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이왕 테라스에 길게 이어진 건 바로 코끼리 테라스, 여기는 앙코르톰 동쪽 '승리의 문'을 통해 들어올 수

있었던 개선군이 왕에게 승리를 보고하던 곳이라 한다. 코로 연꽃을 휘감아 왕에게 바칠 태세를 갖춘 코끼리

코들이 벽에서 뻗어나왔다.
 
아니, 어쩌면 코끼리들의 육중한 몸으로 벽을 쌓아 왕의 전면에 도열시켜 놓았음을 상징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굉장히 유니크하면서도 재미있는 발상, 그리고 건축물이다.

코끼리 코, 하면 생각나는 건. 근데 돌로 깎였음에도 미끈하게 쭉 뻗은 코끼리 코라기보다는 팔을 스트레칭하는
것 같이 나와버렸다. 아놔.

통일신라시대던가, 이 땅에서 발굴된 막새-기왓장-무늬에도 비슷한 그림을 분명 본 적이 있다. 흔히 요새

'치우천황기'라고 흔드는 데 들어간 그 그림 말이다. 그건 사실 한민족의 고대 인물을 드러내기엔 다소 적젏치

않은 상징일지 모르겠다. 캄보디아에서도, 다른 불교 베이스의 국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미지인 탓이다.

('치우천황'이란 인물에 대한 악의적 이미지 왜곡이 중국에 의해 이뤄졌고, 그게 아시아 문화권 일반의 악귀,

라거나 악귀를 쫓는 무서운 신, 의 이미지로 변용되었단 점을 감안해도 그렇단 얘기다.)

여기서도 빼놓을 수 없는 매혹적인 저 사자의 뒷태. 완전 잘록한 허리와 풍성한 힙의 조화라니. 사랑스럽다.

뭐랄까, 카메라 광고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는데. 그들이 의식하지 않게 하겠다, 어쩌구 하는 비를

따라가다간 가랭이 찢어지겠다. 두다리를 허공에서 펄럭이며 날고 있는 압사라 여신도 비웃었다.

코끼리 테라스에서 왕이 바라본 풍경은 또 어땠을까, 싶어 휘휘 둘러보았다. 우선 정면.

멀리 보이는 건축물들은 원래 창고 용도로 쓰이다가, 나중에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는 일종의 영빈관으로

쓰였을 거라는 게 가이드북의 설명이지만 글쎄. 저런 데 사람이 살기엔 좀 불편하지 않았을까, 커다란 굴뚝

아니면 무슨 화장터 같이 생겼는데.

왼쪽으로 고개를 틀면, 저쪽에 문둥이왕 테라스와, 길게 이어진 코끼리 코가 인상적인 코끼리 테라스.

오른쪽, 문무백관들이 왕의 좌우로 호위하듯 둘러서 있었겠지. 빳빳한 밀랍인형처럼.

관광객들도 눈에 잘 띄지 않는 한산하고 다소 휑한 분위기, 운치를 더하듯 어슬렁대는 검정개 한마리.

가만히 앉아 쉬고 있자니 휘적휘적대며 느릿하던 녀석이 어느새 바로 앞까지 찾아왔다. 심심했던 게냐.

왕이 서 있던/앉아 있던 바로 그 장소. 다소 기울어져 보이는 게 카메라 잡은 이의 농간이었는지 아님 원래

저 지반이 살짝 뒤틀어져 기우뚱해 있던 건지 모르겠다.


왕의 시각에 빙의되어 보자, 이게 바로 왕의 시야.




여전히 앙코르톰 내부의 이야기. 3kmX3km의 거대한 계획도시의 내부에 돌로 축조된 궁전과 사원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으니 둘러 보는 데만 한나절이다. 아무래도 크메르왕국의 최전성기이던 시절, 황금의 도시라 불리던

때 지어진 수도니만치 당대의 공력을 총동원했던 게다.

