는 거다. 그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며 맏아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던 어쩌던,

나는 이 나라의 모든 전쟁에 반대하며 총알받이를 거부한다는 거다.


대체 지금의 한반도 위기를 점점 고조시키는 자들은 무엇을 판돈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건가.

혹시 그 판돈은 대가리 이외 자들의 목숨과 재산은 아닌가. 전쟁 위기 앞에서 분명하게 말하지만,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여느 때나 비슷했지만 특히나 이명박의 국가는 이미 누차에 걸쳐

필요하면 힘없고 돈없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임을 선포했으니, 이 나라가 내

목숨과 재산과 일상을 지켜줄 거라고 믿기는 힘들다. 제각기 자신의 목숨 보전은 알아서 해야 할 일.


북한에 두세배의 복수를 해야 한다느니, 왜 (성능에 열배에 달한다는 포탄을) 80발 밖에 쏘지

않았냐느니, 전면전을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느니, 그들에게도 자식과 부모가 죽은 슬픔을 안겨야

한다느니 온갖 되먹지 않은 소리들이 사방에서 번져나온다. 그렇지만 난 아무래도 당신들의 권력놀음을

위해, 북조선의 세습 기도와 남한의 '반공신도'들의 놀이판 위로 '애국심'에 홀려 들려올려가 무익하고

무의미한 개죽음 당하기를 거부한다. 전쟁나면 도망가야겠다.






천안함 함미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현재까지 서른여섯의 사그라든 생명이 확인됐다.

'유력 언론'들은 일제히 꼭집어 어뢰의 가능성을 보도하고 나섰다. 아울러 레이더에서 사라졌다던 북한의

상어급 잠수정의 행방을 다시 한번 부각시키고 있다. 그들이 사건 초부터 줄기차게 주장했던 '북한의 무력도발'

내지 '국가안보의 위기'라는 말들이 이제야 조금은 제 정신으로 하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피로파괴니 뭐니 조심스런 분석을 내놓던 몇몇 '비주류', '진보' 언론 역시 약간은 외부 충격의 가능성을 높여

판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간 그들의 논조가 대개 북한과의 연계로 무작정 몰고 가려는 듯한 주류의 분위기를

경계하고,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을 풀어가는 정부와 군당국의 허술하고 무책임한 자세와 시스템에 포커스를

맞춰왔던 것은 높이 평가할 일이다. 사건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전문 인력을 동원하고도 상당한 시일이

걸려야 겨우 납득할 만한 수준의 해명을 얻을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판에, 막무가내로 북쪽에 대고 삿대질하는

태도보다는 훨씬 '언론'스럽다.


그렇지만 언론이 이번 천안함 사태의 원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북한'을 보는 극단적으로

상이한 두 개의 시각을 반영하고 나아가 강화하는 것 같아 염려스러운 부분이 있다. 무조건 북한은 호시탐탐

남한을 무력도발하고 적화통일하려는 '전쟁광'으로 보는 시각, 그리고 또 하나, 북한은 사실 방어적인 자세를

줄곧 견지했으며 제대로 알고 보면 합리적이고 착한 '외톨이 동포'라는 시각. 나이브하게 정리한 거지만,

'북한'이란 변수를 제각기의 선험적 판단으로 상수화해서 판단하고 있단 점이 중요하다. 
 

북한이 정말 천안함을 공격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제대로 된 언론매체들 기사 행간에 이런 식의

마인드가 깔려있었다고 읽혔다면 오독인 걸까. "북한이 천안함을 쳤다는 건 보수세력의 '북풍몰이'야, (어떤

이유로던) 북한이 그런 무모한 짓을 했을 리 없어"라는 마인드. 정말이지 북한의 무력도발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였거나 기뢰/어뢰 공격으로 판명될 경우에 대한 분석 기사를 찌라시 이외의 언론에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게 아마 지금 거칠게 쪼개진 천안함 단면이 드러나고 보수 언론들이 목소리를 키우는 이유기도

할 거다. 그럴 가능성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을 제공한 기사가 없거나 희박했던 거다.


