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까지는, 사랑하던 남녀의 이별, 갑작스레 '차인' 상황에 대한 메타포에 다름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홀연히 사라져버린 그녀, 빵빵하게 부풀었던 질긴 풍선처럼 자신의 세상 구석구석까지 채웠던 그녀가

 

남기고 간 결핍감, 공허감, 그리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현실부정의 몸부림까지. 대체 왜 사라져버린 건지 감도 잡지 못한채

 

그저 몇몇 단서로 더듬거리듯 추측이나 해볼 뿐인 상황에서 남자는 때로는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만큼의 슬픔과

 

비통함을 토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라져버린 여자에 대한 광기어린 분노와 질투, 증오를 폭발시키던 거다.

 

 

살아가면서 맺는 대부분의 인간관계란 게 고작 핸드폰 번호 하나, 이메일 주소 하나 만으로 간신히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누군가를 떠난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참 쉬운 건지도 모른다. 전화를 꺼버리고 이메일 계정을 삭제한 채

 

커다란 알사탕에 바글바글 꼬여있는 개미떼같은 인간들 틈속으로 슬쩍 스며들면 그뿐이니까. 그렇지만 급속도로 불어난

 

인류의 비대해진 몸집을 전혀 따라잡지 못한 인류의 마음이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서, 남자는 칼처럼 자신을 끊어버리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버리고 만 여자를 좀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다. 이제 그녀가 어떤 성격이었는지, 누구였는지,

 

어떻게 웃었으며 말할 때 버릇이 뭐였는지, 자신이 알던 그녀가 그녀가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음에도.

 

 

믿기지 않는, 도무지 현실같지 않은 현실에서 남자는 떠나간 여자의 온기를 찾는다. 그녀가 자신의 옆에 잠시일지언정

 

함께 누웠고, 웃었으며, 꿈이 아닌 '레알'로 존재했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것 뿐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시간과 기억을

 

배반하고 부정하지 않으려는 그 숭고한 의지는 대개의 경우 상대의 싸이나 카톡 사진을 들춰보는 걸로, 술에 취한

 

새벽 두시쯤 전화 한번 해보거나 여차하면 집앞에 찾아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걸로 귀결되기 마련이지만, 영화 속

 

남자는 여자의 뒤를 쫓으며 예기치 않은 어둠의 장막을 들춰보게 된다. 계획된 살인과 본격적인 정체성의 은폐공작.

 

 

스릴러가 풀려가는 방식보다 더욱 재미있었던 건, 그 모든 걸 일종의 메타포로 읽어내렸을 때 남자의 반응이었다.

 

남자는 왜 여자의 뒤를 기를 쓰고 쫓으려 했을까. 남자는 왜 여자의 옛 남편까지 만나보려 했을까. 남자는 대체 왜,

 

기어이 여자를 만나고 껴안고 다시 놓아줬을까. 자신이 그녀와 함께 했던 사랑의 순간들이 그녀의 배신으로 한순간에

 

부질없는 조각들로 무화되는 걸 막아내려 필사적이었고, 그렇게 지켜낸 사랑의 이야기(서사)에 나름의 소망이 담긴

 

엔딩을 그려보려 하는 안간힘은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그는 그녀가 시든 꽃잎처럼 나풀거리며 낙화하는 그 순간을 막아보겠다고 기를 쓰고 내달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가 바라던 건, 그녀가 끝내 살아남는 것. 자신과 함께 했던 순간들, 마지막으로 마주서서 끌어안았던 순간의 진정성을

 

놓치지 않은 채 그래도 한조각 가슴에 품고 살아갈 만한 진심을 건네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절대 잡히지 말고

 

어디서던 무슨 이름으로 어떤 얼굴로 누구로 살아가던 간에 꼭 살아남기를 바랬던 건지도 모른다. 남자와 여자가 했던

 

사랑을 지켜내기를,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배신당하지 않기를 바랬던 게 남자의 깊숙한 속내 아니었을까.

 

 

그랬다면, 여자의 선택은, 코너에까지 몰려버렸다고는 해도, 그의 기대와 소망을 다시금 흔들어버린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와 그녀가 함께 했던 시간동안의 '사랑'에 대한 남김없는 배신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고 머릿속에 남는 건, '아기코끼리' 체위란 걸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 정도?