그 전성기를 구가한 왕이라 여겨지는 자야바르만 7세, 이 문둥이왕 테라스의 주인공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의 치하에 크메르 왕국 전지역에 병원들이 설치되고 정비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그가 문둥병/나병에

걸렸었다는 추측을 뒷받침한다고 한다. 물론 다른 설들도 많다. 캄보디아의 많은 사원이 대부분 죽은 이들을

봉안한 무덤의 역할도 겸하고 있듯 이 테라스에도 왕실 전용 화장터가 설치되어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테라스 위에 앉아 있는 인물이 야마(염라대왕), 즉 죽음의 신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학자들 간의 설왕설래야 어떻든 간에, 이 조각상은 몇가지 재미있는 특징이 있다. 옷을 안 걸치고 있는, 혹은

옷의 실루엣을 거의 조각해 넣지 않은 모습의 상이라는 점(누군가 저렇게 옷을 계속 공양하길 바라고 만든 양),
 
생긴건 남자임이 분명한데 앞면을 보면 뭔가 남성의 심벌이 없이 밋밋하다는 점(신의 양성성을 표현하고 싶던

걸까), 그리고 조각 표면이 매끈하게 다듬어지지 않고 뭔가 깔깔한 느낌이 의도적인 양 느껴진다는 점(이게

바로 이 조각상이 문둥병/나병에 걸린 인물이라 추측하는 이유라 한다). 차마 민망해서 앞면은 못 찍었다.ㅋ

문둥이왕, 혹은 염라대왕 혹은 다른 무엇, 그가 내려다보고 있던 풍경이 뭘까, 옆에 주춤 서서는 사방을 둘레

둘레 두리번거렸다. 우측에 보이는 길게 이어진 테라스의 요철, 그리고 오래된 것의 향취가 은근하다.

그리고 전면. 어라, 이 문둥이병 걸린 아저씨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 걸까. 분홍색 귀여운 아이스크림차.

아이스크림 스티커가 나름 주의깊게 배치되어 나란히 붙어있는 걸 보면 왠지 저 차를 분홍빛으로 도색하고

스티커를 한장한장 울지 않고 삐뚤지 않게 세심하게 붙이려 노력했을 모습이 떠올라 재밌다.

아이스크림 차 옆으로 마치 무슨 제약회사 로고처럼 멋지게 자라난 거대나무. 짙푸른 녹색잎도 무성하고,

가지의 뻗어나간 모양이나 좌우 대칭의 형태가 장쾌하다. 넉넉히 사람 백명은 수용하겠다 싶은 짙은 그늘.

문둥이왕 테라스는 외벽과 내벽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테라스 위에서 내려서 벽면의 조각들을 보려고

계단을 내려서는데 아까서부터 졸졸 우리를 따라다니던 녀석들이 계단에 기대 쉬고 있었다. 원달러원달러,

아저씨 멋져요, 일불일불, 이러던 애들. 과거 왕의 테라스였던 이 곳이 녀석들에겐 기대어 쉼직한 휴식처이자

일터인 셈이다.

앙코르왓이나 앙코르톰의 해자에는 원래 악어들이 득시글거렸다고 한다. 요새도 조금 깊은 정글에는 악어가

여전히 야생으로 살고 있다 하고. 그만큼 그 사나움과 파워에 익숙해서겠지, 조각에도 악어가 심심찮게

등장했다. 흉폭한 모습 그대로지만, 살짝 생각에 잠긴 듯한 눈매와 턱의 모습이기도 하다.

얼굴 아랫쪽 벽돌이 떨어져 나갔더니 더욱 무시무시하다. 빨간 마스크 밑에 쫙 찢어진 입을 숨기고 다닌다는

'빨간 마스크' 아주머니 같기도 하고.

'헐벗은' 여성들의 조각도 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선이 굵어서, 왠지 이 여성들도 악어처럼 용맹스러울

거 같아 보인다.

이녀석 웃는 모습이란, 왠지 주는 거 없이 얄밉다. 빙글빙글대는 웃음이 입가에서 뱅글거리는 느낌.

테라스도 그렇고, 다른 시엠립의 사원들도 모두 일정 수준의 복원을 거친 터라, 이런 자국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사방에 흩뿌려져있던 돌무더기들에 하나하나 이름/번호를 붙여 차근히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는 것.

그러고 보니 어렸을 적 국사학자 내지는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었다.

뭔가 전투중인 장면이다. 날카롭게 조각된 돌칼들이 번득번득하고, 적군의 신체 중 아무데나 거침없이

겨냥되는 와중에 이 녀석은 왠지 술을 마시며 칼을 제편에 휘두르고 있는 것 같다. 병나발 불며 아군을

희생시키는 망나니 캐릭터랄까.