북한이 했다고 몰아붙이는 건 또라이짓이지만, 애초부터 제껴놓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찌라시들처럼 타국의

무력도발임을 공공연히 선동하는 건 또하나의 도발행위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물론 이명박 정부와 그의

군대가 보여준 초동 대응이나 후속 조치들, 실종자 가족들에 대한 배려 따위 뭐하나 맘에 드는 구석이 없지만,

그건 수습 과정에서의 문제다. 적나라하게 말해서, 아무리 이명박을 못 믿겠어도 김정일을 믿어야 할 이유는

달리 없는 거다. '북풍'놀음에 대한 대응책이 고작 '反북풍', 북한감싸기로 귀결된다는 건, 너무나 고단하고

비루한 옵션 아닌가.
 

남한의 위정자들도 못 믿겠지만 북한의 위정자(혹은 그의 충성스런 군대)도 못 믿겠다. 북한이 안 했을 거라고

단언할 증거 역시 없잖은가. 정말로 천안함 사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아무런 주관적/감정적 선입견없이

사실 그대로 파악하고 원인을 밝혀야 한다. 정략적으로 이용해 보려 '북풍'과 '反북풍'을 초혼하는 제각기의

세력들에 휘둘리지 않고, 언론인 척 여론만들기 찌라시 놀이중인 쓰레기에 놀아나지 말고. 사고든, 실수든,

천재지변이든, 공격이든, 혹은 자폭이든, 이 나라의 이름으로 강제징집된 아이들이 어쩌다 '개죽음'을 당했는지

책임있는 해명은 해야 할 것 아닌가 싶다.


그게 그들의 섧은 죽음 앞에 일찍부터 어색하게 붙여진 "국가를 위한 헌신, 희생 정신, 군인 정신, 대한의 아들,

영웅" 따위의 거창한 국가주의적 수사가 그나마 올바른 의미를 담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어떠한 경우던

그들의 죽음은 강제로 부과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다가 당한 안타깝고 섧은 죽음임에야 틀림없지만, 벌써부터

그들을 북한과의 사선 앞에 세운 채 '전쟁영웅'으로 묘사하는 건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건 그들의 죽음 자체에

대해 쏟아져야 할 정당한 안타까움과 슬픔을 이용해 먹으려는 짓, 오히려 죽은 이를 욕되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전역..이란 단어의 의미를 새겨 본 적이 없었다. 역종을 바꾼다는 의미. 마침표의 뉘앙스는 담겨 있지 않았었다.


이중국적 문제부터 김일병의 '사고'까지. 병역 기피자들에 대한, '문제사병'에 대한 들끓는 분노가 돌아간 곳은,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거나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대/한/민/국/에 살아남을 자격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뿐이었다. '우리는 하나였다' 란 반쪽짜리 진실의 울먹임처럼, 이아이들 모두 다 내자식같다는 말이 담은

교묘한 울타리처럼. 군대 안 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그만큼의 농밀한 부러움임을, 숱한 '문제사병'을

죽여왔던 총구가 이제 밖으로 돌려졌을 뿐임을 솔직히 말하지 못하고, 그저 감정의 극단과 극단에 선채 배설을

위한 쉬운 해답과 쉬워보이는 상대만 밟아대는 걸까.


근 1년만에 전투복을 입어봤다. 월욜, 화욜 훈련했던 석박사들보다 약간은 말을 안 듣는다는 교관들의 얘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순순하게 충성~이라고 경례를 올려붙여주고, 툴툴대면서도 열을 맞춰

'이동'하는 나 자신과 개구리얼룩 속에 묻혀버린 사람들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쩔수 없이 착해빠진

먹물들이라고, 풍선처럼 부푼 머리에 감정이 눌려버린 공허하고 얕은 인간이라는 게 훤히 드러나는 거 같았다.

강렬하게 뭔가가 가슴에서 치받아 오는 걸 느끼면서, 정말 자연스럽게 티비에 나올법한 예비군 아저씨의 모습..

웃도리 풀어제치고 주머니에 손찌르고 모자삐뚜름히 돌려쓴..을 연출할 수 있었지만, 교관 아저씨가 옆으로
 
지나갈 때마다 슬그머니 손을 빼내고 단추를 채우는 척했다. 배터지기 직전의 개구리같이 바람만 잔뜩 들어갔다.


