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희망버스를 다녀와서 느꼈던 것 중 하나. 자칫, 과거의 촛불집회가 그랬듯 '광장에서의 카타르시스'로

끝나는 자족적이고 자위적인 이벤트로 끝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모인 사람들은 희망버스를

타며 '봉사활동', 혹은 벼랑 끝의 목숨인 김진숙을 구하러 가는 '구조활동'으로 생각한 걸까, 아니면 정말

자기 스스로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가는 건지. 그 '희망버스'가 그런 생각들을 표출, 발전시킬 수 있을지도.


촛불집회를 꺾었던 건, 막아선 경찰 앞에서 '폭력/비폭력'을 운위하며 스스로 동력과 가능성을 소모해버린

대중의 두려움, 그리고 어느 정도 기존 편견에 기댄 '시위꾼'들에 대한 염증에 따른 정당/시민단체 등 운동

지도세력에 대한 불인정. 그 두가지 아니었을까. 희망버스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그런 한계는 여지없이

드러났던 것 같다. 185대에 자발적으로 타고온 사람들이니만치 나름의 의견, 입장은 있을 테고 존중하지만 .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이야기가, 그저 듣기 쉽고 편한 이야기만 하다 끝내자는 이야기와 같지는 않다.

지금껏 진보진영의 세력들이 대중과 유리되어왔다는 비판이, 그들이 갖고 있는 견해와 입장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과 같지는 않다. '시민'의 자발성을 존중한다는 것이 '지도부'의 존재와 모순되는 것은 분명

아닌데, 누구 하나 그런 불편한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는다.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을지 모른다.


지도부가 없고 모두가 주체라는 말은, 뒤집으면 정제된 정체성이 없다는 말과 같다. 백인백색의 주장만이

난무할 뿐 요구사항과 승리조건을 정돈해서 내밀지도 못하는 모래알같은 군중이란 말과도 같다는 말이다.

차벽이 막았을 때 돌파할지 말지의 문제는, 스스로의 법을 무시하며 초법적으로 군림하려 드는 국가권력에

저항할지 말지의 문제였다. 폭력/비폭력의 문제가 아니라 저항의 문제라고 이야기해야 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 하지 않는다, 라는 속담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불편하고, 어렵고,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말문은 터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여기 왜 모였습니까. 어떤 점이 당신을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앞으로 이끌었습니까. 무엇이 달성되면 돌아가겠습니까. 장애인과 동성애자와 두리반,

유성기업, 콜트 노동자들이 함께 하는 의미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당신의 '저항'이, '분노'가 향한 끝은 어디입니까.

그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마침 비슷한 생각을 써낸 기사가 있어서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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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의 희망버스, '촛불판 명박산성' 넘을까(미디어오늘)


희망버스와 '광우병 촛불집회', 불평등·불공정의 '차벽' 넘어 희망 홀씨 주목

[0호] 2011년 07월 12일 (화) 허완 기자 nina@mediatoday.co.kr

전국 각지에서 194대의 버스에 나눠 탄 7천여 명의 사람들이 부산에 모여 ‘정리해고 분쇄’와 ‘구조조정 중단’을 함께 외쳤다. 9일 부산에 집결한 ‘2차 희망의 버스’는 700여 명이 동참했던 ‘1차 희망의 버스’를 넘어 그렇게 뜨거운 연대의 불길을 지피며 하나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187일째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끝내 만나지 못했다. 이들은 ‘3차 희망의 버스’를 다시 출발시키자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3차 희망의 버스’가 출발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만만치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는 “기성 노동운동과 정당, 시민운동이 하지 못하는 역할을 새로운 방식의 운동이 보완하고 대체해 주고 있다”고 말했고,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조직된 노동자들이 함께 정리해고를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풀어나간다는 의미가 희망버스에 있다”고 밝혔다. 박유기 금속노조 위원장도 “이제 노동운동도 과거 수동적이거나 선전선동, 상투적인 조직으로는 안 된다”며 자발적인 시민들의 참여가 주축이 됐던 이번 행사의 의미를 높게 평가했다.