아...바이욘의 큰바위얼굴들 표정도 미묘하게 좋았었지만, 이 표정만큼 푸근한 건 그 전에도, 이 이후로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헤죽, 하고 큰 입을 쫙 땡겨벌리며 웃고 있는데, 눈도 가만히 따라 웃고 있다.




바이욘은 크메르왕국의 전성기를 구축했던 '자야바르만 7세'의 무덤으로 추측되고 있다. 바이욘에 있는 오십여개의

탑 네면에는 모두 사람 얼굴이 돌로 짜여져 있는데, 이 얼굴이 아마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로 죽고 나서도 왕국을

수호하겠다는 의지, 지켜보겠다는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해석이다.

바이욘에 들어가 돌아보기 전 한번 여행책자를 일별해 보았다. 뒤로 보이는 수많은 아이들은, 여행객의 복장, 말투의

힌트를 얻고 '안녕하세요 일달러, 니하오, 곤니찌와, 하이'를 넘나들며 조악한 악세사리를 다짜고짜 들이댄다.

자야바르만 7세, 앙코르왓 유적군의 대부분은 그의 치세 때 세워진 것들이다. 이름이 잘 안 외워진다면,

"잘 발음해봐" 자야바르만. 이제 한 큐에 외워버렸다.

캄보디아에 대한 몇 안 되는 이미지 중에 빠지지 않는 '압사라 댄스', 머리에 금탑같은 거 쓰고 손으로 인을 맺으며

추는 춤이 바로 이런 '압사라'들의 동작을 흉내낸 거다. '압사라'란, 태초에 세계가 거대한 우유바다였는데 그걸

신과 악마들이 휘저으며 세상을 창조할 때, 우유 거품에서 태어난 무희의 신들이다.

바이욘에 들어서니 이미 두 무리의 단체여행객이 회랑을 선점했다. 바이욘 회랑에 그려진 벽화를 따라 가이드의

선전을 들으며 그들이 진격하는 사이, 한쪽에 자리잡고 앉아 사간 용과(Dragon Fruit, 龍果)을 까먹었다.

삐딱하게 세워진 위험 표지판만큼이나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는 유적. 그렇지만 여긴 그래도 대표적인 곳 중 하나라

잘 관리되고 있는 축에 속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깨달았다.

돌에 새겨진 조각이라기엔, 드문드문 곰팡이도 슬고 퇴락한 것처럼 보여서 무슨 그림 같다. 그냥 자연 그대로의

돌덩이였다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저 씻겨지고 부서져 여전히 돌덩이 그대로였을 텐데, 사람의 손을 타고나니

돌에 시간이 새겨진다.

앙코르 톰은 4대문을 가진 성곽도시였다. 바이욘을 기준으로 남쪽은 귀족들의 거주지역, 북쪽은 왕궁과 사원이었다고
 
하며, 백성들은 악어가 사는 해자를 지난 성벽 외부에 살았단다. 돌로 만든 것들만 남아서, 지금은 가로세로 3km의

성곽과 내부의 왕궁, 사원들만 남아 있지만 이런 회랑의 벽화를 통해 과거의 모습을 그려볼 수가 있다.

얼굴이 숨어있는 돌탑들, 이정도면 차라리 얼굴이 스며들은 돌탑이라는 게 나을지도. 20만개가 넘는 돌들을 쌓아올려

만들어졌다는 이 얼굴들은 약간씩 표정이 다르다. 세월에 따라 버즘처럼 피어오른 얼룩이들이 뉘앙스와 표정을

바꿔놓았는지도 모르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저 두툼하고도 커다란 입을 벌려 껄껄 대고 웃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입을 벌려 혀를 움직이고 이를 부딪혀 무언가 말을 만들어낼 것 같기도 하다.

다소 양식화된 형태의 나무. 정글 지역의 나무답게 사방팔방으로 가지를 뻗었다.

코끼리가 한바퀴 돌았나보다. 바이욘 사원의 문간 너머로 문득 잡힌 코끼리.

알고 보니 흡연 금지, 쓰레기 투척금지, 식사 금지, 음...떠들기 금지.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그리고 사원이니만치

민소매 대신 반팔을 입으라는 지침. 반팔을 입으라는 건, 사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서양인들은 차제에

선탠까지 같이 하고 싶은 듯 다들 바짝바짝 짧게 입었고, 나도 벌써 흠뻑 젖은 옷을 보니 차라리 나시가 낫겠다싶다.