총을 쏘기가 싫었다. 훈련소 때 탄알이 총안에서 뭉그러졌던 사건 이후 삼사십살은 훌쩍 넘은 총을 믿을 수도

없었지만, 총을 다룰 때 나는 신경질적인 금속성과 호흡을 깨뜨리는 파열음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냥

'못쏘겠습니다'하고 열에서 빠져나왔으면 좀더 맘이 편했을라나. 굳이 말앞에 '머리가 아파서'란 말을 붙이고

말았다. 어찌 생각하면 솔직하지 못했고, 돌이켜 생각하면 그게 이런 '연극'에서 내가 맡은 역할에 합당한

대사라고 생각했다.


주어진 역할이다. 어찌됐건 저들은 교육을 시켜야 하는 입장이고, 약장수처럼 떠들어대며 말안듣고 통제안되는

예비군들에게 군인 정신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맡은 역할은 정말 쓰잘데기없고 짜증만 나는

훈련을 최대한 개기고 민간인임을 잊지 않으며 군복이 주는 마력과도 같은 압박감과 대치하는 것. 말로 자신의

사정..개인적인 의사를 이해시킬 여지도, 필요도 없다. 원하는 게 각기 달라, 결국 그 누구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양쪽 다 신경만 곤두선채 스스로 회의가 들고 만다. 대체 이 나라는 어찌 되어가는 것이냐, 그리고 대체 이

같잖은 병정놀이를 왜 해야하냐.


그런데 교관들의 홈경기였고, 내겐 일종의 어웨이경기였다. 더구나 복장과 말투와 스케줄..같은 것들을

장악당한 채, 스멀대며 돋아나는 이전의 원치않던 습관들과 기억들을 쓰게 바라봐야했다. 여전히 북괴란

단어를 쓰고 정신나간 김일병을 저주하며, 그리고 갈수록 전우애가 상실된 채 '빠져가는' 군대를 한탄하는

교관들이. 전쟁놀이, 병정놀이에 몰입한채 진지하게 계급과 조직을 신봉하는 그들은 너무 많은 고지를

선점하고 있었다. 


'이왕 온거 열심히 하다 나가자'라는 맹목적인 성실함의 호명, '누구 한명이 방만하면 나머지 동료들이

힘들어진다'라는 식의 연좌제적인 책임감 부여. 그러한 식의 꼬임은 언제나 말문을 막고 만다. 내 맘대로 하면

되는 건줄 알았는데, 막상 표정과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눈앞까지 바싹 끌어당겨졌었다. 참 다양하게

응용될 수 있는 이야기다. 내 의지, 내 각오를 믿고 뛰어들고 나니 주위에서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눈길을

잡아당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다. 바꾸어 보려다가 바뀌고 만다는, 진부한 얘기.


그리고 호루라기. 규칙적인 파공성으로 신경을 긁어놓는 그 소음을 무시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이동을 '강제'하면서, 발은 안맞춰도 좋으니 열만 맞춰라..고 했던 교관들. 발을 질질

끌면서도 양순하게 끌려가는 머리만 굵은 얼룩무늬들. 1번부터 99번. 제각기였던 스텝이, 호루라기가 울리기

시작한지 얼마안돼 대략 일정한 발소리를 만들고 있었다. 호루라기 소리와 재우치는 교관들에 짜증을 내면서도,
 
발이 한덩이로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억지로 엇박을 내딛으려 해봐도, 아님 그 거슬리는 소리를 쌩까보려 해도 내 몸은 헐떡이며 호루라기 소리하고

붙어먹고 있었다. 짜증나 죽을듯이 머리에서 거부감을 울컥 퍼올리는 것 만큼, 내게 삽입되었던 행동 패턴들과

양식들이 어느새 내 몸을 통제하고 있었다. 문득 깨달아버린 왼손의 담배처럼. 항시 경례를 준비해 비워놓아야

했던 오른손을 피해 왼손에 걸려진 담배는, 일이병때 그곳에서 내 낙하지점을 대략 상상해보기 위한 낙하물의

역할도 맡았더랬다.


빠져나왔다고 생각한지 일년여만에, 다시 그 말도 안되게 어이없고 쓰레기같은 곳에 처했더니 온몸의 구정물이

들고 일어나 화답하는 꼴이다. 그치만 어째야 했는지. 어떻게 했으면 만족했을지도 사실 모르겠다. 경례구호에

맞춰 어영부영 모자끝쯤 갖다붙였던 손가락 두개쯤..을 아예 쉬게 냅뒀어야 했을까. 총 들고 다니며 전쟁얘기,

핵폭탄 얘기만 해대는 동선을 못견디겠다고 주저앉았어야 했을까. 누군가는 당연한듯 명령하고 누군가는

깍듯이 각진 자세로 부름을 받잡는 조직을 인정치 못하겠다고 뻗대봤어야 했나. '다'나 '까'의 말투 따위 엿이나

먹으라고 귀를 틀어막아버릴껄 그랬나..


