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문화재단'이란 곳에서 '에너지체험 블로그기자단'을 모집해서 출사 여행도 떠나고 원전 견학도

간다는 제안을 내 블로그 방명록에 남겼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났던 건 2009년쯤, 조승수 국회의원이 지식경제부

국정감사에서 질의했던 내용이었다. 질의의 요지는, 국민의 세금으로 '에너지' 전체를 홍보하는 게 아니라

'원자력'만을 홍보하는 게 문제가 있지 않냐는 것. 더구나 풍력이나 태양열 등 친환경 신재생에너지가 더욱

전세계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중에 말이다. [국정감사]“원자력문화재단을 에너지문화재단으로 교체하라”


그냥 지나쳐 읽었던 내용이었지만 역시 아직 명칭이 바뀌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새삼 궁금증이 일었다.

후쿠시마의 원전 사태가 터지고 나서 핵융합이 발생하니 어쩌니 여전히 방사능물질이 펄펄 전지구로 퍼지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대체 원자력문화재단이나 원전 측은 얼마나 세련된 반박 논리를 가지고 있을까. 건설적인 대안이나

합리적인 논의가 가능하려면 우선 서로가 갖고 있는 논리와 근거를 확인하는 게 필요하겠다, 싶어서 나 역시

어느 한쪽의 논리에 편승해 입장을 전하기 전 우선 들어가 알아보기로 했던 거다. 그게 원자력문화재단에서도

'에너지체험 블로그기자단'에 바랬던 역할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전선이 하늘을 온통 갈라놓고 있는 이곳은 영광 원전. 국내에는 현재 경상도의 고리, 월성, 울진과 전라도의 영광,

이렇게 네 지역에서 21기의 원자력발전소가 가동중이며, 영광에는 총 6기의 발전소가 돌고 있다고 한다. 원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버스가 워낙 빨리 달려 사진을 미처 찍지는 못했지만 몇몇 가옥에 시뻘건 현수막과 굵은 페인트

글씨로 원전 반대, 후쿠시마 사태의 재연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남아있었다.

홍보관까지는 촬영이 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원전 내부 시설은 청와대와 같은 수준의 국가 안보시설이어서 촬영이

불가하다고 하여 찍을 수가 없었다. 홍보관에 있던 원전 외벽 구조를 설명하는 샘플. 철근과 콘크리트로 단단히

만들어진 5중 방호벽이 방사성 물질을 안전하게 가둬둘 뿐 아니라, '무려' 규모 6.5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는

내진설계를 갖추고 있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버스에서도 틀어줬던 비디오 내용이었다. 원자로 외벽과 동일한 규격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에 전투기를 정면으로

충돌시켰는데 고작 5cm만 관통되고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제법 인상적인 화면이다 싶었는데 여기서 또 발견했다.


이제부터 내 생각이다. 첫날의 원전 견학과 둘째날의 관련학과 교수 특강을 거쳐 현재 도달해 있는 생각이랄까.

간단히 요약하자면, 원자력발전의 강점으로 이야기되는 경제성과 안전성에 대한 주장은 생각보다도

근거가 허약하며, 결국 최종적으로 기대는 근거는 현실적으로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게 전부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현재의 시스템과 전력소비 양태를 유지한다는 가정 하에서나 유효하다는 생각이다.




1. 원전의 경제성 : 사고대비 비용 및 사회적 비용을 감안한다면?

특강 때도 지적했던 이야기지만 동일한 전력량을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수력이나 화력 등 기타 방식에

비해 원자력이 월등히 저렴하다는 계산에 빠진 부분이 있다는 거다. 사고가 났을 때 이를 복구하기 위한 비용이

애초에 반영되어 있어야 하지만 이 부분이 빠져 있다. 그리고 후쿠시마 사태에서 보이듯 일단 사고가 났다고

하면 그 비용은 천문학적인 수준에 이르게 될 수 밖에 없다. 단지 경제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남는

인적 피해를 감안한다면 '물이나 불의 피해도 총량으로 치면 원자력만큼 위험하다'는 논리는 말장난일 뿐이다.


그에 더해, 원전과 같은 치명적인 기피시설이 들어서기까지, 또한 원전에서 발생하는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을

지정하고 운영하는데 들어가는 비용도 무시할 수 없다. 당근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경제적 급부는 물론이고

모두가 기피하는 그런 시설을 들이도록 설득하고 갈등하는 과정 자체가 커다란 비용이다. 물론 다른 수력이나

화력발전소 역시 나름의 사회적 비용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겠지만, 특히 원자력 발전소의 경우 국제적으로도

커다란 화두가 되고 국제 시민단체의 압력까지 이어지는 등 그 차이가 큰 것이다.


