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 4점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김영사
 

돌려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조금 맘을 잡고 읽어본 정의란 무엇인가 나부랭.

 

베스트셀러니 어쩌구 하는 책들을 전혀 신뢰치 않기에 좀체 볼 마음이 동하지 않은 채 반년이 지난 셈이다.

 

마침 최근에 방한한 샌델이 스타 대접을 받으며 동시에 각종 찌라시들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면 읽지 않은 채로

 

돌려 줬을지도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본심이다. 책을 읽기 전이나 읽고 나서나, 그런 양면의 거품은 불편하다.



간단한 소감. 이 책은 결국 '성찰'에 대한 책이다. 세사에 대해 신문 찌라시나 일상에 (잘난 척) 횡행하는 단언들과

 

자극적인 타이틀에 절어버린 입맛 앞에 대령하는 수십수백 페이지짜리 각주랄까. 세상사 간단하고 확실한 정답이나

 

규정은 없으며 난망한 이러저러한 면이 있다면서 각종 사례들을 사방으로 뒤채며 보여주고 있는, 그야말로 역시나 교과서다.

 

사고와 성찰이란 건 이런 베이스로 작동한다는 걸 보여주는 대학교 교양섭 기본 강의 수준.


 

예를 들어 최근 술마시고 폭력적으로 변하는 이른바 '주폭' 문제가 갑작스레 부각되고 있는데, 이를 보고 단순히

 

"술을 못 먹게 해야 돼"라거나 "술값을 올리면 돼"라는 처방을 제시하는 게 한국사회다. 심지어 '주폭' 문제를 진단한다는

 

TV 시사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이런 수준에서 과히 벗어나지 않는다. 샌델 식으로 말한다면 어떨까.

 

사회 전반을 짓누르는 높은 스트레스와 불만지수, 저소득층 성인의 유일한 즐길거리, 전반적인 놀이문화의 부재를 살피고,

 

조금 다른 면으로는 '주폭'을 방지하기 위해 술을 막아야 할지 범죄가 발생한 후 일벌백계해야 할지 등등 한없이 뻗어간다.

 

 

그런 수많은 결들이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문제 뒤에 숨어 있다는 것,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따지기 위해선

 

이쪽과 저쪽에 서서 가능한 모든 측면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는 건 사실 일종의 상식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영어 원제가

 

그러한 의미를 함축한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라는 걸 생각하면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좀 '정의'라는 단어를

 

앞세웠다는 느낌이 있다. 그건 한국 사회가 그만큼 '정의'에 목말라있다는 걸 감지한 영리한 상술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사회의 또다른 상식은, '전봇대가 걸리적거리면 불도저를 동원해 깡그리 밀어버리'는 걸 추진력과 유능함으로

 

치부해 왔으니까. 내 판단으로는 성찰을 말하는 이 책 역시 베스트셀러로, 일종의 유행으로 소비해버리고는 저자에 대한 '팬질'을

 

시작해 버린 굉장한 나라다. ('팬질'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대상이 가진 입장과 의견에 대한 숙고 과정과 성찰이 생략되어 버린단

 

점에서 샌델의 메시지와 반하거나 최소한 무관하다.)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화려하고 선정적인 답을 찾을 게 아니라 답찾는 과정,

 

자못 지루하고 고루하며 담백한 그런 입맛을 길러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이런 식으로 소비되는 책이, 우리 사회에 어떤 유익함과 성찰, 자기 반성을 남겼고 남기고 있을까. 2010년 '올해의 책'에 선정되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지 이미 수년이 흘렀는데 여전히 사회 곳곳에는 '정의가 무엇인지' 묻지 않고 따지지도 않은 채 '부자'가

 

되겠다는 야만과 몰상식이 횡행한다.(심지어 자장면 한 그릇 먹는데도 맛있게 먹고 부자되란 말이 복음처럼 전파된다.) 샌델에 대한

 

팬질은 물론이고 나꼼수니 노무현이니 김연아니, 보다 오랜 대상으로는 박정희니 박근혜니 등등 팬질은 거침없이 하이킥중이다.

 

 

 '정의'가 무엇인지 단숨에 밀어붙이고 싶은 열망은 곳곳에서 파열하며 총선과 야권연대를 말아먹었고, 사람들은 '140자'로 표상되는

 

 SNS 시대에 걸맞는 짧고 자극적인 이야기에 열중하는 와중에, 성찰을 말하는 책에 대고 '정의'가 뭔지 말해달라며 개미떼처럼

 

달려들고 말았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유례없이 대히트를 치며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나라의 이야기다. 암울한 세상이다.

 

 

 

 

 

 

 

 

총선이 끝난지도 벌써 한달 가까이 되었지만 여전히 엉망이다.

 

역사에 죄를 지은 민주통합당은 여전히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채 자중지란 중이고,

 

제버릇 개 못주는 통합진보당의 당권파들은 '진보/좌파'에 '종북'의 똥물을 뒤집어 씌우고 있으며,

 

여전히 '쫄지마씨바'를 되뇌이며 모 아니면 도, 우리편 아니면 남의편, 이란 이야기중인 나꼼수도 곁다리다.

 

 

애초 거리의 만담꾼인 그의 인기를 제도정치권에서 어찌해보려 한 민주통합당의 꼼수가 더 문제라고 생각하고,

 

나꼼수 자체는 애초 그랬듯 그저 듣고 즐기는, '정신승리'를 위한 자위 같은 거였다고 생각해서 이야기할 깜도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꼼수 자체가 불러들인 역기능과 폐해도 적지 않은 데다가

 

총선 패배의 일정 기능을 담당한 그의 패거리와 일종의 자극적인 인트로덕션 이상의 기능은 불가능한 그들의 수준을

 

감안하면. 오마이의 이 글이 다소 공격적이다 싶긴 하지만 그다지 틀린 말은 없어 보인다.

 

 

 

 

 

이번에는 나꼼수와 김어준이 틀렸다
[정치 톺아보기] 반MB와 '쫄지마 씨바'는 약발 끝?