▲ '2차 희망의 버스' 서울지역 출발 지점이었던 시청 앞 재능교육 농성장에서 한 참가자가 '슈퍼크레인' 티셔츠를 팔고 있다. ⓒ허완 기자

한겨레는 11일자 사설 <고통받는 이들과의 연대와 나눔, 희망버스>에서 “이들의 마음은 이제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해고자를 넘어,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불평등과 불공정을 함께 해결해가는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평했다. 경향신문도 같은 날 사설 <촘스키, 강경진압, 그리고 ‘희망의 연대’>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이들이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를 ‘불쌍하다고 동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문제’로 여기고 해고노동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2차 희망의 버스’가 주목할 만한 ‘새로운 현상’이자 ‘대안 운동’의 하나로 떠올랐지만, 현장에 있던 참가자들 사이의 ‘온도차’는 곳곳에서 감지됐다. 9일 저녁 거센 빗줄기를 뚫고 부산역에서 출발해 약 4㎞를 걸어 영도조선소를 향해 가던 시위대의 눈앞에 육중한 경찰 ‘차벽’이 나타나자, 참가자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 부산역에서 시작된 행진을 마치고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와 불과 700여 미터 떨어진 봉래 로터리에 도착한 '2차 희망의 버스' 참가자들이 마주한 것은 거대한 '공권력의 성채'였다. ⓒ허완 기자

차벽 맨 앞에 자리를 잡은 몇몇 단체와 시민들은 거친 ‘분노’를 쏟아냈다. “평화행진 하겠다는 데 이게 뭐하는 거냐”, “카메라 끄라고(채증을 중단하라는 뜻) 이XX들아!”, “폭력 경찰 물러가라” 등의 구호와 욕설이 난무했다. 참가자들은 차벽에 ‘정리해고 박살내자’, ‘강제진압 중단하라’ 등의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붙였다. 깃대로 차벽 위에 있던 전경들을 공격하거나, 주먹으로 차벽을 거칠게 두드리며 거세게 항의하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일부 참가자는 물병을 던지거나 거리에서 통째로 뜯어온 안전펜스를 타고 올라가 차벽 위에 설치된 채증용 카메라의 선을 뽑기도 했다. 이들은 양 옆 인도를 막고 있던 경찰들과 쉬지 않고 몸싸움을 벌이며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차벽에서 멀리 떨어져 행렬 뒤 편에 자리 잡고 있던 참가자들에게서는 한결 여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예 일찌감치 자리를 펴고 앉아 맥주와 준비해온 음식 등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참가자들도 많았다.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원생 이 모(26)씨는 “왜 저렇게까지 해서 (저지선을) 뚫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가볍게 몸을 흔드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그 사이 방송차에서는 “방송차가 뒤로 이동하니 앞자리로 이동해서 빈자리를 채워달라”거나 “젊은 남성분들은 앞쪽으로 나와 저지선을 함께 뚫자”는 방송이 이따금씩 흘러 나왔다.

▲ 일부 참가자들이 인도를 가로막고 있던 경찰을 뚫고 진입을 시도하면서 거친 몸싸움이 이어졌다. ⓒ허완 기자

경찰이 경고방송 끝에 물대포와 최루액, 색소포 등을 쏘아대자, 차벽 앞에서는 점점 더 거센 ‘분노의 몸짓’이 이어졌다. 한 쪽에서는 ‘폭력은 안 된다’며 이를 저지하는 참가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팽팽한 긴장 속에 긴박하게 대치 상황이 이어지던 새벽 두 시경, 일부 참가자들이 ‘희망의 계단’을 쌓기 시작했다. 두 줄로 늘어선 사람들의 손길이 뒤에서 앞으로 벽돌과 소금포대 등을 연신 날라댔다. 경찰의 차벽을 넘어 85호 크레인으로 가자는 이들의 열망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계단이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강경 진압’으로 반응했다. 경찰의 진압 작전은 순식간에 시위대를 50여 미터 뒤로 멀찌감치 밀어냈다. 결국 차벽에서 50여 미터 떨어진 지점에 형성된 ‘전선’은 다음날 정리 집회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 채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새벽에 발생한 경찰과의 충돌 과정에서 연행된 50명의 석방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혼선도 빚어졌다. 주최측은 10일 아침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연행자가 석방되기 전에는 희망 버스 단 한 대도 서울로 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일부 참가자들은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 참석자는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대안은 있는 거냐”고 되물었다. 일부에서는 짐을 챙겨 농성장을 이탈하는 장면도 적지 않게 목격됐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자체 행사’를 갖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주최측과 참가단체 대표단이 회의를 거듭하면서 오전 한 때 프로그램 진행이 일시 중단되는 상황도 두세 번 연출됐다. 무엇보다 한 번 ‘밀려난’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갈 힘은 나오기 힘들어 보였다. 맨 앞줄에 서있던 한 참가자는 “이럴 거면 뭐 하러 여기까지 왔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답답해하기도 했다.

