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4,130미터. 이 표지를 보고 나자 생각보다 훨씬 감개무량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를 오려고 여태 걸었구나, 싶기도 하고

 

내가 이렇게 높이까지 걸어올라와 보았구나, 싶기도 하고. 그냥, 질리도록 걷고 싶었는데 그야말로 5일간 징하게 걸어서 도착한 곳.

 

 

그리고 짙은 안개속에서 헤엄치듯 조금 더 걸어가니 비로소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가 나타났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예기치 않게도 산악인 고 박영석의 기념패. 2011년에 안나푸르나 등정을 왔다가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크고 황량하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시즌이 아니라 더욱 사람이 적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앞서 걷던 미국 친구 하나는 벌써 다이닝룸에 누워서는 우쿨렐레를 연주하고 있길래, 슬쩍 도촬. 훌륭한 풍경이다.

 

그리고 한쪽에는 새로 롯지를 짓고 있는 공사판이 있고, 그 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을 위한 텐트가 짙은 구름 속에 숨어있다.

 

새로 지어지는 롯지에 들어갈 침대들. 그러고 보니 트레킹 중에 내가 누웠던 침대는 모두 저렇게 생겼던 거 같다.

 

멀찍이 흐릿하게 보이는 탑 같은 형체가 삐죽 솟았길래 슬쩍 가봤다.

 

가는 길에는 온통 누군가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진과 글귀가 가득했고.

 

 

탑 역시도 티벳 불교식의 깃발을 온통 휘감고서는 안나푸르나를 바라보고 향했던 사람들을 품었다.

 

 

 

비교적 최근에 늘어뜨린 것처럼 보이는 선명한 빛깔의 깃발은 '부처의 눈' 그림을 새긴 채 산아래를 굽어보는 중.

 

4,130미터 고도의 이곳에서도 공사판은 별다를 거 없다. 물론 건축용 부자재들은 하나씩 전부 사람이 이고지고 날라야 한다는

 

차이가 있다면 있겠지만, 그렇게 날라온 문짝과 유리와 나무판넬들을 가지고 건물을 세우는 건 기술자들의 몫.

 

이렇게 촘촘한 발받침을 갖고 있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도 할 테고. 저렇게 간격이 좁으면 오히려 불편하지 않을까, 괜한 걱정.

 

여기까지 무사히 트레커들을 인도해서 끌고 온 가이드와 포터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이야기에 열중이다.

 

모두들 추위를 막기위해 오리털 파카에 네팔 전통의 양털 모자를 썼다.

 

그리고 이미 이 곳 다이닝룸에 자리를 잡은 한 트레커는 침낭 안에 들어간 채 꽁꽁 옷을 싸매고 모자까지 쓴 채 독서삼매경.

 

아침마다 향을 새롭게 갈아 피울 텐데, 저렇게 나무벽에 찰싹 붙여서 태우면 위험하지 않으려나 걱정스럽기도 하고.

 

애초 제대로 씻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래도 고양이세수라도 하려고 화장실을 찾았더니 주인 아저씨가 양동이를 내준다.

 

여기는 물도 귀하다면서 저 양동이에 달린 수도꼭지를 틀고 세수도 하고 발도 닦고 하라는 것. 대충 씻고 치웠다.

 

 

그리고, 짙은 안개를 뚫고 불현듯 안나푸르나 봉우리들이 나타났다. 그야말로 두둥실, 구름 사이에서 삐쭉 고객만 내밀었다.

 

근데 이토록 가까이 다가섰을 줄이야. 거의 코앞이잖아 싶을 정도로 눈앞을 압도하는 위용과 그 디테일.

 

이내 짙은 구름 속으로 다시 숨어버렸고, 한참을 바라보아도 좀체 다시 나타날 기미가 없더니,

 

해가 거의 떨어지기 직전 다시 한번 슬쩍 안부인사를 건넸다. 굳 나잇. 내일 새벽에 봅시다.

 

 

마차푸챠레 베이스캠프에서 도착해서 점심을 주문하고 잠시 쉬어가는 참. 마차푸챠레 베이스캠프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길에는 네팔의 공작새와 염소 비슷한 동물들이 곧잘 출몰한다고 한다. MBC에서 ABC로 가는 길은 대체로 완만한 오르막길.

