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양장) - 10점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문학동네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순교, 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굉장히 사람을 숙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누군가의 죽음이

여하간에 대의를 위한 죽음으로 포장되는 순간, '순교'로 불리우는 순간 더이상 그 죽음의

전후 맥락을 따지거나 정확한 팩트를 판별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만다. 심지어는,

그렇게 죽어간 사람이 어떠한 고민과 생각을 거쳤고 어떤 죽음을 맞았는지조차도.


고은 시인 이전에 한국계 작가가 이미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김은국이란 작가, 함경도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전쟁때 해병대 근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그의 프로필이나 이 책의 심상찮은 제목 '순교자'를 보고 처음에는 꽤나 거부감이

생겼더랬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도의 시각으로 본 미국, 남한 만세 이야기인가 했다.


'그래, 언제 이 병신같은 전쟁놀이를 그만둔다지?'
'전쟁은 천지창조 이후 계속되어온 거 아닙니까?'

아니었다. 그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이 전쟁 역시 짐승같은 국가들과 썩은 정치인들 사이의

눈먼 권력 투쟁이 빚어낸 구역질나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미 죽었고 앞으로

죽어갈 수많은 사람들은 정말이지 개죽음이며, 무고한 제물로 희생된 것이며 냉혹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국제 정치 무대에 꼼짝없이 붙들린 죄없는 볼모들이다'라는 거다.


한국전쟁에 대해 이토록 냉정한 평가, 그리고 뜨거운 평가는 꽤나 인상적이다. 그렇지만

더욱 강렬한 건 정작 이 다음이다. 그러한 배경 하에서, 주인공 이 대위는 갈등하고 있다.

빨갱이들에게 죽은 열두명의 목사와 살아남은 두명의 목사, 그 생사의 스토리에 얽힌 진실이

무엇이던간에 '순교'의 금칠을 하려는 군대와 기독교인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다.


'목사들의 신성한 복장 밑에 더러운 속옷이 숨겨져 있었다고 폭로하기보다는 열두 명 순교자들의 영광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자네들 기독교에 더 큰 봉사가 되지 않는가?'

그런 금칠을 단순히 사기극이라고 치부할 건 아니다. 군인은 지켜야할 국가와 그 명분이 있는

거고 목사도 또한 지켜야할 교회와 교회의 명예가 있는 거니까, 전면전의 상황에서 그런 둘의

이해 관계나 목적은 굉장히 단단하고 뚜렷하며 현실적이다. 거기에 대고 진실은 모두가 알아야

한다느니, 순교자는 하나님의 뜻에 봉사하는 거지 인간의 일시적 필요로 만들어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물론 옳지만 다소 한가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열두명의 목사가 끝까지 종교적 신념과 신앙을 지키며 죽었건 아니면 서로 헐뜯으며 살려달라고

애걸하다 죽었건, '목사들의 신성한 복장 밑에 더러운 속옷이 숨겨져 있었다고 폭로하기보다는

열두 명 순교자들의 영광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자네들 기독교에 더 큰 봉사가 되지 않는가?'하는

대령의 말에 군종목사가 입을 닫고 마는 게 딱 그런 논박의 한계다. 탈영병 백명을 백명의 영웅으로

둔갑시키는 것과 신앙의 영웅을 만드는 게 다를 바 없다는 것. 조직 보위와 프로파간다의 논리다.

 
 '신성하게 미친 가련한 젊은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조롱과 미움의 대상이 되고 로마 병정의 창끝에 온 몸을 찔리고, 적들의 시선 앞에서 그를 구해줄 기적 하나 없이 무력하게 헐떡이고 땀을 흘리고 피를 쏟고 있는 젊은이, 신의 아들이라는 사람의 그 가련한 육신의 절규'를 구원의 동화로 만드는 것. 그런 동화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을 경멸할 텐가, 사랑할 텐가. '

그런데 이렇게 치열한 세속의 고민에서 작가는 한발 더 내딛는다.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종교와 신앙의 역할에 대한 질문, 특히 전쟁과 인생에 지쳐있는 그야말로 절망적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러한 '동화'를 주어 위로하는 종교에 대한 폭넓고 깊은, 극한까지 밀고 들어가는

고민인 거다. 고난에 시달리고 고문당하는 불쌍한 사람들, 그들의 비참한 생에 달콤한 환상을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줘야 하는가.


이 대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들을 잘 보살펴주시고 국가는 그들의 운명을 진지하게

걱정해주고 있으니 만사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는 모든 고상한 거짓말,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위한다며 저질러지는 이 모든 것들이 역겹게만 느껴진다. 그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동정하면서도 종교나 신이 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 거다.

하여 계속 묻는다.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그와 다른 축으로 모여선 사람들, 신목사와 박 대위는 그저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진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삶을 의미있게 하고 고난을 값진 것으로

해줄 그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련하고 유약한 사람들이라는 거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자신의 신과 신앙을 모두 의심하고 무너졌던 열두명의 목사가 '순교자'로 불리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라는 거다. 정의에 대한 약속, 신에 대한 약속 없이는 모두 무너질 테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당하는 고통은 고통일 뿐, 거기에는 우리가 이승 너머에서 찾아낼 어떤 정의로움도 없습니다.'