▲ 시민들은 행진을 가로막은 차벽에 다양한 구호를 담은 손팻말을 붙이며 항의 의사를 표시했다. ⓒ허완 기자
▲ 대치가 이어지면서 일부 참가자들이 물병을 던지는 등 강하게 저항하자 경찰은 물대포와 최루액, 최루액을 섞은 색소포 등을 뿌리기 시작했다. 차벽 위로 모습을 드러낸 물대포가 참가자들을 조준하고 있다. ⓒ허완 기자

“판을 크게 키워놓기는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판을 이끌고 갈 것인지 고민하고 책임 있게 판단할 수 있는 주체가 없다.”

소리 공연과 랩, 마임 등 흥겨운 ‘연대 공연’이 이어지던 10일 오전, 현장에서 만난 한 노동운동단체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관심으로 한진중공업 사태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라면서도, “지금처럼 느슨한 연대로는 경찰의 저지선도 뚫을 수 없고, ‘판’을 앞으로 이끌어 나갈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같은 상위 단체가 대규모 투쟁을 조직할 여력이 안 되는 상황에서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만 기대기에는 (투쟁의) 한계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송경동 시인은 11일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밥을 먹으러 가는 데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기 마련”이라면서 “그럼에도 ‘밥을 먹으러 가자’는 데에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송 시인은 “기존의 운동들이 많이 관성화되어 있고 진정성이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면서 “흔히 이야기하는 ‘운동 중심’을 넘어서 보편적인 ‘사람의 문제’에 기반을 두어 공개적으로 (희망의 버스를) 제안하고 연대해나가는 운동이 힘을 갖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이어 송 시인은 다양한 목소리가 한 데 어울리면서 발생할 수 있는 전술적 의견 차이에 대해서는 “각자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투쟁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라며 “그 과정에서 큰 결정들은 현장에서 의견을 종합해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두고) ‘희망의 버스’ 내부에 이견이나 분란이 있다고 보는 것이나 운동조직과 일반시민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관점도 잘못된 것”이라는 게 송 시인의 생각이다.

▲ 경찰의 진압은 신속하게, '효과적으로' 시위대를 저지선에서 멀찌감치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시민은 부상을 당했고, 50여 명이 연행됐다. ⓒ허완 기자

한편, ‘희망의 버스’에서 2008년 여름의 거리를 장식한 ‘광우병 촛불집회’를 연상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반 시민들의 자율적인 참여가 집회를 주도했다는 점과 ‘느슨한 연대’가 지속됐다는 점 등 당시의 촛불집회와 ‘희망의 버스’가 여러모로 닮았다는 지적이다. 2008년 촛불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는 송선주(22) 씨는 물대포와 최루액 등이 등장한 경찰의 강제 진압, 결국 ‘차벽’을 넘어서지 못한 ‘2차 희망의 버스’의 고민 등 “현재 상황이 2008년에 ‘명박산성’을 앞에 두고 시위대 사이에서 벌어졌던 논쟁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개방 협상에 반대해 들불처럼 번져나갔던 촛불집회는 당시에도 ‘새로운 운동’, ‘대안적 운동’ 등으로 불리며 뜨거운 여론의 관심과 호응 속에 거리를 물들였다. 시민들은 자유롭게 광장에 나왔고, 자유롭게 떠들었다.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했고, 즉석에서 토론이 오고가기도 했다. “웹 2.0 세대가 시위를 ‘놀이’로 만들어 즐기기 시작했다”, “대중지성, 집단지성이 세상을 바꾼다”는 등의 찬사도 이어졌다. 시민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가사를 따라 부르면서 동시에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권력을 향해 냉소와 조롱을 퍼부었다. 그러나 촛불집회는 그 뜨겁고 맹렬했던 기세만큼이나 급작스럽게 사그라들었다.