 

해발 3,700미터. welcome을 저렇게 중간에 하나 쉬고 적어놓으니 뜻이 미묘하다. well, come to 블라블라. 오시던가, 하는 시크함.

 

 

앞마당에 놓인 테이블과 빨랫줄에서 빨랫감을 넣고 있는 롯지의 주인 아저씨와 따뜻한 홍차 한 잔을 마시는 중인 가이드 꺼멀.

 

 

등산화는 앞코가 긁히고 옆엣 쿠션이 슬쩍 터지고.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많이 상했다. 잠시나마 신발을 벗고 따뜻한 햇살에 일광욕.

 

그리곤 맨발은 얼음같이 차가운 히말라야의 자연수에 담그고 땀을 씻어내고 열도 빼내고. 세째 발톱이 거의 시꺼매졌다.

 

마차푸챠레 베이스캠프에서 한숨돌린 일꾼들이 등짐을 메고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길, 그러고 보면 굉장히 스펙터클한 자연의 품안이다.

 

 

이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찍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이렇게 잠시 몸의 근육들을 풀어주기도 하고.

 

나와 함께 페이스를 맞추던 체코의 70대 노부부 두 분도 느지막히 올라와선 등산화부터 풀어젖히고 계신다.

 

롯지 안을 슬쩍 구경해보니 온갖 세계인들의 증명사진들이 한쪽 벽에 빽빽히 붙어있는 게, 여기 다녀왔다는 기념삼아 남겨둔 것인 듯.

 

다이닝룸 안에서 점심식사를 시작하신 두 부부. 불빛 하나 없이 유리창 너머로 스며오는 햇살에만 기대어 갈릭스프를 드시는 중.

 

 

나는 달밧. 따뜻한 콩스프인 '달'이 들어가니까 몸의 구석구석까지 콩단백과 뜨끈한 온기가 전달되는 느낌이다. 막판 스퍼트 준비.

 

안개가 점점 짙어진다 싶은 게, 점점 추워지기도 하고 시계거리도 엄청 짧아지기 시작했다. 조심조심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했다.

 

 

 

키작은 관목들, 그리고 내가 가려는 길을 거슬러 흘러내리는 제법 맹렬한 개천, 끊긴 듯 이어지는 오솔길 하나. 시야는 제로.

 

누군가 길 옆 풀떼기들을 가지고 이렇게 머리채처럼 땋아놨다. 무슨 의미가 담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정성들여 꼼꼼히 땋았다.

 

 

걷다 보니 굉장히 초현실적인 느낌이다. 몸이 둥둥 떠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개천과 산과 언덕과 오솔길. 이런 그림같은 풍경이라니.

 

 

 

 

이런 식의 완만하고 몽환적인 풍경 속을 한참 걷고 또 걷는데, 전혀 힘들지도 않고 그냥 가볍고 유쾌하게 산책하는 기분이다.

 

 

 

 

 

그렇게 한참. 도무지 안개인지 구름은 걷힐 생각이 없어보이고, 저 너머로는 분명 만년설을 이고 있는 안나푸르나 사우스와

 

안나푸르나 1 봉우리 등등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을 텐데 당장은 한발자국 앞의 보랏빛 꽃송이들이 눈길을 잡아챈다.

 

 

 

 

당장 눈앞의 길은 보인다지만 대체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계속 이어지기는 하는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휘적휘적 이어지는 길.

 

 

 

바위들도 다들 모서리가 날카롭고 거칠기 짝이 없어 한발한발 내딛을 때마다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자칫 넘어지거나 스텝이 꼬이면 망.

 

 

 

앞서거니 뒷서거니, 세상에 온통 나와 가이드 꺼멀 둘 뿐인 듯 하다. 그는 겨울엔 이 곳도 온통 허릿춤까지 쌓인 눈이 가득하다며

 

그때는 알아서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지금은 그래도 걷기 무척 편한 거라며 내게 듬직한 등을 보여줬다.

 

 

그리고, 아무런 징조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 나마스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해발 4,130미터의 트레킹 코스 종점이자

 

본격적인 안나푸르나 등산가들을 위한 시작점. 내게는 5일동안 내처 걸었던 전반적인 오르막의 꼭지점이기도 하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