작가는 두 가지 입장을 첨예하게 밀고 나간다. 수백만명이 죽어가는 한국전쟁의 와중이라는

혼란하고 부조리한 상황 한복판에서, 아무런 희망과 약속을 얻을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근대의 낙관주의처럼 모두가 차갑고 냉엄한 현실 앞에서 당당하진

못하더라도 괴로운 진실을 떠안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입장과 불의하고 무의미한

삶을 견디지 못해 무너져버리고 말거라며 '환상'을 쥐어준다면 그것자체가 희망 아니겠냐는

입장, 그 두 입장은 끝까지 머리맞대어 고뇌하며 이리저리 약점을 찾아 타격하며 투쟁한다.


사실 한국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아니어도, 사람들은 종종 자문하곤 한다. 이걸 지금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내 삶은 어딜 향하고 있을까, 죽고 나면 다 끝나는 건가. '죽음'이나 '사후'에
 
대한 그런 숱한 질문은 더러는 사회적인 터부가 되어 자물쇠가 채워져 관리되고, 개인적으로도

애써 힘내보자는 자기계발류의 이야기나 생에 대한 이야기로 집요하게 돌려버리곤 하는 거다.

그런 걸 보면 인간은, 끝내 스스로 삶과 죽음, 영원한 소멸과 사라짐을 긍정할 수 없는 걸까.


'교인들은 이 무의미한 세계에서 그들의 생을 지속시키는 그 무언가를 갖고 있어. 한데 우리에겐 그게 없지. 그들이 가진 그것을 우리가 꼭 동화라고 불러야 할까.'

소설에선 신 목사가 그런 '경지'에 이른 거 같다. '스스로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스스로 그 십자가를 짊어질 수

없는 사람들을 삶에서 보호하는 거다. 그들을 위해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지켜주는 목자.

소설 제목인 '순교자'는 이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신을 위해 봉사하고 목숨까지 바친

사람이 아니라, 신을 믿는 사람과 삶에 의미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사람인 거다.


그건 어쩌면 매트릭스 식으로 말하자면, 빨간 알약을 먹어버리고도 이 세계에 남아있는 존재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깨닫고도 아직 피안으로 넘어가지 않은 채 중생을 계도하는 존재,

보디사트바(보살)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난 궁금하다. 이 대위도 궁금했던 거다.

'국외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애초에 신을 믿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에 기댈 수 있을까.

신으로 엮인 목자와 양떼의 관계가 아니라, 신의 개입없는 개인과 개인이라면.


분명 그건 더욱더 힘든 싸움일 거다. 십자가뿐 아니라 온갖 기도와 염불과 예배 소리로

가득한 땅에 살면서 그런 '종교'라는 마약에 취하지 않고 눈 똑바로 뜨고 아연하게

짖쳐들어오는 온갖 희로애락과 불행들을 맞닥뜨리고 온전히 감내하려면. '순교자'에

기대어 삶의 의미를 보증받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회의와 두려움 속에서 한치 앞도

알 수 없고 의미조차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니까. 신 없이 살아간단 건 그런 거다.


* 굉장히 인상깊었던 대목 하나. 이 작품과 이 작가가 한국 사회에서 잊혀진 이유 아닐까.

기독교에 대한 굉장히 전향적이랄까 혁신적인 해석, 그리고 기독교 교리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랄까 새로운 시각이란 것들을 품기에는 한국사회가 너무. 여전히.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그러나 내가 찾아낸 건 고통받는 인간...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그리고 죽음의 다음은?"
"아무것도 없소! 아무것도!"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주어야 해요. 영광과 환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희망이라는 환상을 준단 말입니까? 무덤 이후의, 죽음 이후에 대한 환상을 주란 말입니까?"
"그렇소!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이오. 절망은 이 피곤한 생의 질병이오. 무의미한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삶의 질병입니다."

..."목사님은요? 당신의 절망은 어떡하고 말입니까?"
"그건 나 자신의 십자가요. 그 십자가는 나 혼자서 짊어져야 하오"
"다른 사람들은?"
"많은 이들이 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건 아니잖소? 그들은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이오. 우린 그들에게 그들의 그리스도와 그들의 유다를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부활도?"
"그렇소, 육체의 부활도!"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도?"
"그렇소, 그 천국도!"
"정의는?"
"물론이오. 정의, 얼마나 그리운 이름이오? 그렇소. 정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궁극적인 정의를 주어야 하오."
"목사님은?"
"계속 괴로워해야겠지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얼마 동안이나? 얼마 동안이나 괴로워해야 하는 겁니까?"
"죽을 때까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없을 때까지!"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떻게 내려져야 하는 걸까.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기로 한