희끗희끗한 붓의 터치감, 약간 탁한 초록빛 풀빛이 섞인 진회색의 사원. 불투명수채화 화폭 가운데에다 대고

사람이 얼굴을 마구 눌러대는 것만 같다.

낙서란, 어쩔 수 없다. 아예 정과 망치로 새겨버린 듯한 이 오랜 낙서는, 어느 시점부터는 '유적'이 될 게다.

회랑을 지나 사원의 내부로 들어가는 길, 아무런 조명도 없는 그곳까지 스물거리며 기어들어온 정글의 햇살.

아래서 보면 살짝 웃는 거 같기도 하다. 훈남. 정면에서 볼 때랑 밑에서 볼 때랑, 이게 바로 얼짱 각도의 마법?!

원래 54개의 탑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약 40개가 안 되는 탑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 탑 중 하나 안에 들어가보니

하늘이 저멀리로 밀려나있다. 하늘을 길어내릴 수 있을 법한 거꾸로 '우물'이다.

"Hey Ya hey Ya Fire Fire 오 아가씨 Yeah ya Yeah Ya Warning Warning No No"(냉면, 명카드라이브 中)

명수 생각하다. 이정도 가파름이라면, 제시카를 업어야 한다. 근데 낼모레 마흔인 내가, 내몸도 추스리기 힘들텐데.

시카 생각하다. 이정도 가파름이라면, 명수 오빠를 업어야 한다. 에효. (팬픽 '금단의 사랑' 51부 中)

이 사자상의 매혹적인 뒤태. 돌로 조각해서 만들었다기엔 너무 유연하고 봉곳하다.

어이, 비웃지 말라고. 사자상 뒷태 좀 감상했기로서니. 가까이서 보면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것들.

압사라 댄스 무희 복장을 하고, 여행객들과 함께 사진찍을 준비를 하고 있는 젊은 처자들. 1 달러였던가, 나는

누군가 함께 찍힐 준비를 하고 있는 새 그녀들만 사진에 담아와 버렸다. 내가 들어있지 않아도, 내가 찍은

사진이면 만족한다.

누구라도 생각할 법한, 액자식 프레임 안에 담긴 '크메르의 미소'.

질문. 이 사진안엔 총 몇 개의 얼굴이 담겨 있을까요.

미소짓고 있는 압사라. 왠지 머리굵어지고 나서 석굴암에 다시 한번 가봤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거기에도 압사라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건 좀. 무슨 공포영화도 아니고, 얼굴을 정육점 회전분쇄기에 대고 갈아버린 것 같잖아. 근데 좋댄다.

돌들에 나 있는 구멍들은, 아마도 돌들을 서로 이어놓기 위한 이음새를 꼽아넣었던 자국 아닐까 싶다.
 
약간 폐허의 느낌처럼 돌조각들이 산재해 있는 바이욘의 내부 공간. 그래도 천년이나 무사히 버텨온 게 대단하다.

여긴 금세라도 이런 거대한 나무와 덩쿨들이 짖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은 '정글'이란 말이다. 악어와 원숭이들이

뛰놀고 뱀들이 쉭쉭거리며 한동안 인적을 끊어놓았을 그런 깊은 야생의 정글.

그 와중에 마주친 고양이 한마리. 꺄아~ 이 곳의 고양이도 한국의 고양이처럼 보드라운 털실을 신고 살금살금

사람 사이를 돌아다녔고, 살짝 뾰루퉁한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도도함을 잃지 않았다.

목이 잘려나간 수문장. 신화와 은유의 세계였던 그 때 사람들의 사고를 어찌 오롯이 이해하랴만은, 이 곳의

힘을 약화시키겠다며 수문장의 목을 꺽고 조각상들을 훼손한 침략자들의 심보야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어쩌면 발전한 건 인간의 도구일 뿐, 그걸 다루고 이용하는 인간은 별반 진보하지 않았다. 어쩌면 철저히

분업화되고 실제 생산활동에서 유리된 현대인은 생존능력이랄까, 어떤 면에서는 퇴보했는지도 모른다.

올록볼록 양감이 뚜렷한 탑들이 천년을 버티고 서있었다. 아기자기하게 인공으로 꾸며진 작은 돌산 같기도 하고.

떠나기 전 뒤돌아 바라본 바이욘의 전경. '크메르의 미소'는 숨어버리고 '크메르의 사원'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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