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끼가 한 남자에게, 한 남자와 여자에게 빨간 점을 찍는다. 그 전까지는 그야말로 '갑남을녀',

익명의 바다를 떠다니던 남자와 여자에게 이름이 붙었다. '덴고'와 '아오마메'.


그의 소설은, 그의 소설 중 내가 좋아하는 류의 소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나, 주인공은 특정 분야에서 나름대로 특출하달 정도의 재능을 갖고 있지만 의지와 욕구가

부재하다. 맘만 먹으면 그래도 꽤나 해낼 수 있는데, 그 마음 먹기가 힘들다. 딱히 무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 사실 뭘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는 상태. 둘, 주인공은 다른 등장인물과의 관계나

세계 그 자체에 대한 회의나 비현실감을 끈질기게 품고 있다.

"여기는 여기가 아닌 세계구나"류의 대화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 내내 반복되는

질문, 우리가 지금 같은 시공간에 있는 걸까. 셋. 도무지 주인공의 문제가 해결되는 법이란 없다.

기껏해야 원점, 이거나 여기가 내가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할 수 있는 딱딱한 바닥면이구나, 정도의

확인에서 그친다.


그건 왠지 내 이야기다. 얼마전 하루끼와 관련한 잡지 인터뷰에서도 말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어필하는 부분은 바로 그런 부분이다. 적나라하게 지금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 맨날 보여주면

짜증나서 죽어 버릴지도 모를 볼품없고 엉성한 상태지만 그래도 가끔은 거울을 들여다보듯 날

비추어 볼 수 있는. 그의 이야기에서 공통된 부분들, 딱히 신나게 달리지도 않고 드라마틱하고

거창한 결말도 없으며 주인공은 늘 사변적이고 주춤거리는-때로 아주 답답하고 짜증나는-캐릭터에

딱히 꿈이나 야망이랄 것도 없고 사실 뭘 하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누추하고 김빠지며

'참 사느라 애쓴다' 싶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의 소설을 보는 이유는, 그게 지금 내 삶과 많은 부분

맞닿아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가 바닥이구나, 싶어서다. 그건 내가 살아감에 대한 일종의

데카르트식 '방법적 회의'를 가능케 하는 최후의 지반일 수도 있겠다.


항상 그렇듯 건조한 인생을 쌓아나가다 어느 순간 문제가 불거진다. 두 개의 달이 떠있음을 퍼뜩

깨닫게 되듯 일상에 그어진 작은 균열을 발견하고 나면 쭉쭉 균열이 사방으로 번지는 건 금방이다.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밋밋하고 조용했던 인생을 복기하다 보면, 정작 본인의 문제랄까,

본인의 결락이 심각함을 발견하고 그것에 매달리게 된다. 외부의 문제는 최초의 자극, 계기일 뿐

이내 시선은 내부로 향하게 되는 거다. 그 내부엔 자신의 가치, 자신의 사랑, 자신의 치부가 오롯이

숨겨져 있다. 모든 문제를 자기화하고,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내밀한 것으로 되돌이하고

마는 강력한 산화력이 발휘되지만, 그건 이기적이라거나 탈정치라거나 혹은 관념적, 사변적이라는

표현과 맞춤하지는 않다. 자신을 먼저 찾아내고 알아내려는 노력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A에서 A'로 바뀐 자신은 드디어 뭔가를 의욕하기 시작한다. 범속한 일상에서

무기력하고 무의지한 모습으로 일관하던 주인공이지만, 조금은 '의지'라는 것을 품게 된다. 그건

아마도 수많은 상실을 거친 후, 내적으로는 거의 세계대전에 가까울 만큼 혁명적이고 치열했을

전투를 거친 결과이겠지만, 정작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별반 다를 바 없다. 하루끼가 찍어 놓은

빨간점을 지우고 일상에 풀어주면 다시 이전처럼 이름없고 얼굴없는 대중 속으로 빨려들어갈 거다.
 

