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

인도 역사의 특징

인도는 다양한 인종, 종교, 언어, 생활풍습에도 불구하고, 아시아대륙과지리적으로 차단된 특수성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독특하고 개성적인 문화를 이루어 왔음.

○ 5,000년 이상의 긴 역사 중 정치적 통일을 이룬 시기는 마우리아왕조(B.C.321-185), 굽타왕조(A.D.380-606) 및 무갈왕조(A.D.1526-1858) 등 3개 왕조에 불과하며, 북서부지역은 외부세력 침입의 출입구가 되어 그리스, 훈, 터키족 같은 외부 세력과의 항쟁 속에서 성쇠를 거듭하였으나, 데칸고원 등 남부지역은 지형적 요인으로 인해 외부세력의 침입을 비교적 적게 받아 왔음.

고대

○ 인더스 문명(기원전 3000-2000)

- 세계 4대문명 발상지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 유역에서 기원전 3,000~2,500년경부터 약 500년간 번성한 고대 문명으로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등의 유적이 있음.

- 고도로 발달된 후기 청동기 문명의 단계로서, 종교는 다신교, 정치 체제는 제사장 중심의 공화제를 형성함.

○ 아리안 문명(기원전 2000-1000)

- 인도 문화의 원형은 상당 부분 아리안족이 인도 대륙 침입 후 정착하면서 이루어졌음.

- 사제 계급인 브라만 중심의 제사 의식과 신에 대한 찬양 등이 집대성된 리그베다 등 베다문화가 이 시기에 형성됨.

○ 도시국가의 형성

- 기원전 7세기경에 이미 상당한 세력을 지닌 도시국가들을 건설

- 정복전쟁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마가다 왕국은 알렉산더왕의 침입 때까지 난다 왕조와 더불어 인도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을 유지하였으며, 기원전 500년경 불교 및 자이나교가 발생함.

중/근세

○ 마우리아 제국(기원전 321-185)

- 3대왕인 아쇼카왕(BC 272~232)은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남서부의 타밀지역을 제외한 전 인도를 통일하고, 포교에 힘써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함.

○ 쿠샨왕조(78-226)

- 쿠샨족 카니슈카왕이 서쪽으로 이란, 동쪽으로 중국의 한나라, 남쪽으로는 인도대륙의 중심부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함.

○ 굽타왕조(380-606)

- 찬드라 굽타 2세(380-413) 시대에 문화적 르네상스를 구가하였으며, 불교, 힌두교 및 자이나교 등이 융성, 부흥했음.

○ 무굴제국(1526-1858)

- 데칸을 제외한 인도의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을 아우르는 대제국이 건설되었고 악바르 이후 150년 간 전성시대가 지속됨.

- 이슬람교가 번성하여 타지마할 등 이슬람 관련 유적을 남김.

- 1707년 이후 지방토후의 발호, 서구열강의 침입으로 약화됨.

- 1757년 영국이 프랑스와의 플랏시 전투에서 승리함.

- 1857년 영국이 세포이 반란을 진압한 후 영국의 직할지로 편입됨.

근대

○ 반영 독립투쟁

- 18세기 후반에 생겨난 많은 정치단체 중, 1885년 결성된 "인도 국민회의"가 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함. 특히, 독립운동에 대한 영국의 냉담한 반응에 대응하여 보이콧 및 스와데시 운동이 전인도로 파급되게 됨.

- 이에 대해 영국은 분할통치 정책을 취하여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간 대립을 조장하였으며, 1906년에는 국민회의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영국의 배후 지원을 받은 회교도 연맹을 결성함.

- 1차 대전 이후 인도 국민회의는 마하트마 간디의 지도하에 영국이 제시한 자치령 지위를 거부하는 등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많은 인도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반해 회교도 연맹은 파키스탄의 분리를 요구함.

○ 독립

- 2차 대전 후 영국은 인도에 독립을 부여하기로 결정하고,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방안을 제시한 바, 동 제안을 국민회의가 수락함으로써 인도는 1947.8.15 영연방의 자치령으로 독립하게 됨.

현대

○ 인도 헌법 채택

- 1947년 8월 15일 독립과 함께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가 초대 인총리에 취임한 후, 1949년 제헌의회에서 연방제와 민주주의를 골자로 한 헌법이 채택되고, 1950. 1월 발효됨으로써 영연방 자치령의 지위에서 탈피함.

○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강화

- 한편, 독립 당시부터 파키스탄과는 종교적, 영토적 분쟁으로 1947. 10월, 1965. 6월, 1971. 12월 등 3차례 전쟁을 치뤘으며, 중국과는 국경문제인해 1962년 전쟁을 겪는 등 주변국들과 마찰을 겪기도 했으나 비동주의와 균형 및 실용주의를 적절히 추진함으로써 꾸준히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강화시켜 옴.

○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 시현

- 국내 정치적으로 국민회의당(Congress Party)이 정권을 독점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서구식 의회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추진해 오다가 1990년초 경제상황 악화에 따라 1991년 신경제정책을 채택하여 경제개혁 및 개방정책을 실시함. 1990년대 이후 국내 정치권력은 국민회의당․BJP 양대 정당과 군소 정당들이 합종연횡하면서 연립정부를 구성해 오고 있으며, 경제개방 및 개혁의 성과로 꾸준히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시현하고 있음.

정치 개황

국내 정치의 특수한 여건

인도의 국내정치에 영향을 주는 주요 요인으로는 일반국민의 민주의식, 언론자유의 보장, 관료제도, 군부의 중립성, 사법부의 독립 등 긍정적인 요인들과 카스트 제도, 종교간 대립, 빈부격차, 지방주의, 취약한 정당기반 등 부정적인 요인들이 있음.

○ 인도의 고질적 사회풍습인 카스트제도를 타파하고 특히 전체국민의 22.5%에 해당하는 최하층민(Scheduled Caste와 Scheduled Tribe)과 52%에 해당하는 하층민(Other Backward Castes)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향상 문제는 인도정치가 안고 있는 최대 과제 중의 하나임.

- 오랜 인습은 타파되지 못하고 있으며, 일부 지방에서는 무력충돌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음. 2006년에는 정부의 OBC에 대한 국립대학 입학할당제도 도입 방안추진계획을 둘러싸고 찬반논쟁이 가열되기도 함.

헌법과 정부형태

○ 1950년 1월 26일 공포된 헌법은 22장 395조 및 부칙 9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특징은 아래와 같음.

-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 공화국 표방

- 종교 무차별주의로 신앙의 자유 허용

- 주정책에 대한 지시지침(Directive Principle of State Policy)을 통해, 부의 공정하고 적절한 분배 및 생산수단의 집중방지 규정

의회 민주주의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연방국가로서 의원내각제의 정부형태를 취하고 있음.

- 연방은 28개 주(state, 2000년도에 3개 주 신설)와 7개 연방 직할지(Union Territory)로 구성

○ 각 주에는 주 정부와 주 의회가 있음. 주를 대표하는 주지사(Governor)는 5년의 임기로 대통령이 임명하며 주행정의 실권은 주지사가 주 의회 다수당 지도자 중에서 지명하는 주 총리(Chief Minister)가 장악함.

입법/행정/사법부

○ 상원(Rajya Sabha)은 각주 및 연방 직할지 의회에서 간접 선출되는 238명 및 대통령이 임명하는 12명 등 총 250명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6년으로 매 2년마다 1/3씩 새로 선출함.

○ 하원(Lok Sabha)은 각주 및 연방 직할지 대표 543명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Anglo-Indian community 대표 2명 등 총 545명으로 구성하며, 임기는 5년임.

행정부는 대통령, 부통령, 총리 및 각료회의(Council of Ministers)로 구성됨.

- 대통령은 5년 임기로 상‧하 양원 및 주 의회 의원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하여 간접 선출되며, 국가원수로서의 상징적 역할 수행함.(군 최고통수권 보유)

○ 사법부는 연방 대법원(Supreme Court of India), 주 최고법원(High Court), 지방법원(Lower Court)으로 구성되는 3심제임. 대법원은 인도 헌법과 법률에 대한 궁극적인 해석권을 가지며 대법원의 판결은 모든 법원에 대해 구속력을 가짐.

외교

대외정책의 기조

1947년 독립이후 인도의 외교정책을 지배해 온 기본적 원칙은 “네루외교노선”에서 비롯된 비동맹주의와 균형주의 원칙이며, 이와 같은 외교기조는 인도가 처한 특수한 외교 및 안보환경 즉, 광대한 국토와 복잡한 사회적 구조로 인해 국가적 단결이 독립초기의 최대의 관심사였고 대외정책 선택에 있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친 정책결정을 내리기 곤란한 국내적 제약조건에 기인한 것이었음.

- 인도는 독립 당시부터 패권주의 반대, 군사동맹 가입 반대, 국제분쟁평화적 해결 및 모든 국가와의 우호관계 수립 등 비동맹회의와 유사기본이념을 대외정책의 기본노선으로 표방하면서 비동맹운동의 창설을 주도하였고 비동맹주의를 대외정책의 기조로 삼아 왔음.

최근 외교정책 노선

점차 과거 비동맹 외교노선에서 탈피하여 고도 경제성장의 지속적 달성을 위한 실용주의적, 친서방적 외교정책 노선을 강화하는 추세이며, 특히 미국과의 관계 강화가 아시아의 세력 균형에 기여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음.

- 1990년대 후반 이후 현저하게 대미국관계 강화를 시도하는 실용주의 노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2004년 재집권한 Congress당 중심의 UPA 연합 정권 하에서도 이러한 추세가 지속되고 있음.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등 부상하는 global power로서의 국제영향력 확대 노력을 가속화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G-4와의 협력 유지를 통한 외교노력을 경주하고 있음.

서남아 지역의 중심국가로서 지역분쟁 예방, 정세 안정화 및 역내 영향력 유지․확대를 위한 외교적 지도력를 추구하며, 특히 주변국가들에게 군림하던 과거의 형태를 벗어나 서남아지역연합(SAARC)의 활성화 등을 통한 전향적이고 유연한 지역 외교 노선으로 전환중임.

고도 경제성장에 필요한 에너지 확보를 외교정책의 최우선 과제의 하나로 추진하고, 특히 원자력 에너지협력을 위해 미국, EU, 러시아, 중국 등 기존 핵보유 국가들의 지원 확보를 위한 다방면의 외교노력을 기울이고 있음.

○ 동아시아 정상회의(EAS) 출범을 통한 장기적 East Asia Community 구상 추진, ASEAN과의 FTA 협상 마무리, 한국과의 FTA(CEPA) 협상 개시, 중국 및 일본과의 FTA 타당성 검토 등 동아시아권과의 지역 협력 강화를 통한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고 있음.

인도-파키스탄 관계

○ 카슈미르 문제는 대 파키스탄 외교정책의 가장 큰 부문으로서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 이후 카슈미르(Kashmir) 지역에서 계속 일어나는 영유권 싸움이며 회교와 힌두간의 대표적인 종교적 갈등임.

○ 인도·파키스탄 전쟁

- 카슈미르 지역 영유권 분쟁은 1947년 영국 식민지하의 인도가 신생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될 당시, 동 지역 인구의 절대다수(77%)를 차지하는 회교도측이 파키스탄에 귀속코자 파키스탄 정부군의 지원하에 반란을 일으킴. 이에 대해 동지역의 힌두교 영주(Maharaja)가 인도정부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여 1947. 10월 제1차 인도·파키스탄 간에 전쟁이 발생하였고, UN의 거중조정에 따라 휴전선이 설정됨.

- 1965. 7월 양국간 다시 전쟁(제2차 인·파 전쟁)이 발발하였으나, UN 안보리의 노력으로 휴전됨.

-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을 둘러싸고 제3차 인·파 전쟁이 발발

○ 2003년 양국 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 분쟁을 종식시키는 노력과 동시에 그동안 끊겼던 항공 운항을 2004. 1월부터 재개하고 2005. 10월 발생한 대 지진과 관련 카슈미르 지역에서 양국 공동 구조 활동을 펼치는 등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있음.

○ 그러나 2006. 7월 뭄바이열차 연쇄폭탄테러로 인해 약 2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인도 측은 동 테러를 일으킨 단체가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두고 있음을 이유로 7월에 예정되어 있는 외교차관 회담을 무기한 연기함.

2006. 7월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개최된 SAARC 상임위원회(Standing Council) 회의를 계기로 양국 외교차관 회담에서 양국은 평화구축 과정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단 공감하였으나, 구체적인 다방면 대화의 추후 일정은 정하지 못함.

○ 2006. 8월 파키스탄이 자국내 인도 외교관을 외교관 신분에 적절치 않은 행동을 한 혐의로 추방하자, 인도도 맞바로 자국내 파키스탄 외교관을 추방하는 사건이 발생함.

뭄바이 테러 사건 발생(2008.11.26-29)

- 10명의 테러리스트가 중무장한 채 해상을 통해 뭄바이에 침투, 11월 26일 밤 10시경부터 동시다발적 무차별 테러 공격 감행함.

- 약 170명이 사망하고 3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테러범 9명을 사살하고 1명 생포하여 테러를 진압함.

- 파키스탄 정부는 이번 테러와 파키스탄 당국과의 관련성을 계속 부인해 왔으나, 파키스탄 무장단체 ‘라슈카르에타이바’(LeT)와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짐.

- 이 사건을 통해서 군병력의 국경 재배치 움직임이 일어나고 양국간의 갈등이 다시 고조됨.

남아시아 지역협력 연합(SAARC)

○ 국제무대에서의 상호협력을 도모하고 역외개도국 및 타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증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아시아국가간 지역협력 기구로서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에 이어 두 번째로 창설됨.

- 경제, 사회, 문화, 과학‧기술 분야의 발전 모색(정치, 군사문제 제외)

-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네팔, 몰디브, 부탄, 아프가니스탄 등 서남아 8개국이 회원국이며, 한국, 중국, 일본, 미국, EU가 옵서버로 가입함.

역내국가간 국력의 불균형과 회원국간 다양한 갈등 및 대립 등 어려운 문제가 있으나 회원국 상호간의 공동체 인식과 함께 협력분위기 조성에 기여하는 바도 있음.

사회

카스트(Caste) 제도

○ 수천 년 간 인도인의 생활을 규율해 온 카스트 제도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고, 근대화 및 교육의 영향으로 점차 약화되고 있으나 아직도 많은 인도인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관습으로 존재하고 있음.