▲ 경찰의 차벽 앞에서 피켓을 들어보이는 '2차 희망의 버스' 참가자들의 모습. ⓒ허완 기자

2008년 촛불집회 직후 출간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에 공동 저자로 참여했던 백승욱 중앙대학교(사회학) 교수는 당시에 썼던 <경계를 넘어선 연대로 나아가지 못하다>라는 글에서 “(집회가) 축제로 끝난다는 것은 이 집회에 참여하는 대중들이 이미 머물러 있던 경계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지키면서 불만만 표출하는 차원에 머문다는 의미”라면서 “촛불집회에서 가장 경계할 것은 이 집회가 ‘축제’가 되어 ‘카타르시스로’ 끝나는 일”이라고 썼다. 백 교수는 이어진 글에서 “2008년 촛불집회가 부딪힌 가장 큰 한계점은 광장의 저항이 자신의 생산·재생산 공간(일상적 삶의 공간)으로 확산되고 이전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고 평가하면서 촛불집회가 “참가자들 사이에 놓인 경계들(비정규직과 정규직, 이주노동자와 현지인, 남성과 여성, 고학력 노동자와 저학력 노동자 등)을 넘어 구체적인 연대로 나가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희망의 버스’의 미래를 좌우할 고민이자 과제로 남아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희망의 버스’를 제안한 송 시인도 “(한진중공업 사태가) 이 곳 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과 이 일이 당사자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인식이 보다 긴밀하고 보편적으로 퍼져야 한다”며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확산 등 그간 진행되어 왔던 신자유주의 기조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의식”을 언급했다. 이는 ‘한 번 왔다가 가는’ 투쟁의 현장에서의 삶과 일상 생활에서의 삶이 서로 변화를 주고받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엇갈려서는 안 된다는 지적인 셈이다.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참가자들이 단순한 ‘동정’이나 ‘안타까운 마음’, ‘막연한 분노’를 넘어서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희망 버스'가 당면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장의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도 숙제다. 한진중공업노조가 사실상 떨어져나간 상태에서 '희망버스'는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큰 힘이 되고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 어떤 결말로 나아갈지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3차 희망의 버스'가 안고 갈 희망만큼이나 그 등불이 되고 있는 김진숙지도위원에 대한 부채감도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차 희망의 버스’가 출발한 곳은 시청 앞 재능교육 농성장이었다. 이곳에서는 부당한 임금체계를 개선하고, 특수고용직으로 규정된 학습지 교사를 정규직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투쟁이 무려 1200일 넘게 이어지고 있다. 작년 겨울 파업을 벌였던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30여 명은 ‘희망 자전거’를 타고, 2년 전 직장을 잃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지난 1일 평택을 출발해 도보로 ‘희망의 버스’ 대열에 합류했다. 사측의 직장폐쇄에 맞서 일괄복귀를 요구하며 두 달 넘게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유성기업 노동자 100여 명도 달려왔다.

‘희망의 버스’가 활짝 열어젖힌 ‘연대의 장’은 분명 다양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렇지만 “광장에 모인 개인들은 과연 ‘연대’하고 있었던 것 것일까? 아니면 함께 모인 사람들과 그저 함께 있기만 했던 것일까?”(백승욱 교수)라는 질문은 이번에도 필요해 보인다. 과연 ‘희망의 버스’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얼마나 더 많은 곳으로 실어 나를 수 있을까?

