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 바로 인접한 곳에 있는 절두산 순교성지. 사실 이곳은 드물지 않게 강변북로를 타거나

 

합정을 거쳐 강북이나 강남을 넘나들 때 꽤나 지나친 곳이기도 하다. 그저 지나치기만 했다는 게 함정이었달까.

 

 

좌회전이 불가하다는 속세의 붉은 사인 따위 코웃음치며 하늘 높은 곳과 사방을 고루 가리키는 녹슨 십자가.

 

 

 아마도 조선 말기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어느 대감 양반이런가.

 

 성모의 얼굴이나 안고 있는 예수의 얼굴이 참 와닿는다. 딱 한국인 얼굴이다.

 

 

 

 고수부지로부터 자전거를 끌고 계단을 올라와 순교지에 올라온 사람도 보인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의 '박해'와 '순교'를 기리기 위한 곳, 교회와 천주께 바쳐졌다는 그들의 충성은

 

더러 기존 질서와 관습에 대한 극단적인 거부와 천대로 이어지곤 했다는 것도 동시에 기억해둘 비극이다.

 

 

 

 천주교 신자들이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지 모형과 이야기들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해둔 체험관.

 

 

 한국의 초대 추기경이 타고 다니던 포니 2를 반짝반짝한 상태 그대로 보존하고 있던.

 

 

 그리고 엎어져 곤장을 매우 치던 형틀 역시 사실적인 (아마도) 1:1 실제 사이즈로 재현되어 있었고.

 

 발에 차는 차꼬와 얼굴에 씌우는 형벌기구들까지.

 

 

 

그리고 절두산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

 

 

 녹색의 그늘은 짙푸르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봄바람에는 성당의 성가대 노랫소리가 살짝 실렸다.

 

 

 절두산 성당은 순교자들에게 씌웠던 목칼, 조선시대 양반이 즐겨쓰던 갓, 그리고 순교자들에게 채워진

 

차꼬를 형상화한 쇠사슬의 세가지 포인트를 갖고 건축되었다고 한다.

 

 

 

 온통 해어진 채 구멍이 너덜너덜한 예수님. 아마 이 시대의 이 땅을 지켜보는 예수의 마음이 저럴 거다.

 

 

 활짝 열린 성당의 정문 안 쪽으로 당당하게 걷고 계신 수녀님.

 

 

 성당 앞에는 미니어쳐로 성경의 유명한 구절들을 재연해두고 있었다. 아마도 이 모습은,

 

글쎄, 묵을 곳을 구하지 못해 헛간에 잠시 몸을 뉘인 요셉과 마리아 아닐런지.

 

 

그리고 이 장면은 필시 예수가 최초로 기적을 행하는 장면일 거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

 

 

 성당 뒷켠에는 흥선대원군이 세웠을 척화비가 여전히 시대착오적으로 당당하다.

 

 

  

 저 분은 얼핏 듣기로 한국 최초의 신부님이셨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시라 했던가.

 

 

 

 절두산 성지 옆구리 쪽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성모상을 모신, 붉은 장미꽃들이 화환처럼 에워싼 곳이 나타난다.

 

 

 

매번 지나치기만 하던  절두산 순교성지. 이쪽에서는 더욱 잘 보이는 갓 모양의 둥근 형상과

 

구멍이 뻥 뚫린 목칼의 형상. 그리고 건물을 빙 두르고 늘어뜨려진 차꼬를 형상화한 쇠사슬의 형상들.

 

 

 



#2. 탈주를 잠재운 약빨.


촛불집회가 들불처럼 번지고 뭔가 '주권'이라는 게 한줌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강부자 정부가 아니라 시민들에게

있다고 살풋 실감날라던 때가 있었다. 6월 10일. 백만 가까이의 인파가 어게인, 87년 6월을 외치며 모였었고 이후

6월말까지, 아무 대책도 수습책도 없이 손놓고 있는 정부를 거침없이 압박해 가는 모양새라고 생각했다. (그치만

이런 끈덕진 무대책과 무반응이란 건 이 정부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인 것 같다. 요새 강호순 사건으로 용산

참사를 덮으려는 심각한 여론조작을 시도했다는 온갖 심증과 물증에도 일절 언급을 피하는 청와대'꼬라지하고는.')


어느순간 기류가 바뀌었다. 고병권은 그게 6월말 7월초, "80년대식 강경진압을 한번 해봐야겠다"는 경찰 고위직의

말대로 거침없는 폭력이 행사되고 난 후, 각계 종교계인사들이 대거 나서서 '비폭력' 행진을 하면서부터라고 본다.

압도적이고 적나라한 국가 폭력 앞에서 잠시 멈칫했던 시민들의 분노가 채 어떤 모양새를 갖추고 어떻게 분출될지

결정될 그 중요한 시점에 종교인들이 촛불시위대의 지도부 역할을 자임하면서 급속도로 그 분노와 '폭력성'이

사그라들어 버렸다는 거다.