 

 

 

서울 대학로 <나는꼼수다>(나꼼수) 카페 '벙커'에 마련된 녹음실.
ⓒ 권우성
나꼼수

 

나는 600만 명이 다운로드 받았다는 인터넷 팟캐스트 방송 <나꼼수>(나는 꼼수다)를 딱 한 번 들었다. 그 뒤로는 한 번도 듣지 않았다. 끊임없이 '사실'에 천착해야 하는 기자로서는 설(說)을 전파하는 공간에서 웃고 즐기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서 나꼼수에 대한 논란이 한창일 때도 나는 논평할 가치를 못 느꼈다. 왜? '개그'니까. 전직 국회의원이든, 정치평론가이든, PD든, 기자든 개그 프로그램에 나온 이상은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든, 그것은 개그일 뿐이다. 개그에 정색을 하고 논평을 하는 것은 모기 잡자고 칼을 빼어든 것만큼이나 우스꽝스런 일이다.

 

개그는 아니지만 증권가 소문을 집대성(?) 해놓은 '찌라시'에도 설이 난무한다. 일부 언론사는 찌라시의 정보를 가공해 돈을 받고 팔기도 한다. 그런데 찌라시 정보의 절반은 나중에 실제 사실로 확인되곤 한다. 찌라시에도 절반의 사실과 절반의 설이 섞여 있는 셈이다. 그 사실과 설을 구별하는 것은 기자의 몫이다.

 

 

'나꼼수'와 '찌라시'의 공통점은 사실과 설의 혼재

 

그런데 나꼼수는 사실과 설이 구별되지 않고 섞여 있다(김어준이 나꼼수에서 전파한 사실 아닌 설들을 여기에 열거하는 것은 지면 낭비다. 설령 그것이 '사실 반, 설 반'이 아니라 '순도 99%의 사실과 1%의 설'을 배합한 것일지라도, 설은 설일 뿐이다. 오히려 99%의 사실 속에 숨긴 1%의 의도된 거짓은 전체를 사실로 믿게 하기 때문에 더 나쁜 거짓말이다).

 

그래서 찌라시에 실린 것에 대해 논평하지 않는 것처럼 나꼼수에 대해서도 언급할 가치를 못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이라는 공론의 장에서 하는 얘기라면 상황이 다르다. 김어준은 최근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나꼼수를 둘러싼 몇 가지 쟁점에 대해 얘기함으로써 비로소 언급할 가치를 느끼게 했다. 그것이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김어준의 상황 인식과 진단은 틀렸다. 김어준의 <한겨레> 인터뷰(우리가 15석 날렸다는 덧씌우기는 진보·보수의 '국공합작', 4월 28일자)를 보면, 그가 중증의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김용민의 출마와 막말 논란에도 사퇴하지 않은 이유, 그리고 선거 패배의 나꼼수 책임론을 방어하는 김어준의 논거는 ① 가카는 모든 일을 주관한다는 '가카 결정론' ②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진영논리와 승리 이데올로기 ③ 만사형통의 '조중동 프레임'의 세 가지다. 그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것이 '가카'(MB)와 박근혜 그리고 '조중동 프레임' 탓이라는 피해망상이다.

 

 

[오류 ①] 가카는 모든 일을 주관한다는 '가카 결정론'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 이정민
나는PD다

우선, 그가 보는 정치-사회 현상의 본질은 일종의 음모론이다. '가카가 매사에 가이드라인을 설정해 주관한다'는 '가카 결정론'이다. 그는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인 최시중까지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데 '쫄지마 씨바'라는 나꼼수의 구호가 여전히 유효한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명박은 박근혜가 자신을 완전히 털고 갈 수 있도록 검찰을 동원해 자신이 죽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는데, 그 안에는 질서정연한 가이드라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검찰이 갑자기 엄정해져서 이명박 측근을 우수수 잡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 순서와 수사 강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 가이드라인을 설정하는 게 바로 이명박이 여전히 갖고 있는 힘이다."

 

나꼼수가 '쫄지마 씨바'라는 애티튜드(태도)를 고수해야 하는 근거로 내세운 것은, 그가 별다른 근거없이 '이명박과 박근혜의 거래' 가운데 하나로 추정한 '가카가 만든 질서정연한 가이드라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어준은 "그런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고 믿는 근거는 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내가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것이다.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고, 나라면 어땠을까 이렇게 바라본다. 다른 사람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인데,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박근혜와 '가카'의 거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방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김어준은 '사람의 마음을 읽는(觀心) 현대판 미륵'?

 

내가 그 사람이 되어보는 것? 어디서 많이 본 '시추에이션'이다. 그렇다. 후삼

국시대 궁예의 '관심법'(觀心法)과 일맥상통한다. 궁예는 자신을 '사람의 마음을 읽는(觀心) 미륵'이라고 칭했다. 중세 암흑시대의 마녀사냥도, 공산주의자를 때려잡던 매카시즘도 같은 이치다. 누구든 낙인이 찍히는 순간, 역도(逆徒)가, 마녀가,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입증하지 못하면 곧, 죽음이다.

 

그는 심지어 김용민의 총선 출마 배후가 누구냐는 질문에도 조금도 망설임 없이 "가카다"고 단정했다. 그는 "많은 이들이 '정봉주가 빠진 뒤~'라고 하는데, 그는 빠진 게 아니라 계속 까부니까 잡혀간 거다"면서 "우리는 그런 가카의 결정을 그냥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요컨대, MB가 정봉주를 잡아가두는 바람에 '제2의 정봉주'(김용민)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과연 그럴까? "계속 까부니까 잡혀간 거"라는 출마의 전제부터가 틀렸다. '가카'는 그의 주장처럼 질서정연한 가이드라인에 입각해 죽은 척하는 게 아니고 이미 정치적으로 사망한 '식물인간'이다. 국정 운영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진 '레임덕 대통령'의 힘이 빠진 근거는 차고 넘친다.

 

이번 선거는 철저히 박근혜에 의한, 박근혜의 선거였다. MB는 이번 총선 비례대표 공천에 단 2명의 후보자를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이봉화 전 차관은 공천위에서 공천이 취소되는 바람에 청와대 몫은 단 한 명이었다(지난 2008년 총선 공천 때는 이정현 의원과 임두성 전 의원 등 2명이 비주류였던 친박계 몫이었다).