▲ 참가자들은 대오를 해산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꼬박 밤을 지샜다. 그 사이 새벽이 밝아왔다. 농성 대오와 멀리 떨어져 있는 차벽도 밤새 자리를 지켰다. ⓒ허완 기자


불안증폭사회 - 8점
김태형 지음/위즈덤하우스
IMF 이후 전면화된 경쟁 속에서 기존의 공동체나 조직이 약화되거나 심지어 붕괴되었다,

그 결과 생존에 대한 공포는 불안으로 만성화된 채 사회 구성원 모두를 미치거나 죽도록

몰아가고 있다는 게 요지다. 출산율은 꼴찌, 자살율과 자살을 유발하는 우울증 유발율은

1위라는 적나라한 지표 앞에서, '지금 한국인들은 멸종하고 있다'는 저자의 단호한 주장을

뿌리치기란 사실상 어렵다. 구성원들이 새로이 충원되기는 커녕 있던 사람들도 그저

이민이든 자살이든 탈출하려 애쓰는 공동체가 바로 한국이란 거다.


이 책의 덕목은, 여태 개인의 문제나 '마음수양'의 문제로 미뤄두었던 인간 심리와 병리적

상태가 상당부분 사회의 책임
이라는 부분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여기서

함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일정한 공약수를 가진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면, 사회구조로

인한 스트레스와 발병요인을 한번 의심해보고 분석해보는 게 맞지 않을까. 연예인들의

자살이 우울증 때문이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직업적 스트레스나 불규칙한 생활 때문은 아닌지,

또 우리의 '마시고 죽자'는 음주 문화가 감춘 건 몸을 함부로 하며 죽어도 좋다는 자살충동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공정을 기하자면 두어가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들이 있다. (이 책에서 그저 '경쟁심화'

정도의 대중적 의미로만 새겨지는) '신자유주의'의 전세계적 영향 하에서 한국이 유독

적나라하고 심대하게 피해를 입었다고 보는 이유가 설명되어야 하고, 이전부터 경쟁을

기반으로 유지발전되던 사회와 '신자유주의' 하의 한국사회가 근본적으로 달라진 점은

무엇인지 명확히 해야 하며, 무엇보다 개인의 불안과 공포, 심리적인 병리상태가 대개

사회적 차원에서 비롯한다는 그 통찰이 가진 무기력함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왜 하필 한국만 이렇게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을까.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이미

구미 제국들을 집어삼키고 도도하게 세계화된 흐름 아닌가. 저자는 경쟁이 심화되는

사회에서 도태되거나 내쳐졌을 때 당면하게 되는 생존 위협의 정도가 다르다 말한다.

잘 알려졌다시피 한국의 복지수준, 사회적 안전망의 정비 수준은 비교하기가 민망한

수준인 거다. 그러니 회사에서 짤리면 '내새끼들 어쩌나'하다가 온가족 목숨을 쥐고

사라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 밖에 저자는 한국의 유난한 공동체주의를 지적하며 '중산층'이란 가상공동체에서

튕겨나오는 것, '사회적 생명'을 박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강력하다고 분석한다.

인간은 단지 배만 부르면 되는 돼지가 아니니까,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고 존중받는

일원이려는 욕구가 더 크니까. 특히나 개인주의의 뿌리가 얕고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로

수천년 지탱해온 문화가 있으니까 한국은 더 심하지 않을까. 말이 된다. 그 '중산층'의

허울, 중산층만큼은 인정받겠단 욕구가 극성스런 명품열풍을 만들었다는 것 역시.


그러면 왜 하필 지금인가. 사실 '경쟁' 그자체는 신자유주의만의 문제도 아니고

자본주의 자체, 혹은 인류 문화 전체에 투영되어 있는 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IMF 이후로 한국인들 삶의 기반 자체가 크게 흔들리고 위태하게 되었고, 이후

시스템의 변화와 함께 삶의 목적, 가치관 등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데 동의하지만

그것은 '경쟁'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IMF로 인한 패러다임의 변화 문제에 가깝다.

패러다임의 변화로 인해 경쟁이 심화된 거고, 그로 인해 사회병리가 심해진 거니깐.


