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는 묘한 나라다. 피씨방에서도 코란 독경소리를 엠피쓰리로 듣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아침식사를 하러

들어간 식당에서는 자신의 휴대폰에 담긴 야한 동영상을 어깨동무하고 같이 보자는 점원도 있다. 즐감해 주고, 몇마디

농담을 나누다가 카르낙 신전으로 향했다.

몇 대의 왕에 걸쳐 계속 확장되고 보수되고 고쳤다는 카르낙 신전. 전날 왕의 계곡을 자전거로 도느라 완전히 지쳤어서

오늘은 좀 여유있게 다니려 했는데, 이 신전 하나만 돌아보는데도 두세시간은 걸릴 듯 했다. 룩소에 도착해서 알게 된

친구 칼리드가 말한 대로 세 시간 정도는 할애해야 그 사이즈에 대한 느낌을 온전히 품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기둥이 수백개는 되는 듯 했다. 아마 최근 트랜스포머2에서 나왔던 이집트의 신전이 여기가 아닐까, 보면서 혼자

생각했는데 영화 속에서는 카이로 기자의 피라밋 옆에 딱 붙어있는 신전처럼 나왔던 거 같다. 영화적상상력이란 건가.

그나마 다합으로 떠나기 전 룩소에서의 마지막 방문지를 칼리드와 함께 다닐 수 있어서 사진이 좀 남았다.

그래서,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한국인누나들이 그랬듯, 아스완서 렌이 그랬듯, 룩소르에선 칼리드가 출발할

때 배웅해 주었다. 머, 앞길을 선명한 비전으로 가다듬고 오겠다거나, 세상에 다시없을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오겠다거나, 그런 거창한 걸 바라고 온 여행은 아니었는데,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다니며 자유로움을

만끽했다는 게 제일 큰 뿌듯함인거 같다.

내가 무언가를 왜 하고 싶냐, 고 스스로 자문했을 때 왜냐믄 내가 그걸 하고 싶으니까. 라는 대답으로 충분하다는
 
것. 아마도 대뇌피질쯤에 각인되었을 그 무수한 해돋이와 석양의 풍경, 매혹적인 온갖 자연의 풍광들과 인간이
 
이루어놓은 호방하고 때론 우악스러운 유적..건축물들은 덤, 쯤 되겠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마주치고 말을 섞고 혹은 잠시나마 여행을 함께 한 사람, 사람들.. 언제나 난 사람들에
 
기대를 덜 걸었고,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은 내게 선물과도 같이 주어지곤 한다.


* 비분강개하게도, 인물이 사진 주제를 많이 훼손시킨 사진들.

생각같아선 6시에 딱 룩소르 서안에 도착하고 싶었지만, 자전거를 빌리는 게 아무리 빨라야 7시가 넘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아침삼아 간단하게 바싹 마른 팥빵..? 파이 비슷한 걸 먹고 출발했다. 내셔널 페리 선착장이 워낙 머니까 그냥

자신들의 펠루카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라 했던 펠루카 호객꾼의 구라와는 달리, 자전거로 한 10초 달리니까 바로

선착장이 나온다. 정말, 딱 10초 달렸는데 선착장이 나왔다. 대단한 구라빨이라 해야할지..

신나게 좀 달린다 싶을 때 덜컥 멤논의 거상이 나왔다. 네이*에 빌어 나온 자료사진, 이왕 찾아본 김에 설명도 좀

덧붙이자면 테베 근처 왕실 무덤군인 네크로폴리스의 입구에 있는 이 거상은 로마시대에 각광받았던 관광지라고

전해진다. 실제 크기는 이렇게 사진으로 볼때보다 훨씬 더 크단 느낌은 있지만, 워낙 허물어져서 그런지 뒤의 황량한

돌산과 함께 그저 황폐하단 느낌이 짙었다. 그래도 이 거상들이 왕과 왕비들, 귀족들의 무덤을 지키고 있는

수호자들이었을 거란 생각을 하니, 자전거 페달 밟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무덤 중 가장 볼만하다는 네페르타리 여왕의 분묘는 역시나 닫혀 있다는 이야길 듣고 살짝 실망했다. 가장 먼 왕의

계곡부터 갔다가 고만고만하게 붙어있는 나머지 무덤군들을 좀 더 지나 해가 중천에 뜨고 더워질 때 돌아볼 작정으로

페달을 밟았는데 무진장 힘들다. 온통 그늘 한 점 없는 아스팔트 도로 위를, 그것도 약간 오르막길인데다가 벌써부터

미친듯이 무덥다. 해서 길을 틀어 합셋수트 신전부터.

어디선가 한번쯤 본 듯한 건물이다. 아마도 인디아나 존스였던가, 뭐 그런 데였을 거다. 돌산을 깍아내고 또 가공한 돌을

차곡차곡 이어붙혀 만든 건물이라는데, 크기도 크기지만 그 위치가 정말 절묘하다. 산 중턱에 덜컥 붙어있는 모양새랄까,

산은 온통 붉은 빛. 보기만 해도 가슴이 황량해지고 마는 그런 무생물스러운 산이다. 생명체 하나 품지 않을 것 같은 산.

신전도 같은 빛깔이다. 죽은 이들만 품을 듯한 느낌의 황량한 신전.

그런데 또 그쯤에서 룩소르를, 나일강 동안을 되돌아보면 온통 초록빛이다. 뭔가, 인디아나 존스가 식인종이 우글대는

정글이 지난다거나 온갖 고초를 겪은 후 짜잔, 하고 나타나는 낙원 샹그릴라나 잃어버린 성지처럼 그렇게 어슴푸레

나타난다. 야자수도 잔뜩 보이고, 약간의 건물을 제하면 마치 환영인 양 신기루처럼 펼쳐지는 싱그런 녹색 대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하다가 거기서 일하는-아마도 가이드인양 박시쉬를 잔뜩 뜯어낼 법한-아저씨들이 모여앉아

있다가 날 부른다. 경계모드로 돌입, 일단 순순히 가보니까 밥먹었냐고, 같이 빵이랑 차 먹자고.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한테 일일이 박시쉬-팁-을 주지는 않아도 될 거고, 먹고 보자는 속셈 반, 꼬질꼬질하고 새까맣게 타버린 내가

2리터들이 물병 세개를 든 채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게 얼마나 불쌍했겠나 하는 공감 반, 함께 앉았다. 히에로글리프가

잔뜩 남아있는 돌멩이를 깔고 앉아 아저씨들과 함께 빵과 차를 나눠 먹었다. 여전히 발굴중이거나 복구중인 모양인지,

유적 잔해들이 걍 난해하게 흩어져있는 걸 아저씨들은 의자로 쓰고 있었다.

잠시 쉬다가 인사하고 다시 왕의 계곡으로, 어찌나 먼 길이던지. 게다가 그 먼 길에 어떻게 표지판 하나가 없을 수

있는지. 그러고 보니 시와 오아시스 마을도 그렇고 어디에서든 투어 위주로, 투어가 제일 편하도록 해 놓았을 뿐

개별 여행자들을 위한 배려나 안내표지판 같은 것에 꽤나 인색한 것 같다. 땀을 삐질대며 구비구비 고갯길을

돌아오를 때마다 실망하길 몇 차례, 지쳐빠질 때쯤, 혹은 길 잃은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할 즈음 나타난

왕의 계곡 매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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