 

역대 총선에서 MB처럼 '배제'된 대통령은 없었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MB처럼 총선에서 '배제'된 대통령은 없었다. MB가 건국 이래 치러진 11번의 직선제 대선에서 가장 큰 530여만 표(22.6%P) 차이로 2위를 따돌린 대승을 거둘 때만 해도 임기말 총선 공천에서 청와대 몫이 '단 한 명'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랴? 다 '가카'가 자초한 것인데.

 

지난 2010년 8월 MB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현오 경찰청장을 임명했을 때 이미 후임 경찰청장은 이강덕 당시 부산경찰청장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파다했다. 경찰대 1기 출신으로 '영포 라인'인 이 청장은 실제로 서울경찰청장에 기용됨으로써 차기 경찰청장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MB는 임기말에 쓰려고 아껴놓은 '이강덕 카드'를 쓰지 못했다. 사실상 박근혜측의 '비토'로 인사청문회 통과를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통령이 비례대표 국회의원 한 명 공천하지 못하고, 임기말 경찰청장도 '자기 사람'을 임명하지 못할 만큼 힘이 빠져 있는데도 '가카가 설정한 질서정연한 가이드라인' 운운하는 것은 나꼼수에서나 통용될 법한 '개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번 선거는 철저히 박근혜에 의한 박근혜의 선거였다.

 

그런데도 나꼼수에 대한 탄압을 견뎌내고 고급정보를 얻기 위해 국회의원이라는 울타리가 필요했다는 출마 논리는 구차하기 짝이 없다. 김용민은 자신의 출마 배경을 "'나꼼수' 안했으면 정봉주는 감옥갈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이명박 대통령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 또한 가카가 질서정연한 가이드라인을 설정해 만사를 주관한다는 '가카 결정론'과 맥이 닿아 있다. 자신이 싸우는 상대방에 대한 조작된 공포의 극대화를 통해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특히 김용민이 출마를 결심한 이유를 "국회의원이 되면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나꼼수가 제기해온 여러 의혹들을 좀더 자유롭게 파헤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 데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국회 본회의장을 '개그 콘서트' 장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오류 ②] 남이 하면 불륜, 나꼼수가 하면 로맨스?

 

지난 4월 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나는 꼼수다>(나꼼수)'삼두노출' 번개모임에서 김어준 총수, 주진우 기자, 김용민 민주통합당 노원갑 후보가 팬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다.
ⓒ 권우성
나꼼수

 

김어준의 두 번째 오류는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진영논리와 승리 이데올로기다. 김어준은 막말 파문으로 '뜨거운 감자'가 된 김용민에 대한 사퇴 요구를 수용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극단적 대결 국면에서의 사퇴는 지지층의 정서적 전선을 무너뜨리고 상실감과 열패감을 부른다"면서 "이건 논리적 설득으로 단기간에 만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단언했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금품수수 논란 때 진영논리로 그를 감싼 것에 대해서도 김어준은 "곽 교육감이 저들의 공격을 받아 사퇴했다면 지지층은 정서적으로 무너졌다"면서 "곽 교육감이 사퇴했으면 박원순 후보는 졌다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가설'을 합리화했다. 그의 단언과 자기 합리화의 근거는 이번에도 사람의 마음을 읽는 '관심법'인 것이다(그런 논리라면, 그가 사퇴를 안하고 버티는 바람에 향후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오는 대선에서 서울시교육감 보궐선거도 함께 실시하기 때문에 대선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설도 성립한다).

 

김어준은 조작된 공포의 극대화와 나꼼수의 피해를 강조하기 위해 나꼼수가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된 사건의 형평성과 사찰 및 도청 의혹을 연관지어 제기했다. <한겨레>에 따르면, 그는 선관위 고발을 탄압으로 받아들이냐는 질문에 "나꼼수 진행자는 민간인 사찰의 직접적 대상이었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또 "우리의 전화가 도청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나꼼수에서 뱉은 '이바구'처럼 의혹일 뿐, 확인된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서울시 선관위는 4·11 총선기간인 4월 1일부터 10일까지 8차례에 걸쳐 민주당 정동영 후보와 김용민 후보 등 특정 후보를 대중 앞에서 공개 지지하고, 대규모 집회를 연 혐의로 김어준과 주진우 <시사인> 기자를 검찰에 고발했다. 선관위의 고발 취지는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언론인이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선거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김어준은 인터넷신문 <딴지일보> 발행인이고 주진우는 현역 기자 신분이므로 형식논리로는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언론인'이 분명하다.

 

그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우리는 우리가 해야만 한다고 믿은 일을 했지만 선관위는 당연히 했어야만 하는 일을 다하지 않았다"면서 "선관위가 공정했다면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과 손수조 후보의 카퍼레이드나 새누리당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해 놓고 마지막 순간까지 박근혜 위원장을 편드는 논설을 내놓았던 (이상일) 중앙일보 논설위원의 문제를 지적했어야 한다"고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통상적인 정당 활동을 할 수 있는 정당의 대표자와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언론인'인 자신의 행위를 동등 비교한 것은, 이른바 '나꼼수 삼두노출' 카퍼레이드에서 짐작할 수 있듯, 박근혜와 자신을 '동급'으로 보는 착각이다. 또 그의 지적처럼 '친박' 성향인 이상일 논설위원이 박근혜를 편드는 논설을 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해 놓고 그런 논설을 쓴 것과, 그런 논설을 쓴 뒤에 비례대표 제의가 들어와 응한 것은 차이가 크다. 내가 아는 바로는 이상일은 후자다.

 

정봉주 수감이 MB 뜻이라면 곽노현과 한명숙은 어찌 설명하나?