▲방사능의 이동 경로. 붉은색이 방사능 위험지역이다. 서북로를 따라 이동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위험지역은 반경 30km를 한참 벗어난 곳에서도 발견되고 있다(Hot Spot). ⓒ장정욱 교수 제공 자료서 캡처. (프레시안에서 재인용)



2. 원전의 안전성 : 세계 제일 수준의 일본조차 천재지변 앞에 무기력했다는 사실.

길게 이야기할 부분도 아니다. 세계 최고의 기술 수준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한국은 고작 6.5의 내진설계를

갖추고 있을 뿐이다. 일본과 같은 천재지변이 우리나라에는 생기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으며,

더구나 일본과 같이 천재지변을 끼고 살아 예방, 방재에는 훨씬 잘 준비된 나라에서조차 저렇게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그보다 준비가 잘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분에 대한 압축적인 표현은 원전 중앙 통제실 앞에 붙어있던 표어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다름아닌 "100 빼기 1은 0이다"라는 문구. 만의 하나, 수백만의 하나라는 가능성만 있다고

하더라도 그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냉철한 현실 인식이다. 이미 체르노빌에서,

미국의 쓰리마일아일랜드에서, 후쿠시마에서, 보았고 보고 있는 일들이다.




3. 가장 중요한 문제 :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는 '훈계'에 숨은 전제를 볼 것.

이제까지의 간소한 논의를 따른다면, 결국 숨겨져 있는 비용을 고려했을 때 전혀 경제적이지도 않고, 사고가 났을 때의

피해는 지구적 차원으로 치명적인 에너지원이 원자력인 셈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반박 논리는, 사실상 다른

대안이 없다, 그런 위험이라도 무릅쓰고 원자력 에너지를 취하지 않으면 인류 문명이 멈춰서게 된다는 주장이다.

그런 주장 앞에서는 할 말이 없어진다. 화석연료로 다져진 근대 문명이 차츰 한계에 달하고 있고, 깨끗하고

안전하며 효율적인 대량의 대체 에너지원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 과도기 역할을 원자력이 맡아야만 하는 걸까,

숙명처럼 이고 지고 가야 하는 걸까 생각하게 되는 거다.


그렇지만 그런 주장은 'Ceteris Paribus(다른 조건이 현재와 같다면)'이라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깔고 있다.

경제학의 기본 가정이기도 한 저 전제는, 원자력 발전소를 껴안고 살아야 한다는 가장 근본적인 근거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와 같은 에너지 정책과 시스템에 문제는 없을지, 현재와 같은 삶의 방식이 앞으로도 가능할지에

대한 성찰이나 개선 노력을 막고서 그저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려면 역시나 원자력밖에는 대안이 없다는

식이니, 어떻게 듣기엔 '협박'처럼 들리기도 하는 것 같다.



4. '전제'를 바꾸어내는 노력 : 한국의 에너지 정책을 바꾼다면. 에너지 소비패턴을 바꾼다면.

지금 한국이란 나라가 갖추고 있는 전력 수급 시스템이나 경제 구조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까. 한국적인 맥락에서

말하자면 지금 현재의 전력 수요가 효율적으로 쓰이고 있는지, 보다 에너지를 절감하는 방식으로 산업과 경제가

굴러갈 여지는 없을지 시스템을 정비할 수는 없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 그러하듯, '원자력산업'이라는 부분의 최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전체의 최선이 일그러지는 결과를 손놓고

바라보게 될 위험이 상존한다고 생각한다.


수출기업들을 위한 값싼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전력단가를 비현실적으로 유지한 채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다거나,

에너지 효율적인 전기기기나 시스템을 구축하도록 유인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 무책임한 정책 입안의 문제, 혹은

반도체니 철강과 같은 전력 소비가 막대한 부분에 국가경제 대부분이 과잉집중되어 있다는 사실 등. 얼핏 생각해도

이런 부분을 개선하여 증가일로의 에너지 수요를 적잖이 통제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에 원전이 이렇게 많아 무려

세계 6위의 원자력발전국이란 건 이런 방만한 에너지 소비와 정책에 따른 막대한 전력 생산으로 인한 결과일 텐데,

이런 부분들을 개선하고 고친다면 최소한 두 기 지을 원전을 하나만 지어도 되지 않을까.