최강희는 늘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배우이고 이선균 역시 부드러운 목소리에 섬세한 눈빛이

꽤나 인상적인 배우라고 생각하지만, 스토리가 영..뭐랄까, 응, 쩨쩨했다.


아예 '섹스앤더시티'류의 거침없는 섹스담도 아니고, 그렇다고 둘의 러브라인을 치밀하게

그려내며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도 아니고, 만화라는 소재가 잘 버무려졌다기보다는 그냥

장식처럼 주렁주렁 엮여있는 느낌. 발칙하지도 않고, 깊이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스토리가

흡인력이 강력하지도 않고.

그래서 아기코끼리 체위만 머릿속에 남아있다가, 작년 인도 출장 때 사왔던 '카마수트라'에

비슷한 체위가 그려져 있었던 게 떠올랐다. 앉거나 누운 남자의 위에 여자가 등을 돌리고 앉아서

마치 아기코끼리처럼 팔다리를 곱게 모아 붙여서 움직이는 자세. 뭐,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대충 변형된 자세라고 보면 될 듯. 여하간, 사진 공개~! 참고하시길.






 



이선균이 부러웠다. 여복(女福)이구나. 그는 첫사랑인 두살 연상의 운동권 누나와, 파주에 내려와 만난

착하고 발랄한 아내와, 그리고 어리지만 강렬한 매력의 아가씨, 아내의 여동생까지 만수산드렁칡처럼

이리저리 얽힌 거다. (게다가 그녀는 근래 내가 기대감을 품고 영화를 찾아보게 만드는 '서우'란 말이다.)


그가 첨엔 멋져보여서, 나중엔 받은 게 많아서 계속한다던 철거민대책위원회 등 사회 운동, 그건 첫번째

첫사랑과의 접점이자 그녀를 기리는 그만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이상 계속하는 이유를 못

찾으면서도 추억을 되새기듯, 그녀에게 인정받겠다는 듯 철거촌에서 화염병을 던진다. 아내 역시 그의 삶에

늘 존재한다. 파주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로, 첫사랑과의 관계에 대한 죄씻음의 고백으로.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다,는 고백은 아내를 여전히 놓지 못하는 그의 마음을 거꾸로 보여주기도 한다. 계속 허점을 내보이고

유인해내다가 끝내 입술을 덮치고 단추를 끌러내린 서우에 대한 맘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가 누구를 사랑하는 걸까, 어느 순간 헷갈리기 시작했다. 여복이라기보다 여난(女亂)이란 단어가 가깝겠다

싶어지기도 했다. 어느 마음 하나 스쳐가거나 가짜였던 것은 아닌 거 같은데. 어느 것 하나 놓지 않은 거라면,

어느 순간부터 두 번째, 세 번째 사랑이 시작된 걸까, 그건 아예 구분조차 못하겠다. 아무리 사랑이란 감정이

칼로 잘리듯 툭 끊기고 툭 시작되는 감정이 아니라지만, 어쩌면 그는 영화가 끝나도록, 그가 삶을 다하도록 

세 명 모두를 가슴에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우 역시 혼란스럽긴 매한가지. 그녀는 언니를 위한다며 형부를 미워하고, 사랑하고, 떠나고 돌아온다.

그녀가 놓인 세속의 문제들-보험금 문제라거나 사고 원인이라거나-따위가 그녀 내면의 모순과 뒤숭숭함을

더욱 강화하는 거다. 그녀는 언니에 대한 사랑과 형부에 대한 사랑 사이에 끼인 채, 언니와 형부의 사생활을

불편함과 호기심이 복합된 눈초리로 바라보고, 언니를 위한 가출에 형부 사진을 잘라 품고 간다.


파주는, 계속해서 안개 속이다. 파주로부터 나가는 길, 들어가는 길 모두 몽환적이게도 짙고 무겁게 떠도는

안개 속에 잠겨 있다. 뭐 하나 뚜렷하지도 칼처럼 구분되지도 않는 그런 안개속, 이선균과 서우는 파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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