 

'개그'의 장에서는 사실이 아닌 설과 거짓을 전파해도 명예훼손을 피해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국회의원 강용석이 '개그 콘서트'에서 자신을 풍자한 개그맨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것은 '초절정 코미디'였다. 그런데 설과 거짓이 '개콘'이 아닌 언론이라는 공론의 장으로 나오는 순간 달라진다. 물론 나꼼수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는 자신이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언론인' 신분임을 알면서도 광장과 공론의 장으로 나와 선거운동을 했다. 그런데 실정법 위반 사실을 인지하고서도 선관위 고발을 정치적 탄압이라고 주장한다. 김 총수는 차라리 언론인의 선거운동을 금지하는 '악법'과 싸우기 위해, 다른 언론인들처럼 숨어서 선거운동을 하지 않고 내놓고 했다고 떳떳하게 주장했어야 했다.

 

지난 2002년 <오마이뉴스> 사례를 소개하면, 오마이뉴스는 당시 대통령 후보경선을 앞두고 민주당 경선후보 초청 토론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선관위는 인터넷신문은 정기간행물법상의 언론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후보들의 토론회 참석을 선거법 위반이라며 막았다. 이 때문에 토론회에 참석하려던 노무현 후보가 두 번이나 발길을 돌리는 해프닝이 벌어졌지만, 오마이뉴스는 <주간 오마이뉴스>를 창간해 정간물로 등록함으로써 <주간 오마이뉴스> 주최로 토론회를 개최하는 편법으로 선거법 장벽을 돌파했다.

 

'@bbk_sniper'라는 트위터 계정처럼 지난 대선 당시 'BBK 저격수'로 맹활약한 정봉주 전 의원도 마찬가지다. 당시 한나라당측은 BBK 의혹 사건과 관련, 정봉주 의원과 박영선 의원 그리고 정동영 대선후보 등 6명을 선거에 영향을 주기 위해 특정 후보에 대한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선거법 위반)로 고소했다. 그중에서 정봉주만 기소되어 유죄가 확정된 데는 가장 앞장서 정권에 밉보인 탓도 있지만, 그만 혼자 앞장서 검찰에 출두해 진술조서를 받은 탓도 있다.

 

대선 이후 한나라당은 고소-고발을 취하했고 이명박 대통령도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서면으로 검찰과 법원에 제출했다. 이에 따라 검찰의 공소장 변경이 이뤄져 명예훼손 부분은 빠졌지만, 1, 2심 재판부는 허위사실 유포(선거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했다. 대법원 상고심도 결론은 같았다. 대법원이 이 사건을 3년 6개월 만에 판결한 것은, 불기소되거나 무죄를 받은 다른 BBK 피고소인들과의 형평성 문제로 고민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꼼수는 이런 과정과 사정을 생략한 채 대법원의 확정 판결에 따른 수감을 MB가 마치 사법부까지 장악해 나꼼수를 탄압한 것으로 호도했다. 그것은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진영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사법부가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하면서도 곽노현 교육감을 법정구속하지 않은 것이나, 검찰이 두 번이나 기소한 한명숙 전 민주당 대표에 대해 두 번 모두 무죄를 선고한 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오류 ③] 나꼼수 책임론은 '조중동 프레임'?

 

제19대 총선을 하루앞둔 지난 4월 10일 오후 서울 노원구 공릉역 부근에서 열린 팟캐스트 방송 <나꼼수> 출신 김용민 민주통합당 후보 유세에서 김 후보가 'V'를 만들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 권우성
김용민

 

김어준의 세 번째 오류는 나꼼수를 비롯한 진영 논리론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조중동 프레임'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어준도 김용민의 막말 논란과 나꼼수 책임론을 '조중동 프레임' 탓으로 돌렸다.

 

김용민 막말 논란이 선거에 미친 영향이 가장 컸다는 지적을 반박하는 근거로 그가 내세운 것은 여론조사 공표금지 기간(D-6) 중에 매일 전국 유권자 7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리얼미터 조사결과다. 이 조사결과에 따르면, '막말 파문'이 김용민 지역구(서울 노원갑)와 비례대표 정당 지지율에 다소 영향을 미쳤지만 전국 지역구 후보의 지지율에는 변동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김용민 막말 논란이) 1~2위에 등장하는 사후 여론조사는 많이 봤지만 그건 결과에 맞춰 거꾸로 원인을 추론하는 것에 불과하다"면서 이렇게 반박했다.

 

"리얼미터처럼 최종 1주일치 여론조사 결과를 제시하는 것도 없이 '나꼼수 때문에 15석 날아갔다'는 식의 주장은 조중동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을 그대로 받아먹은 결과 야권 패배의 책임을 나꼼수에 덧씌우기 위한 일종의 국공합작이 이뤄졌다."

 

요컨대, 선거일 사후 여론조사는 믿을 수 없고 사전(D-6~D-1) 여론조사에 근거하지 않은 '나꼼수 책임론'은 '조중동 프레임'을 그대로 수용한 보수와 진보세력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전국 단위 정당 지지도 조사(표본조사 대상 750명을 전국 246개 선거구로 나누면 지역구마다 평균 3명꼴로 설문에 참여한 셈)를 근거로 개별 선거구에 영향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설이 아니냐는 지적에 그는 "그게 왜 가설인가. 데이터인데"라고 반박했다. "나꼼수의 총선 책임론을 인정하지 않는 건가"라는 질문에는 "인정할 수 없는 게 아니라 그건 사실이 아니고 틀린 거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이번엔 김어준이 틀렸다. 그가 잊고 있는 중요한 전제는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라는 민주주의 선거의 4대원칙이다. 이를테면 공개투표가 아닌 이상, 세대별 투표율은 알 수 있지만 세대별 지지율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장 출구조사나 사후 여론조사로 근사치를 추정할 뿐이다. 그런데도 사전 여론조사(리얼미터)는 '데이터'이고 사후 여론조사는 '가설'이라는 주장은 궤변이다.

 

게다가 한겨레의 지적처럼, 김용민 막말 논란이 선거에 미친 영향을 직접적으로 물어본 사전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선거학회-YTN이 공동으로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여론조사(D-4~3일, 전국 성인남녀 1500명 대상)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36.7%가 김용만 막말이 영향을 미쳤다고 응답했다. 영향을 받았다는 응답자는 상대적으로 고연령층(44%)과 보수층(43.5%)에서 더 많았다. 김용민 변수가 새누리당 지지층의 결집을 가져왔다는 뜻이다. 이는 '조중동 프레임'이 아니고 '민심의 프레임'이다.