저자에 대해 약간 아쉬운 부분이 이 곳인데, 무엇을 지칭하는지 그 내용도 명확히

알 수 없는 '신자유주의'라는 모호한 단어 대신 차라리 'IMF 이후'라는 구체적인 시기를

적시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신자유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을 하고 그 정체를 밝히려는

글이 아니니까, 그런 식의 뭉뚱그린 단어는 피하는 게 나았지 싶다. 사실상 저자가 말하는

'신자유주의'를 'IMF 이후'라는 말로 바꿔도 전혀 문제가 없는 거다. 그래서 IMF 전후의

사회적 차원의 심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강했다면 훨씬 정밀하지 않았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 저자도 책의 대부분에 걸쳐서 강조하고 있지만,

만성화된 불안과 그로 인한 정신적 병리현상들이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문제란 사실은 굉장히 커다란 실천적 압박을 수반한다. 혹은, 에라 모르겠다, 는

식의 무기력함을 초래한다. 너무 막막한 거다. 내가 지금 우울한 게 내 마음에 뭔가 문제가

있거나 내 성격에 뭔가 문제가 있다기보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잘못 굴러가고 있고

나를 이상하게 만들어서라 믿기도 힘들고, 그러고 나서 어쩔지도 모르겠다는 거다.


저자는 앞으로 가는 것도 한걸음부터, 뒤로 가는 것도 한걸음부터라며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여러 제안들을 제시한다. 결국 사회가 건전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어야 사람들의

마음병도 근본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거니까, 사회를 바꾸는 여러 제안들이다. 사실은

난 잘 모르겠다. 저자가 문장 곳곳에 느낌표를 한두개씩 박아두는 것도 좀 눈에 거슬리고,

그가 내놓은 제안들이 딱히 참신하다거나 와닿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믿음직한 문장은

하나 건졌으니 다행이랄까.


"우울증은 세상에 대한 저항이다." 우울해지는 것이 되려 정상성의 표징인 셈이다.

우울함을 자각하는 건 아직 세상에 맞춰지지 않았다는 깨어있음인 셈이니, 일단은 그걸로

스스로를 경계하는 지표로 삼기로 한다.






시립미술관 가는 길은 늘 설렌다. 덕수궁 돌담길의 운치도 그렇지만 도심에서 한발 벗어난 곳의 고즈넉하고

적적한 분위기가 맘에 든다. 게다가 몇 시간꺼리 재미나게 놀 수 있는 소재들을 만나러 가는 거니까, 아마도

어렸을 때 큰 길건너 아파트촌에 있었던 '기린놀이터'로 달음질치던 기분이 이랬을 거다.

앤디 워홀. 대량 생산, 무한 복제의 시대에 걸맞는 '팝아트'를 창시한 예술가이면서 헐리웃과 세계의 '유명인사'

그 자체를 이미지로 소비해낸 자칭 '기술자'이기도 하다. 정치적 영향력, 역사적 중요성 따위와 관계없이 그저

사람들이 잘 알고 제혼자 친숙한, 그야말로 '쎌레브리티(Celebrity)'로서, 그는 마를린 먼로와 레닌, 마오쩌둥을

같은 반열 위에 놓고 작업을 하는 거다.

그의 숱한 '선정적'인 말들 중 이런 것도 있다. "미래에는 모두가 15분씩은 유명인이 되는 기회를 얻을 것"이라

했던가. 그의 작품들은 마치 익명의 일반인이 유명인이 되듯 하찮고 사소한 상품과 물건들에 초점을 맞춘 것이

꽤 많이 보인다. 너무도 흔한 세제 상자, 통조림스프 따위가 열맞춰 세워진 모습을 재구성한 작품들이 그렇다.


그가 창조해내는 세상은 모든 것이 이미지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제통도, 재클린 케네디의 죽음도,

레닌과 마오의 이데올로기도, 교통사고와 심지어는 죽음조차 변주되는 해골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는 왜

자신이 기계처럼 예술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을까. 뭔가 그림 뒤에서 심오한 의미를 찾고 온갖 기호를 암호처럼

배열하던 기왕의 미술과는 다르다는 뚜렷한 선긋기였는지도 모르겠다.

더이상 스스로를 근대적, 혹은 그 이전 시기 '예술가'라는 단어가 갖는 아우라로 포장하지 않고, 단순한 하나의

직업으로서의 예술가를 자처하고 자본주의 상업미술과 근대 미술과의 접점을 찾는 여정을 걸었달까. 그런

점에서 그의 세계는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탈근대의 미학과 미감들에 대한 하나의 클래식인지도 모른다.