대체 왜 하는지도 모르겠는 예비군훈련따위,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안 한다고, 원치 않는 공간에

처하진 않겠다고 결심했었는데. 애초에 가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굳이 꾸역꾸역 찾아가서 조국을 위해 총을 쥘

몸뚱이만을 요구하는 곳에서 짐승처럼 '부려질' 필요는 없었던 거다. 근데...애초 군바리로 이름불리기 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한꺼풀만 들추면 인간이 사육되는 곳에서 살고 있는 거다. 남자나 여자나. 티비를 보면 진행자의
 
말끝마다 미친듯이 감탄하는 방청객들이 넘쳐나고, 인터넷에는 대한민국과 독도와 축구에 몰입해버린

대한민국 국민들이 있을 뿐이고. 현실적으로는, 앞으로 6번 더 예비군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제대..전역. 轉役. 그 공간은 근 반세기동안 그러했듯, 내 몸을 숙주로 삼고 사회를 칭칭 옭아맬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었다. 이런 제길, 잡탕인 거다. 에이리언을 품은 시고니 위버가 자살을 택하듯, 최초의 보균자가

숨을 끊었어야 했나..?


..대답이 궁해졌다. 어쩔꺼냐면.




(2005. 7. 1)

아이를 잃어버리는 건 순간이다. 드라마나 여느 영화 따위에서 흔히 나오듯 문득 움찔하는 느낌도, 물건을

떨어뜨리는 전조도, 빠바바빰~하는 비극적인 음악도 없는 거다. 그냥, 아이가 서서 손흔들던 창가가 휑해지고

집에 불이 꺼져 있다. 촛불이 훅 꺼지듯, 그렇게 아이는 한순간에 사라진다.
 
내 아이를 찾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경찰은 느리다. 다음날 아침이면 돌아올 거라고 태평이다. 꼭 좀

찾아달라는 눈물의 읍소 앞에 오만하고 위압적이다. 게다가 부패하고 비열한 경찰은, 아이의 실종 사건이

자신들의 이미지를 실추(라고 쓰고 '폭로'라고 읽는 게 낫겠다)하는 악재가 되고 있음에만 주목한다.

덕분에 그녀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혼란에 빠져 사리분별도 못하는 못난이 취급받는다. 나쁜 엄마이자 못된

'암캐'가 된다. 온 동네를 돌며 '제 아이도 몰라보는 여자'로 낙인찍힌다. 정신상태를 의심받더니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감된다. 다리를 벌려 매독검사를 받는다. 제안에 따르지 않아 전기쇼크-고문-기계 위에 눕혀진다.

준비되지 못한 해군과 당국, 프락치만 준비하다.[2010-03-30]

염장 지른 경찰… 실종자 가족 틈서 사복형사들 첩보활동(경향신문, 2010-03-31)
"함미에 산소 주입? 공급할 산소가 없다는데..."(오마이뉴스, 2010-03-31)


그녀는 운다. 울고 분노한다. 그녀의 아이를 되찾고 싶을 뿐이었다. 아이를 되찾고 싶었지 경찰과 거물정치인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도, 새삼스럽고 쌩뚱맞은 정의감과 적대감도 없던 일반인이었다. 자신의 아이만 온전히

려받을 수 있다면 경찰과 정치인들에게 코가 땅에 닿도록, 손바닥이 닳도록 감사하고 감사했을 착한 사람.


뒷짐진 靑, 노골적 '北風 띄우기' 용인? (프레시안, 2010-04-02)
생환 기원 詩, 인터넷에 확산…국민들 심금 울려 (동아일보, 2010-04-02)
'얼 빠진' 한나라…故 한주호 준위 입관식에서 기념 촬영 (프레시안, 2010-04-02)


그렇지만 아이를 찾는 일이 점점 경찰과 시장의 썩어빠진 곳에 빛을 비추는 일과 같아지고 말았다.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경찰과 시장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그들의 권력과 위세가, 썩어빠진 곳에서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말 '국민의 종복'이고 '정의의 지팡이'였다면, 실종된 아이 앞에서 자신의

이미지 실추나 걱정하고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을지 따위나 고민하진 않았을 거다.