 

▲ 총선에 영향 미친 이슈 리얼미터의 사후 여론조사(D+1, 전국 성인남녀 750명)에서도 4.11 총선에 지지후보를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이슈는 '막말 파문'이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 리얼미터
4.11총선

 

심지어 리얼미터의 사후 여론조사(D+1, 전국 성인남녀 750명)에서도 4·11 총선에 지지후보를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이슈는 '막말 파문'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리얼미터가 선거 다음날 총선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이슈에 대해 물어본 결과, '막말 파문'(22.3%)이 1위였고, 그 다음은 경제 민주화 공약(16.1%), 민간인 불법사찰(14.9%), 한미FTA 폐기논란(10.7%), 야권 여론조사 조작파문(9.7%), 북한 로켓 발사준비(5.1%), 제주해군기지 건설 논란(3.7%) 순으로 나타났다. '가설'이 아니고 '데이터'다.

 

응답자 특성을 보면, 이 조사에서도 일관된 여론의 흐름이 엿보이는데, '막말 파문'의 영향은 연령별로는 40대 이상 중장년층, 지역별로는 서울(30.1%)과 대전/충청(30.3%), 지지정당별로는 새누리당 지지층, 이념성향별로는 보수층과 중도층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반대로 '민간인 불법사찰' 이슈의 영향은 30대, 호남, 민주당 지지층, 진보층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막말'은 새누리당 지지성향 유권자를 결집시켰고, '불법사찰'은 민주당 지지성향 유권자를 결집시켰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자기 진영에 유리한 데이터만 인정하고 불리한 데이터는 배제하는 것은 전형적인 진영 논리다. 김어준과 나꼼수는 범진보 진영의 소중한 자산이다. 정치에 무관심한 20대의 눈길을 정치에 돌리게 한 '치어리더'로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당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어준이 틀렸다. 방송 1주년을 맞이한 나꼼수의 '반MB'와 '쫄지마 씨바'는 약발이 많이 떨어졌다. 김어준과 나꼼수가 또 다른 기발한 '개그'로 대중을 즐거운 정치참여의 길로 유혹하는 '삐끼'가 되길 바란다.

 

 

 

 

#1. 은근과 끈기가 미덕인 나라라서 그런가. 새누리당의 선전과 낮은 투표율은, 민통당의 삽질과 기타등등에도 비롯하고

 

결국 이 나라의 수준을 보여준다. 그래도 진보신당은 살아남길 바랬는데.

 

 

#2. 가장 큰 승리자는 MB, 그리고 박근혜. '이명박근혜'란 단어가 승인받은 셈이니까. 박근혜 대통령여왕폐하가 강림하시겠구나.

 

 

#3. MB 4년차에 이런 결과라는 건, 지금이야말로 절망할 때라는 거다. 애써 괜찮은 척 '새누리당의 승리가 아니라 민주당의 패배'

 

라느니 따위 말장난하지 말고. 승리한 새누리당과 죄씻김받은 MB의 강고한 지지층에 절망하고, 또 반대편의 오합지졸 세력들과

 

여러모로 제한적인 그 지지층에 절망하고.

 

 

#4. 패배에 대한 귀책사유를 여기저기서 찾나본데, 아직 그 '패배'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공약수조차 찾지 못하겠다.

 

선거가 끝나도록 '반MB' 이외의 공약수를 키워내는데 실패한 야권의 무능은, 사실 그 역사가 길고 오래다.

 

 

#5. 말뿐인 '반MB' 구호의 거품이 걷혔다. 누구나 씹고 다니는 게 유행이던 껌조각이 공급과잉에 이르자 일부는 그에

 

음모론과 집단주의를 짬뽕시켜 더욱 자극적인 껌이나 팔고 다니다가 금배지 줏어먹을 뻔하고.

 

 

#6. 분명한 사실 하나, 연초만 해도 새누리당은 굉장한 위기감에 휩싸였었다는 거. 뭐 하나 제대로 해명하고 책임진 것도 없이

 

4/11이 왔는데, 심지어 계속 악재가 있었음에도, 그들이 과반수를 넘보는 제1당으로 건재하다는 건..지금은 절망할 때란 거다

 

 

#7. 김용민 패배와 기타 이슈에 대해 언론의 노골적 편향을 문제삼기도 하지만, 애초 그가 세습받은 공천이 원죄.

 

거리의 재담꾼이 얻은 인기를 선거에 그대로 가져다 쓸 수 있겠다 여겼던 얄팍한 계산 혹은 무개념 역시.

 

 

#8. 나꼼수가 스마트폰처럼 사람들을 감각적이고 '스마트'하게 만들어 성찰하고 숙고하는 힘들고 난망한 정공법을 기피하게

 

만들었다면, 민통당과 통진당은 스마트하지도 못한데 각자의 정공법을 대중에게 한목소리로 전달하는데 철저히 실패했다.

 

각자의 정공법이 애초 있는지도 의문.

 

 

#9. 이토록 대안없는 민통-통진당 연대에나마 표를 준 사람들의 갑갑함과 열망을 봐서는 그들 지도층에 분노가 치밀고,

 

이토록 대안없는 정당만 짝사랑하며 진보신당이나 녹색당이 표를 주지않은 그들 '보수적인' '진보'지지층에 분노가 치미는 거다.

 

 

#10. 박근혜 대통령여왕폐하가 납실 거 같다. 빨간당과 '이명박근혜'의 견고한 지지층에, 무능하고 무기력하며 배부른

 

민통당-통진당 지도층에, 대안도 못내놓는 그들만을 짝사랑하는 민통당 지지층에, 그리고 투표조차 나서지 않게 되어버린

 

뿌리깊은 무기력과 냉소에 절망해버렸다.

 

 

#11. 더 짜증나는 건, 박그네가 우야튼 현 정치인들 중 대중에 소구하는 정치적 감각이 돋보이고 있다는 점. 단순히 애비의

 

후광만은 아니란 거다. 그 와중에 투표율도, 투표결과도 모든 게 이지랄인데다가, 대안이 될 진보신당이나 녹색당은 해체..

