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날 새벽엔 변태를 만났다. 뉴욕에서도, 팟타야에서도, 심지어는 이집트의 아스완에서까지 변태는 내 친구..엉?

아침에 펠루카를 탄 채 나일강 위에서 해돋이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새벽 5시, 여전히 깜깜한 한밤중에 나일강변에

나섰더니 왠 이집션이 다가왔다. 시시껄렁한 얘기하고 어쩌구 하더니 불쑥, 자기 집에 아무도 없댄다. 아내도 없고,

자식들도 없고. 그리고 long banana가 있다나..not small이란다. 쳇..여전히 못 알아듣고 있던 나는, 50파운드

주겠단 얘기를 듣고서야 그제야 그제야 알아버린 거다. 일단..너무 싸다고 거절.ㅋㅋ 50파운드? 우리돈 오천원이잖아.


근데 이자식, 아니랜다. 여기 정가가 그렇다고, 얼마를 원하냐고 진지하게 치근덕거렸다. 장난으로 대거리하다가는

정말 큰일나겠다 싶어 더럭 겁이 났다. 단호히 거절하고 돌아서서 속보로 퇴각하는데도 계속 따라오길래..경찰이 보이는

곳으로 도망왔다. 성질 좀 내볼까 했으나...어찌나 정말 '남자답게' 생겼던지 화는 못 냈다.

그러고 찍은 해돋이 사진들. 아침 5시반..그 바나나 아저씨를 만나고 난 직후다. 더구나 펠루카를 빌려서 나일강 서안으로
 
건너가 해돋이 보기로 약속을 해놓고서 이 아저씨들이 바람이 없어 펠루카는 안된다며 모터보트로 건너갔던 터다. 전날

황혼을 펠루카에서 보려던 계획을 빵꾸낸지라, 대신 해돋이를 보겠다던 의욕에 불타던 내 기분이 살짝 흐려졌었지만...

하늘이 밝아지고 천지가 뿌얘지더니 그제서야 은근슬쩍 올라오는 해를 보며 모든 걸 용서할 듯한 마음이 되어버렸댔다.


6시면 해가 뜰 줄 알았더니 동쪽에 딱 산이 있어서 생각보다 꾸물거린다. 6시 50분쯤에야 해를 봤다. 단순히 "해뜨다"란

표현으로 가리우는 그 지루할만큼 길고도 변화무쌍한 국면들...뿌연 하늘, 차츰 진해지는 청색과 서편 끝에까지 뻗어나가는

빛의 알갱이들, 동편이 차츰 붉게 달아오르다가 어느 순간 이미 햇님이 어디선가 뜬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밝아졌다 싶을

즈음, 불쑥, 하고 해가 떠오른다. 처음에는 고개만 빼꼼히 그치만, 점점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고, 완전히 지면에서 떨어져

나갈 때조차 아직은 빛을 내는 아주아주 똥그란 다홍빛 원반같을 뿐. 그 열기는 한참 후에야 내게 도착해서 따뜻함을

전한다.


해뜨기 전이 가장 춥다느니 하는 통속적이고 진부한, 마냥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자세를 강조하는 말도 있지만, 기실
 
해 뜨기 전에 이미 사위는 모두 밝아진다는 점을 주목할 수도 있는 게다. 용례라면,

A : "해뜨기 전이 가장 춥다잖냐, 물고문, 성고문만 나오면 80년대와 다를 게 없다지만 좋아지겠지."

B : "꼬됴 이자식아. 해가 뜨기도 전에 이미 사방은 온통 밝아온다는 말도 모르냐."


여행 중 숱하게 떠오르는 해를 보고 가라앉는 해를 봤지만, 이때의 해돋이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물론, 그러고 나서

이 모터보트 선장이 애초 약속과는 달리 바가지를 씌우려는 바람에 불끈, 또 깡따구를 부려야 했지만. 머, 인샬라다.

이집트는 여전히 해가 떠오르는 동쪽...나일강 동쪽변에만 그들의 삶을 꾸린다. 서편은 별로 발전시킬 의욕도

없는 거 같고, 일단 과거로부터의 무덤이 너무도 많아서. 나일강을 보고 있으면 보통 볼 수 있는 water와는

다르게 점도가 상당히 높은 거 같다는 착각이 든다. 유속이 그리 느리지도 않은데, 수면에 계속해서 파문이

그려지면서도 쉽게 지워지지가 않는다. 살짝 끈적스러워 보이면서도 무진장 맑아보이는 나일강. 물 밑에는

거대한 물고기가 잔뜩 산다.






밤 10시 기차, 카이로에서 아스완까지 13시간을 달렸다. 내가 앉은 좌석에 또다른 티켓이 발부되어 잠시 소란이 이는 등

영 못 미더운 이집트 기차의 저질 서비스를 실감하고 내리 자다가, 꽉꽉 들이찼던 사람들이 많이 빠진 한적한 찻칸에

동그마니 남았다. 아침 6시밖에 안 되었는데, 유리창 너머 햇살이..느낌일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남으로 내려갈수록

심상찮다. 입으로 이글이글 소리를 내면서 내리쬔다는 느낌?