그의 이야기가 하나의 커다란 원을 돌아서 원점으로 돌아온다 싶은 게 그래서다. 결말이 이상하다

싶다는 소감들도 그래서 아닐까 싶다. 1984나, 1Q84나 다르지 않다. 내면에선 폭풍우가 일고 숱한

상실과 모험을 겪었지만, 외부로 드러나는 건 거의 없다. 여전히 세계는 해가 뜨고 달이 뜨고, 신은,

'리틀 피플'은 기분이 좋지 않으면 천둥치며 으르렁대는가 하면 사람들의 일상 역시 똑같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도 바뀌는 건 없는 거다. 건방지지만, 그게 세상이다, 라는 정도의 말을

해야 할 타이밍이다.


어쩌면 고마쓰니, 교쿄니, 아유미니, 교쿄의 남편이니 하는 등장인물들, 소설속 그리고 현실속 모든

동시대인들 역시 제각기의 모험 중이었을 거다. 상실감을 품고 뭔가를 계속해서 흘리듯 잃어버리면서,

허랑하게 뱉어지는 메마른 말들을 주고 받는 그들이었다. '리틀 피플'의 위협은, 주변의 소중하고

취약한 것들을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은 꼭 덴고나 아오마메에게만 전달된 것은 아니었을

거다. '리플 피플'이란 일종의 비료랄까, 원래 내면에 있던 씨앗을 이상성장시킬 뿐이다. 상실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을 조금 일찍 상실시킬 뿐이다. 그렇게 제각기의 전투와 모험을 마치고, 두권짜리

장편소설 분량의 이야기를 마치고 일상으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복귀했겠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루끼가 빨간 점을 찍고 들어올리기 전까지는.


그들은,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덴고'와 '아오메마'가 1984년에서 어느 순간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없는 1Q84년으로 흘러들었듯, 일상의 어느 순간 어디서 그런 갈림길, 혹은

스위치를 건드릴지 모른다. 기지개를 연달아 네번 켜본다거나, 왼쪽신발과 오른쪽신발을 바꿔

신어본다거나. 굳이 그런 거 아니어도 호, 흡, 호, 흡 대신 호, 호, 흡, 흡 하는 정도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런 사소한 스위치 하나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불가역한, 돌이킬 수 없는 세상으로

옮겨지는지 모른다.


그건 사실상 매순간 돌이킬 수 없는 시공간에 떨어지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지만 좀처럼

그 무게감때문에 직시하고 싶지 않은 깨달음과도 같다. 매순간 돌이킬 수 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많은 소중한 것들을 함께 쓸어내버린다는 것.

시간이 흐른다는 것 자체가 내 현재, 내 소중한 살점들이 흘러가 버린다는 거니까 사실은 같은

말이다. (불가역한) 시간, 과 상실, 이란 단어. 그리고 '리틀 피플'의 협박이란, 사실 언제가

'상실'에 있어 맞춤한 때인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갈협박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작용한 게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상실할 때였는지도 모른다.


1984년과 1Q84년이 결국 다르면서도 같을 수 밖에 없는 이유, 소설의 시작점과 마침점이

다르면서도 같을 수 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깨달은 후에도 별다를 바 없이 계속 똑같이 살아가게

되는 이유, 그 모든 이유는 아마도 시간 = 상실, 삶 = 상실, 실용적이지는 않은 깨달음 때문

아닐까 싶다. 딱히 그걸 알았다고 해서 어째야 할지 대책이 안 서는, 그저 거기서부터 다시

뭐든간에 쌓아올려볼 수 밖에 없는 '방법적 회의'의 밑장.



* 리뷰랄까, 내가 쓴 건 지독히도 재미없는데 소설은 사실 꽤나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하루끼가

이리저리 뒤척여가며 보여주는 그의 '밑장'은 여기서 보던 저기서 보던 똑같다. 그의 문제의식이나

글쓰기의 주제가 더이상 커지거나 발전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이미 그가 다루는 주제는 인간이

나고 자라면서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외로움, 상실감이라는 거대한 것, 그걸 이야기하는 그의

내공은 절정을 친 지 오래고 지금은 이리저리 변주만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물론 이야기는

세련되고 풍성해졌으며 더욱 '열렸지만', 핵심은 '상실의 시대'에서 이미 다 쓰여져 버렸다고 생각한다.