○ 카스트제도는 아리안 족이 인도를 정복한 후 소수집단인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동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짐. 피부색 또는 직업에 따라 승려계급인 브라만(Brahman), 군인‧통치계급인 크샤트리아(Kshatriya), 상인계급인 바이샤(Vaisya) 및 천민계급인 수드라(Sudra)로 크게 나누어지며, 이 안에는 다시 수많subcaste가 있음. 최하층 계급으로는 불가촉천민(untouchable)이 있음.

○ 최초에는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으나 오랜 역사적 흐름과 더불어 다른 카스트와의 결혼 불허 등 많은 금기를 가진 사회규범으로 굳어져 인도인들은 자기가 속한 카스트의 행위범을 준수해야 했었음. 이러한 계급제도는 인도사회를 안정시키고 결속시키는데 도움이 된 면도 있다고 하나, 인권을 침해하고 사회를 정체시켜 활력을 잃게 하는 부정적 영향이 큼.

마하트마 간디를 포함한 많은 사회개혁운동가들은 불가촉 천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위해 노력하면서 불가촉 천민들을 ‘신의 자식’이라는 뜻에서 하리잔(Harijan)으로 부르고, 이들이 힌두 사원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천민보호에 앞장섰음.

- 오늘날 인도에는 1억이 넘는 하리잔이 있는 바, 정부에서는 입학, 취업시 일정비율을 하리잔에 배정해 주는 등 혜택을 주고 있어 하리잔 출신이 장관까지 된 경우도 있으나, 농촌에서는 아직도 카스트제도가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임.

언어

○ 다양한 인종과 더불어 180여종이 넘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헌법으로 인정한 지역별 공용어는 18개임.

- 힌디어, 텔루구어, 벵갈어, 마라티어, 구자라트어 등

이중 인구의 38.7%가 사용하고 있는 힌디어는 전국적 공용어이며, 영어는 18개 공용어에 해당하지 않으나 의회, 행정부, 사법부 및 사각 분야에서 널리 사용하는 공용어이자, 학력이 높은 층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함.

복장

○ 남자 : 고유의상으로는 도티(Dhoti), 룽기(Lungi), 아즈칸(Achkan), 파자마 등을 들 수 있음. 그러나 도시에는 하절기에 사파리가 널리 사용되고 있음.

- 도티 : 동부‧남부지방에서 많이 입는데 긴 천을 밑으로 늘어뜨린 후 다시 허리춤으로 올려 동여 입는데 흰색의 얇은 천을 사용함.

- 룽기 : Kerala 등 해안지방에서 많이 입는데 좁은 폭의 천을 늘어뜨린 후 허리를 동여 입음.

- 아즈칸 : 네루 전 총리가 즐겨 입었던 목이 올라온 제복 스타일의 옷

- 파자마 : 우타르 프라데쉬 주에서는 무릎 아랫부분이 꼭 끼는 추리다(Churidar) 파자마를 입으며 Punjab에서는 헐거운 쿠르타(Kurta)를 입음. 흰색 천을 주로 사용함.

- 사파리 : 하절기(4월-11월)에 많은 도시인들이 즐겨 입는데 공식적모임에서는 점차 양복, 넥타이 차림이 조금씩 늘어가는 추세임.

여자 : 사리(Saree)라는 고유의상을 주로 입는데 지역에 따라 매는 방법, 천의 길이, 천의 개수가 다름.

- 입는 방법은 천을 허리에 감아 맨 다음 어깨에 걸쳐 밑으로 내려 입음. Punjab 지방에서는 사르와르 카미즈(Salwar Kameez)라는 상의가 길고 바지가 넉넉한 옷을 입으며 우타프라데쉬, 라자스탄, 구자라트에서는 가그라(Ghaghra)라는 긴 스커트를 입음.

문화

○ 베다문화(B.C.2000-500)

- 아리안 족의 침입 후 형성된 베다문화는 인도의 종교‧사회‧관습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힌두교를 탄생시켰으며, Veda와 같은 대서사시적인 경전을 발전시켰음. A.D.6세기-10세기를 통해 힌두문화는 건축․조각․회화 등 각종 예술 분야에서 번창했으며 힌두사원 등 많은 기념비적인 힌두문화 유물을 남겼음.

○ 불교문화(B.C.500-A.D.1100)

- 불교문화 전성기는 B.C. 3세기 야쇼카대왕 시대로 산치대탑, 보드가야의 대탑, 녹야원의 석탑, 아잔타․엘로라 동굴 조각 및 건축 예술에서 절정을 이룸. 아울러 불교는 중국, 한국 및 동남아 등 여러 나라로 전파됨.

○ 이슬람문화(A.D.1100-1600)

- 이슬람문화는 특히 건축에서 페르시아 및 힌두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조화를 이룬 대표적 양식으로, 초기의 상호배척을 점차 극복하고 상호간의 종교적 관용이 정착하면서 우루두어의 탄생 등 언어, 문화, 음악, 미술 분야에서도 많은 공헌을 함.

○ 서구문화의 영향(A.D.1700-1947)

- 250년에 걸친 영국 지배하에 인도예술, 특히 전통회화분야에서 서구 예술의 영향을 받음. 또한 영어의 도입과 함께 생활양식의 변화와 문학의 발전을 가져옴. 그러나 힌두문화는 상당부분 그대로 전승됨.

○ 독립이후(A.D.1947-현재)

- 독립 이후, 전통문화 창달과 문화유산을 보호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문학, 음악, 무용, 연극, 미술 등의 진흥을 위한 국가적 지원문화재 발굴, 보존, 전시 등을 위한 박물관, 문화재 관리국 등 국가행정기관을 통하여 현재 문화와 함께 전통문화를 조화시켜 나가고 있음.

교육

○ 교육의 기본정책은 지역 간의 교육격차해소, 전 계층 간의 균등한 교육기회, 국가사회 요구에 부응하는 인력자원개발 등에 목표를 두고 14세까지의 무상의무교육, 영어, 힌디어 및 주 공용어 등 3개 언어교육, GNP의 6% 교육투자 등을 통해 중앙정부와 주정부가 공동 노력하고 있음.

학교교육은 10+2+3의 15년 과정의 교육제도로써 1968년도 채택 후 현재 거의 모든 주가 이를 실시하고 있음.

종교

인도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Jainism), 시크교(Sikhism) 등 4개 종교발생지이며 이슬람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유태교 등 다양한 외래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나라임.

종교는 인도 국민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종교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종교는 인도인의 생활과 밀착되어 있다고 할 수 있고 종교는 인도인의 일상생활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소임.

○ 헌법은 모든 종교에 대한 무차별, 신앙의 절대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모든 종교는 국가로부터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음.

○ 인도의 종교인구 분포는 힌두교 81.5%, 이슬람교 11.2%, 기독교 2.7%, 시크교 2.4%, 불교 0.7%, 자이나교 0.4%, 기타 1.1%임.

힌두교

○ 힌두교는 B.C 2000년경 아리안족 침입 후 최고경전 Veda가 집대성되면서 정치, 사회생활을 지배해 왔으며, 이슬람교 등 이교도의 수세기 동안에 걸친 침략 속에서도 이에 동화되지 않고 오히려 포용하면서 오늘에 이름.

- 드라비다족의 토속신앙, 아리안족의 자연신 숭배 등에 바탕을 둔 다신교인 힌두교는 외래사상과 종교 등에 대한 인내와 관용을 특징으로 하며 생활경험, 도덕, 사회관습, 규범의 총체로서 Dharma(정의 또는 의무)에 따른 수도생활과 최고 정신을 탐구하는 고도의 생활 철학적 종교임.

- 소를 신성시하고 카스트제도를 정착시킨 힌두교는 해외 전파보다는 인도인의 종교로 존속하길 바라는 성향을 띠고 있음.

- 현재 약 8억에 이르는 신도를 가진 힌두교는 인도사회에 절대적 우위를 점하는 종교임.

보건

○ 약 26%의 빈곤층을 가지고 있는 인도는 모든 국민의 건강향상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농촌, 빈민층에 대한 위생, 의료혜택을 확대 실시하고 있음. 특히 UPA 정부는 집권기간 중 GDP의 2-3%를 보건 분야에 투입하되 기초보건에 우선적으로 투자한다는 계획이며,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보험의 조기 도입과 필수 의약품의 저렴한 판매 방안 마련 등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음.

○ 지난 30년 간 평균 수명은 31세에서 52세로 사망률은 천 명당 27.4%에서 14.2%로, 유아 사망률은 천 명당 146명에서 125명으로 개선됨. 또한 전염병퇴치를 위한 특별대책을 실시하고 있는 바, 1977년도를 기해 천연두는 퇴치되었으며 학질, 사상충, 나병, 콜레라, 결핵 등의 퇴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

○ 1952년 제1차 5개년 계획을 출발로 시작한 가족계획은 많은 성과를 가져출생률은 60년대 4.12%에서 1978년도 3.33%로 감소되었으며, 2002년에는 2.38%로 정부는 2001-11년의 10년 간 인구증가율을 16.2% 이내에서 억제한다는 계획임.

관습

인도인들 중에는 무신론자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이 사원이나 집안에서 정기적으로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음. 힌두교는 다신교로서 교리나 성찰보다는 수많은 제신들의 형상화를 통한 의식이 주요 신앙생활을 이루고 있으며, 도덕률이나 내세구원보다는 개인의 현세구복에 치중하고 있음.

오랜 카스트제도 하에서 묵묵히 순종해온 생활태도, 불교의 자비와 관용적 사상, 장기에 걸친 이민족의 지배 등의 영향에 기인하는 관용적 태도, 생명존중 사상, 무저항주의 같은 평화주의 사상이 인도인들의 생활 저변있으며, 마하트마 간디가 제창한 비폭력주의도 이러한 전통적 사상의 계승 내지 발전으로 볼 수 있음.

- 그러나 이슬람-힌두 등 종교, 종파간 갈등 분규가 발생시 폭력사태로 변질되기 쉬우며,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기도 하여 외국인의 주의를 요함.

인도인들은 전통과 관습을 존중, 일반적으로 매우 보수적이며, 보수적 풍속을 벗어나는 외국인은 풍속사범으로 체포, 처벌하기도 함.

인도에서는 금주제도를 실시하는 주가 있으며 일반 식당에서도 금주일이 있고, 판매시간이 제한되어 있음. 주류 판매는 호텔이나 규모가 큰 대중식당에만 국한되는 것이 일반적임.

○ 매춘은 불법이며, 지역마다 정도의 차는 있으나 대체로 자국인들 간에 이루어지며,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음.

○ 여성들은 복장법령에 따라 공적 활동시 반드시 전통의상인 사리 또는 사르와르 카미즈를 입어야 하며, 일반대학에서도 여학생들에게 전통의상을 강요하는 사례가 있음.

언론

인도의 언론은 스스로 영국으로부터 독립(1947년)을 쟁취하는데 공헌바 크고, 독립이후에는 국가 건설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높은 긍지를 갖고 있음.

- 개도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언론자유가 보장되고 있으며 언론이 여론정치 구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신문 등 정기간행물(약 8,000종)은 대부분이 개인소유로 운영되고 있음. 특히 TV 및 라디오는 방대한 지역과 인구의 1/3 이상이 문맹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보도‧교육‧오락 등 일반적인 방송기능은 물론 정부의 대국민 홍보기능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

○ 인도 유일의 공중파 방송인 국영 TV Doordarshan(DD-TV)은 DD National, DD News, DD India(해외방송) 등의 채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외에 최근 대도시를 중심으로 민영TV 채널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으며, 케이블 TV 시장이 활성화되고 있음.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약사

근대 약사

○ 1517년 오스만 터키 지배

○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

○ 1922년 영국의 보호 통치기 종료, 이집트 왕국으로 독립

○ 1948년 이스라엘과의 제 1차 중동전쟁에서 중동 아랍국가 패배

○ 1952년 자유장교단 혁명을 통한 네기브(Neguib) 정권 수립

○ 1953년 군사 쿠테타 이후 공화정 수립

○ 1954년 나세르(Nasser) 쿠테타를 통해 집권

○ 1956년 제2차 중동전쟁 발발

○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발발

○ 1970년 나세르 대통령 사망 후 부통령 사다트(Sadat) 대통령직 승계

○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발발

○ 1981년 사다트 대통령 암살 후 부통령 무바라크(Mubarak) 대통령직 승계

○ 1982년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 반환

○ 1987년 무바라크 대통령 재임

○ 1989년 이집트 아랍연맹 복귀

○ 1993년 무바라크 대통령 3선 당선

정치 개황

이집트의 정치 동향

○ 정치적 안정성

- 1981년 집권에 성공한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 대통령 은 2005년 9월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한 직선제에서도 승리함으로 써 2010년까지 임기를 보장 받았고 군부의 지지도 받고 있으며, 의회에서는 집권 국민민주당(NDP)이 2005년 11월 총선에서 원내의석 70%(311석)을 확보하면서 여당에 권력이 집중된 상태임.

- 여당은 2007년 3월 헌법 211개 조항 중 34개 조항에 대한 개헌 안을 통과시키면서 야당인 무슬림형제단의 정치진출을 억제하고, 무바라크 대통령의 차남 가말 무바라크(Gamal Mubarak)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노력을 강화하고 있음.

○ 무바라크 대통령이 장기집권하고 있고, 헌법개정을 통해 선거감독에 대한 서법권 소멸, 정당소속의 의무화, 종교 세력 지지기반 정당의 불법화 등을 선언하는 등 반민주적 조치가 취해지자 민주화 및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이 더욱 커져가고 있는 상황임.

○ 2008년 연평균 물가상승률이 18.3%에 달했고 2009년에도 물가상 승률이 10%대를 유지하고 있어 서민층의 정부에 대한 불만이 팽 배해 있고 관련 시위도 간헐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나 정권을 위협 하는 수준으로는 발전하고 있지 않음.

- 사법부 및 반대 세력에 대한 이집트 정부의 통제가 효율적으로 작 용하고 있고,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한 반대세력의 경우 계파 별로 분열되어 있어 당분간 현 정권의 실질적인 대항세력으로 부상할 가능성은 낮은 상황임

- 차기 대통령 선거(2011년 9월)까지 큰 정치적 혼란은 없을 것으 로 전망되며, 현 정부도 차기 대선을 위한 권력 이양 작업에 치중 할 것으로 보임.