 

하여 그녀는 울고 분노하고 일어선다. 아이를 찾아야 하겠으므로. 이악물며 수치심과 정신적학대를 견딘다.

그녀를 정신병자 취급하는 이들과 싸워 버티곤, 극도의 불안감과 공포, 위압감으로 바닥까지 동댕이쳐져서도

욕지거릴 내뱉는다. "개자식들. 벼락맞아 뒈질 놈들." 



체인질링을 봤지만 천안호를 봐버렸다. 개자식들, 벼락맞아 뒈질 놈들은 여기 또 있다.



약사



고대/중세


○ 1947년 8월 독립 이전까지의 파키스탄 역사는 바로 인도의 역사로 볼 수 있음.

○ 파키스탄 서남부에 위치한 모헨조다로(MOHENJODARO)에는 고대문명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는 BC 3000년경의 금석병용기 시대의 도시국가 유적으로서 하랍파(HARAPPA) 유적과 함께 고대 인더스 문명의 대표적인 유적이며 두 지역을 인더스 문명의 기원으로 보고 있음.

○ 인더스문명은 고도의 청동기문명으로서 정연한 가도, 완비된 위생시설 등의 탁월한 도시건설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약 1천년 동안 지속되다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침입해 온 아리안족에 의해 멸망되었음.

석가모니 이후 한때 불교가 전성기를 이루기도 했으며 이로 인하여 파키스탄 전역에 걸쳐 곳곳에 간다라문명이 꽃을 피우기도 하였음.

○ 중세사회가 시작되는 8세기부터 12세기까지는 무슬림세력이 서북방 지역으로 침입하여 델리를 중심으로 약 300년간 무슬림왕조가 성쇠를 되풀이하였음.

○ 1500년경 서부인도에 중앙아시아의 티무르가 멸망한 후 그의 후예인 바바르가 수립한 무굴제국은 전인도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150년 간 전성기를 이루다가 힌두ㆍ회교간 대립, 농민반란 등으로 1857년 세포이 반란사건을 계기로 영국에 합병되어 멸망하였음.


근대


○ 영국 식민통치하에서 인도의 독립운동은 마하트마 간디 등 힌두교들의 지도하에 1885년 소집된 인도국민회의를 중심으로 전개됨에 따라 회교도들은 독립 후 힌두문화의 지배를 두려워하여 1930년 초를 기점으로 회교시인 IQBAL 등을 중심으로 회교국가의 분리 독립운동을 점진적으로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음.

○ 2차 대전 후 파키스탄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MOHAMMAD ALI JINNAH (QUAID-E-AZAM)의 파키스탄 분리주장 요구와 영국의 인도ㆍ파키스탄 분리 독립 정책에 따라 1947년 8월에 오늘날의 파키스탄으로 독립하여 영연방의 자치국이 되었으며 초대 총독에는 모하메드 알리 지나, 총리에는 아라드 알리 칸이 취임하였음.


독립이후


○ 신생 파키스탄은 법률 및 제도를 정비하고 1947년에는 UN에 가입하는 등 독립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져 나갔음. 1948. 5월부터 인도와의 분쟁지역인 카슈미르에서 상권과 권력을 쥔 힌두계인들로부터 종교적 제한을 받아온 데에 불만을 품은 회교주민들의 무장 봉기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하여 인도, 파키스탄 양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충돌함으로서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 1949. 1월 UN의 중재로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파키스탄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

○ 1970. 12월 총선 결과 서파키스탄에는 A. BHUTTO가 이끄는 인민당이 의회의 절대 의석을 차지한 반면,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는 MUJIBUR RAHMAN이 영도하는 AWAMI LEAGUE당이 대승하였음. 총선 후 동, 서파키스탄은 정치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연합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추진하였으나 동파키스탄의 RAHMAN 당수가 거부함으로써 협상이 결렬되었음.

○ 이에 따라 서파키스탄군이 동파키스탄에 진주하는 한편 인도가 동파키스탄에 군사개입을 함으로서 1971. 12월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고 동 전쟁에서 파키스탄이 패함에 따라 동파키스탄은 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되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게 되었음.


