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갈맷길, 광안리해수욕장을 따라 이어지는 그 길로 무턱대고 걸었다.

 

조각배들이 허연 배를 뒤집어깐 채 넘어가는 석양을 쬐던 시간대.

 

벌써부터 한낮의 열기를 품고 뜨거워진 모래사장에 새겨진 누군가와 누군가의 사랑, 곳곳에서 파도를 기다리는 하트다.

 

 

하나둘 광안리 저너머 회센터 건물들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발포성 아스팔트가 부어져 푹신거리는 산책로 한켠에는 이런 벽화가 그려져 있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어느 벽면에 엉성하게 그려진 계단을 따라 시선을 자박자박 올려보니

 

두 개의 불빛이 있었다. 몇층인지 아파트의 창문 하나에서 새어나오는 불빛, 그리고 비슷한 높이의 갸름한 달빛.

 

 

저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어디를 향해 도약해야 하는 걸까.

 

요리조리 따져보며 사진을 찍어보던 중에도 시시각각 치솟아오르던 초승달, 아무 선택도 내리지 못했는데

 

어느새 달빛 혼자 저만치 올라가 버렸다.

 

 

 

찜사쪼이 쪽에서 센트럴을 바라볼 수 있는 해변 산책로, 스타 페리를 탈 수 있는 선착장 바로 옆에는 2층짜리

 

뷰잉 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월, 수, 금의 저녁 8시가 될 무렵이면 데크 위는 물론이고 해변가에 온통 몰려나온

 

사람들은 센트럴의 고층빌딩들이 밝힌 불빛을 홀린 듯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8시, 정각이 되면 건물 곳곳에서 소리 없는 폭죽처럼 쏘아올려지는 레이저 불빛 조명과 함께 스피커에서는

 

음악과 알아듣기 힘든 내레이션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덩달아 바빠지는 사람들의 손놀림은 덤이다.

 

완짜이 쪽에 있는 홍콩 컨벤션엑시비션 센터. 서울 삼성동의 코엑스나 비슷한 기능을 맡은 건물이지만 모양새나 입지가

 

천양지차다. 바다에 접해 있는 그럴 듯한 모습하며, 화려하게 번쩍거리는 조명을 두른 모습하며.

 

 사방에서 쏘아올려져 어지러이 허공을 노니는 레이져 불빛들, 그 와중에도 빅토리아항 앞바다를 가르는 조그마한 배들.

 

 

 

 이런 깜찍하고 귀여운 디자인의 배도 통통거리며 홍콩의 화려한 밤 풍경에 한 몫을 더한다.

 

약 15분여의 '심포니 오브 라이트' 쇼가 끝나고 나면 일순 정적에 휘감기는 해변, 그렇지만 반대편에 우뚝 솟은 건물들은

 

여전히 번쩍번쩍 건물 실루엣을 따라 불빛들을 흘려내리고 흘려올리는데 여념이 없다.

 

 

쇼가 끝나고 난 뒤 송곳 하나 꼽을 틈 없던 뷰잉 데크엔 몇몇 사람만이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가 했더니 어느 순간 떠오른 초승달, 조금은 차분해진 홍콩 야경에 운치를 더하러 납셨다.

 

 

 

 

 

이 IFC 건물 위에는 잘 보면 자동차 한대의 형체가 숨어 있다. 헤드라이트 한 쌍, 본넷과 그릴, 유리창틀까지.

 

2003년 완공되었다는 이 88층 빌딩의 높이는 420m, 현재 홍콩 최고의 빌딩이자 세계 7위의 빌딩이라고 한다.

 

대나무를 모티브로 했다는 비대칭 삼각형의 중국은행 건물. 파리 루브르박물관의 유리 피라밋을 설계한 사람의

 

작품이라던가, 불빛들이 현란하게 건물의 아래위를 훑어내리는 통에 눈길이고 마음이고 쏙 뺏겨 버렸다.

 

그리고 찜사쪼이의 해변가를 지키고 서있는 시계탑. 아래의 정방형 연못은 왠지 워싱턴의 그것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일렁이는 실루엣과 불빛 조명들은 제법 그럴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Symphony of Lights' 쇼를 위해 바삐 움직이며 사방으로 조명을 흩뿌리던 녀석들.

 

그렇게, 기백장의 사진을 찍고도 제대로 된 사진 하나 건지기 힘든 홍콩의 야경 사진.