외교

대외정책의 기조

○ 대외적으로는 온건 친 서방 비동맹 외교노선을 지속적으로 견지하 며 중동지역 민주주의 실현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자생적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고 이란의 역내 세력 확대 가능성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갖고 있음.

- 이집트는 지정학적으로 중동 이슬람 문화권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 이고 석유의 보고 페르시아만과 인접해 있으며, 아랍-이스라엘간 의 평화 회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

- 또한 아랍과 무슬림 세계의 지도적 국가로서 국경을 넘어 중동 여 러 인접국가에 정치와 종교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쳐 왔음.

이집트-미국 관계

○ 미국과는 전통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미국으로 부터 매년 대규모 경제, 군사 원조를 받고 있음.

- 미국은 이집트를 미국의 아랍지역 정책 수행의 보완 및 동반자로 활용하는 대신 이집트는 미국으로부터 매년 20억 달러 가량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어 양국 간 관계는 당분간 큰 변동이 없을 전망임.

- 무바라크 대통령 후계자 역시 미국과의 관계를 크게 흔들지 않을 것으로 보이나, 차남 가말이 집권하면 이집트에 정치적 자유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되면서 미국과의 관계의 변수로 작용 할 전망임.

이집트와 그 외 국가들의 관계

○ EU와는 지리적으로 근접하여 경제적으로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 지하고 있으며, 이집트의 탈 서방 정책의 일환으로 러시아와 중국 과의 관계가 진전되고 있는 상황임.

○ 2008년 3월25일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하고 러 시아 푸틴 대통령과 푸틴의 후임자로 러시아 대통령에 당선된 드 미트리 메드베데프와 중동 평화 문제를 포함한 각 종 국제 사회 문제를 논의하며 양국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하였고, 이 집트와 러시아 간 핵에너지 협력 협정을 도출하였음.

○ 중국의 경우 2006년 6월 원자바오 총리가 이집트를 방문하여 상 호 경제 협력 협정을 체결하였고, 외국인 투자 유치 확대, 탈 유럽 을 통한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증진을 위한 이집트의 노력과 에너 지 자원 확보에 총력을 다하고 있는 중국의 이해관계가 상호 일치하고 있음.


이집트 체류 정보

치안 및 유의사항

이집트는 비교적 치안이 안정적인 편이며 외국인에 대해서도 호의적임. 다만 외국인을 상대로 한 바가지 씌우기, 소매치기 등에 주의 요망.

- 일단 분실된 소지품은 찾기가 어려우니 사전에 분실되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 최선임.

○ 최근 이라크 등 중동정세 관련, 한국, 미국 등 이라크 파병국 국민에 대한 반감이 있는 바, 이집트 국민을 자극할 수 있는 발언 (특히 정치, 종교)은 삼가야 함.

○ 이집트는 별도의 신호등이나 횡단보도가 없으며 현지인들의 운전습관이 난폭하여 길거리 무단횡단시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함.

- 일단 사고가 발생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으므로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

○ 거리나 대중음식점에서 판매하는 음식이나 음료수를 함부로 섭취해서는 안 됨. 특히 음료수는 탄산음료나 정화된 물 이외에는 가능한 마시지 않는 것이 좋고 식당에서도 국물이 포함된 식사메뉴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음.

기후

봄철은 3~4월 중 짧게 나타나고 거의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로 바뀌는 기후변화를 보이며 4월말경이면 우리나라의 6월 상순에 해당하는 더위가 시작됨.

5~9월말이 여름철로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넘으며 6~9월의 혹서기에는 38-45도 사이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가 지속됨.

1년중 국지적인 특성으로는 매년 3~5월 사이에 ‘까마신’이라는 사막의 열풍 및 모래바람이 부는데 엄청난 먼지를 수반함.

환전

사용화폐

- 통화단위 : 1 파운드(Pound) = 100 피아스타(Piasta)

- 지폐 : 200, 100, 50, 20, 10, 5, 1파운드, 50, 25 피아스타

- 동전 : 25, 20, 10, 5 피아스타

○ 환전 : 시중은행 및 환전소, 호텔에서 환전가능

- 환율 : 1.00 USD = 5.51800 EGP (2009년 9월 현재)

- 사설환전소의 경우도 은행 환율과 거의 비슷함

- 역환전 : 출국시 이집트화를 달러로 재환전할 경우, 처음 환전시 증빙서 필요(이 경우 하루 30불 이상 지출했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함)

국제 전화

일반전화 이용시

- 00(국제전화) + 82(한국 국가코드) + 2(서울 지역코드) + 번호

- 호텔에서 이용시에는 외부전화 9번을 누른 후 전화번호 입력

수신자 부담 데이콤 전화 이용시

- 365-5641를 누르면 안내방송이 나옴.

- 안내방송에 따라 교환원과 연결 후 원하는 전화 번호 통보

국내 또는 국제통화는 룸이나 호텔 1층 로비에 문의, 사용 가능하나, 비용이 매우 비쌈.

공중전화 사용이 가능하나 설치 지역이 드물어 이용이 매우 불편함.

시차 및 서머타임

이집트의 시차는 GMT+2

리나라와 시차는 KST-7시간으로 한국이 24:00시일 때 이집트는 같은 날 17:00시임.

현재 서머타임이 해제되어 한국과의 시차는 7시간임.(서머타임 중에는 한국이 24:00시일 때 이집트는 같은 날 18:00시가 됨)

전력 및 인터넷 환경

○ 인터넷 환경 : 일부 ADSL이 사용되나 주로 모뎀을 사용함.

○ 전력사용 현황 : 220V/50Hz 사용

- 콘센트 타입은 한국과 같으나, 모터를 사용하거나 강한 열을 내는 전자제품의 사용은 멀티플러스 사용 요망

주요언론

○ T V : 이집트국영방송(채널 1,2,3)

- 유료위성방송을 통해 여러 나라 방송(BBC, CNN 등)을 시청할 수 있으며 한국의 KBS월드, 아리랑 TV 시청 가능함.

○ 신문과 잡지

- 신문과 잡지는 이집트 공용어인 아랍어 외에도 영어, 불어로도 발간되기도 하며 외국의 유명 신문 및 잡지(New York Times, Herald Tribune, Newsweek 등)도 시내 곳곳에서 쉽게 구입 가능

- 주요일간지 : Al Ahram, Al Akhbar, Al Gomhuriaw, Al Wafd 등

팁 문화 및 교통편

팁 (박시시)

- 팁이 생활화 되어있으며 대체적으로 5파운드 정도가 적절함

- 호텔과 레스토랑 등에서는 이미 계산서에 서비스 요금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팁을 지불할 필요는 없으나 포터나 웨이터들에게는 1파운드 정도를 주는 것이 좋음.

교통편 안내

- 시내 교통편으로는 일반적으로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함.

- 사전에 요금 협상하여 승차하는 것이 좋음.

- 요금은 근거리 5파운드, 15~20분 거리는 10~15파운드 정도임.

교통수단

○ 항공

- 국제선․국내선 모두가 연발착이 잦은 편이므로 72시간 이상 이집트에 체류할 시 반드시 예약 확인이 필요하며, 출발 시에는 최소한 2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을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

철도

- 철도는 이집트 철도청에서 관장하며 총 연장 약 5천 Km로 주요 도시와 연결되어 있으나 카이로-알렉산드리아 구간 등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권장할 만한 교통수단이 되지 못하며, 특히 남부 지역은 치안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철도 및 자동차를 이용한 여행은 삼갈 것.

○ 버스

- 버스는 미니버스, 시내버스, 장거리 버스 등으로 구분. 시내버스는 요금(0.5 이집트 파운드(약 0.2불))은 싸지만 매우 혼잡함.

- 미니버스는 일정 지역 구간을 운행하나 정해진 목적지가 없으며 구간에 따라 요금이 차등 적용됨. 장거리 운행 버스는 카이로 시내 TAHRIR 광장 및 람세스역에서 출발, 알렉산드리아, 포트사이드 등 주요도시와 시나이 반도, 후르가다 등 주요 도시 연결함.

○ 지하철(Metro)

- 1-3호선이 있으며, 역명이 영문 알파벳으로 표기 되어있어 초행자의 경우에도 이용이 비교적 편리함. 열차의 첫 번째 및 두 번째 칸은 여성 전용임.

○ 택시

- 택시는 호텔 앞에서 관광객 상대로 운행하는 리무진과 '우그라' 라는 일반 택시가 있으며 미터기가 부착되어 있으나 거의 사용되지 않 고 있음(이집트인의 경우에도 동일). 특히 외국인의 경우에는 별도 요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탑승 전 미리 흥정이 필요함.

종교활동

○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이나 외국인들의 종교 활동에 특별한 제한 을 두고 있지 않음.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자말렉, 헬리오 폴리스, 마아디 등)에는 성당, 개신교회 등이 있어 종교 활동(예 배)에 큰 불편이 없음.

- 카이로에는 2개의 한국인 교회와 성당이 있어 비교적 자유롭게 종 교 생활을 영위하고 있음.

○ 그러나 선교사활동은 일체 인정하지 않으며, 엄격히 제한함. 특히 무슬림의 샤리아에 의해 무슬림에 대한 선교활동은 역시 엄격히 제한되고 있음.

대인관계 문화

○ 이집트인들은 인사할 때 주로 악수나 양 볼에 입 맞추는 정도이나 아주 친밀한 사이일 경우에는 껴안기도 함.

○ 대부분의 이집트 국민들은 이슬람 율법에 따른 종교생활(1일 5회 예배 등)을 하므로 이들의 종교생활을 해치는 행위는 삼가 해야 하며, 너무 짧고 노출이 심한 옷은 피하는 것이 바람직함.

○ 종교에 따른 금식기간인 라마단은 이슬람력으로 아홉 번째 달에 시행되며 태음력에 기초하므로 해마다 시기가 약 11일씩 앞당겨지 는데, 2009년의 경우 라마단은 8월 21일~9월 19일이었음.

- 라마단 기간에는 일출에서 일몰시까지 금식하는데, 이곳 사람들이 철저히 지키는 종교행사이므로 현지인 앞에서 음식을 먹거나 음주, 흡연 등은 삼갈 것.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약사



고대/중세


○ 1947년 8월 독립 이전까지의 파키스탄 역사는 바로 인도의 역사로 볼 수 있음.

○ 파키스탄 서남부에 위치한 모헨조다로(MOHENJODARO)에는 고대문명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는 BC 3000년경의 금석병용기 시대의 도시국가 유적으로서 하랍파(HARAPPA) 유적과 함께 고대 인더스 문명의 대표적인 유적이며 두 지역을 인더스 문명의 기원으로 보고 있음.

○ 인더스문명은 고도의 청동기문명으로서 정연한 가도, 완비된 위생시설 등의 탁월한 도시건설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약 1천년 동안 지속되다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침입해 온 아리안족에 의해 멸망되었음.

석가모니 이후 한때 불교가 전성기를 이루기도 했으며 이로 인하여 파키스탄 전역에 걸쳐 곳곳에 간다라문명이 꽃을 피우기도 하였음.

○ 중세사회가 시작되는 8세기부터 12세기까지는 무슬림세력이 서북방 지역으로 침입하여 델리를 중심으로 약 300년간 무슬림왕조가 성쇠를 되풀이하였음.

○ 1500년경 서부인도에 중앙아시아의 티무르가 멸망한 후 그의 후예인 바바르가 수립한 무굴제국은 전인도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150년 간 전성기를 이루다가 힌두ㆍ회교간 대립, 농민반란 등으로 1857년 세포이 반란사건을 계기로 영국에 합병되어 멸망하였음.


근대


○ 영국 식민통치하에서 인도의 독립운동은 마하트마 간디 등 힌두교들의 지도하에 1885년 소집된 인도국민회의를 중심으로 전개됨에 따라 회교도들은 독립 후 힌두문화의 지배를 두려워하여 1930년 초를 기점으로 회교시인 IQBAL 등을 중심으로 회교국가의 분리 독립운동을 점진적으로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음.

○ 2차 대전 후 파키스탄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MOHAMMAD ALI JINNAH (QUAID-E-AZAM)의 파키스탄 분리주장 요구와 영국의 인도ㆍ파키스탄 분리 독립 정책에 따라 1947년 8월에 오늘날의 파키스탄으로 독립하여 영연방의 자치국이 되었으며 초대 총독에는 모하메드 알리 지나, 총리에는 아라드 알리 칸이 취임하였음.


독립이후


○ 신생 파키스탄은 법률 및 제도를 정비하고 1947년에는 UN에 가입하는 등 독립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져 나갔음. 1948. 5월부터 인도와의 분쟁지역인 카슈미르에서 상권과 권력을 쥔 힌두계인들로부터 종교적 제한을 받아온 데에 불만을 품은 회교주민들의 무장 봉기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하여 인도, 파키스탄 양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충돌함으로서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 1949. 1월 UN의 중재로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파키스탄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

○ 1970. 12월 총선 결과 서파키스탄에는 A. BHUTTO가 이끄는 인민당이 의회의 절대 의석을 차지한 반면,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는 MUJIBUR RAHMAN이 영도하는 AWAMI LEAGUE당이 대승하였음. 총선 후 동, 서파키스탄은 정치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연합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추진하였으나 동파키스탄의 RAHMAN 당수가 거부함으로써 협상이 결렬되었음.

○ 이에 따라 서파키스탄군이 동파키스탄에 진주하는 한편 인도가 동파키스탄에 군사개입을 함으로서 1971. 12월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고 동 전쟁에서 파키스탄이 패함에 따라 동파키스탄은 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되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게 되었음.


정치 개황



정치제도


○ 정부형태 : 내각책임제(2002. 8월 헌법개정)

○ 행정부 의회간의 견제·균형장치

- 대통령의 국회해산권

- 내각은 하원에 대해 책임을 짐(91조 4항)

- 하원은 수상 불신임권을 가짐

○ 지방행정기구는 4개주(Baluchistan, Punjab, Sindh, North-West Frontier Province)와 소수종족연방보호지역(FATA : Federally Administered Tribal Area) 및 연방수도권지역(FCA : Federal Capital Area)으로 구성됨.