1Q84 1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1Q84 2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1Q84 3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하루키처럼 [2009.08.07 제772호]
[레드 기획] 누구나 한 번씩은 거쳐가는 소설 <상실의 시대> 한국 출간 20년,
일상의 곳곳에 스며든 ‘하루키와 나’

(중략)

 
» 다음 카페 ‘무라카미 하루키 되기’의 회원들이 저마다 좋아하는 하루키의 책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박주희, 김도윤, 윤성의, 유승진, 윤종석씨.

“얼마만큼 좋아?” “봄날의 곰만큼.”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날의 곰만큼.” … “그게 무슨 말이야. 봄날의 곰이라니?”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 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상실의 시대>,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제목이 된 문장)

2003년 개설된 다음의 ‘무라카미 하루키 되기’ 카페 회원 수는 4천 명이 넘는다. 대부분이 20대다. 20년이 지난 뒤 17살에게도 하루키는 단숨에 읽힌다.

카페지기 김도윤(27)씨는 언어영역 이외의 책은 읽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를 피해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어야 했는데, 책방의 친한 누나가 “야 이거 읽어봐”라고 건네주는 것을 들고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에 앉아서 그냥 끝내버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것도 처음이었지만 그렇게 긴 소설을 독파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 뒤로도 질릴 때마다 꺼내본다. <상실의 시대>다.

같은 카페의 박주희(28)씨는 하루키의 수필을 좋아했다. 너무 좋아 일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나 읽은 소설인 <상실의 시대>는 ‘와타나베 바람 피우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대학교 4학년 무척 괴롭던 시절에 간 일본에서, 중고서점에 들렀다.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의 세 줄이 인생에 해답을 던져준 듯했다. “그러나 당시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되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간이라는 것은 때로 그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는 <상실의 시대>를 와타나베의 시각으로 다시 읽고는 모든 하루키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감각적인 문장도 좋지만 그것만이 하루키의 매력은 아니다. 윤종석(34)씨는 하루키 때문에 바람의 노래를 들으려고 한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작품이 있음). “책을 읽으면서 내 일기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루키에게 정말 감사한다. 살다가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때 다시 들춰본다.” 윤성의(28)씨도 “나뿐만이 아니구나. 애써 감추고 있던 생각을 얘기해줘서 위로를 받는다. 니체의 초인이나 오쇼 라즈니시처럼 극한을 긍정하는 사람이다.”

 

하루키는 PPL, 원 소스 멀티 유스

하루키는 맥주 TV광고보다 자극적이다. 하루키는 PPL이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맥주가 마시고 싶어지고 재즈가 듣고 싶어진다. 하루키는 원 소스 멀티 유스다. 책에서 책과 음악과 스타일이 가지를 뻗어나온다. 윤종석씨는 하루키의 소개로 레이먼드 챈들러를 읽고 헤어날 수 없이 빠졌고, 박주희씨는 글렘 굴드를 듣고, 먼 북소리를 좇아 그리스를 간다. 김도윤씨는 1년간 여행 가고 싶다고 엄마에게 말했다가 맞아죽을 뻔했다.

‘하루키처럼’은 이어진다. 그들이 진짜로 하루키에게 배우는 것은 ‘마이너리티’다. 유승진(27)씨는 “하루키에게는 거대담론과 거대권력에 대항하는 마이너리티의 정치학이 있다”고 말한다. 그가 오해되듯 탈정치화한 게 아니란 말이다. “80년대의 거대담론에서 인간 실존은 죽어 있었다. 김승옥 같은 예외가 있었지만 희귀했다. 그 단절 기간 동안 목말라 있었는데 하루키가 채워준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윤성의(28)씨도 비슷하다. “한국 문학이 극복하지 못한 지점에 하루키가 있다.”

무엇보다 그의 작가적인 태도야말로 ‘스타일’이다. 정은숙 마음산책 사장은 “소설에서 주는 아름다움과 자기 관리가 동시에 다가왔다. 하루키가 20대가 보는 패션지에 쓴 칼럼을 묶어낸 게 있다(<무라카미 라디오>). 그걸 읽고 하루키는 그런 데 써도 하루키의 몸을 버리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을 쓰기 위해 마라톤을 하고 담배를 끊었다. 소설가의 자세가 느껴진다.”