 

언제나 그렇듯 삼각대는 챙겨놓고도 정작 필요할 때는 쓰지를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冬 夜
黃景仁(淸)

텅 빈 집 밤 되니 더욱 썰렁하여

뜰에 내린 서리나 쓸어보려다가

서리는 쓸겠는데 달빛 쓸어내기 어려워

그대로 달빛과 어우러지게 남겨두었네.


달빛 밝고 공기차가운 겨울날만큼 술맛 나는 때도 없는 것 같다. 조금만 숨을 내불어도

짙고 풍성하게 뱉어지는 입김 덕분인지 부자가 된 듯한 풍요로운 마음이 되는 데다가,

시크한 듯 하면서도 왠지 정겨운 달이 내려봐준다는 기분에 살짝 달뜨기도 하는 거다.


지금부터는 밤하늘 말고, 술자리에서 달이 뜨는 이야기.

손바닥만한 사이즈, 네모진 박스 두개를 배달받았다. 제법 고급스러워보이는 검정색 종이로

포장된 내용물은 터진 옆구리로 언뜻언뜻 비치긴 하되 껌껌해서 잘 안 보이고, 그보다 눈에

띄는 건 전면에 뜬 달 그림. 초승달에서부터 점점 배가 부르더니 보름달이 되는 그런 달.

'달 아래 벗삼아 완월장취하련다'라는 문구가 박혀있는 옆구리를 톡 열었더니 까맣게

생긴 술잔이 톡 튀어나온다. 완월장취라..달과 놀며 오래도록 취하겠다는 의미일 텐데,

참 멋스런 표현이지 싶다.

그런데 잔 모양이 살짝 이상하다. 보통 잔과 다르게 잔 내부가 슬쩍 경사가 져서는 불룩

튀어나온 느낌이랄까. 슬슬 미끄러져 내려가던 경사가 툭 꺽여서 잔 바닥까지 급전직하하는

그림인데, 이걸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이건 아마도 술을 덜 마시게 하려는 배려일까 싶더라는.

아무래도 그냥 속이 완전히 비어있는 술잔에 비해서 절반이나 들어가려나 싶다.

일단 막걸리를 가득 채웠다. 채우고 나니 여느 잔이나 다를 바 없지만 아무래도 포장지

앞면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달의 모습을 본 지라 새삼스럽다. 이건 보름달, 보름달 두 개가

두 개의 잔에서 떠오른 셈이다.

이런 식의 대작은 가끔 해보는 일, 마치 내 오른손과 왼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하듯 술잔

두 개를 따라두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번갈아 마시는 거다. 오른손군이 술잔을 쥐어 슬쩍

잔을 부딪혀 건배를 하더니 조금 잔을 비웠다. 어라, 달이 조금 홀쭉해졌다.

아직 반달이라기엔 뭐하지만 보름달이라기에도 많이 부족해진, 종종 하늘에서 봤던 달.

오른손군의 선방에 뒤이어 왼손양도 조금 입술을 축였다. 역시 조금 이지러진 보름달,

조금 더 배가 불러야 이제 보름달이 되고 소원을 빌겠구나, 싶은 타이밍에 보이는 달이다.

오른손군은 좀더 과격하게 마시더니 반달이 되어버렸다. 오른쪽이 둥근 반달, 상현달.

마시다 보니 술이 아니라 달을 마시고 있는 느낌이랄까. 조금씩 술의 수위가 내려가면서

검은 잔에 완연히 떠오르는 건 조금씩 홀쭉해지고 있는 달의 모습이다. 왼손양은 이제

그믐달만 남긴 상태, 오른손군은 술잔 위치가 바뀌어서 왼쪽이 둥근 하현달이 조금

이지러졌다.

두 잔 모두 비운 상태, 라지만 조금 술이 밑에 남아서는 스마일~ 하고 있다. 저렇게 살풋

흔적만 남은 달의 모습은 차라리 누군가의 웃는 입술이나 웃는 고리눈을 생각나게 한다.

까만 잔에 하얀 빛깔을 띄는 막걸리나 탁주 계열이 담겨 있는 것만으로도 꽤나 운치있는

그림이 나와서 술맛이 절로 난다지만, 까만 잔에 투명한 술이 담긴다고 해서 그 운치가

덜할 것 같지도 않다. 조금 은근하게 숨어있는 달의 모양을 그려보며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술먹는 재미가 한결 더 쏠쏠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이 잔을 들고 어디론가 나가서

술동무를 찾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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