의회


○ 상 원

- 구 성 : 100명(4개 주의회별 각각 22명 선출, 하원 12명 선출)

- 임 기 : 6년(매 3년마다 1/2 개편)

- 의장단 : 의장 및 부의장 각 1명(임기 3년)

- 상원의장은 대통령의 해외 방문으로 인한 부재나 사임, 사망 등 대통령 공석시, 대통령의 직무권한을 대행

하 원

- 구 성 : 342명

- 임 기 : 5년

- 의장단 : 의장 및 부의장 각 1명

- 회 기 : 1년에 적어도 3번의 회기, 최소한 130일이 개원되어야 함.


국방


○ 병역제도 : 지원제

○ 국방예산 : 2235억루피(약 37.3억불)(GNP 대비 3.3%, 총예산의 20.0%)

○ 병력 : 64만 명(예비군 54만)


외교



기본 외교 노선


○ 파키스탄 대외 정책은 카슈미르 분쟁 해결 등 인도와 대립 관계 개선, 인근 국가인 아프가니스탄과의 선린 관계 유지, 대미, 대중 관계의 강화가 근간을 이루고 있음.

○ 기본 외교 노선으로는 비동맹 중립 외교 노선, 이슬람 제국과의 결속 강화, 대 중국 관계 공고화, 대 아프가니스탄 전후 복구 경제 지원 등을 들 수 있음.


파키스탄-인도 관계


○ 카슈미르 문제는 대 인도 외교정책의 가장 큰 부문으로서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 이후 카슈미르(Kashmir) 지역에서 계속 일어나는 영유권 싸움이며 회교와 힌두간의 대표적인 종교적 갈등임.

○ 인도·파키스탄 전쟁

- 카슈미르 지역 영유권 분쟁은 1947년 영국 식민지하의 인도가 신생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될 당시, 동 지역 인구의 절대다수(77%)를 차지하는 회교도측이 파키스탄에 귀속코자 파키스탄 정부군의 지원하에 반란을 일으킴. 이에 대해 동지역의 힌두교 영주(Maharaja)가 인도정부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여 1947. 10월 제 2차 인도·파키스탄 간에 전쟁이 발생하였고, UN의 거중조정에 따라 휴전선이 설정됨.

- 1965. 7월 양국간 다시 전쟁(제2차 인·파 전쟁)이 발발하였으나, UN 안보리의 노력으로 휴전됨.

-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을 둘러싸고 제3차 인·파 전쟁이 발발

○ 2003년 양국 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 분쟁을 종식시키는 노력과 동시에 그동안 끊겼던 항공 운항을 2004. 1월부터 재개하고 2005. 10월 발생한 대 지진과 관련 카슈미르 지역에서 양국 공동 구조 활동을 펼치는 등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있음.

○ 그러나 2006. 7월 뭄바이열차 연쇄폭탄테러로 인해 약 2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인도 측은 동 테러를 일으킨 단체가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두고 있음을 이유로 파키스탄 측에서 자국내 테러기지 및 테러척결에 대한 성의있는 조치를 취하기 전에는 평화구축 과정에 진전이 있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면서 7월에 예정되어 있는 외교차관 회담을 무기한 연기함.

이에 파키스탄 Musharraf 대통령은 7월 20일 대국민 TV 연설을 통해 인도측에 뭄바이 열차 테러 관련 비난전을 하지 말 것을 촉구하면서, 인도측이 테러에 개입한 테러리스트에 관한 정보를 파키스탄측에 제공한다면 가능한 모든 협력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함.

2006. 7월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개최된 SAARC 상임위원회(Standing Council) 회의를 계기로 양국 외교차관 회담에서 양국은 평화구축 과정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단 공감하였으나, 구체적인 다방면 대화의 추후 일정은 정하지 못함.

○ 2006. 8월 파키스탄이 자국내 인도 외교관을 외교관 신분에 적절치 않은 행동을 한 혐의로 추방하자, 인도도 맞바로 자국내 파키스탄 외교관을 추방하는 사건이 발생함.

뭄바이 테러 사건 발생(2008.11.26-29)

- 10명의 테러리스트가 중무장한 채 해상을 통해 뭄바이에 침투, 11월 26일 밤 10시경부터 동시다발적 무차별 테러 공격 감행

- 약 170명이 사망하고 3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테러범 9명을 사살하고 1명 생포하여 테러를 진압함.

- 파키스탄 정부는 이번 테러와 파키스탄 당국과의 관련성을 계속 부인해 왔으나, 파키스탄 무장단체 ‘라슈카르에타이바’(LeT)와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짐.

- 이 사건을 통해서 군병력의 국경 재배치 움직임이 일어나고 양국간의 갈등이 다시 고조됨.


대 아프가니스탄 관계


○ 파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자원 교류 및 교역을 원활히 하고, 이들 국가들로의 해상 운송 루트로서 가치를 발휘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안정 및 아프가니스탄의 친파키스탄 정책 유도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현재까지 아프가니스탄과의 유대 관계는 형제국과 같은 관계로 매우 긴밀한 편임.


대 중국 관계


○ 파키스탄과 중국은 전통적으로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

○ 1996년 12월 1일 장쩌민 국가 주석이 파키스탄을 방문해 양국 경제 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특히 핵개발 기술 협력 강화에 합의(평화적 목적)하였음.

○ 중국은 인도 견제를 위해 전략적으로 친 파키스탄 외교를 펴고 있으며 파키스탄에 대한 다양한 경제 지원을 계속하고 있음.

○ 한편 무샤라프 대통령은 지난 2006년 2월 중국을 공식 방문, 후진타오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간 교역 및 협력 확대에 합의하였으며 2006년 11월 이루어진 후진타오의 답방을 통해 FTA 협정을 체결하는 등 정치, 경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


대 미국 관계


○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문제 해결, 인도에 대한 견제, 경제지원 등의 측면에서 대미 관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의 대 테러 활동, 마약류 단속 노력에도 적극 협조하기로 함.

○ 무샤라프 대통령은 쿠데타 집권 후 9.11사태 발생 시 미국에 적극적인 협조를 함에 따라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의 경제 원조를 받아낼 수 있었고 파키스탄의 주력 수출품인 섬유 제품의 쿼터 추가 확보로 미국 수출 증가에도 크게 기여함.

○ 2001년부터 미국과의 협력 강화를 모색해왔고 부시 정권과의 관계도 양호함에 따라 대미 관계의 지속적인 유대 강화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됨.


사회




교육


○ 파키스탄은 국가이념과 회교교육을 바탕으로 하여 과학기술교육에 중점을 두는 신교육정책을 채택하고 있음.

○ 파키스탄의 학제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음.

- 초등교육 5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2년, 대학교육 2~4년


언론


○ 정부에 의한 직접 사전검열이 82년 초 완화되어 현재는 정부 지침에 따른 자체 검열제를 시행함. 중소언론기관이 난립하고 재정상태가 어려우며 언론인의 자질문제 등으로 객관성 유지가 어려운 점 등의 문제가 있음.

○ 국영 PTV(3개 채널), AJK TV, 기타 Geo-TV, ARYONE, Indus TV 등 다수 채널이 두바이 또는 인도에 본사를 두고 방송하고 있음.


사회적 갈등 요인


○ 파키스탄은 마약상습자의 증대로 심각한 사회문제에 직면해 있음.

- 마약상습자의 숫자는 100만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음.

○ 지형이 험난한 북서변방지역의 계곡은 양귀비 재배지와 헤로인 제조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에서 소비되는 헤로인의 1/5이 이곳에서 공급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음.

- 이 지역은 영국의 식민통치 당시부터 국내법이 적용되지 않았고, 그 지방의 부족지배자가 통치한 것도 마약증대의 원인으로 들 수 있음.


문화


○ 회교화 운동 : 회교화 운동이 강조되고 있으며, 일반생활의 회교 전통유지에 부심함.

○ 복장 : 전통 복장이 일반적임.

○ 기타 : 술, 돼지고기, 도박 등이 금지되고 있음.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약사



인도 역사의 특징


인도는 다양한 인종, 종교, 언어, 생활풍습에도 불구하고, 아시아대륙과지리적으로 차단된 특수성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독특하고 개성적인 문화를 이루어 왔음.

○ 5,000년 이상의 긴 역사 중 정치적 통일을 이룬 시기는 마우리아왕조(B.C.321-185), 굽타왕조(A.D.380-606) 및 무갈왕조(A.D.1526-1858) 등 3개 왕조에 불과하며, 북서부지역은 외부세력 침입의 출입구가 되어 그리스, 훈, 터키족 같은 외부 세력과의 항쟁 속에서 성쇠를 거듭하였으나, 데칸고원 등 남부지역은 지형적 요인으로 인해 외부세력의 침입을 비교적 적게 받아 왔음.


고대


○ 인더스 문명(기원전 3000-2000)

- 세계 4대문명 발상지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 유역에서 기원전 3,000~2,500년경부터 약 500년간 번성한 고대 문명으로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등의 유적이 있음.

- 고도로 발달된 후기 청동기 문명의 단계로서, 종교는 다신교, 정치 체제는 제사장 중심의 공화제를 형성

○ 아리안 문명(기원전 2000-1000)

- 인도 문화의 원형은 상당 부분 아리안족이 인도 대륙 침입 후 정착하면서 이루어졌음.

- 사제 계급인 브라만 중심의 제사 의식과 신에 대한 찬양 등이 집대성된 리그베다 등 베다문화가 이 시기에 형성됨.

○ 도시국가의 형성

- 기원전 7세기경에 이미 상당한 세력을 지닌 도시국가들을 건설

- 정복전쟁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마가다 왕국은 알렉산더왕의 침입 때까지 난다 왕조와 더불어 인도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을 유지하였으며, 기원전 500년경 불교 및 자이나교가 발생함.


중/근세


○ 마우리아 제국(기원전 321-185)

- 3대왕인 아쇼카왕(BC 272~232)은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남서부의 타밀지역을 제외한 전 인도를 통일하고, 포교에 힘써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함.

○ 쿠샨왕조(78-226)

- 쿠샨족 카니슈카왕이 서쪽으로 이란, 동쪽으로 중국의 한나라, 남쪽으로는 인도대륙의 중심부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

○ 굽타왕조(380-606)

- 찬드라 굽타 2세(380-413) 시대에 문화적 르네상스를 구가하였으며, 불교, 힌두교 및 자이나교 등이 융성, 부흥했음.

○ 무굴제국(1526-1858)

- 데칸을 제외한 인도의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을 아우르는 대제국이 건설되었고 악바르 이후 150년 간 전성시대가 지속됨.

- 이슬람교가 번성하여 타지마할 등 이슬람 관련 유적을 남김.

- 1707년 이후 지방토후의 발호, 서구열강의 침입으로 약화

- 1757년 영국이 프랑스와의 플랏시 전투에서 승리

- 1857년 영국이 세포이 반란을 진압한 후 영국의 직할지로 편입.


근대


○ 반영 독립투쟁

- 18세기 후반에 생겨난 많은 정치단체 중, 1885년 결성된 "인도 국민회의"가 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함. 특히, 독립운동에 대한 영국의 냉담한 반응에 대응하여 보이콧 및 스와데시 운동이 전인도로 파급되게 됨.

- 이에 대해 영국은 분할통치 정책을 취하여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간 대립을 조장하였으며, 1906년에는 국민회의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영국의 배후 지원을 받은 회교도 연맹을 결성함.

- 1차 대전 이후 인도 국민회의는 마하트마 간디의 지도하에 영국이 제시한 자치령 지위를 거부하는 등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많은 인도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반해 회교도 연맹은 파키스탄의 분리를 요구함.

○ 독립

- 2차 대전 후 영국은 인도에 독립을 부여하기로 결정하고,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방안을 제시한 바, 동 제안을 국민회의가 수락함으로써 인도는 1947.8.15 영연방의 자치령으로 독립하게 됨.


현대


○ 인도 헌법 채택

- 1947년 8월 15일 독립과 함께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가 초대 인총리에 취임한 후, 1949년 제헌의회에서 연방제와 민주주의를 골자로 한 헌법이 채택되고, 1950. 1월 발효됨으로써 영연방 자치령의 지위에서 탈피함.

○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강화

- 한편, 독립 당시부터 파키스탄과는 종교적, 영토적 분쟁으로 1947. 10월, 1965. 6월, 1971. 12월 등 3차례 전쟁을 치뤘으며, 중국과는 국경문제인해 1962년 전쟁을 겪는 등 주변국들과 마찰을 겪기도 했으나 비동주의와 균형 및 실용주의를 적절히 추진함으로써 꾸준히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강화시켜 옴.

○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 시현

- 국내 정치적으로 국민회의당(Congress Party)이 정권을 독점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서구식 의회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추진해 오다가 1990년초 경제상황 악화에 따라 1991년 신경제정책을 채택하여 경제개혁 및 개방정책을 실시함. 1990년대 이후 국내 정치권력은 국민회의당․BJP 양대 정당과 군소 정당들이 합종연횡하면서 연립정부를 구성해 오고 있으며, 경제개방 및 개혁의 성과로 꾸준히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시현하고 있음.


정치 개황



국내 정치의 특수한 여건


인도의 국내정치에 영향을 주는 주요 요인으로는 일반국민의 민주의식, 언론자유의 보장, 관료제도, 군부의 중립성, 사법부의 독립 등 긍정적인 요인들과 카스트 제도, 종교간 대립, 빈부격차, 지방주의, 취약한 정당기반 등 부정적인 요인들이 있음.

○ 인도의 고질적 사회풍습인 카스트제도를 타파하고 특히 전체국민의 22.5%에 해당하는 최하층민(Scheduled Caste와 Scheduled Tribe)과 52%에 해당하는 하층민(Other Backward Castes)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향상 문제는 인도정치가 안고 있는 최대 과제 중의 하나임.

- 오랜 인습은 타파되지 못하고 있으며, 일부 지방에서는 무력충돌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음. 2006년에는 정부의 OBC에 대한 국립대학 입학할당제도 도입 방안추진계획을 둘러싸고 찬반논쟁이 가열되기도 함.


헌법과 정부형태


○ 1950년 1월 26일 공포된 헌법은 22장 395조 및 부칙 9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특징은 아래와 같음.

-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 공화국 표방

- 종교 무차별주의로 신앙의 자유 허용

- 주정책에 대한 지시지침(Directive Principle of State Policy)을 통해, 부의 공정하고 적절한 분배 및 생산수단의 집중방지 규정

의회 민주주의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연방국가로서 의원내각제의 정부형태를 취하고 있음.