정치 개황



정치제도


○ 정부형태 : 내각책임제(2002. 8월 헌법개정)

○ 행정부 의회간의 견제·균형장치

- 대통령의 국회해산권

- 내각은 하원에 대해 책임을 짐(91조 4항)

- 하원은 수상 불신임권을 가짐

○ 지방행정기구는 4개주(Baluchistan, Punjab, Sindh, North-West Frontier Province)와 소수종족연방보호지역(FATA : Federally Administered Tribal Area) 및 연방수도권지역(FCA : Federal Capital Area)으로 구성됨.


의회


○ 상 원

- 구 성 : 100명(4개 주의회별 각각 22명 선출, 하원 12명 선출)

- 임 기 : 6년(매 3년마다 1/2 개편)

- 의장단 : 의장 및 부의장 각 1명(임기 3년)

- 상원의장은 대통령의 해외 방문으로 인한 부재나 사임, 사망 등 대통령 공석시, 대통령의 직무권한을 대행

하 원

- 구 성 : 342명

- 임 기 : 5년

- 의장단 : 의장 및 부의장 각 1명

- 회 기 : 1년에 적어도 3번의 회기, 최소한 130일이 개원되어야 함.


국방


○ 병역제도 : 지원제

○ 국방예산 : 2235억루피(약 37.3억불)(GNP 대비 3.3%, 총예산의 20.0%)

○ 병력 : 64만 명(예비군 54만)


외교



기본 외교 노선


○ 파키스탄 대외 정책은 카슈미르 분쟁 해결 등 인도와 대립 관계 개선, 인근 국가인 아프가니스탄과의 선린 관계 유지, 대미, 대중 관계의 강화가 근간을 이루고 있음.

○ 기본 외교 노선으로는 비동맹 중립 외교 노선, 이슬람 제국과의 결속 강화, 대 중국 관계 공고화, 대 아프가니스탄 전후 복구 경제 지원 등을 들 수 있음.


파키스탄-인도 관계


○ 카슈미르 문제는 대 인도 외교정책의 가장 큰 부문으로서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 이후 카슈미르(Kashmir) 지역에서 계속 일어나는 영유권 싸움이며 회교와 힌두간의 대표적인 종교적 갈등임.

○ 인도·파키스탄 전쟁

- 카슈미르 지역 영유권 분쟁은 1947년 영국 식민지하의 인도가 신생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될 당시, 동 지역 인구의 절대다수(77%)를 차지하는 회교도측이 파키스탄에 귀속코자 파키스탄 정부군의 지원하에 반란을 일으킴. 이에 대해 동지역의 힌두교 영주(Maharaja)가 인도정부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여 1947. 10월 제 2차 인도·파키스탄 간에 전쟁이 발생하였고, UN의 거중조정에 따라 휴전선이 설정됨.

- 1965. 7월 양국간 다시 전쟁(제2차 인·파 전쟁)이 발발하였으나, UN 안보리의 노력으로 휴전됨.

-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을 둘러싸고 제3차 인·파 전쟁이 발발

○ 2003년 양국 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 분쟁을 종식시키는 노력과 동시에 그동안 끊겼던 항공 운항을 2004. 1월부터 재개하고 2005. 10월 발생한 대 지진과 관련 카슈미르 지역에서 양국 공동 구조 활동을 펼치는 등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있음.

○ 그러나 2006. 7월 뭄바이열차 연쇄폭탄테러로 인해 약 2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인도 측은 동 테러를 일으킨 단체가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두고 있음을 이유로 파키스탄 측에서 자국내 테러기지 및 테러척결에 대한 성의있는 조치를 취하기 전에는 평화구축 과정에 진전이 있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면서 7월에 예정되어 있는 외교차관 회담을 무기한 연기함.

이에 파키스탄 Musharraf 대통령은 7월 20일 대국민 TV 연설을 통해 인도측에 뭄바이 열차 테러 관련 비난전을 하지 말 것을 촉구하면서, 인도측이 테러에 개입한 테러리스트에 관한 정보를 파키스탄측에 제공한다면 가능한 모든 협력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함.

2006. 7월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개최된 SAARC 상임위원회(Standing Council) 회의를 계기로 양국 외교차관 회담에서 양국은 평화구축 과정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단 공감하였으나, 구체적인 다방면 대화의 추후 일정은 정하지 못함.