칼럼니스트 임경선씨는 2005년 “그저 그래야 될 것 같았고 또 너무나 그러고 싶었기 때문에” <하루키와 노르웨이 숲을 걷다>를 펴냈다. 그에게 하루키는 불가사의한 존재다. 변덕이 심한데 하루키에 대해서만은, 일본에서 빨간 책·초록색 책을 읽은 1987년 이후로 여전히 깊이 매료돼 있다. 그의 책상 앞에는 하루키의 사진이 붙어 있다. 하루키는 데레크 하트필드에게 문장에 대해서 배웠지만, 임경선씨는 하루키에게서 글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 임경선씨가 글을 고칠 때 언제나 옆에 하루키가 나타난다. “아이씨, 대충 보고 말지, 하는 생각이 들 때 하루키를 생각한다. 문장에 대한 집착, 잘 쓴 문장에 대한 집착을 유지하려고 한다. 얼음을 깎듯이 단어를 많이 없애려고 하루키처럼 노력한다.”

진실한 작가적 태도야말로 그의 ‘스타일’

하루키는 임경선씨에게 작가로서도 롤모델이지만 인간적으로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보는 유명인 중에서 성실함을 미덕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없어져간다. 진정성이 있으면서 성실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 임씨는 하루키가 ‘가치 전파자’라고 말한다. “건강하고 합리적인 개인주의, 다원주의, 민주주의를 몸소 실천하고 또 은연중에 글이나 사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파하는 것 같다. 강요가 아니라. 또한 그는 집단주의의 광기나 부조리함, 권위주의을 맹렬히 거부한다. 그만큼 ‘편견’이 없고 ‘상대성’을 인정하는 개인주의자다.”


*                                                                 *                                                                 *

#1. "하루키는 뭐랄까, 말하자면..왜 그거 뭐죠? 드라마 속에 광고가 숨겨진 거?" 그렇게 내가 물었고, 기자님이 PPL

이란 답을 알려줬다. 그렇게 하루키는 PPL(제품 간접 광고(Product Placement))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멋지고 단순한
 
표현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사실 PPL이란 비유는 어폐가 있다. 다만 그의 작품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음악, 음료, 음식,
 
작가의 이미지들이 워낙 강렬하다는 거다.


#2.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저 사진을 올리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찍으면서도 우리들끼리 아 이렇게 촌스러울 수가,

라고 탄식했던 포즈였었는데. 맘에 아주아주 들지 않는 사진이다.


#3. 뭐랄까, 그날 이야기했던 부분들이 기사 전체에 녹아있는 느낌이다. 누군가의 말로 인용되거나 적절히 쪼개지긴

했지만, 예컨대 임경선의 이야기도 그날의 인터뷰에서 몇차례 반복되어 강조되었던 부분이었다. 생각보다 하루키에

대한 평가는 정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여전히 인터뷰비는 없었다. 원래 없는 건가.




무라카미하루키되기(http://cafe.daum.net/harukimake)란 까페에서 최근 공지가 올랐었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출간 20주년을 맞아 한겨레21에서 기획기사를 쓰는데,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몇 명 모아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딱히 누군가에 대한 '팬질'은 해 본 적이 없는데다가 작가가 좋아

글을 읽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하루키의 소설들은, 적어도 고베 지진의 영향이 드러나기 이전의 작품들은 모두

워낙 마력적이었고 하루키 역시 딱 그만큼 특별한 작가였다.


저번주 수요일, 퇴근을 서둘러 홍대의 '한잔의 룰루랄라'라는 만화책방으로 향했다. 내가 5명의 인터뷰이 중 하나로

낄 수 있었던 건 아마도 하루키를 20년동안 알아왔다는 것, 그래서 초딩 때와 고딩 때와 대딩 때와 군인 때, 그리고

지금 어떤 느낌으로 읽고 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어서였던 것 같다. 초딩 때 영문모르고 펼쳤던 '노르웨이의 숲',

레종 데트르(raison detre)라던가, 주인공 와타나베가 하루동안 걸었던 발걸음을 세고, 오르내린 계단수를 세지만

아무도 그런 것엔 관심을 갖지 않는단 걸 알아차리는 부분이 깊이 인상에 남았었다. 그에 더해 나오코의 희뽀얀

육체가 달빛아래 노출되는 초딩에겐 다소 자극적인 장면도 틈날 때마다 발췌독하는 부분이었고.