- 연방은 28개 주(state, 2000년도에 3개 주 신설)와 7개 연방 직할지(Union Territory)로 구성

○ 각 주에는 주 정부와 주 의회가 있음. 주를 대표하는 주지사(Governor)는 5년의 임기로 대통령이 임명하며 주행정의 실권은 주지사가 주 의회 다수당 지도자 중에서 지명하는 주 총리(Chief Minister)가 장악함.


입법/행정/사법부


○ 상원(Rajya Sabha)은 각주 및 연방 직할지 의회에서 간접 선출되는 238명 및 대통령이 임명하는 12명 등 총 250명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6년으로 매 2년마다 1/3씩 새로 선출함.

○ 하원(Lok Sabha)은 각주 및 연방 직할지 대표 543명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Anglo-Indian community 대표 2명 등 총 545명으로 구성하며, 임기는 5년임.

행정부는 대통령, 부통령, 총리 및 각료회의(Council of Ministers)로 구성

- 대통령은 5년 임기로 상‧하 양원 및 주 의회 의원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하여 간접 선출되며, 국가원수로서의 상징적 역할 수행(군 최고통수권 보유)

○ 사법부는 연방 대법원(Supreme Court of India), 주 최고법원(High Court), 지방법원(Lower Court)으로 구성되는 3심제임. 대법원은 인도 헌법과 법률에 대한 궁극적인 해석권을 가지며 대법원의 판결은 모든 법원에 대해 구속력을 가짐.


외교



대외정책의 기조


1947년 독립이후 인도의 외교정책을 지배해 온 기본적 원칙은 “네루외교노선”에서 비롯된 비동맹주의와 균형주의 원칙이며, 이와 같은 외교기조는 인도가 처한 특수한 외교 및 안보환경 즉, 광대한 국토와 복잡한 사회적 구조로 인해 국가적 단결이 독립초기의 최대의 관심사였고 대외정책 선택에 있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친 정책결정을 내리기 곤란한 국내적 제약조건에 기인한 것이었음.

- 인도는 독립 당시부터 패권주의 반대, 군사동맹 가입 반대, 국제분쟁평화적 해결 및 모든 국가와의 우호관계 수립 등 비동맹회의와 유사기본이념을 대외정책의 기본노선으로 표방하면서 비동맹운동의 창설을 주도하였고 비동맹주의를 대외정책의 기조로 삼아 왔음.


최근 외교정책 노선


점차 과거 비동맹 외교노선에서 탈피하여 고도 경제성장의 지속적 달성을 위한 실용주의적, 친서방적 외교정책 노선을 강화하는 추세이며, 특히 미국과의 관계 강화가 아시아의 세력 균형에 기여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음.

- 1990년대 후반 이후 현저하게 대미국관계 강화를 시도하는 실용주의 노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2004년 재집권한 Congress당 중심의 UPA 연합 정권 하에서도 이러한 추세가 지속되고 있음.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등 부상하는 global power로서의 국제영향력 확대 노력을 가속화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G-4와의 협력 유지를 통한 외교노력을 경주하고 있음.

서남아 지역의 중심국가로서 지역분쟁 예방, 정세 안정화 및 역내 영향력 유지․확대를 위한 외교적 지도력를 추구하며, 특히 주변국가들에게 군림하던 과거의 형태를 벗어나 서남아지역연합(SAARC)의 활성화 등을 통한 전향적이고 유연한 지역 외교 노선으로 전환중임.

고도 경제성장에 필요한 에너지 확보를 외교정책의 최우선 과제의 하나로 추진하고, 특히 원자력 에너지협력을 위해 미국, EU, 러시아, 중국 등 기존 핵보유 국가들의 지원 확보를 위한 다방면의 외교노력을 기울이고 있음.

○ 동아시아 정상회의(EAS) 출범을 통한 장기적 East Asia Community 구상 추진, ASEAN과의 FTA 협상 마무리, 한국과의 FTA(CEPA) 협상 개시, 중국 및 일본과의 FTA 타당성 검토 등 동아시아권과의 지역 협력 강화를 통한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고 있음.


인도-파키스탄 관계


○ 카슈미르 문제는 대 파키스탄 외교정책의 가장 큰 부문으로서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 이후 카슈미르(Kashmir) 지역에서 계속 일어나는 영유권 싸움이며 회교와 힌두간의 대표적인 종교적 갈등임.

○ 인도·파키스탄 전쟁

- 카슈미르 지역 영유권 분쟁은 1947년 영국 식민지하의 인도가 신생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될 당시, 동 지역 인구의 절대다수(77%)를 차지하는 회교도측이 파키스탄에 귀속코자 파키스탄 정부군의 지원하에 반란을 일으킴. 이에 대해 동지역의 힌두교 영주(Maharaja)가 인도정부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여 1947. 10월 제1차 인도·파키스탄 간에 전쟁이 발생하였고, UN의 거중조정에 따라 휴전선이 설정됨.

- 1965. 7월 양국간 다시 전쟁(제2차 인·파 전쟁)이 발발하였으나, UN 안보리의 노력으로 휴전됨.

-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을 둘러싸고 제3차 인·파 전쟁이 발발

○ 2003년 양국 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 분쟁을 종식시키는 노력과 동시에 그동안 끊겼던 항공 운항을 2004. 1월부터 재개하고 2005. 10월 발생한 대 지진과 관련 카슈미르 지역에서 양국 공동 구조 활동을 펼치는 등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있음.

○ 그러나 2006. 7월 뭄바이열차 연쇄폭탄테러로 인해 약 2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인도 측은 동 테러를 일으킨 단체가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두고 있음을 이유로 7월에 예정되어 있는 외교차관 회담을 무기한 연기함.

2006. 7월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개최된 SAARC 상임위원회(Standing Council) 회의를 계기로 양국 외교차관 회담에서 양국은 평화구축 과정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단 공감하였으나, 구체적인 다방면 대화의 추후 일정은 정하지 못함.

○ 2006. 8월 파키스탄이 자국내 인도 외교관을 외교관 신분에 적절치 않은 행동을 한 혐의로 추방하자, 인도도 맞바로 자국내 파키스탄 외교관을 추방하는 사건이 발생함.

뭄바이 테러 사건 발생(2008.11.26-29)

- 10명의 테러리스트가 중무장한 채 해상을 통해 뭄바이에 침투, 11월 26일 밤 10시경부터 동시다발적 무차별 테러 공격 감행

- 약 170명이 사망하고 3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테러범 9명을 사살하고 1명 생포하여 테러를 진압함.

- 파키스탄 정부는 이번 테러와 파키스탄 당국과의 관련성을 계속 부인해 왔으나, 파키스탄 무장단체 ‘라슈카르에타이바’(LeT)와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짐.

- 이 사건을 통해서 군병력의 국경 재배치 움직임이 일어나고 양국간의 갈등이 다시 고조됨.


남아시아 지역협력 연합(SAARC)


○ 국제무대에서의 상호협력을 도모하고 역외개도국 및 타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증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아시아국가간 지역협력 기구로서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에 이어 두 번째로 창설됨,

- 경제, 사회, 문화, 과학‧기술 분야의 발전 모색(정치, 군사문제 제외)

-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네팔, 몰디브, 부탄, 아프가니스탄 등 서남아 8개국이 회원국이며, 한국, 중국, 일본, 미국, EU 옵서버 가입

역내국가간 국력의 불균형과 회원국간 다양한 갈등 및 대립 등 어려운 문제가 있으나 회원국 상호간의 공동체 인식과 함께 협력분위기 조성에 기여하는 바도 있음.


사회



카스트(Caste) 제도


○ 수천 년 간 인도인의 생활을 규율해 온 카스트 제도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
고, 근대화 및 교육의 영향으로 점차 약화되고 있으나 아직도 많은 인도인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관습으로 존재하고 있음.

○ 카스트제도는 아리안 족이 인도를 정복한 후 소수집단인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동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짐. 피부색 또는 직업에 따라 승려계급인 브라만(Brahman), 군인‧ 통치계급인 크샤트리아(Kshatriya), 상인계급인 바이샤(Vaisya) 및 천민계급인 수드라(Sudra)로 크게 나누어지며, 이 안에는 다시 수많subcaste가 있음. 최하층 계급으로는 불가촉천민(untouchable)이 있음.

○ 최초에는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으나 오랜 역사적 흐름과 더불어 다른 카스트와의 결혼 불허 등 많은 금기를 가진 사회규범으로 굳어져 인도인들은 자기가 속한 카스트의 행위범을 준수해야 했었음. 이러한 계급제도는 인도사회를 안정시키고 결속시키는데 도움이 된 면도 있다고 하나, 인권을 침해하고 사회를 정체시켜 활력을 잃게 하는 부정적 영향이 큼.

마하트마 간디를 포함한 많은 사회개혁운동가들은 불가촉 천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위해 노력하면서 불가촉 천민들을 ‘신의 자식’이라는 뜻에서 하리잔(Harijan)으로 부르고, 이들이 힌두 사원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천민보호에 앞장섰음.

- 오늘날 인도에는 1억이 넘는 하리잔이 있는 바, 정부에서는 입학, 취업시 일정비율을 하리잔에 배정해 주는 등 혜택을 주고 있어 하리잔 출신이 장관까지 된 경우도 있으나, 농촌에서는 아직도 카스트제도가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임.
 

언어


○ 다양한 인종과 더불어 180여종이 넘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헌법
으로 인정한 지역별 공용어는 18개임.

- 힌디어, 텔루구어, 벵갈어, 마라티어, 구자라트어 등

이중 인구의 38.7%가 사용하고 있는 힌디어는 전국적 공용어이며, 영어는 18개 공용어에 해당하지 않으나 의회, 행정부, 사법부 및 사각 분야에서 널리 사용하는 공용어이자, 학력이 높은 층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함.


복장


○ 남자 : 고유의상으로는 도티(Dhoti), 룽기(Lungi), 아즈칸(Achkan),
파자마 등을 들 수 있음. 그러나 도시에는 하절기에 사파리가 널리 사용되고 있음.

- 도티 : 동부‧남부지방에서 많이 입는데 긴 천을 밑으로 늘어뜨린 후 다시 허리춤으로 올려 동여 입는데 흰색의 얇은 천을 사용함.

- 룽기 : Kerala 등 해안지방에서 많이 입는데 좁은 폭의 천을 늘어뜨린 후 허리를 동여 입음.

- 아즈칸 : 네루 전 총리가 즐겨 입었던 목이 올라온 제복 스타일의 옷

- 파자마 : 우타르 프라데쉬 주에서는 무릎 아랫부분이 꼭 끼는 추리다(Churidar) 파자마를 입으며 Punjab에서는 헐거운 쿠르타(Kurta)를 입음. 흰색 천을 주로 사용함.

- 사파리 : 하절기(4월-11월)에 많은 도시인들이 즐겨 입는데 공식적모임에서는 점차 양복, 넥타이 차림이 조금씩 늘어가는 추세임.

여자 : 사리(Saree)라는 고유의상을 주로 입는데 지역에 따라 매는 방법, 천의 길이, 천의 개수가 다름.

- 입는 방법은 천을 허리에 감아 맨 다음 어깨에 걸쳐 밑으로 내려 입음. Punjab 지방에서는 사르와르 카미즈(Salwar Kameez)라는 상의가 길고 바지가 넉넉한 옷을 입으며 우타프라데쉬, 라자스탄, 구자라트에서는 가그라(Ghaghra)라는 긴 스커트를 입음.


문화


○ 베다문화(B.C.2000-500)

- 아리안 족의 침입 후 형성된 베다문화는 인도의 종교‧사회‧관습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힌두교를 탄생시켰으며, Veda와 같은 대서사시적인 경전을 발전시켰음. A.D.6세기-10세기를 통해 힌두문화는 건축․조각․회화 등 각종 예술 분야에서 번창했으며 힌두사원 등 많은 기념비적인 힌두문화 유물을 남겼음.

○ 불교문화(B.C.500-A.D.1100)

- 불교문화 전성기는 B.C. 3세기 야쇼카대왕 시대로 산치대탑, 보드가야의 대탑, 녹야원의 석탑, 아잔타․엘로라 동굴 조각 및 건축 예술에서 절정을 이룸. 아울러 불교는 중국, 한국 및 동남아 등 여러 나라로 전파됨.

○ 이슬람문화(A.D.1100-1600)

- 이슬람문화는 특히 건축에서 페르시아 및 힌두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조화를 이룬 대표적 양식으로, 초기의 상호배척을 점차 극복하고 상호간의 종교적 관용이 정착하면서 우루두어의 탄생 등 언어, 문화, 음악, 미술 분야에서도 많은 공헌을 함.

○ 서구문화의 영향(A.D.1700-1947)

- 250년에 걸친 영국 지배하에 인도예술, 특히 전통회화분야에서 서구 예술의 영향을 받음. 또한 영어의 도입과 함께 생활양식의 변화와 문학의 발전을 가져옴. 그러나 힌두문화는 상당부분 그대로 전승됨.

○ 독립이후(A.D.1947-현재)

- 독립 이후, 전통문화 창달과 문화유산을 보호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문학, 음악, 무용, 연극, 미술 등의 진흥을 위한 국가적 지원문화재 발굴, 보존, 전시 등을 위한 박물관, 문화재 관리국 등 국가행정기관을 통하여 현재 문화와 함께 전통문화를 조화시켜 나가고 있음.


교육


○ 교육의 기본정책은 지역 간의 교육격차해소, 전 계층 간의 균등한 교육기회, 국가사회 요구에 부응하는 인력자원개발 등에 목표를 두고 14세까지의 무상의무교육, 영어, 힌디어 및 주 공용어 등 3개 언어교육,
GNP의 6% 교육투자 등을 통해 중앙정부와 주정부가 공동 노력하고 있음.

학교교육은 10+2+3의 15년 과정의 교육제도로써 1968년도 채택 후 현재 거의 모든 주가 이를 실시하고 있음.


종교


인도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Jainism), 시크교(Sikhism) 등 4개 종교발생지이며 이슬람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유태교 등 다양한 외래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나라임.

종교는 인도 국민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종교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종교는 인도인의 생활과 밀착되어 있다고 할 수 있고 종교는 인도인의 일상생활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소임.

○ 헌법은 모든 종교에 대한 무차별, 신앙의 절대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모든 종교는 국가로부터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음.

○ 인도의 종교인구 분포는 힌두교 81.5%, 이슬람교 11.2%, 기독교 2.7%, 시크교 2.4%, 불교 0.7%, 자이나교 0.4%, 기타 1.1%임.


