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 김진숙과 김세균 / 한정숙
정년을 1년 앞둔 김세균 교수가
징계를 받을 위험에 처했다
김진숙씨를 응원했기 때문이다
한겨레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정년을 1년 앞둔 김세균 교수가 징계를 받을 위험에 처했다
김진숙씨를 응원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생각보다 자그마했다. 호리호리해서 가냘프기까지 해 보였다. ‘85호 크레인의 여인’ 김진숙씨가 진분홍빛 스카프를 역삼각형으로 두르고 대학생들을 위한 강연 단상에 섰을 때 내가 받은 첫인상이었다. 전투적으로 활짝 웃는 사진이 주곤 했던 강인하고 억세 보이는 이미지는 실제 모습과 다른 것 같았다. 푸른 스웨터 색깔 때문에, 그녀를 수국꽃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 대중운동가에게는 최적의 자산일 맑고 힘찬 그녀의 목소리는 그런 생각들을 날려버리기에 족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멋있는 목소리로, 그렇게 감동적으로, 그렇게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로 강연을 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김진숙씨는 쉼 없이 흔들리는, 지상 35m 높이의 크레인 조종실에서 보낸 계절과 나날에 대해 말했다. 땅에 내려왔을 때는 멀미를 했고 토했고 계속 땅에 부딪혔고 위장이 아파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것도 이야기했다. 요컨대 그녀는 일상생활을 모두 잊고 잃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살아 내려올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 까마득한 높이로 발길을 디뎠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을 촉구하기 위해 크레인에 오르기 전에 그녀는 신변정리를 마쳤다. 그 높고 어지러운 곳에 올라 309일을 보내면서 그녀는 생사를 넘어서 있었으리라. 하지만 죽음을 각오하면서도 결코 죽음을 허투루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그저 땅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아득하게만 보였으리라. 그런 그녀에게 용기와 희망을 되돌려준 것이 희망버스였다. 그녀는 희망버스에서 ‘눈이 맞은’ 뒤 크레인을 다시 찾아와 그 아래서 사랑의 언약을 맺은 청춘남녀 이야기를 했다. 내려다보는 그녀에게도 펄떡이는 삶의 의지가 전해졌으리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이룬 희망버스 덕에 그녀는 살아서 크레인 아래로 내려왔고, 해고노동자들도 복직할 수 있었다.

 

김진숙씨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가족이 겪고 있는 형극의 아픔에 대해서도 말했다. 듣는 사람들은 자연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위해서도 희망버스가 있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고. 쌍용차 사태가 덧내고 있는 깊은 사회적 상처와, 그래도 파국을 면하고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귀결된 한진중공업 사태를 비교한다면 자본과 권력은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기여한 희망버스에 진작에 훈장이라도 주며 치하했어야 하리라.

 

김세균 교수는 정치학자다. 형님인 고 김진균 교수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진보적 사회과학 학술운동을 이끌어왔다.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로 20년 이상 재직하였고, 이제 정년을 1년 앞두고 있다. 그러한 그가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징계를 받을 위험에 처했다. 희망버스에 올라 김진숙씨를 응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1차 희망버스를 타고 영도에 갔을 때 한진중공업 구내로 들어가 크레인에 접근했던 사람 중 하나다. 검찰이 무단침입죄로 기소했고 법원에서는 벌금 200만원을 부과했다. 교과부가 이를 빌미로 그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는 것이다.

 

서울대 법인화법이 통과된 뒤에도, 정년을 눈앞에 둔 김 교수는 신분 전환을 하지 않고 교육공무원으로 남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 법인화법이 통과되자마자 교과부가 상급기관임을 내세워 스스로 교수 징계권을 행사하려고 한다니, 국립대 법인화가 진보적 교수들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추진된 것이라는 일부의 추측이 현실이 되고 있다. 원로교수를 이런 식으로 모욕하는 것은 야만이고 비열이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35m 높이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희망버스를 탄 사람, 그들이 지닌 깊은 인간애를 이해할 영혼이 징계 추진자들에게는 없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분노하라 - 10점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돌베개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는 책읽기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무언가 자신의 사고 궤적을 이어나가는 행위랑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소설이나 문학류 이외의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 서적을 본다는 건 당시 자신이 갖고 있는 의문점,

고민이라거나 관심분야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 독서 리스트를 쭉 이어나가보면

그자체로 나름의 스토리랄까 문제의식이 뻗어나가는 그림이 잡히는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분노하라'라는 책이 내 손에 쥐어진 건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이 다들 쥐고

있는 이른바 '핫한' 책들은 일단 피하려고 하는 묘한 청개구리 심리에다가-아직 '정의란 무엇인가'는

좀체 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지구 반대편 레지스탕스의 목소리를 빌려 굳이 '분노하라'는 말을

전해듣지 않아도 될만큼 무시로 분노하고 있지 않은가. 그냥, 워낙 감각적인 표지가 맘에 들었다.