불쑥 승무원 아저씨가 객실에 들어오더니 통로바닥에 깔린 카펫이 깨끗하다고 막 자랑을 늘어놓는다. 어이없게도

그러고 나서 박시쉬 달라고. 기차 카펫 깨끗하니 팁달라는 건 대체 무슨 경우냐. 하이 머니 헬로우 머니 어쩌구 하는

아이들도 적나라한 사례였다. 뭐랄까, 그들의 생업 자체가 관광객에 달려있어서, 아직 그다지 세련화하지는 못한

-서비스 정신으로 치장되지 못한-fight for money가 더욱 두드러진다고 느꼈다.

숙소를 잡자마자 나섰다. 정처없이 아스완 시내구경 좀 하다가, 이집트 남단의 원주민이라는 누비안족의 문화나 유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엘레펀트 아일랜드에 들어가기로 했다. 20파운드(2000원)이라는 관광객요금을 요구하는 페리호
 
선장을 쌩까고 1파운드(200원)의 현지인요금만 내고 건너간 그 섬에서, 플라스틱 물병을 소중히 간직한채 5시간여 거닐며

온갖것을 볼라다가 일사병 걸리는 줄 알았더랬다. 그 조그마한 섬에서도 길을 잃고 헤매던 내게 자신의 짐을 들리시곤,

자신의 집방향과 같은 곳에 있던 누비안박물관을 안내해 주셨던 순박한 아저씨, 들고 갔던 2리터짜리 물병을 다 비우고

탈진해가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뜨신 차이를 나눠줬던 맘좋은 아저씨..들 덕분에 살아돌아나왔달까.

햇빛 가릴 한 줌의 그늘이 아쉬워질 정도의 열기, 눈알이 화끈거리며 말라붙는 듯하던 그 열풍이라니. 물통 역시

금세 끓어오를 듯이 뜨거워져서는 물이 이미 미지근함을 넘어서버린지 오래였다. 박물관에선 그래도 손님이 나밖에

없어서 그랬는지 관리인이 따라다니며 불켜줬다가 다시 끄고 설명도 해주고 차도 함께 마시고 그랬다.

펠루카와 엘레판트 아일랜드. 강에 내려앉은 나비떼 같은 저 하얀 돛단배들이 바로 펠루카. 무동력범선이랄까.

오로지 돛의 힘으로 움직인다는데,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때는 노를 쓰고. 그치만 갈수록 모터도 다는 추세인 거

같았다, 펠루카 선장들과의 인터뷰 결과 노질이 너무 힘들어서 모터를 다는 거라나. 아스완은 수단과의 경계에

가장 근접한 도시인지라, 내가 내려간 최남단의 도시이기도 했다. 아부심벨은 물론 여기서 한 160킬로 더 남단에

있었고. 무진장 더웠다. 하루에 1.5리터 펫병을 네개까지 먹을 정도였으니...에어콘은 커녕 선풍기조차 천장에 붙은

크다란 팬밖에 없는 숙소는 그저 밤에 잠잘때만 들어갔고, 나머지 시간은 저 유유한 나일강의 유유한 펠루카를

바라보며 유유하고자 했다.

 펠루카와 나일강..은 참 잘 어울린다. 한강에는...거북선이 어울릴라나. 뜬금없이 한강도 보고 싶어졌다.

어딜가나 박시시(일종의 팁)을 요구하는 이집트인들, 오죽하면 카이로공항에 첨 떨어져서 화장실을 이용할 때
 
휴지 빼주고 건조기 버튼눌러주고는 팁을 요구할까..어딜가나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내가 자발적으로 박시시를

줘야겠다고 맘먹은 아저씨, 너무도 더운 아스완에서 그것도 2시에서 3시쯤에, 아스완 서안에 있는 tombs of

nobles를 안내해가며 다니는데 할아버지가 넘 힘들어하는 거다. 내 욕심같아선 몇개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나도 지쳤고 물도 떨어졌고 해서 걍 만족하고 내려오는 길. 이미 볼만치 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덤들의 열쇠를 가진 할아버지는 내가 보자고 하는 무덤에 앞장서 도착해 문을 열어줬고, 내가 보고 나온 무덤을

다시 잠그고는 서둘러 앞장섰더랬다. 무덤들은, 비슷하게 정형화된 양식인 듯 했지만, 그 안에 온통 가득한

히에라글립스(상형문자)들과 그림들은 정말 볼 만 했다. 단순히 치장이나 배경이 아니라 죽은 자의 일생을

세세히 새겨넣어 후생을 기하려는, 그런 어떤 의지가 강렬하게 와닿을 정도로,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의지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내게 등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을 앞세우는 것은 살짝 안심스런 일이기도 하다. 그 사람에 대한 신뢰와 호의가 쌓여

무언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사이라면, 난 그사람이 쥐여준 끈을 잡고 길을 인도받는 셈이다. 누군가에게

등을 보이고, 누군가에게서 등을 빌리고. 그 길이 비록 뜨끈뜨끈한 모래바람이 휘몰아친대도, 태양이 아무리

녹여내릴 듯 작열한대도.(저 짙은 그늘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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