 

 

#12. 투표결과가 51:49던 99:1이던 이긴 자가 국회에 입성한다. 이제 4년간은 이 결과로 만들어진 국회가 굴러갈 텐데, 이런

 

상황에서 야권이 대통령을 만들어낸들 얼마나 뭘 할 수 있을까. 만들어내봐야 노무현의 내외적 한계가 그대로, 혹은 그이상일 텐데.

 

 

#13. 4년간 누적된 MB에 대한 피로감과 반발심을 날려버릴 정도로 무능력하고 무기력했던 야권. 역사에 죄를 짓는다는 건

 

아마도 이런 걸 말하는 거다. 청와대는 '국민들의 현명한 선택'을 환영하고 나섰다.

 

 

 

 

 

 

 

시뻘겋구나. 이제 박근혜 대통령여왕폐하 취임식만 남은 거 아닐까...

 

어제 출구조사 발표 때부터, 아니 그전의 미미한 투표율을 체크할 때부터 예감했던 결과지만 여전히 멘붕.

 

멘붕을 이기지 못하고 오전내내 북한땅을 뻘겋게 칠하면서 멍하니 보내버렸다.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

여러분이 <진보신당>입니다

13000개의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이 시대의 시지프스들에게 띄우는 편지

“시지프스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이 돌아오는 동안이고 멈춰 있는 동안이다. 바로 바위 곁에 있는 기진맥진한 얼굴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인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거운, 그러나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끝도 알지 못하는 고뇌를 향하여 다시 내려가는 것을 본다. 그의 고통처럼 어김없이 되돌아오는 휴식 시간, 이 시간은 의식意識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소굴로 차츰차츰 빠져 들어가는 순간마다, 그는 자기의 운명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알베르 까뮈, 《시지프스의 신화》 중에서


뒤늦은 새해편지

당원 동지 여러분.


설 연휴가 지난 지도 오래고, 2월도 중순을 넘어가고 있으니 새해인사를 전하기엔 새삼스런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본디는 ‘신년사’라는 걸 통해 동지 여러분께도 말씀을 건넬 계획이었습니다. 오래된 관행도 그렇고, 새해의 첫걸음을 응원하고 희망어린 비전을 제시하는 게 마땅한 도리라는 사람들의 권고도 있었지요. 어느 해인들 그렇지 않은 때가 있었겠습니까만, 너나할 것 없이 강조하는 2012년의 중요성 때문에 더욱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숙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저는 신년사라는 말이 싫었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순간 과장되고 거짓된 말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무렵, 이른 아침 집을 나와 경의선 기차역까지 걷는 동안 문득 신년사를 편지글로 고쳐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밤에 쓴 편지를 아침에 다시 읽지 말라”고 어느 시인이 말한 적이 있지요. 결국은 못 부치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 경구를 이번에는 잊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절망이든 희망이든, 저는 제 속에 깃든 진심을 차라리 드러내는 쪽을 선택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늦은 밤에 쓴 이 편지를 아침에 읽지 않은 채 여러분께 곧장 띄웁니다.



시지프스를 떠올리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거나 그 반대인 시대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 너도나도 ‘위기의 시대’를 입에 올리지만, 하나의 위기가 지나고 나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의 범주는 급속히 좁아지고 불행을 감내해야할 사람들의 그것은 같은 속도로 확대되어왔습니다. 23년 만에 영구 귀국한 2002년 1월로부터 지난 10년 동안 그 격차라는 것이 이 정도까지였나 하는 점을, 고백컨대 저는 최근에서야 비로소 깊이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11월 당대표가 되고 나서 3개월 동안 저의 일상을 중요하게 차지한 것은 불안정 노동이라 부르는 비정규 노동자들,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의 투쟁 집회 현장을 찾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3개월 동안 다닌 곳이 지난 10년 동안 갔던 곳보다 많지 않을까 싶네요. 그냥 다닌 게 아니었습니다. 발언 순서를 기다리면서는 왜 그리 긴장되는지, 또 마이크 앞에서는 다른 분들처럼 큰 목소리로 자신 있게 외치지 못하고 자꾸만 허둥대는 자신이 또 얼마나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세상에 이리 많은 싸움이 있는데, 세상은 왜 이리 조용한가를 생각하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이 길고 지루한 싸움의 끝을 대체 누가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요? 네 번의 겨울을 맞으며 1500일 가까이 싸우고 있는 재능교육 선생님들의 거리농성장을 찾던 날이었습니다. 이 막막하고 외로운 싸움을 목도하고 나오면서 저는 문득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를 떠올렸습니다. 산꼭대기까지 무거운 바위를 끝도 없이 되풀이해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 ‘그래서 어쩔 건대?’라는 자본의 비정한 얼굴에 맞서 부르튼 두 손으로 기약 없이 바위를 굴려야 하는 부조리한 운명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이 어찌 이분들뿐이겠습니까 마는.


그러다 또 문득 저는 진보신당 당원 동지 여러분을 생각했습니다. 다른 이들이 하루아침에 뒤로 하고 떠난 당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는 여러분이 바로 이 시대의 시지프스가 아닌가요? 냉소와 무관심과 외면에도 불구하고 두 팔을 뻗어 당을 지탱하고 다시 산 아래로부터 가파른 산비탈을 기어오르고 있는 우리의 운명이 시지프스의 그것 아닌가요?


1% 대의 지지율, ‘통합’이란 이름표를 단 야당들의 틈바구니에서 소외된 원외정당의 설움, 언론의 외면, 고집불통이란 딱지, 명망 정치가들이 남기고 간 부정적 유산과 상처, 무정한 옛 동지들에게 ‘진보(신)당’이란 이름마저 도용당하는 비애, 이당 저당 가릴 것 없이 ‘좌클릭’이요 진보를 자처하는 현실, 조합원들의 민주적 선택권을 몰수하여 3자통합당에 대한 변형된 배타적 지지방침을 관철시키려는 민노총에 대한 울분……. 기나긴 지난 1년여의 통합논쟁으로 지치고 힘겨워 주저앉은 당원들과 지역당협이 적지 않다는 소식을 듣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왜 여기에 남아있는 것일까요?