삶으로 말한다, '앵디녜부(Indignezvous)!'

저자는 이제 무관심과 냉소를 넘어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행동을

위한 에너지로서 분노를 말하고, 분노의 결과로 행복을 말한다. 삶의 안전망으로 기능해야할 사회보장

제도의 축소, '일반의 이익보다 특정인의 이익을 앞세우'게 된 경제 시스템, 정부와 대기업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쓰고 있는 찌라시 언론들,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대물림하는 교육. 분노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이런 식의 현실분석은 이미 차고 넘친다. 집회나 시위현장에서 배포되는 얇은 전단에

더욱 정밀하고 응축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에 기반한 결론, 혹은 주장도 같다. 이제 그만 속고,

그만 참고, 그만 당하자고. 분노하고 저항하자는 거다. 다만 이 책은, 그 뻔하고 당위적이며 선동적인

이야기에 담긴 무게가 다르다. 메시지의 진정성, 신뢰성이 다른 거다. 그러니 울림이 다를 수 밖에.
 

1917년에 태어난 저자는, 나치와 싸우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다가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갇힌 채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 탈출하고 다시 투쟁, '유엔 세계인권선언문' 작성에 참여했으며, 여전히

인권과 환경 등 사회문제 전반에 발언하며 활동하고 있다. 올해 아흔네살이다. 그런 '늙은이'가,

그런 '꼰대'가 좋은 게 좋다느니, 철 좀 들으라느니 따위 이야기가 아니라 '분노하라'는 거다.


90대 노인의 '격렬한 희망'에 위로받다

결국 이 책을 읽고 발견한 건, 육체적인 쇠락에 지지 않고 탄탄하며 쌩쌩한 열정과 젊음을 가진

어느 존경할 만한 투사의 삶이다. 그리고 그의 삶 자체로 느껴지는 위로다. 나보다 앞선 그의 삶과

신념과 가치를 발견하고는, 왠지 그의 여전히 탄탄할 것 같은 등을 바라보는 안온함과 믿음직함을

느끼게 되는 거다. 근 한세기동안 명멸해온 거대한 폭력과 광기를 지켜봐온 그가 희망을 말하니까.

그의 견지로 봤을 때 MB치하 3년간의 고난, 괴로움은 그야말로 '이 또한 지나갈 것'이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좌절과 절망을 느꼈을까.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편에 서왔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제 한세기를 살아온 노인의 혜안으로 젊은이들에게 고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총대를 넘겨 받으라, 분노하라는 거다.


수많은 한국의 레지스탕스에게. 특히 김진숙에게.

이 책의 소감은 사실 책에 씌여질 종류의 것은 아닌지 모른다. 분노하고, 행동하라는 그의 분명한

메시지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한국에 태어난 건 다행인지 모른다. 갈수록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어렵고 분노의 대상이나 책임의 소재를 밝히기 어려워지도록 복잡해지고 은폐되어지는

사회시스템의 진화 속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날것의 국가폭력, 비인간적인 자본의 모습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용역깡패의 모습으로, 어용 언론의 모습으로, 유치한 고소고발로,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의 밥줄을 끊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분노하기 유리할지도.


역시, 내게 책읽기는 사유의 연장이다. 요새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는 한진중공업의 그녀, 김진숙.

사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할아버지까지 찾아갈 것도 없었다. 젊어서부터 안 해본 것 없이 노동해온

오십대의 그녀가 도무지 한눈에 보기에도 어처구니없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대항해서 크레인에

올라간지 180여일이 가까워진 참이다. 한국의 자본권력, 그리고 그를 비호하는 국가권력은 최소한의

설탕코팅조차 없이 쓰디쓴 현실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참이다.


스테판 할아버지(저자)는, 그녀의 이런 투쟁을 안다면 노구를 이끌고 크레인 위에라도 오를 사람이다.

그리고 김진숙 그녀는, 레지스탕스 할아버지처럼, 그리고 거리의 신부 문정현신부님이나 다른 한국의

이름없는 레지스탕스들처럼, 아무리 나이를 먹고 육체가 노쇠해져도, 지금과 같이 그런 열정과 분노를

가지고 우리에게 든든한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러려면 이 팬시하고 '깔쌈한' 표지의 책은 서가에

꽂아놓을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슴에 꽂아두어야 할 일이다.


그러면 혹시 또 아나, 우리는 백발 성성해진 김진숙이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를 이야기하며 분노하라,

그리고 저항하라며 쓴 또다른 뜨거운 책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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