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거기서 왕의 계곡 입구까지가 또 500미터다. 자전거를 묶어두고 왠 모노레일같은-에버랜드에서 본 듯한-차를

타고서야 제대로 도착해서, 람세스 6세가 묻혀있는 무덤부터. 아직도 그 색이 그토록 선명하게 남아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루트모스3세나 람세스2세 모두 공사중이어서 세크메트랑 람세스9세의 무덤을 들어가봤는데, 이제서야 좀

히에로글리프랑 그림들이랑 친해진 느낌이다. 왠지 소화가 좀 되는 듯 하달까. 여태까진 그 압도적으로 수다스런

그림들에 다소 질렸거나 소화불량에 걸린 것 같았다.

내려와 돌아오는 길은 쉬웠다. 그 모노레일같은 차에 일단의 여행객들을 태우고 출발하려던 가이드 하나가 나를

자신 옆자리에 끌어앉혀주는 덕분에 난 공짜로 그 웃긴 차를 타고 내려왔고, 그 아저씨의 '안녕히 가세요'란 인사를

받으며 신나게 자전거를 달려 내리막을 주파했다. 그대로 Tombs of Nobles로.

뜻밖에도, 그 무덤군이 소재한 구릉들 위에 그대로 왠 판자촌 같은 마을이 세워져있다. 경찰할아버지가 굳이

붙여주려던 가이드를 사양하고 올라가다가, '야방'이라는 이름의 꼬마애한테 잡혀서 길안내를 받게 되었는데,

이녀석 상당히 착실하고 눈치도 빠르다. 일본인 여행자들이 야방, JAPAN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 했다.

7개나 되는 띄엄띄엄 떨어진 무덤들을 도는 동안 별 얘기없이 밖에서 계속 기다려주고, 열쇠를 가진 무덤지기

아저씨들도 열심히 불러다 준다. 애초 가이드가 없이는 잠긴 문 너머 무덤들을 들어갈 수가 없었던 거였다.

막판에 혹시나 하고 물병을 건네니 몹시 목이 말랐던 듯 순식간에 다 마셔버리는 걸 보고 조금 미안해지기도 했다.


워낙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긴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Senifer의 무덤이다. 천장이 온통 싱그런 보랏빛깔

포도덩굴과 포도그림이었다. 그린지 몇년 되지 않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잘 보존된 데다가, 워낙에

색감이 이뿌게 잘 표현되어있었다. 어찌나 멋지던지 무덤밖으로 나오기가 싫을 정도였다. 나머지도 모두 멋졌다.

정형화되고 위엄을 부리려다 다소 딱딱해진 느낌의 왕들보다 훨씬 자유로워보이는 그림 스타일에, 풍경화같이

그려진 일부 이색적인, 실험적인 그림들, 카르투쉬와 히에로글리프가 아예 없거나 적당히 감해져 있어서 더욱

그 참신함이 돋보였던 것 같다.

그 무덤 중 하나였던 듯 한데, 사실 이집트의 Hieroglyph란 거, 저런 식으로 모두가 채색되어 있었다는 거다.

왠지 예기치 못한 색깔의 선택,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다채로운 색감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림을 상상할라치면...

이집트 외딴 오아시스 마을에까지 수다떨 준비가 되어있는 그들의 넘쳐나는 유산들을 본다면, 거기가 아마도

상상력의 경계쯤 되지 않을까.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자전거에 실었던 2리터들이 물통 세개가 반나절만에 비어버렸다. 너무 지쳐서 중간에

기념품점에 들어가서 콜라 한병 마시며 구경하다가, 무덤에 가서도 지하에 위치한 덕에 품고 있는 냉기에

감사하며 한참이나 쉬고, 그렇게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끝내 람세스3세의 신전...메디나 하부까지 돌아봤다.


그가 여느 왕들보다 훨씬 깊이, 그리고 강박적이다 싶을 만큼 많이 파놓은 왕의 상징, 그의 카르투쉬를 보고

있자니 왠지 비감함이랄까 안쓰러움마저 들었다. 보통 남들은 1센티정도의 깊이로 카르투쉬를 조각해 놓는데,
 
그의 것은 무려 4-5센티? 그 정도 깊이로 조각해 놓았댔다. 애비에 대한 자격지심이었을까, 아니면 잊혀지는

게 그토록 두려웠던 걸까. 왠지 군대 갈 즈음의 내가 떠올랐다.


* 왕의 계곡 입장권 퍼레이드.