좀더 근본적으로는 인류가 근대에 짧은 순간 누렸던 에너지 압축적인 소비 양태를 앞으로 바꿀 수 밖에 없으리란

전망을 직시하고 그에 맞는 전략을 짜야 할 때는 아닐까. 이런 이야기가 너무 거창하다면, 최소한 현재 갖고 있는

기술 수준에서 가능한 대안을 발굴하고 개발하는 노력에 좀더 힘을 쏟아야 하는 건 아닐까 싶다. 대량의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소로부터 인근 도시와 지역을 커버하는 식의 집중화된 발전 말고, 풍력이나 태양열 따위의 새로운

대체 에너지원을 활용해 분산된 형태의 자가발전을 시도하고 있는 유럽의 사례가 단적인 사례다.


최소한, 이것 하나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원자력 발전에 따른 부산물들인 고준위, 중저준위 핵폐기물들이

환경상 무해한 수준으로 자체 정화되기에는 수만년 이상이 소요된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화석연료 시대와

아직 오지 않은 대체에너지의 시대 사이에 한 50년쯤을 원자력 에너지가 주로 감당할 것이라는 게 강의를 했던

관련학과 교수의 전망이었다. 50년을 커버하기 위해 수만년 지속될, 아직 밀폐차폐 말고는 안전한 처리방법조차

개발하지 못한 치명적인 위협을 자초해야 할까의 문제다.



원전이 스스로 말하듯, 100 빼기 1은 99가 아니라 0이다.




* '에너지체험 블로그 기자단'의 일원으로 원전 견학을 보내거나 관련 강의를 듣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 꼭

현재 한국정부의 '원전 수출' 정책이나 원자력발전소의 입장을 지지하고 대변할 사람들을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닐 거라 이해한다. 애초 불명료했던 근거와 입장을 이번 기회를 통해 조금더 깊이 가다듬고 나름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도록 한 것만으로도 원자력문화재단에 감사한다.



김수행 교수님의 아카데미시즘

김수행 교수님은 아직 상대평가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부터 수강생들에게 엄격한 학사관리를 한다는

평판이 높았다. 수업에서 듣는 내용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다고 생각했던 일부 사회대 학생들은 이른바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님께서 그런 것도 몰라주고 엄격한 출결관리와 냉정하고 야박한 학점을

고수하는 데에 섭섭함을 느끼기도 했었지만, 사실 '상대평가'와 '사회주의적 가치'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할 이유 따위는 찾지 못했었다. 교수님은 특히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하고자 수업을 듣는 학생이라면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씀했었다.


이 책에서 교수님은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명확히 고백한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자면 자신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탐색을 하는 데서 그칠 뿐, 예컨대 '김수행노믹스' 식의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현실

정책이나 개별 사안에 대한 디테일한 평가가 가능할 만큼 공부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는 것. 지승호와

인터뷰할 때의 교수님은 때로는 시사 이슈에 대한 대중적 이해 수준에 머물거나, 혹은 솔직히 '그 부분은

공부를 안 해서 모르겠다'고 한 발 물러선다. 농업 경제학의 문제, 영국 복지정책 후퇴에 대한 해석의 문제..


그렇지만 한국 사회와 같은 황량한 지형에서 '자본론'에 기대어 한국경제를 읽어낼 만큼의 공력이 있는

경제학자가 있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김수행 교수님에게 구체적인 경제정책을 내놓으라거나,

혹은 개별 사안에 대한 입장과 논평을 요청하는 건, 일개인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선,

서울대학교에서조차, 그분의 퇴임과 함께 마르크스 경제학은 주류 계량경제학의 틈바구니에서 또다시

밀려나 버리는 상황인 거다.


자본론의 부활을 말할 때

누군가 진보 세력의 특징은 개인이나 요소가 아닌 구조와 동학을 주목하고, 반대로 보수 세력의 특징은

개인과 요소에 우선적인 책임과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동의하는 말이다. 맑스도 그랬지만

김수행 교수도 개별 사안이 아닌 구조 자체를 천착하고 있다. 케인즈도 '구성의 모순'이라며 개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전체로서의 합리적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을 했으니, 꼭 빨갱이만 구조적

모순과 시스템의 불합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아닐 거다.


실제로 주류 경제학이 'Ceteris Paribus'(다른 모든 조건이 일정하다면)이라는 비현실적 전제 하에서 완전

경쟁을 상정하는 것과 달리 정부가 시장판 자체를 유지, 존속시키는 역사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가능성을 최소한 이전에 그랬듯 지금 굴러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반성적

역할에 한정하더라도, 시장의 역사성이나 생산의 원천 및 분배에 대해 풍요로운 시사점을 충분히 던질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마르크스와 그의 경제학을 아예 도외시하고 있는게 문제다.