(나중엔 책만 펼치면 자동으로 책장이 갈라져 그 페이지가 딱 열리곤 했었다는...ㅡㅡ;)

그런 얘기를 했다. 2006년쯤 싸이 미니홈피에 올렸던 감상을 인쇄해서 가져갔었다. 그때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루키의 소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미묘한 상실감과 허무함에 특정 '주의'의 틀을 씌워내며 그의 작품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제멋대로 유추해 내는 과정에, 과하리만큼 90년대 초중반을 경과하는 시대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있다는 거다. 누구나 그의 작품에서 느낄 흡입력과 강한 공감, 그런 것들에 이름을 부여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적극적인 독해의 작업이 그 하루키 작품 전부에 붙어있는 '친절한' 해설, 서평 등속의 것들, 그리고 그의 작품의 표지디자인, 카피..그런 것들로 제한되고 굴절되어 거개가 비슷한 시야로 보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작품들이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서(실제로는 한국에 한정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인기를 끄는 이유를 일반화하여 ready-made해낸다.

뻔하게 나오는 큰틀은 그렇다. 60년대말70년대초 전공투라는 이상주의적이고 환상적인(미망과도 같은) 경험을 하고 이에 대한 환멸을 겪은 하루키는 9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이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하겠지? 그 평론가입네 하는 작자들은?-시대적 경험의 동질감을 던져주며 인간 내부로 침잠하여 삶의 상실감과 허무함을 염세적 현실주의라는 스타일을 빌어 아주아주 매력적인 기교로 풀어낸다는 식이다. 글쎄......뭐랄까. 90년대 초에 지성계를 휩쓸었다는 유행..청산주의의 냄새가 너무나 짙다.

거대이념과 근대적 사고-합리와 인과가 보장되는-가 더이상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고, 사회주의의 실험은 거대한 사기극이었으며 68년으로부터 한국의 80년대에 이르기까지 혁명적인 열기의 분출은 치기어린 '젊음'탓이었다는. 그리고 그러한 과거를 가진 인간은 현실로부터 아무런 위로도 못받고 "아무곳으로도 갈 곳이 없다"는 허무함만을 채워가며 이것이 하루키의 작속 인물들의 전형, 내지는 기본적인 형상이라는 게 그들의 분석이다.

과연?

하루키의 작품에 드러나는 '상실'을 그런 식으로밖에 이야기할 수 없을까? 그러한 역사적인 실패, 그리고 후쿠야마식의 '역사의 종언' 이후 등장한 인간군상이 아니라, 하루키 자신이 끊임없이 환기하고 있듯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본질적인 상실감이라는 부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의 작중 인물들은 애초부터 갖고 있던 상실의 요소들이 외화되어 드러나면서 현실을 일그러뜨리기 혹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자본주의적 형태로 맞추어진 가족이 해체되고, 직업(직장)으로부터 탈출하며 등등, 그러한 조건들이 충족되고 난 후 쯔음 인물들이 맞닥뜨리는 현실은 조금씩 일그러져 리얼리티를 잃어가며 주인공-아니, 이말은 그의 소설에 적절치 않다..그냥 일인칭 "나"가 온당할 듯-여튼 그가 무엇인가를 확실히 놓쳤다, 잃어버렸다, 잊었다 라는 인식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가 대응하는 방식은 상당히 영웅적이다.
 