○ 2006. 8월 파키스탄이 자국내 인도 외교관을 외교관 신분에 적절치 않은 행동을 한 혐의로 추방하자, 인도도 맞바로 자국내 파키스탄 외교관을 추방하는 사건이 발생함.

뭄바이 테러 사건 발생(2008.11.26-29)

- 10명의 테러리스트가 중무장한 채 해상을 통해 뭄바이에 침투, 11월 26일 밤 10시경부터 동시다발적 무차별 테러 공격 감행

- 약 170명이 사망하고 3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테러범 9명을 사살하고 1명 생포하여 테러를 진압함.

- 파키스탄 정부는 이번 테러와 파키스탄 당국과의 관련성을 계속 부인해 왔으나, 파키스탄 무장단체 ‘라슈카르에타이바’(LeT)와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짐.

- 이 사건을 통해서 군병력의 국경 재배치 움직임이 일어나고 양국간의 갈등이 다시 고조됨.


대 아프가니스탄 관계


○ 파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자원 교류 및 교역을 원활히 하고, 이들 국가들로의 해상 운송 루트로서 가치를 발휘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안정 및 아프가니스탄의 친파키스탄 정책 유도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현재까지 아프가니스탄과의 유대 관계는 형제국과 같은 관계로 매우 긴밀한 편임.


대 중국 관계


○ 파키스탄과 중국은 전통적으로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

○ 1996년 12월 1일 장쩌민 국가 주석이 파키스탄을 방문해 양국 경제 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특히 핵개발 기술 협력 강화에 합의(평화적 목적)하였음.

○ 중국은 인도 견제를 위해 전략적으로 친 파키스탄 외교를 펴고 있으며 파키스탄에 대한 다양한 경제 지원을 계속하고 있음.

○ 한편 무샤라프 대통령은 지난 2006년 2월 중국을 공식 방문, 후진타오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간 교역 및 협력 확대에 합의하였으며 2006년 11월 이루어진 후진타오의 답방을 통해 FTA 협정을 체결하는 등 정치, 경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


대 미국 관계


○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문제 해결, 인도에 대한 견제, 경제지원 등의 측면에서 대미 관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의 대 테러 활동, 마약류 단속 노력에도 적극 협조하기로 함.

○ 무샤라프 대통령은 쿠데타 집권 후 9.11사태 발생 시 미국에 적극적인 협조를 함에 따라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의 경제 원조를 받아낼 수 있었고 파키스탄의 주력 수출품인 섬유 제품의 쿼터 추가 확보로 미국 수출 증가에도 크게 기여함.

○ 2001년부터 미국과의 협력 강화를 모색해왔고 부시 정권과의 관계도 양호함에 따라 대미 관계의 지속적인 유대 강화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됨.


사회




교육


○ 파키스탄은 국가이념과 회교교육을 바탕으로 하여 과학기술교육에 중점을 두는 신교육정책을 채택하고 있음.

○ 파키스탄의 학제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음.

- 초등교육 5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2년, 대학교육 2~4년


언론


○ 정부에 의한 직접 사전검열이 82년 초 완화되어 현재는 정부 지침에 따른 자체 검열제를 시행함. 중소언론기관이 난립하고 재정상태가 어려우며 언론인의 자질문제 등으로 객관성 유지가 어려운 점 등의 문제가 있음.

○ 국영 PTV(3개 채널), AJK TV, 기타 Geo-TV, ARYONE, Indus TV 등 다수 채널이 두바이 또는 인도에 본사를 두고 방송하고 있음.


사회적 갈등 요인


○ 파키스탄은 마약상습자의 증대로 심각한 사회문제에 직면해 있음.

- 마약상습자의 숫자는 100만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음.

○ 지형이 험난한 북서변방지역의 계곡은 양귀비 재배지와 헤로인 제조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에서 소비되는 헤로인의 1/5이 이곳에서 공급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음.

- 이 지역은 영국의 식민통치 당시부터 국내법이 적용되지 않았고, 그 지방의 부족지배자가 통치한 것도 마약증대의 원인으로 들 수 있음.


문화


○ 회교화 운동 : 회교화 운동이 강조되고 있으며, 일반생활의 회교 전통유지에 부심함.

○ 복장 : 전통 복장이 일반적임.

○ 기타 : 술, 돼지고기, 도박 등이 금지되고 있음.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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