물론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폭력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역사를 움직이는(진전이건 후퇴건)

중요한 동력인 건 틀림없는 데다가, 민주화의 대표적 상징이 되어버린 87년 6월 항쟁이나 80년 광주항쟁 등을 봐도

스스로를 합법화하는 폭력인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폭력은 이번 촛불집회 때의 양상 따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극렬'했던 것이 사실이다.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곳곳에서 무력충돌이 빚어졌고, 그때도 언론들은 법질서

확립 운운하며 떠들었던 터다. 형식적인 민주화가 쟁취되었고 어쨌든 '우리가 뽑아놓은 대통령'이니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글쎄.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종교인'들이란 사람들은, 그 습성상 사람들을 자신들이 구제하고 계도하고 이끌어야 할 '어린양'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마치 그들이 사람들의 아픔을 직접 어루만지고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 짊어질 몫이라며

앞장서서 떠맡고자 한다. 아름다운 마음이고, 감동적인 자세라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지상의 법'이다. 그들이

가진 숭고한 인류애, 희생정신,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의 허물을 보려는 자세,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구도자의

자세..그런 것들은 말이 통하고 눈높이가 맞는 사람에게나 통하는 내용이다. 누가 잘못했고 어떤 현실적 해법을

구해야 할지,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서 조금이나마 그 왜곡을 풀어내야 하는데, 종교인들은 (거칠게 말하건대)

'모두가 죄인'이고 '폭력=죄'란 구도를 순식간에 형성해 버렸다. 노신이 얘기했던 것처럼 물에 빠진 개는 건져

올려봐야 다시 버릇 못버리고 물겠다고 컹컹댈 게 뻔하니, 우선 죽기 전까지 때렷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말도

일리가 있을 텐데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촛불정국이 (단기적으로는) 아무런 성과도 못 남기고 만 상황을 보며 마치 1919년 삼일절 독립만세

운동의 귀추가 오버랩되는 감이 있었다. 훌륭하고 고매한 정신세계를 가진 33인의 '민족대표'란 사람들은 휘황한

문구와 이상적이고 또 그만큼 종교적인 의미와 맞닿는 독립선언서를 쓰고는 채 제대로 낭독조차 안하고서 감옥에

걸어들어간다. 그들의 독립선언서에서 보이는 건 국외의 무장독립운동단체가 써내린 또다른 독립선언서에서

풍기는 피 냄새와 일전불사의 자세가 아니라, 어쩌면 조선인민 내부 회람용이 아닌가 싶을 만큼 자족적이고, 또

타협적인 자세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 '비폭력'을 내세우며 상처입고 버려진 국민들을 종교인들이 끌어안는

순간, 정부를 향했던 촛불들은 어느새 둥그렇게 안을 보고 모여선 캠프파이어가 되어 버렸다.


잘은 모르겠다. 고병권은 간디와 루터킹목사의 '비폭력'투쟁이란 이런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최초 촛불들이 공권력과 '빠이와 꽃병'으로 맞대응하기보다 공권력의 구획과 질서를 희롱하면서 겁먹지

않던 그 때의 분위기가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어쩌면 한층 적나라하고 짐승스러웠던 7월초의 분위기를

넘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쿨하게 그렇게 갈 수 있었다면..비록 자연스레 격한 감정과 액션들이 간헐적으로 분출될

지라도..지레 겁먹고 수위를 통제하려던 것 같았던 데다가 전혀 지엽적이라 느껴지던 폭력/비폭력 논쟁으로

힘을 소진하진 않았을 거 같다.


종교가 현실 세계에 미치는 힘은 여전히 꽤나 크다.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던 맑스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 양면적인 면을 가리키는 표현 아닌가. 잘만 쓰면

효능 좋은 약이지만 잘못 쓰면 사람 병신만드는 게 아편인 게다. 신, 그리고 종교는 어디까지나 지상의 인간들이

보다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만들어진 창조물이라 생각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지 않더라도, 종교적인

위로와 정신적인 고양감만으로는 당장 내 살과 뼈를 발라내겠다고 덤벼드는 아귀들을 막아낼 수 없다는 건

불문가지다.


선종하신 김수환추기경님의 덕성과 고매한 인격을 의심할 바야 없지만, 그 분이 때로 보였던 보수적이거나

양비론적이고 애매한 입장들이 갖는 효과들은 따로 떼어 생각해 보아야 할 거라 생각한다. 그게 어쩌면 종교인에

짐지워진 하나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지 모른다. 하기야, 신의 말씀이라는 성경, 성서, 코란 등등 조차도

정치적으로 읽힐 수 밖에 없고, 또 그렇게 읽혀왔다는 걸 상기한다면, 그 분 역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지도.


앞선 글 : [추방과 탈주(고병권, 그린비)] (이명박) 정부로부터의 '탈주' 선언(1/2)


추방과 탈주 - 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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