힌두교


○ 힌두교는 B.C 2000년경 아리안족 침입 후 최고경전 Veda가 집대성
되면서 정치, 사회생활을 지배해 왔으며, 이슬람교 등 이교도의 수세기 동안에 걸친 침략 속에서도 이에 동화되지 않고 오히려 포용하면서 오늘에 이름.

- 드라비다족의 토속신앙, 아리안족의 자연신 숭배 등에 바탕을 둔 다신교인 힌두교는 외래사상과 종교 등에 대한 인내와 관용을 특징으로 하며 생활경험, 도덕, 사회관습, 규범의 총체로서 Dharma(정의 또는 의무)에 따른 수도생활과 최고 정신을 탐구하는 고도의 생활 철학적 종교임.

- 소를 신성시하고 카스트제도를 정착시킨 힌두교는 해외 전파보다는 인도인의 종교로 존속하길 바라는 성향을 띠고 있음.

- 현재 약 8억에 이르는 신도를 가진 힌두교는 인도사회에 절대적 우위를 점하는 종교임.


보건


○ 약 26%의 빈곤층을 가지고 있는 인도는 모든 국민의 건강향상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농촌, 빈민층에 대한 위생, 의료혜택을 확대 실시하고 있음. 특히 UPA 정부는 집권기간 중 GDP의 2-3%를 보건 분야에 투입하되 기초보건에 우선적으로 투자한다는 계획이며,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보험의 조기 도입과 필수 의약품의 저렴한 판매 방안 마련 등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음.

○ 지난 30년 간 평균 수명은 31세에서 52세로 사망률은 천 명당 27.4%에서 14.2%로, 유아 사망률은 천 명당 146명에서 125명으로 개선됨. 또한 전염병퇴치를 위한 특별대책을 실시하고 있는 바, 1977년도를 기해 천연두는 퇴치되었으며 학질, 사상충, 나병, 콜레라, 결핵 등의 퇴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

○ 1952년 제1차 5개년 계획을 출발로 시작한 가족계획은 많은 성과를 가져출생률은 60년대 4.12%에서 1978년도 3.33%로 감소되었으며, 2002년에는 2.38%로 정부는 2001-11년의 10년 간 인구증가율을 16.2% 이내에서 억제한다는 계획임.


관습


인도인들 중에는 무신론자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이 절이나 집안에서 정기적으로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음. 힌두교는 다신교로서 교리나 성찰보다는 수많은 제신들의 형상화를 통한 의식이 주요 신앙생활을 이루고 있으며, 도덕률이나 내세구원보다는 개인의 현세구복에 치중하고 있음.

오랜 카스트제도 하에서 묵묵히 순종해온 생활태도, 불교의 자비와 관용적 사상, 장기에 걸친 이민족의 지배 등의 영향에 기인하는 관용적 태도, 생명존중 사상, 무저항주의 같은 평화주의 사상이 인도인들의 생활 저변있으며, 마하트마 간디가 제창한 비폭력주의도 이러한 전통적 사상의 계승 내지 발전으로 볼 수 있음.

- 그러나 이슬람-힌두 등 종교, 종파간 갈등 분규가 발생시 폭력사태로 변질되기 쉬우며,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기도 하여 외국인의 주의를 요함.

인도인들은 전통과 관습을 존중, 일반적으로 매우 보수적이며, 보수적 풍속을 벗어나는 외국인은 풍속사범으로 체포, 처벌하기도 함.

인도에서는 금주제도를 실시하는 주가 있으며 일반 식당에서도 금주일이 있고, 판매시간이 제한되어 있음. 주류 판매는 호텔이나 규모가 큰 대중식당에만 국한되는 것이 일반적

○ 매춘은 불법이며, 지역마다 정도의 차는 있으나 대체로 자국인들 간에 이루어지며,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음.

○ 여성들은 복장법령에 따라 공적 활동시 반드시 전통의상인 사리 또는 사르와르 카미즈를 입어야 하며, 일반대학에서도 여학생들에게 전통의상을 강요하는 사례가 있음.


언론


인도의 언론은 스스로 영국으로부터 독립(1947년)을 쟁취하는데 공헌바 크고, 독립이후에는 국가 건설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높은 긍지를 갖고 있음.

- 개도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언론자유가 보장되고 있으며 언론이 여론정치 구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신문 등 정기간행물(약 8,000종)은 대부분이 개인소유로 운영되고 있음. 특히 TV 및 라디오는 방대한 지역과 인구의 1/3 이상이 문맹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보도‧교육‧오락 등 일반적인 방송기능은 물론 정부의 대국민 홍보기능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

○ 인도 유일의 공중파 방송인 국영 TV Doordarshan(DD-TV)은 DD National, DD News, DD India(해외방송) 등의 채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외에 최근 대도시를 중심으로 민영TV 채널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으며, 케이블 TV 시장이 활성화되고 있음.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쿠웨이트 (Kuwait) 알기

지정학적 위치

○ 북위 28-30도(한국과 대만 중간), 동경 46-48도

(우랄산맥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중간)

○ 쿠웨이트의 총면적은 17,818㎢로 한국의 경상북도 크기와 비슷 하며, 동서의 폭은 150km, 남북의 길이는 195km임. 총면적중 2,590㎢는 1966년 사우디와 쿠웨이트간에 분할된 '중립지대'(Neutral Zone)이며, '부비얀'(Bubiyan), '와르바'(Warba), '훼일라카'(Failaka)로 구성되는 10개의 근해 섬(offshore island)과 쿠웨이트만(灣)에 형성돼 있는 199km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음.

지형적 특징

○ 쿠웨이트는 아라비아 반도의 동북부, 즉 걸프만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산유 부국(富國)으로 북으로는 이라크, 남으로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동으로는 걸프만에 인접. 쿠웨이트의 정식 국명인 State of Kuwait는 '작은 요새'(little fortress)라는 의미를 갖고 있음.

○ 쿠웨이트는 걸프만 내륙으로부터 이락에 이르는 진입로를 제공하는 약 간 경사진 단단한 땅을 가지고 있고, 가까운 모래 언덕과 산호초로 둘러싸인 양호한 항구를 가지고 있기에 성장에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음.

○ 동부의 해안지대를 제외하고는 국토의 대부분이 해발 10-80m의 평탄한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음.

기후

○ 열대성 사막기후

- 연간 평균기온 : 25도 연중 6개월이 30-53도 사이(연중 최고기온 53도)

- 연중 6개월이 30-35도 사이(연중 최고기온 53도)

- 아라비아 반도에서 가장 더운 지역(6-8월의 경우, 세계에서 가장 고온)이고, 겨울에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기온상 가장 추운 지역

약사

국가 형성 과정

○ 16세기 이전부터 터키(Ottoman 제국)의 영향에 있었으며, 18세기초부터 오늘날의 사우디, 이라크, 이란 등지로부터 Amaiza족 등이 이주하여 현 쿠웨이트 민족의 주류 형성

- 756년 초대 Sabah 왕이 황무지를 개척, Koutu라는 지역에 정착

○ 1897년 Mubarak왕은 터키의 쿠웨이트 합병을 피하기 위해 보호를 요청했고, 영국은 지중해와 인도간의 무역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1899년  쿠웨이트와 보호조약 체결, 이후 영국이 외교와 국방 담당 

근대 및 현대

○ 1961년 쿠웨이트는 영국과의 보호조약을 우호협력조약으로 대체, 독립국 지위 획득

- 화폐는 루피(Ruffy)에서 디나(Dinars)로 변경

○ 1990.8.2. 이라크가 침공, 쿠웨이트 합병 선언

- 유엔 결의에 따라 미국을 주축으로 구성된 27개국 다국적군의 공격으로 이라크군을 축출하고 1991.2.26. 쿠웨이트 해방

왕위 계승

○ 13대 ‘자베르(Jaber)’ 국왕(77.12 즉위)은 걸프전후 왕정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고조되자 언론검열 폐지(92.2), 여성 참정권 허용(05.5) 등 점진적으로 민주화 추진

○ 2006.1 ‘자베르’ 국왕의 사망으로 ‘사드(Saad)’ 왕세제가 즉위했으나 건강문제로 직무수행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10일만에 의회의 결정으로 퇴위

- 왕위계승 관련 법률 4조에는 의회가 재적의원 2/3 이상의 동의로 국왕 퇴위를 결정할 수 있다고 규정

○ 총리였던 ‘사바’가 국왕으로 즉위(06.1), 외교장관․총리로서 40년 이상 풍부한 국정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정국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

- 사바 국왕은 여성참정권 허용, 신언론법 제정, 선거구수 축소 등 선거제도 개선, 각종 규제완화 등 개혁정책 추진

- 쿠웨이트는 GCC 국가중 유일하게 의회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06.6월 국회의원 선거에 여성이 최초로 입후보하고 투표에 참가

정치 개황

정부형태

○ 국가 형태 : 입헌 군주국

○ 국왕(AMIR)의 권한

- 국왕은 국가수반으로 각료 임면권, 의회 해산권 및 군 통수권을 갖고 있음. 국왕부재 시는 왕세자(CROWN PRINCE)가 업무를 대행하며, 왕세자의 업무대행이 불가할 경우 국왕은 칙령에 의한 대행자를 임명함.

- 종전에는 왕세자가 수상을 겸임했으나 2003.7월 정치 개편 이후 수상직이 별도 분리되었고, 각료수상의 추천에 따라 국왕이 임면함.

- 각료는 국가의 정책에 대한 집단 책임과 함께 개별 부서의 업무에 대한 개별 책임을 짐.

- 단일 도시국가 형태로 지방자치 제도는 전혀 확립되어 있지 않으며, 전국은 행정부 산하로 6개의 GOVERNORATE로 나뉘어 있음.

내각

보통, 비밀,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된 50명의 의원과 당연직 의원인 15명의 각료로 구성되며, 구성각료는 의원겸직 가능

의원의 임기는 4년으로 연임 제한은 없으며 법률안 의결권 및 왕세자 임명 동의권을 가짐.

의원 선거권자는 문자 해독이 가능한 21세 이상의 쿠웨이트 시민이며 왕족, 군인, 경찰및 보안관계 종사자는 투표권이 없음.

사법제도

3심제이며 모든 법원은 형사, 민사, 가정사건 등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사건을 다루고, 계엄 시 군사법정이 설치되며 재판관은 국왕이 임명함.

○ 대법원 - 대법원장과 부원장이 있으며 판결은 5인 1팀의 법관에 의해 내려짐.

○ 고등법원 - 법원장과 부장이 있으며 1심 또는 즉결심판에서 불복한사건에 대해 판결함. 판결은 3인 1팀의 법관에 의해 내려짐.

○ 1심 법원 - 형사 사건이나 단독심의에 의해 내려진 판결을 재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독심으로 진행됨.

○ 헌법 재판소 - 헌법에 위배되는 사항을 다루기 위한 법원으로 5명의 상시 재판관과 2명의 임시 재판관으로 구성되어 있음. 헌법소원은 의회나 정부 또는 하급법원에서 제기되고 있음.

각료명단 및 주요인사 인적사항

국왕

○ 이름 : His Highness The Amir, Sheikh Sabah Al-Ahmed Al-JaberAl-Sabah 아미르, 셰이크 사바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 생년 : 1929년

○ 출신 : 3대 국왕인 Amir Shaikh Jaber Al-Ahmed Al-Sabah(아미르 셰이크 자베르 알-아흐마드 앗-사바)의 동생

○ 경력

- 1962년 공보부 장관 역임

- 1965~1967년 재경부장관과 석유부장관대리 역임

- 1963~1991년 외무부장관 역임

- 1998~2003년 외무부장관과 제1부총리 겸임

- 2003~2006년 총리 역임

왕세자

○ 이름 : His Highness Sheikh Nawaf Al-Ahmed Al-Sabah(Amir’sbrother) 셰이크 나와프알-아흐마드 앗-사바(현 국왕의 동생)

○ 생년: 1937년

○ 경력

- 1962년 하왈리 주지사 역임

- 1978~1988년 내무부 장관 역임

- 1988~1991년 국방부 장관 역임

- 1991~2003년 국가방위군 부의장 역임

- 2003~2006년 내무부 장관과 부총리 겸임

총리

○ 이름 : Sheikh Nasser Al-Mohammad Al-Ahmad Al-Sabah

○ 생년 : 1940년

○ 경력

- 1965년 왕실 의전장관역임

- 1968년 이란대사 역임

- 1985~1988년 정보부장관 역임

- 1988~1990년 노동사회부장관 역임

- 1990~1991년 국무부장관 역임

- 1991~2006년 왕실 의전장관 역임

외교

외교정책기조

○ 독립 이후 비동맹 중립외교를 표방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친서방 정책을 견지해 왔으나, 81년 5월 사우디, 바레인, UAE, 오만, 카타르 등과 GCC(페르시아 만안(灣岸) 협력 회의)를 창설, 강대국의 개입을 배제한 자주적 역내집단 안보체제 구축을 모색하면서부터 미∙소 양 진영에 대한 등거리 외교정책과 엄정 비동맹 정책을 추구

○ 이러한 외교적 노력의 실례로 81년도 SABAH 외상의 방소, JABER 국왕의 발칸 및 동구제국 순방, 82.6월 SABAH 외상의 동구 및 소련 방문, 미∙소 양측으로부터의 무기구입 등을 들 수 있는 바, 이는 친서방적인 종래의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한 외교적 전략으로 해석됨.

○ 걸프전 이후 외교정책은 안보체제 구축을 최우선으로 하여 미국, 영 국, 프랑스, 러시아와 방위 조약을 체결하는 등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음.

대미국 관계

○ 쿠웨이트의 동∙서 등거리 외교원칙에 입각, 중립적인 태도를 취해 왔 으나 쿠웨이트항공기 납치 및 국왕 피격 사건 시 미국의 신속한 태도 표명으로 85년부터 관계가 호전됨.

○ 미국의 대 이란 무기 판매 사건으로 쿠웨이트에 있어서 미국의 신뢰성이 크게 실추되었으나 2차에 걸친 미해군의 이란 쾌속정 및 석유시설 공격과 대 이란 무기 금수조치에 대한 명확한 태도 표명으로 신뢰성도 크게 회복됨.

○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에 의해 이라크로부터 해방된 91년 2월 이후 방위조약을 체결한 이후 경제적인 모든 면에서 미국 기업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등 미국과의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고 있으며, 2003년 이라크전을 통해 더욱 공고히 되고 있음.