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탈근대, 포스트모더니즘의 '클래식'은 이제 조금은 유치하고 촌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아무리 앤디 워홀이 전례없는 예술 양식과 미감을 개척했다고는 해도 사실 워홀식의 작품들은 이미 무수한

발전 혹은 변화를 거쳐 사방에서 볼 수 있는 거다. 자본주의적 광고와 예술의 벽은 허물어진지 오래, 일상의

것들을 주목하고 새로운 문맥에 배치하는 시도 역시 그 자체만으로는 너무도 진부해진지 오래. 


게다가 재키-재클린 케네디-의 죽음이나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참사가 이미지로 어떻게 소비되고 소진되는

지에 대해서는 워홀보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훨씬 익숙할 수 있는 거다. 물론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여전히

워홀의 참신하고 날카로운 시각이 필요하달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익숙해진 만큼 다른 예술가들은 다시

꾸준히 낯설게 하기를 시도하고 있는 거다. 굳이 앤디 워홀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앤디 워홀의 바나나 그림이 프린팅된 벽면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찍고 있는 사진 한장한장,

그게 바로 앤디 워홀이 다양한 색감으로 표현한 마릴린 먼로라는 작품이고 네가지 색깔의 레닌 작품인 거다.

이미 이미지는 넘치는 데다가 심지어 유사한 곳에서 유사한 피사체-음식, 건물, 풍경 따위-가 쉼없이 복제되고

변주되고 있는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가 워홀을 관람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시대를 관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신의 작품 뒤를 보려 하지 말라고 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과연 그런지는 별개 문제지만

그는 자신과 자신의 작품이 '충분한 만큼 오랫동안 바라보아'지는 걸 두려워했나 보다. 충분한 만큼 오랫동안

바라보기. 이미지의 매트릭스를 깰 수 있는 건 역시 성찰의 힘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건가, 모르겠다.

그의 작품 뒤로 걸어나오면서, 몇가지 그의 말들을 되씹어 봤다. 말장난같기도 하면서, 묘하게 여운이 있다.

* 사람들은 시간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그들 자신에 의해 변화한다.

* 인생은 그들 자신의 변화하는 모습을 되풀이하여 보여주는 시리즈의 연속물이다.

* 사람들은 점점 더 오래 살고 늘어가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아이로 살아갈 것인지 배워야 한다.

* 사람을 가장 흥분시키는 매력들은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

* 예술은 당신이 벗어날 수 있는 다른 세상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마지막 것, 미술관이나 전시관을 굳이 꾸역꾸역 찾아 돌아보는 이유기도 하다.

시립미술관 1층에서는 "조각적인 것에 대한 저항"전이 열리고 있었다. 다들 앤디 워홀전만 보고 여기를 지나쳐

가버리는 듯, 들어가니 관람객은 나 혼자 뿐이었다. 작품들을 보다 보면 불현듯 스스로 되묻게 된다. 근데 이거

조각전이었지? 조각은 뭐지? 하고.


커다란 덩어리 하나 혹은 여러개가 단단하고도 조용하게 지표 위에 버티고 있는 게 전통적 의미의 조각이라면

그 모든 것들 하나하나를 의문에 빠뜨린다. 덩어리가 아니거나, 단단하지 않은 액체/기체거나, 조용하지 않고

회전하거나 불규칙하게 움직이거나, 지표 위가 아니라 벽면이나 천장에 있거나. 형체가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은 도발적이고 불안정해 보이는 것들, 그것들을 '조각'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각이 아니라 청각과

촉각까지 끄집어내는 작품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앤디 워홀전만큼 재미나게 관람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반짝거리는 아이디어들이 가득했던

전시 공간이었다. 앤디 워홀의 그것들이 조금은 더 '클래식'하고 '올드'해 보인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시립미술관에서 돌아나오는 길, 아까는 참 앙상하고 못나보였던, 무슨 파리채마냥 똥그란 철사에 전선 그물망

얼기설기 엮인 듯 보였던 그곳에 불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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