새로운 방식의 영웅성, 마치 바싹 마른 녀석이 다리를 부들부들떨며 돌띵이를 들어올리는 듯한, 자칫하면 깔릴 듯 위태로우면서도 한편으로 우스운. 적극적으로 현실을 일그러뜨리고 자신의 상실된 부분을 찾고자 나서는데, 그 여로는 사실상 사회로부터의 절연, 자신 내부로의 침잠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끊임없이 돌덩이를 밀어올리는 프로메테우스의 그림자가 언뜻 겹치기도 한다. 그 사회로부터의 절연은 약간 모호한 방식이긴 하고, 그래서 보르헤스같은 환상 문학의 냄새가 짙어지는 거겠지만 그걸 현실 도피라고 일률적으로 재단하는 건 온당치 않다.

중요한 건 애초에 상실이 있었고, 그 상실의 원천이 된 온갖 사회적 관계들, '일상'이라 불리거나 상식이라 불릴만큼 당연한 흐름으로부터 유리되어, 상실감을 느끼게 된 시점부터 일그러지고 얼개가 맞지 않는 현실을 더욱더 뒤틀고 단속적으로 토막냄으로써, 적극적으로 자신의 결락감(!)을 메워내고자 하는 하루키의 시도들. 그게 그의 작품 세계 아닐까..

태엽 감는 새, 이 작품에 슬쩍 드러나는 태엽감는 새 연대기 어쩌구의 맥락도 그렇다. 사실 세상은 인과가 뚜렷하고 합리적인 사고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대기처럼 하나하나 자체로 완결되어 닫혀 있는 사건이라는 게 하루키의 인식 아닐까. 거기에는 물론 이성에 대한 불신, 과학적 인과법칙에 대한 회의 등 포스트모더니티의 요소들이 담겨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세계관에 있어 근본적인 모순이라 할 만한 그 '상실감'은 현 세상의 '관계'들로부터 비롯되는 거라는 얘기다.

그의 글빨은 정말...멋지다. 정점에 다다른 기교와 깊은 통찰력, 그리고 장면별로 완전한 함축과 은유들. 더구나 태엽감는 새에서처럼 그러한 장면들이 결국엔 합류되어 하나의 직조된 의미를 그려내는 데에 이르면. 마치 짜라투스투라..처럼, 여러 잠언들과 금언들을 화려하게 짜깁기한 듯한 느낌이 없지 않을 정도다. 운명에 관한 대목..에서 내가 받은 느낌은 그런거다. 마치 재봉틀로 재봉질하듯, 이미 박힌 부분은 운명, 아직 박히지 않은 부분은 일반론이 지배하는 공백. 어차피 박히고 나면 운명이 되고 말. 여튼, 그람시와 연관지으면, 하루키는 그람시가 말한 '효소'의 개념을 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거 같다. 그리고 그보다 더, 하루키에 대한 판에 박힌 평들을 서로서로 베껴가며 재생산해내는 평론가들은 '효소'가 뭐에 써먹는건지부터 좀 생각해야 될 거 같다."



대체 어쩌자고 하루키의 소설에 그람시를 연결지으며 글을 마쳤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효소'란 개념이 뭐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니 대체 어떤 맥락인지도 잘 모르겠다는. 어쨌든, 하루키의 세계를 단지 자기 내면으로의 퇴행이라거나

도피로만 해석하는 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하루키가 내세우는 인물은, 주의주장, 이른바 '이즘'을 넘어선 인물이다. 어떤 사회 시스템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인간 내면의 문제에 집중하는 인물이다. 어떨 때 자신의 감정이 파르르 떨리는지, 어떤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자신과

타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죽기 전까지 함께 할 그 '결락감', 공허함 혹은 외로움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늘 유지하는 인물이다. 피곤한 인물이다. 하루키를 읽으면 내면 깊숙이 숨겨졌을 뿐이던 대답하기 어렵고 곤란한

문제들이 모처럼 밖으로 끄집어져 바람을 쐬었다는 후련함과 함께 망연스러움이 느껴진다.


요새는 또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리 해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 아무리 고민해도 답없는 문제, 가끔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의아해질 때 하루키를 펼쳐보며 그런 문제를 맞닥뜨리는 것도 좋겠지만, 어쩌면 대개의 시간엔

그걸 덮어두고 지내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여유가 없어진 건지도, 그저 피곤해진 건지도, 삶에 대한 눈먼 열정과

두려움없는 궁금증이 부담스러워진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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