아랍-이스라엘 분쟁

○ GCC 회원국들과 공동보조 아래 미국․EU의 중재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조속한 해결을 적극 지원한다는 입장

○ 이스라엘에 대해서는아랍권의 정서를 고려, 관계개선에 미온적이며 통상 관계도 중동평화협상 진전 상황을 보아가며 결정한다는 입장

유럽 및 러시아와의 관계

○ 93.11월 상호방위 조약 체결 이후 합동 군사 훈련을 계획하는 등 군사외교적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고 있음.

○ 이라크로부터의 해방 후에도 이라크의 위협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으며 자국의 방위를 위한 UN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력

○ GCC국가와 가장 밀접한 교역 파트너인 EU의 시장통합에 대응하기 위하여 GCC국가가 추진하고 있는 역내 자유교역 및 대EU 수입품의 수입 관세율 동일 적용 등의 추진에 회원국으로서 적극적으로 대응

대아시아 관계

○ 자국산 원유의 최대 도입국인 한․일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으며, 한․일의 쿠웨이트 진출기업 및 근로자들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 견지

○ 걸프전 시 다국적군에 참여한 한국의 역할에 사의

○ 2004.7 '사바‘ 총리(현 국왕)는 한국․일본․중국을 함께 방문한 바 있으며, 최근 들어 중국, 베트남과의 관계 강화에 적극적 자세를 보이면서 에너지 협력 및 금융투자 확대 추진

중동국가들과의 관계

○ 이라크와는 1990년 걸프전이라는 악몽이 남아 있으나, 최근 들어 이라크와의 과거 청산 및 미래지향적 협력관계 수립에 적극적 자세

-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말리키’ 총리의 2차례 쿠웨이트 방문(06.7)및 ‘국경선 설치에 관한 양해각서’ 체결(06.11) 등을 계기로 적대관계청산을 모색하고 있으나, 이라크와의 국경분쟁, 이라크 내부 혼란으로 인한 난민 유입 가능성 등에 대해 우려하여 친미 성향의 이라크 신정부정책을 지지하고, 이라크의 조속한 안정화를 지원

- 최근 대이라크 부채탕감 문제에 다소 신축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이라크 재건사업에 5억 6,000만불 지원

○ 이란과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이란의 핵개발은 IAEA 체제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으로, 특히 이란의 핵개발로 인한 걸프지역의 해수오염 가능성에 우려

○ 2006.10 미국 주도의 PSI 해상 기동 훈련시 이란은 쿠웨이트가 참여하지 않도록 간접적으로 압력을 행사하였으며, 이에 따라 쿠웨이트는 옵저버 자격으로만 참가

사회

교육

○ 공립학교 및 사립학교는 초, 중, 고 각 4년

○ 국제학교(사립학교)중 American School은 미국학제, British School은 영국학제를 따름

○ 학교현황

- 국.공립학교 : 현지인만 입학

- 사립 아랍어학교 : 현지인 및 외국인 입학가능

- Int‘l School : American School 및 British School 등 다수

- 학비는 US$5,000 - US$13,000 범위

○ 쿠웨이트대학 (www.kuniv.edu.kw)

- 현지인 및 외국인 입학가능 단, 외국인은 교육부장관 승인사항

- Tel : 4988-888

○ 사립대학

- American University of Kuwait, Gulf University, Australia University

언론

○ 채널 4개가 있으며 아랍어방송 1개, 영어방송 1개, 스포츠․오락방송 1개 등 아랍어 방송 2개가 있음. (모두 국영방송)

영어방송의 경우 대부분이 미국방송 프로그램을 그대로 방영하고 있음.

○ 위성수신 TV Channel이 다양하며 CNN, BBC, STAR TV 시청 가능

Arirang TV, Sun Channel, YTN TV등 한국 TV방송도 가입시 시청가능

○ 일간지 - 아랍어 현지 신문 5개, 영자신문 3개

사회적 갈등 요인

○ 국민을 1등국민(참정권 향유)과 2등국민(귀화후 20년 미경과자로서 참정권 없음)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약 12만명의 아랍계 무국적자(Bedouns) 및 외국인 근로자 등이 공존하면서 사회의 이질감 형성

서구식 자유를 향유코자 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보수 이슬람주의 자들이 사회를 이슬람화 하려는 동향이 있어 종종 갈등 노정

○ 외국인은 쿠웨이트인 Sponsor가 있어야 사업과 체류를 할 수 있는 바, 외국인 근로자의 체류비자를 둘러싸고 쿠웨이트인의 비자 알선 폭리와 인권유린이 사회문제화

○ 남.녀간의 성비 불균형(많은 외국인 독신 근로자들의 존재로 남성이 압도적인 다수 차지), 본인 의사에 반하는 결혼으로 이혼율 증대, 공공부문의 흡수능력 한계로 인한 쿠웨이트인들의 실업율 증대도 점차 사회문제로 대두

비즈니스 에티켓

○ 복장

- 반바지 착용 금지

- 여성의 경우 전통의상인 ‘아바야’ 반드시 착용 요망

- 여성이 남성 앞에서 손목과 발목 및 얼굴을 노출시킬 경우 외국인일지라도 종교경찰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음에 유의

○ 식사문화

- 세 번 이상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남.

- 전통식당에서 오른손으로만 식사해야 할 것에 유의

- 개, 돼지, 맹수류, 맹금류, 파충류와 이슬람식으로 도살되지 않은 고기, 죽은 짐승의 고기와 피, 내장 등을 먹지 않는 것이 관례

- 술을 권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남.

- 쿠웨이트는 주류, 마약 반입을 철저히 금하고 있어 입국 시 일체의 주류를 소지해서는 안됨. (마약 반입은 최고 사형)

○ 인사

- 남성 간에는 악수교환이 일반적인 인사법

○ 선물

- 이슬람 문화는 뇌물수수를 금기시하기 때문에 선물전달에 유의

- 특별한 기회에 소박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함.

○ 약속

- 현지인은 시간관념 부족

- 비즈니스 미팅의 경우 잦은 연락을 통해 약속을 지키도록 유도

사회문화

○ 가부장적인 가정생활

- 남편의 권위주의, 남아선호사상

- 사회발전과 세계화의 영향으로 여성인권 및 사회진출 요구 중

○ 결혼문화

- 부족주의 시대관습 계승하여 근친간의 결혼형태가 만연

- 혼인을 위한 신랑의 막대한 지참금 부담이 사회문제화

관습및 체류시 주의사항

○ 관습

- 전통적 회교국으로서 사회생활의 근간을 이슬람 교리에 두고 있음.

- 대가족제도를 유지하고 있으나 사회발전에 따라 점차 핵가족화 경향

- 이슬람 교리에 따라 4번까지 중혼이 가능하나 중혼은 점차 줄어들고 있음.

- 매춘, 음주, 돼지고기, 이자놀이, 도박 등은 금기사항

○ 체류 시 주의해야 할 사항

- 이슬람교도가 아닌 경우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지 말 것.

- 기도하고 있는 사람의 앞을 지나가거나 말을 걸지 말고, 기도할 때 까는 담요를 밟지 말 것.

- 친한 경우가 아니면 종교나 상대방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말 것.

- 여주인이나 여자식구를 위해 선물을 사오거나, 여주인의 안부를 물어서는 안되며 거리에서 여인의 사진을 찍어서는 안됨.

- 여성의 경우 옷차림은 정숙하여야 하며 어깨를 드러내는 옷은 피해야함.

- 라마단 단식 기간 중에는 아랍인 앞에서 먹거나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지 말 것. (위반 시 구금)

- 특별히 의심되지 않는 쿠웨이트인이 제공하는 아랍커피와 홍차는 받아 마시는 것이 예의임.

- 물건을 주고받을 때는 바른손을 사용

- 쿠웨이트인과 면담 시, 신발바닥이 보이도록 앉는 것은 실례

- 길거리나 주요건물 앞에서 사진촬영 금지

(적발 시 벌금 부과 및 차후입국 시 입국금지 됨)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지정학적 위치

아라비아 반도의 서해안 중간지대에 위치, 걸프만쪽으로 약 160㎞ 북쪽으로 뻗어 있는 반도 (남-북 160㎞ / 동-서 80㎞)

Halul 섬 등 다수의 섬을 포함하고 있으며, 사우디와는 육지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

지형 특색

○ 대부분의 지형이 사막평지로 되어 있으나, 60m 높이의 모래 둔덕이 있음. 해발 최고지점은 120m 높이임.

약 6천만년전 해수아래 침잠 되어 있은 영향으로 다수지역에 소금지대가 산재함.

민족구성

○ 카타르인은 17C-18C에서 19C 초엽까지 인근지역에서 이주해 온 아랍계 인종임.

○ 카타르인 외에 인도․파키스탄․이란 등 100여개국의 외국인이 거주함.

주요 도시

○ Doha : 동해안의 항구도시로 수도임. 정치‧경제‧사회생활의 중심지역으로 카타르 전체 인구의 절반이상이 거주함.

○ 기타 석유화학 산업도시인 Messaieed, 유전지역인 Dukhan, 가스생산 지역인 Ras Laffan, Doha 인근 해변도시인 Al-Wakrah와 Al-Khor가 있음.

종교

공식종교는 이슬람이며, 주요 입법원은 회교 샤리아법임.

○ 절대 다수 카타르인은 순니파 이슬람교도이며, 이슬람교 일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고 있음.

이슬람교 이외의 외국인의 종교에 대해서는 비공식 묵인 등 관용적 태도를 취함.

약사

고대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BC 4C 남부 이라크와 북부 걸프 아라비아 지대에 번성한 Ubaid 문명이 카타르에까지 미쳤으며, 인간 정주의 흔적을 남김.

BC 5C에 원주민이 정주하기 시작했으며, AD 2C에 아랍세계 지도에 Qatra로 지명이 표기

중세

이슬람 여명기에 Mandher 왕조의 지배하에 있다가 그후 Khawarej와 Qarameta의 지배를 받음.

○ 6C에 인도행 무역전략 거점으로 포루투갈의 통제하에 있었으나, 곧 오토만 터키의 영향권으로 들어감.

근대

○ 1860년대 Bani Utab족 카타르에 정착

○ 1868 : Sheikh Mohamed bin Al-Thani족 영국과 선린 외교관계 수립, 협정 체결 (이후 현재까지 Al-Thani 왕가가 지배)

○ 1872 : Ottoman Turkey 지배

○ 1876 : Ottoman Turkey의 정부 수립

○ 1880 : Bahrain과 영토보호 협정 체결

○ 1899 : Kuwait와 영토보호 협정 체결

○ 1913 : 영국과 Ottoman Turkey 제국간 협정체결로

카타르 독립인정

○ 1914 : 영국과 Ottoman Turkey 제국간 정식 협정 체결로 영국은 카타르 국내 문제 불간섭 언약

(동시에 카타르 반도내의 터어키 세력권 규정)

○ 1916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터어키 세력 물러가고 영국세력 신장

현대

○ 1961 : OPEC 정회원으로 가입

○ 1970 : 영국 보호령으로부터 아랍 연맹 가입을 허락하는 신헌법 제정 독립 선포

○ 1971. 9. 3 : 영국과의 보호협정 폐지, 완전독립을 선언

○ 1971. 9. 4 : Sheikh Ahmed bin Ali Al-Thani 국왕(Emir) 즉위

○ 1971 : 아랍연맹 및 유엔에 각각 가입 (9.11 및 9.21)

○ 1972. 2.22 : 궁정 쿠데타로 국왕 (Sheikh Khalifa bin Hamad Al-Thani) 즉위

○ 1977. 5.31 :Hamad 왕세자 국왕 후계자로 지명

○ 1995. 6.27 :궁정 쿠데타로 현 국왕 (Sheikh Hamad bin Khalifa Al-Thani) 즉위

○ 1996.10.22 :현 국왕의 3남인 Sheikh Jassim bin Hamad Al-Thani를 왕세자로 책봉

○ 1999. 3. 8 : 중앙자치의회 의원 선거 실시 (29명)

○ 2002. 7. 2 : 영구헌법안 발표 (5장 150조)

○ 2003. 4. 7 : 중앙자치의회 의원 선거 실시 (여성의원 1명 최초 당선)

○ 2003. 4.29 : 영구헌법안 국민투표실시 (96.6% 찬성, 통과)

○ 2003. 8. 5 : 현 국왕의 4남인 Sheikh Tamim bin Hamad Al-Thani로 왕세자 교체

○ 2003. 9.16 : 제1부총리 (외교장관 겸직) 및 제2부총리 (에너지․산업장관 겸직) 신규 임명

○ 2005. 6. 1 : 영구헌법안 발효

○ 2007. 4. 1 : 지방선거

○ 2007. 4. 3 : 정부조직개편 (복수부총리제를 단수부총리제로 개편)

정치개황

국왕 (Emir)

2003. 4월 통과된 영구헌법에 의하면 국왕(Emir)은 행정부를 관장하며, 자문위원회(Advisory Council, 우리의 국회에 해당)에서 제정한 법률안 거부권과 자문위원회의 해산권을 가짐.

- 헌법이 완전하지는 않으나 민주 헌법의 요체인 3권 분립 도입하여 자문위원회의 법제정권을 인정함으로써 영구헌법 이전에 국왕이 독점적으로 보유하였던 입법권이 대폭 약화됨.

○ 국왕은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고, 모든 법령을 비준, 공포하고, 각의를 주재하며, 군 통수권자가 되는 외에 법률에 따라 정부각료와 군인을 임명하고, 자문위원을 임명

내각

내각은 국왕의 위임을 받아 각종 법령을 집행하는 최고 행정 기관임.

○ 각료는 각종정책을 집행하는 책임을 지며, 법령안 제안 및 집행, 재정감시, 예산준비, 국가 이익의 대외적 수호 등 임무를 수행

총리, 부총리(2명, 장관 겸직), 9개 부처 장관, 국무장관 4명, 무임소 국무장관 8명으로 각료회의(Council of Minister)가 구성됨.

자문위원회

○ 영구헌법에 의한 자문위원회는 4년 임기로 총 45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이중 30명은 직접․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나머지 15명은 국왕이 임명하는 위원으로 구성됨.

- 과거 자문위원회는 72년 발효된 헌법에 따라 전원 국왕이 임명한 20명(75년 30명, 96년 35명으로 증원)으로 발족되었고, 그후 국왕 칙령으로 임기가 1년에서 6년 연장되었으며, 이후 4년씩 중임되었음.