자존감自尊感에 대하여


당원 동지 여러분.


13000개의, 저마다의 바위를 밀어 올리고 있는 바로 여러분이 이 시대의 시지프스들입니다. 알베르 까뮈처럼,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고도,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해야만 한다”고도 차마 지금은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여러 글에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기에 우리가 가야 한다.” 이 말도 지금은 잠시 유보해 두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 한마디는 반드시 해두고 싶습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제 <진보신당>입니다. 우리에겐 13000 개의 진보신당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선 ‘정치적 자존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문명 자체의 위기가 눈앞에 전개되는 상황에서 정작 자본주의 이후를 대비해야할 진보정당은 소멸의 위기에 처한 슬픈 역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여도 야도 ‘좌클릭’이 유행인데 우습게도 왼쪽에 있던 사람들마저 몸은 ‘우클릭’하는 이 역설의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요?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이 어처구니없는 자기분열의 시대에 그저 목이나 어루만지며 안심하자는 이야기는 물론 아닙니다.


정치 혹은 정당은 자신의 정치적 자존감에 존립합니다. 자존감은 우선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요동치지 않고 자기정체성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에 대해 끊임없는 확인하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누구인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물음을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질문이 누락된 정당은 누군가의 말장난처럼 ‘가설정당’일 수는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당일 수 없습니다.


정치가 자존감이 아니라 수數나 세勢에 존립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흩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진보신당 13000 당원들은 불가사의한 존재들로 보일지 모릅니다. ‘끝없는 패배’가 두려운 이들에게 정치적 자존감이란 것은 그저 던져버리고 달아나고픈 거추장스런 시지프스의 바위로 비쳐졌을지 모릅니다. 두 가지의 아주 다른 길이 있는 것입니다. 산꼭대기만을 쳐다보다 바위를 버리고 달려가는 ‘상층연합’의 길이 있는가하면, 바위를 밀어 올릴 때나 바위를 찾기 위해 산 아래를 향해 걸을 때나 묵묵히 자신의 발끝이 향하는 길을 보고 걷는 ‘하층연합’의 길이 있습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 가운데는 제가 당대표가 된 직후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진보신당 당원들과 저의 힘겨운 노력이 실패한다면 우리는 즉시 ‘하방下放’을 선택하여 새로운 진보정당의 밀알이 되겠다는. 처음부터 패배주의로 시작하느냐는 지적도 없지 않았습니다만, 사실은 이것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1926년 <리용 테제>를 떠올리며 했던 말이었습니다.


한때 사회당(PSI) 좌파의 지도자였던 무솔리니의 파시즘의 광풍 앞에서 반半합법적 존재로 탄압받으면서 궤멸의 위기에 처한 이태리 공산당(PCI)은 자국 내에서 당대회를 열지 못하고 프랑스 리용으로 당원들을 소집하지요. 그람시는 이 당대회의 테제에서 5만 당원에게 ‘하방’을 명령합니다. “북부의 노동자와 남부의 농민을 조직하고 그들의 혁명적 동맹을 공고화하라”는 이 테제에 따라 당원들은 민들레 씨앗처럼 공장으로 농촌으로 학교로 퍼져나가 삶의 근거지마다에서 진지를 구축하지요. 그리고 파시즘의 몰락 이후 당은 50만 당원을 가진 서유럽 최대의 대중적 좌파정당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동지 여러분.


벌써부터 머지않아 다가올 4월 총선에서 진보신당이 살아남을 것인가 해산될 것인가를 놓고 말들이 분분합니다. 진보신당의 존재가 자신들의 뒷덜미를 잡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간절히 희구할지도 모르지요. 여기에 판돈을 걸어야 한다면 아마도 후자 쪽에 수북이 쌓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패배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어렵게 존속시키려던 당은 해산되고 우리는 다시 시지프스처럼 산 아래로 무거운 발걸음을 다시 옮겨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민들레가 뿌리째 뽑혀도 갓 털을 단 씨앗들이 흩어져 큰 숲을 이루듯, 당이 해체되고 진보신당이란 이름이 사라져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13000개의 진보신당으로 남아있다면 머지않은 시간에 13만의, 130만의 진보정당이 출현할 것입니다. 그람시는 감옥에서 병사했지만, 그의 두뇌를 20년 간 작동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호언하던 파시즘 권력은 사라졌어도 그의 《옥중수고》를 우리가 지금 읽고 있습니다.


어떻게 져야 할까요? 아니면 어떻게 이겨야 할까요? “싸움은 승리를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시라노>의 유명한 마지막 대사입니다.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13000개의 진보신당’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면, 총선이라는 한 번의 전투에서의 승리와 패배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의 씨앗과 한 알의 밀알에 우주가 있듯이, 여러분이 각각의 존재가 진보신당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이것이 자존감의 두 번째 비밀입니다. 씨앗과 밀알이 썩어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에서 보듯이, 자존감은 ‘자기다움’에 대한 치열한 물음이자 ‘자기해체’를 무릅쓰는 용기입니다. 이 두 가지는 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다움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자기해체의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새로운 진보정당을 위한 지난한 진보좌파연석회의의 과정은 바로 이 ‘찾기’와 ‘만들기’의 동시적 진행과정입니다. 우리가 우주를 품고 있는 밀알의 자존감이 있다면 무엇을 주저하고 무엇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이번 임시당대의원대회의 주요 안건 가운데 하나인 사회당과의 통합문제도 그렇습니다. 긴 시간을 자본주의 극복을 위해 분투해온 사회당과의 통합은 총선에서의 유·불리를 따지는 사고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사안입니다. 그것은 정체성이 유사한 이웃 당은 소외시키면서 어제까지 한 지붕 아래 있을 수 없다던 정당과는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손을 잡는 정치공학을 끝내고 이제 자존감의 정치를 시작하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는 실천이며, 보다 넓은 진보좌파정당 건설로 나아가는 정치조직의 자기정비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창당을 모색하는 녹색당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유와 성장과 소비가 미덕인 시대에 이 지배적이고 주류적인 가치와 씨름해온 생태주의자들은 또 다른 시지프스들입니다. 오늘의 신자유주의 교리와 자본의 독재가 강요하는 삶이 결코 ‘올바르지도’ 않고, 앞으로 온전히 ‘가능하지도’ 않은 것이라면 자본주의 극복에 있어 좌파와 녹색은 전략적 동맹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보수는 물론이고 진보까지도 사로잡아온 ‘성장의 신화’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우리에게는 과감한 자기해체의 모험과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녹색과 좌파가 서로의 보완재로 보지 않고 내적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가치의 연대’가 이 시대 한국의 진보좌파 앞에 놓인 가장 중차대한 숙제라고 인식된다면, 우리는 좀 더 담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겸허하고 섬세한 선거연대를 시도하되, 일시적인 비대칭성이 주는 난관 때문에 비관하지 맙시다. 시간문제일 뿐 ‘녹색좌파’의 새로운 전망은 기어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할 것입니다.