목사가 여전히 말로 답하기를 거부하는 그 질문.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보급판 문고본) - 10점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동아시아

신화란 뭘까. 고대인들에게 신화가 뭔지를 알려면, 신화와 함께 그들이 세계를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프레임을 제공했던 종교와 비교해 보는 게 필요하다. 종교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세계, 삶의 고단함 혹은 무의미함을 버티어낼 수 있는 환타지의 세계를 그려내

왔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 온 대로다. 당위론적이고 목적론적인, 인간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재구성된 세계는 비록 그들에게 맑스가 말한 것과 같은 '마약'이 되어줄지언정 날 것의 현실

세계를 파헤치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대면하고 탐구하는 걸 두고 과학이라고도 하고 철학이라고도 하지만,

저자는 다름아닌 신화에 그 근본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다고 한다. 별들과 자연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라거나 자연의 질서, 인생의 의미 등에 대한 현실적인 통찰력과 분석이 신화 속 은유와 이미지에

담긴 채 후세로 전달되어 왔다는 거다. 그 안에는 먹기 좋게 설탕으로 코팅되거나 듣기 좋게 위로와

소망이 뒤섞인 환상이 존재하지 않으며, 더러는 냉혹하고 잔인하게 인간의 욕망과 어두운 이면까지도

까발리기도 하는 게 신화. 그래서 저자는 아마도 인류의 역사를 '신화 VS 종교'의 큰 그림으로
 
파악하는 것 같다.


이미 고대인들이 폭넓게 공유했던 신화로부터 오늘날 인류가 꽃피운 과학과 철학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 전세계의 신화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복잡한 사유와 사고 논리의 원형이랄 수 있는

것들이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은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신화래봐야 특정 지역의 특정 부족에서나

공유되는 애매모호하고 흐릿한 민담 비스무레한 거겠거나 생각했던 '곰의 자손'이 무식했던 거다. 

일본의 철학자이자 종교학자인 저자는 이에 대해 북아메리카와 유럽, 일본과 아시아의 여러 신화들에서

공유되는 이미지와 상징들이 어떻게 연관되고 동일한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다름아닌 '신데렐라' 이야기.


신데렐라 이야기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전파되기 이전에도 이미 다양한 버전의 이야기로

유럽 곳곳에 남아있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나 뉴기니, 중근동, 심지어

중국에서도 신데렐라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왔다는 건 어떨까. 물론 조금씩의 변형이나

강조점의 차이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야기가 전승되는 사회 배경의 차이라거나 사람들 관심사의

차이에서 비롯될 뿐 신화적 상징과 정연한 사고와 메시지를 분명히 갖고 있다는 거다. 중국에서의

신데렐라, '섭한' 역시 신발 한짝을 놓고 도망나오며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신데렐라 패러디 '누덕누덕

기운듯한 피부의 소녀' 이야기 역시 신발에 대해 세심한 묘사를 공유하고 있는 식으로 말이다.


저자가 그 이야기들을 어떻게 풀어갔는지, 어떤 부분을 주목했는지에 대해서 시시콜콜 반복하는

것보다 책을 읽고 싶은 맘을 동하도록 여백으로 남겨두는 게 나을 거 같다. 다만 다짜고짜 그의

흥미로운 결론으로 점프해 들어가자면, "신데렐라가 춤을 춘 곳은 저승 세계였으며, 그녀가 놓고 간

신발 한 짝은 그녀에게 새겨진 저승세계의 각인이고, 그것을 찾기 위해 왕궁에서 저승사자를 보낸 것"

이란 거다. 글쎄, 이렇게만 적어두면 뭐가 이렇게 황당해, 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로서는 저 결론이 꽤나 합리적이고 일리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더구나 신화라는 것이 갖고 있는

깊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으니, 그 정도로 머릿속을 흔들어놓을 수 있는 책이라면

강력 추천함직 하지 않은가.



또 하나, 요새 이런저런 식으로 동화를 뒤집어 패러디하거나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교정하는 시도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책에서는 정말 제대로 된, 게다가 재미까지 보강한 패러디가 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신데렐라 이야기의 경박함이나 현세적 속물성, 여성의 수동성, 외모지상주의 같은

부분까지 굉장히 비판적인 시각에서 재구성한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이야기는, 그전까지 알아왔던

신데렐라 이야기를 뛰어넘는 깊은 감동을 남긴다. 패러디라기보다는 오히려 신화의 원형에는 훨씬

가깝게 접근한 거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p.s. 검은괭이2님께서 문득 선물해주셨던 책 한 권. 왠지 내가 좋아할 거 같아 검괭이님께서 좋아하는

책을 선물하셨다 했는데, 대체 어딜 보고 그런 판단을 내리신 건지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매우매우

정확한 판단이셨다는. 역시 '웃고 즐기는' 별자리 이야기꾼이신지라, '물병남자'인 내 취향이나 흥미를

잘 파악하고 계셨던 걸까나. 다시한번, 고맙습니다~^-^*




* 알라딘 11월 이달의 TTB에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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