법률 제정, 각의에서 부의되는 예산, 법령안, 기타 주요안건을 심의하고, 제반 제안을 발의할 수 있는 등 의회 기능을 담

○ 신 영구 헌법에도 서구 개념의 의회제도는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정당 활동이 금지되어 있음.

사법제도

법무부 내에 5종으로 구별되는 법원이 있음.

-하급민사법원 (Lower Civil Court) : 1심

-상급민사법원 (Upper Civil Court) : 2심

-하급형사법원 (Lower Criminal Court) : 경범 취급

-고등형사법원 (Higher Criminal Court) : 중요 사건 취급

-항소심 법원 (Court of Appeal) : 민사, 형사 최고 법원

○ 특수법원으로 전통적인 이슬람법원(Sharia)이 있으며, 이는 이슬람교도의 개인문제에 관련한 판결과 코란의 율법에 대한 유권적 해석을 내리는 종교재판소이며, 그외 종교행정에 있어 광범위한 감독권을 갖고 있음. 동 이슬람법원은 04. 10월 사법 개혁법 공포를 통해 05.1월부터 법무부 내로 편입됨.

○ 지난해 카타르 여성의 권익보호를 위해 국왕비의 주도로 가정법원을 설치하여, 이혼시 여성의 위자료 지급, 양육권 문제, 아동보호 문제 등을 전담함.

국왕 인적사항

○ 성 명 : Hamad bin Khalifa Al-Thani

○ 생년월일 : 1952년 (칼리파 전 국왕의 장남)

○ 출 신 지 : Doha (수도)

○ 학 력

- 카타르에서 초․중등 교육 이수

- 영국 Sandhurst 육군사관학교 졸업 (1971)

○ 경 력

- 1972 카타르군 총사령관

- 1977 왕세자 책봉, 국방장관 취임

- 1979-91 청소년 복지 최고위원회위원장

- 1992 국왕으로부터 내각임명권 수임으로 사실상 국정운영

- 1995 전국왕(아버지) 외유 중 정권장악, 국왕즉위

○ 가족관계 : 부인 및 아들 5명

○ 참고사항 : 99. 4월 방한

외교

외교정책기조

GCC 역내 각국(쿠웨이트, UAE, 오만, 바레인)과 보편적인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주변 이슬람․아랍국가와의 연대감하에 우호관계를 갖고 있지만 친서방 온건 노선을 견지, 실리적 균형 외교를 취하고 있음.

<GCC 및 아랍권 협력>

아랍권 및 GCC 국가와의 전통적인 유대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문제, 중동평화 문제 등 주요 국제문제에 있어 GCC 국가와 원칙적으로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음.

<친서방․친미 외교정책>

실용주의 노선 추구로 2003년 사우디에서 주둔중인 미군기지를 전격적으로 유치하는 등 미국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시하면서 경제적으로는 서방국가와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함.

<아시아국가와의 관계 확대 추진>

최근 카타르는 아시아국가의 일원이라는 기치하에 제15회 도하아시안게임 유치 등 아시아국가와의 관계 강화에 적극 나서고 있음. 특히 서구와 견줄만한 기술과 산업생산력을 가진 한국, 일본, 싱가폴 등과의 협력 확대에 적극적임.

대이스라엘 관계

이스라엘의 점령지로부터의 전면 철수 및 팔레스타인의 독립국가 수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이스라엘 무역대표부의 설치를 허용하는 다소 현실적 노선을 추구함.

○ 2000. 11월 카타르에서 개최된 이슬람 국가 정상회의(OIC) 직전에 이란, 사우디 등의 압력에 굴복, 공식적으로는 자국의 이스라엘 무역 대표부를 폐쇄하였으나, 이스라엘측에서는 무역대표부를 유지하고 있고 2002. 7월, 2003. 5월 각 파리에서 이스라엘과 외무장관급 회합을 갖는 등 일정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음.

○ 2006. 7월 Hamad 제1부총리겸 외교부장관의 이스라엘 방문, 2007. 1월 Peres 이스라엘 부총리의 카타르 방문 등 이스라엘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으로 보임.

팔레스타인 문제

아랍 최우선 현안인 중동평화 협상에 있어 여타 아랍국가들처럼 이스라엘의 점령지로부터의 전면철수 및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독립국가 수립과 국권보호를 전폭 지지하는 원칙적 입장하에 Quartet에 의한 중동 평화정착 로드맵 적극 지지하고 있음.

○ 팔레스타인내 Hamas-Fata간 통합 정부 구성 협상에 적극 개입, 중재에 나서고 있으면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원을 강화

미국과의 관계

대미 관계를 주재국의 안보와 직결된 문제로 인식하고 있어 주변 아랍 국가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미 협조 자세를 보이고 있음.

서방국가중 미국에 대해 카타르 내 주요 병참기지 건설을 허용하여, 약 10,000명의 여단병력을 빠른 시간내 무장시킬 수 있는 Pre-Positioning Base로서의 병참기지가 설치

-동 병참기지는 최신정찰기, 전투폭격기, 탱크 등 주요 군사장비를 보유함으로써 유사시 동 군사기지를 통해 중동에서 지역 분쟁에 대해 빠른 군사개입을 할 수 있게 됨.

○ 한편, 대 이라크 전쟁시 도하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아스 사일리야 기지(Camp As Sayliyah)에 미군 중부사령부의 전진 기지를 제공하였으며, 전쟁 종료후 2003년 8월 사우디 주둔 미 공군기지를 카타르내 알 우데이드(Al Udeid) 공군기지로 이전하는 등 최근 양국간 군사협력 관계가 한층 긴밀해지고 있음.

사회

인구

전체인구는 외국인을 포함 약 90만명(카타르인은 약 20만명)으로 추정되며, 아랍계 40%, 인도 18%, 파키스탄 18%, 이란 10% 등으로 구성되어 있음.

출생률은 1천명당 15.6명, 사망률은 4.8명 선이고, 연령별 인구 분포는 0-14세 (23.1%), 15-59세 (72.9%), 60세 이상 (4%)으로 나타남.

교육

카타르 국민은 대학교까지 무료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외국인에 대해서도 무슬림인 경우에 한하여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음.

카타르는 국력을 기울여 과학기술의 발전과 인재 양성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학업 성적(고등학교 40% 이상 수준)만 좋으면 전액 국비 해외유학 보장

카타르 대학은 현재 6개 단과대학에 학생 수 8,400여명, 교수진 600여명으로 년 1,380여명 내외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으며, 교수진중 70%가 영국, 이집트, 이란 등지에서 초빙, 충원되고 있어 외국 교수의 비중이 높은 편임.

동 대학의 특이한 점은 전체학생수의 약 70%가 여학생으로 성비가 불균형한 바, 동 불균형의 이유는 남학생들은 주로 해외로 유학을 가는 반면 여학생들은 이슬람 관습상 해외유학이 어려워서 국내 교육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임.

- 단 여성인력의 고학력 추세에 따른 여성의 사회진출로 여성인권이 대폭 신장 중

○ 카타르 정부는 중동지역의 교육의 중심지로 부상하겠다는 전략하에 교육부문에 국가적인 투자를 거행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적극적인 교육 정책이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교육도시를 설립하게 됨.

언론

○ 1996년 Hamad 현국왕의 즉위 이후 즉각적인 언론검열의 폐지로 언론보도의 자유는 진전됨. 단, 일정 사항은 아직 금기로 남아있고, 거의 모든 언론들이 카타르 정부의 보조금으로 운영되고 있어 언론인의 자율적인 보도 제한이 실시됨.

라디오 및 TV 방송은 각기 아랍어, 영어방송을 별도 방영하며, 영어뉴스 방송은 다음과 같음.

- 라디오 (QBS) : 06:00, 07:30, 08:30, 13:00, 18:00, 20:00

- QTV (CH.69) : 20:00 (30분)

- Al-Jazeera TV (CH.76) : 전세계 전역 아랍어 시사 TV

○ 신문

-영 자 지 : Gulf Times, The Peninsula

-아랍어지 : Arrayah, Al-Sharq, Al-Watan

종교

국민 거의가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이며, 와하비파에 속하는 순니파로서 사우디와 비슷한 엄격한 이슬람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음.

이슬람교의 교리, 문화, 관습의 전파를 위하여 종교부를 두고 있으며, 종교부는 이슬람 사원의 건립 및 관리, 회사금의 관리, 이슬람문화 보급, 서적발간 등을 맡고 있음.

○ 카타르에서 지켜지는 중요한 종교행사는 아래와 같음.

- Ramadan : 이슬람력 라마단 (이슬람력 9월) 1개월간의 고행과 금식의 기간으로 양력으로는 매년 변동되나, 2006년도에는 9.24 - 10.23 이었음.

- Eid Al-Adha : 이슬람력 둘히자 (이슬람력 12월)

제10-13일까지로 공식 공휴일임.

○ 카타르 정부는 구미 선진국 인의 진출과 기타 외국 인력의 증가와 이들의 압력에 따라 99. 4월부터 기독교 등 타종교에 대해서도 제한된 범위내에서의 종교활동을 허용하기 시작하여 일정지역에 외국인 전용의 성당 등 종교시설 건립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

생활양식

국민의 모든 일상생활은 이슬람 교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음. 그러나, 미국 등 선진국과의 잦은 접촉과 구미 문물의 도입으로 생활면에서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

남녀간의 내외가 엄격하며 사우디만큼 보수적은 아니나, 여성의 직장, 대외활동 등 사회참여가 거의 없음. 그러나, 최근 중앙자치의회 후보로 여성이 입후보하여 여성의원이 1명 탄생하고 국왕비가 적극적으로 공무원 및 국영기업체에 카타르인들을 고용하는 카타르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여성 인력 사회 활동이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또 여성의 운전이 가능함.

- 서구문물의 도입과 해외여행, 백화점, 슈퍼마켓등의 발달로 병원, 교육 기관 일부 등 출입처가 따로 되어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남녀간의 구분이 완화되어 가고 있음.

식생활에 있어서 이슬람교 관습에 따라 주류, 돼지고기, 맹수, 파충류는 금기사항임. 이중 주류는 고급 호텔을 제외한 요식업소에서 판매 또는 접대치 않고, 이를 소지하거나 판매하는 것은 처벌되나, 외국인의 경우 자택에서 마시는 것은 묵인되고 있음.

카타르는 남녀 모두 전래의 아랍 복장을 상용하고 있어 외국인 또는 여타 아랍권 국민과 구별 가능함. 아랍복장을 상용하는 걸프 국가(바레인 등은 서구복장 착용 경향)의 경우도 모양이 다소 상이함. 아랍 복장은 공식복장이며, 남자의 경우 두건 Qutra와 긴 흰옷 Dishta(겨울철에는 유색도 착용)를 입으며, 왕족과 정부 고위층은 각기 다른 소매 없는 두루마기 Al-Abaah를 걸쳐 입음.

여성의 경우 연령에 따라 상이하나, 성년 여자는 마스크 Al-Battoulah와 검은천 Bousheih로 얼굴을 가리고 몸 전체를 감싸는 Al-Daraa를 착용함.

관습 및 국민성

○ 여타 아랍국가들과 같이 이슬람을 국교로 하고 있어 이슬람 종교와 문화가 개인과 사회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

-따라서 공식석상에서의 금주, 돼지고기 섭취 금지, 일부다처제, 가부장제, 전통복장 착용 등의 이슬람 풍습과 관습이 그대로 남아 있음.

○ 다양한 서구식 문화의 유입과 외국인 노동력 유입에 따라 이슬람문화의 영향력이 점차적으로 약화되는 추세로서 외국인의 생활 (복장 및 음주 등) 및 종교에 대해 묵인하는 등 관용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등 개방적인 모습도 목격됨.

○ 가부장제 사회로서 가문 또는 가족을 향한 의리가 무엇보다 우선하며 동일 가문내에서도 친형제와의 우애가 친척간 유대감보다 중요함.

-가족 중시 성향으로 인해 사회적 책임과 공중도덕 관념이 상대적으로 미약

○ 카타르인들은 혈연 가족관계 및 체면․명예를 매우 중시하며 이에 따라 자신의 재산 및 부계혈통을 과시하려는 경향이 있음.

-혼인시 개인의 외모․능력․성격 보다는 가계․혈통이 중요한 고려 요소로 작용함.

○ 카타르인들은 순박하며 인정이 많고 친화력이 있으나, 자존심이 강하고 배타적이며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대해서는 양보를 하지 않는 경향을 보이고 있음.

○ 특히 “조급하게 굴지말라”라는 코란의 계율에 따라 느긋하여 서두르지 않고 서두르는 것을 믿음이 없는 사람의 경박한 행위로 간주함.

○ 라마단 단식기간중에는 먹거나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고 껌을 씹는 것을 삼가하여 함. (해가 뜨기 시작해서 질 때까지)

○ 특별히 의심되지 않는 카타르인이 제공하는 아랍커피와 홍차는 받아 마시는 것이 예의이며, 더이상 마시지 않을 경우는 잔을 들고 세번 흔들어 줌.

비즈니스 참고사항

○ 에이전트 제도

- 카타르는 여타 중동국가와 마찬가지로 Agent 제도가 매우 보편화되어 있음. 현지대리인 또는 대표를 통해서만 판매행위가 가능하고, 외국인이나 외국기업은 직접판매 행위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외국업체가 카타르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Agent 선정이 필수적이며, 좋은 대리인 선정이 사업성공의 중요한 요소임.

- 현지에이전트의 변경은 대단히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므로 대리인 선정을 아주 신중히 해야함. 선정시에는 현지시장을 직접방문, 지명대리인의 잠재력을 충분히 검토한 후에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유능한 대리인은 현지 정부 및 기업조직에 광범위한 접촉망을 형성, 주요 정부발주 입찰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어야 함.

○ 스폰서 제도

- 스폰서는 카타르 장기체류비자 등을 발급받기 위한 일종의 보증인으로 카타르에 지사를 설치하는 경우 반드시 카타르 국적인의 스폰서를 구하여야 하며, 매년 쌍방간의 합의에 의해 일정액의 스폰서료를 지급해야 함.

- 스폰서의 동의가 있어야 장기체류가 가능하며, 주의할 점은 카타르로부터 출국시에도 스폰서의 동의가 있어야 출국이 허용됨.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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