배제된 자들의 서사전략


불과 얼마 전까지 평당원이었던 사람이 당대표의 역할과 업무를 파악하기에도 석 달이라는 시간은 넉넉지 못합니다. 그런 제게 총선과 대선이 있는 이 2012년의 초입은 일찍이 통과해 본 적이 없는, 캄캄한 입을 벌리고 있는 긴 터널의 입구에 서있는 것 같아 현기증이 느껴질 지경입니다.


금융자본주의의 위기에다 이명박 정권의 실정까지 겹쳐 어수선한 정국에서 집권 보수세력의 재집권이 어려워지고 자유주의 야당으로 정권교체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야당의 총선 승리와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 2013년 이후의 미래가 밝을 것으로 이야기하는 지식인들도 있지만, 그러나 그이들의 말처럼 그런 상황이 노동자들의 처지에, 진보정당의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예컨대 세계적 차원의 경제위기가 거대한 파고로 밀려올 때 수구적 보수세력인 새누리당만이 야당인 상황이 우리 사회에 유리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람시는 파시즘을 가리켜 “사라져가는 옛것을 대체할 새로운 것의 출현이 지체되는 위기 국면에 등장하는, 다양한 병적 징후들” 가운데 하나로 규정한 바 있지요. 과거 어설픈 당근과 가혹한 채찍 사이에서 사회적 격차가 오히려 고착되었던 이른바 ‘민주정부 10년’ 동안처럼 자유주의 정권 주도의 위기관리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 파쇼적 상황이 도래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지요. 거듭 강조하지만, 진보정당은 그러한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고 말한 이도 그람시였지요. “선장은 배가 난파되었을 때 자신의 배를 떠난 최후의 사람이 되어야 하며 다른 모든 사람들이 무사하게 된 후에만 배를 떠날 수가 있다”고 말한 이도. 기억들 하시는지요? 여러분께 드리는 첫 인사글 말미에 “두려운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의미 없는 고통”이라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제가 인용했던 것을. 부조리한 운명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 시대의 시지프스들을 떠올리며 그때의 그 말을 다시 반추해 봅니다. 고통과 번민에서 곧바로 어떤 의미든 찾고자 하는 것, 이것은 아마도 의미 없는 고통을 하루하루 끝도 없이 이어가야 하는 이들의 삶에 오래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던 지식인적 사고가 지닌 허영 아니었나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집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눈물은 아래로 흐르고 숟가락은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천하를 논하는 ‘큰 정치’가 따로 있고, 삶의 고통을 다루는 ‘작은 정치’(혹은 민생 정치라 부르는 것)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큰 정치’에서 말해지는 희망을 위해 목전의 삶의 불행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면 그것은 다만 거짓일 뿐입니다.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숟가락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래로 흐르는 눈물을 감추어야 하는 사람들의 생존의 최전선에서, 아래로 전가되는 불행의 크기를 가늠하고 그로부터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진보정치여야 한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에 대응하는 ‘아래로부터의 연대전략’입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


여러 경로로 이야기한 바 있지만, 저는 우리 당의 비례대표전략을 <배제된 자들의 서사 전략>이라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억압당하고 묵살되는 것은 물론이고 대기업 노조 중심의 노동조직으로부터도 소외되거나 외면당해온 ‘배제된 노동’을 비례후보의 전면에 내세우고 이들이 만들어온 삶과 사랑과 투쟁의 서사를 무기로 이 시대의 자본권력과 지배이데올로기와 싸우는 것을 이번 총선의 중심전략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번 총선은 진보신당이 맞이했던 다른 어느 때보다 가혹한 조건에서 치르는 선거가 될 것입니다. 명망정치인들이 다 빠져나간 자리에 이제 무명의 척탄병들이 서 있습니다. 초라한가요? 패배가 너무 불 보듯 빤한가요?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당의 지역후보가 13000명이라면? 무명의 척탄병들 옆에 13000명이 나누어 선다면? 그렇다면 이번 선거가 이 시대의 난장이들과 시지프스들이 오만한 권력과 물신을 향해 돌멩이들을 쏘아 올리는 싸움의 장, 축제의 장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으시는지요?


여러분이 <진보신당>입니다. 우리 자신이 지닌 가능성을 미리부터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축소시키지 말아주십시오. 그저 부조리한 운명에 순응하는 존재로 여겨지던 시지프스는 까뮈를 통해 끝없이 패배하면서도 운명에 저항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위대한 존재로 재해석되었습니다. 그가 주목했던 것은 시지프스가 떨어진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려는 순간이고, 고뇌에 찬 얼굴로 잠시 정지한 시간입니다. 그것은 운명을 응시하는 시간이고 운명을 밀어 올림으로써 운명보다 한 뼘씩 우위에 서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알베르 까뮈로 편지를 시작했으니 그가 《시지프스의 신화》의 첫머리에 쓴 구절로 끝을 맺겠습니다.


오! 나의 영혼아,

불멸의 삶을 애써 바라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남김없이 다 살려고 노력하라!


진보신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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