90년대 'IT 경제' 혹은 '지식경제'가 유행하면서 실물경제의 중요성이 약화되었다느니, 노동-자본의 구도

자체가 무화되었다느니, 혹은 비정규직 문제가 주목받으면서 '노동'을 덩어리로 보는 기존 시각과

맑시즘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느니 많은 지적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금융경제의 거품이

급속히 꺼져들어가는 세상에서 맑스와 김수행 교수가 주목하는 날것의 구조와 시스템, 실물 경제 그리고

강고한 노동-자본의 구도는 요요히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미상 열려있고 내용이 굳어지지 않은 '새로운 사회'

김수행 교수님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일으키는 종말론적인, 목적론적인 '닫힌 미래'를 항상

경계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에 '조응'한다고 했던, 그 '조응'이라는 애매한 단어에

기대어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식, 그러니까 경제가 발전하면 자연히 사회가 발전한다는 식의

'경제주의'도 경계하고자 했던 교수님은, 그래서 '새로운 사회'를 말한다.


그건 어떻게 올 지, 어떠한 형태가 될 지, 언제 올 지 아무도 모른다. 마르크스도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그의 단편적인 아이디어들을 여기저기 흘리고 있을 뿐, 기계적인 도식 따위 그린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는 건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교수님도 이야기하듯)

새로운 사회를 그릴 수 있는 상상력과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런 면에서 책 마지막 장의 우석훈교수가

말했던 좌파 경제학의 정의가 와닿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지키는 것은 (주류)개발경제학이고, 말 못하는

사람-소외 받은 쪽이나 소수자나 약자들-을 지키는 것이 좌파경제학이라는 이야기.


얼마 전 만났던 기자 선배가 했던 이야기가 오버랩되었다. 자신이 되고 싶은 기자란 건, 항상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는 기자라고. 그렇게 지금 사회의 약자들을 지키고 그들과 함께 보고 이야기하면서

문제를 가다듬어 나가고, 또 그에 대한 반응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첩경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이미 그 의미와 내용이 가득 차 굳어버렸거나, 심지어

오염되어 버린 면이 없지 않다.


남북 경협에 대한 새로운 시각, 그러나.

개성에 출장을 다녀오면서 느꼈던 것이지만, 남북 경협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개성공단에 진출한 기업들은 남북관계가 너무 호전되면 임금이 인상되고 노동자 관리하기도 힘들거라

염려하고 있었다. (물론 이는 지금처럼 최악으로 경색되기 이전의 '배부른 고민'이었다.) 김수행 교수도
 
지금과 같은 식으로 투자해서 바로 자본주의적 이윤만을 좇는, 값싼 노동력만을 착취하는 경협은

별 의미도 없고 남북통일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물론 경협 자체만으로도 남북간 합작의 훈련이 될 수 있고, 자본주의의 이식을 위한 훌륭한 시험대가

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 반대편 시각과 그 근거에 대해서도 충분히 논의해 볼 만한 내용 아닌가.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데 필요한 훌륭한 자극이 될 수 있는 꼬투리가 될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그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여전히 웃기지도 않는 '불온도서' 운운하는 세력이 굳건하다.


덧붙임. 인터뷰의 미학.

마구잡이로 치고 빠지는 '합이 짜이지 않은' 날것의 싸움이 막장으로 가는 개싸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그럴 듯해 보이거나 심지어 아름다워 보이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액션 영화나, 토론회, 혹은

'리얼'을 표방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조차 기본적인 '합'을 짜두기 마련이다. 내가 이렇게 치면

넌 이렇게 막고, 니가 이렇게 반격하면 난 저렇게 피한다는 식의 '합' 말이다.


지승호와 김수행의 질문과 답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김빠진 문답도 아니었지만, 어느 한쪽의 기세가

등등한 위압적인 문답도 아니었다. 둘다 최선을 다해 질문하고, 최선을 다해 답하고 있다는 느낌, 

그들은 질문과 답을 함께 만들고 있었다. '합'을 미리 짜두어서라기보다는, 서로가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충실히 알고, 또 아는 것을 최대한 노이즈없게 전달할 만큼 충실히 숙성시킨 사람들이어서 그런 게다.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 - 10점
김수행 지음, 지승호 인터뷰/시대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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