생각같아선 6시에 딱 룩소르 서안에 도착하고 싶었지만, 자전거를 빌리는 게 아무리 빨라야 7시가 넘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아침삼아 간단하게 바싹 마른 팥빵..? 파이 비슷한 걸 먹고 출발했다. 내셔널 페리 선착장이 워낙 머니까 그냥

자신들의 펠루카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라 했던 펠루카 호객꾼의 구라와는 달리, 자전거로 한 10초 달리니까 바로

선착장이 나온다. 정말, 딱 10초 달렸는데 선착장이 나왔다. 대단한 구라빨이라 해야할지..

신나게 좀 달린다 싶을 때 덜컥 멤논의 거상이 나왔다. 네이*에 빌어 나온 자료사진, 이왕 찾아본 김에 설명도 좀

덧붙이자면 테베 근처 왕실 무덤군인 네크로폴리스의 입구에 있는 이 거상은 로마시대에 각광받았던 관광지라고

전해진다. 실제 크기는 이렇게 사진으로 볼때보다 훨씬 더 크단 느낌은 있지만, 워낙 허물어져서 그런지 뒤의 황량한

돌산과 함께 그저 황폐하단 느낌이 짙었다. 그래도 이 거상들이 왕과 왕비들, 귀족들의 무덤을 지키고 있는

수호자들이었을 거란 생각을 하니, 자전거 페달 밟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무덤 중 가장 볼만하다는 네페르타리 여왕의 분묘는 역시나 닫혀 있다는 이야길 듣고 살짝 실망했다. 가장 먼 왕의

계곡부터 갔다가 고만고만하게 붙어있는 나머지 무덤군들을 좀 더 지나 해가 중천에 뜨고 더워질 때 돌아볼 작정으로

페달을 밟았는데 무진장 힘들다. 온통 그늘 한 점 없는 아스팔트 도로 위를, 그것도 약간 오르막길인데다가 벌써부터

미친듯이 무덥다. 해서 길을 틀어 합셋수트 신전부터.

어디선가 한번쯤 본 듯한 건물이다. 아마도 인디아나 존스였던가, 뭐 그런 데였을 거다. 돌산을 깍아내고 또 가공한 돌을

차곡차곡 이어붙혀 만든 건물이라는데, 크기도 크기지만 그 위치가 정말 절묘하다. 산 중턱에 덜컥 붙어있는 모양새랄까,

산은 온통 붉은 빛. 보기만 해도 가슴이 황량해지고 마는 그런 무생물스러운 산이다. 생명체 하나 품지 않을 것 같은 산.

신전도 같은 빛깔이다. 죽은 이들만 품을 듯한 느낌의 황량한 신전.

그런데 또 그쯤에서 룩소르를, 나일강 동안을 되돌아보면 온통 초록빛이다. 뭔가, 인디아나 존스가 식인종이 우글대는

정글이 지난다거나 온갖 고초를 겪은 후 짜잔, 하고 나타나는 낙원 샹그릴라나 잃어버린 성지처럼 그렇게 어슴푸레

나타난다. 야자수도 잔뜩 보이고, 약간의 건물을 제하면 마치 환영인 양 신기루처럼 펼쳐지는 싱그런 녹색 대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하다가 거기서 일하는-아마도 가이드인양 박시쉬를 잔뜩 뜯어낼 법한-아저씨들이 모여앉아

있다가 날 부른다. 경계모드로 돌입, 일단 순순히 가보니까 밥먹었냐고, 같이 빵이랑 차 먹자고.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한테 일일이 박시쉬-팁-을 주지는 않아도 될 거고, 먹고 보자는 속셈 반, 꼬질꼬질하고 새까맣게 타버린 내가

2리터들이 물병 세개를 든 채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게 얼마나 불쌍했겠나 하는 공감 반, 함께 앉았다. 히에로글리프가

잔뜩 남아있는 돌멩이를 깔고 앉아 아저씨들과 함께 빵과 차를 나눠 먹었다. 여전히 발굴중이거나 복구중인 모양인지,

유적 잔해들이 걍 난해하게 흩어져있는 걸 아저씨들은 의자로 쓰고 있었다.

잠시 쉬다가 인사하고 다시 왕의 계곡으로, 어찌나 먼 길이던지. 게다가 그 먼 길에 어떻게 표지판 하나가 없을 수

있는지. 그러고 보니 시와 오아시스 마을도 그렇고 어디에서든 투어 위주로, 투어가 제일 편하도록 해 놓았을 뿐

개별 여행자들을 위한 배려나 안내표지판 같은 것에 꽤나 인색한 것 같다. 땀을 삐질대며 구비구비 고갯길을

돌아오를 때마다 실망하길 몇 차례, 지쳐빠질 때쯤, 혹은 길 잃은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할 즈음 나타난

왕의 계곡 매표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