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어트 리야드 호텔에서 짐을 싸고 공항으로 가기 직전, 이번 출장을 위해 산 가방을 잠시 주목. 무려 29인치짜리

거대한 가방, 시중에서 파는 가방 중에 가장 큰 사이즈이고, 3년간 무상수리가 보장된 가방이다. 애초 사무실에선

출장을 자주 다니다보면 가방이 마구 다뤄지기 때문에 바퀴나 손잡이가 파손되기 쉽다고 하면서 '샘소나마이트'표

가방을 강추했지만, 사실 제품보장이나 사후서비스가 철저한 브랜드, 그리고 딴딴한 품질은 꼭 그것만 있는 시대는

이미 아닌 거 같다. 사이즈로 말하자면, 출장 갈 일이 아니라면...글쎄, 나중에 이민이나 가면 모를까 나 혼자 여행

다닐 때에는 좀체 쓸 일이 없을 거 같은 가방이다. 가뜩이나 나는 짐을 가볍게 하고 다니는 걸 중요시하는 편이다.

사우디에 처음 들어와서 공항서 호텔까지 가면서, 앞서고 뒷서는 차들의 번호판을 보면서 오랜만에 아랍어 숫자

공부를 다시 했다. 이집트 여행다니면서 이미 한번 완전히 익숙해졌었던 체계라서 금세 1부터 0까지의 숫자를

식별해 낼 수 있었다. 다시 리야드 공항으로 가는 길, 이제 다시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번호판들과 교통표지판들의

숫자를 읽으면서 느낄만한 잔재미까지 지워져 버리지는 않았다. 더구나 저런 산만한 치장을 하고 달리는 차라면

내 시선을 붙잡기에 부족함이 없달까.

*참고삼아, 아랍의 숫자체계를 보여줄 그림 두개를 퍼왔다. 내가 미처 챙기지 못한 이런 사진까지 찍어놓으신 분께

감사합니다~*

사우디 공항에 들어서서 보니, 처음 사우디에 도착했을 때처럼 포도송이 눌린 듯한 모냥새의 공항 건물이 왠지

반갑다. 사우디의 맛만 보고 간다기도 뭐한 며칠간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이제 내 머릿속에다가 사우디란

나라를 단단히 박아넣은 느낌이다. 몇몇 사람들의 웃음어린 얼굴과 혹은 모래처럼 부석하게 표정이 말라붙은 얼굴,

그런 것들과 함께 성황을 이뤘던 상담회까지.

티켓팅을 하고 공항 로비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며 쉬었다. 울룩불룩한 천장의 틈새에서 삼각형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뿌여스름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자연채광이라 산뜻한 느낌. 베이지색의 안온한 기둥과 더 엷은

베이지색의 천장 무늬도 차분하다.

까페에 앉아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주위를 찬찬히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다. 인적이 어찌나 드문지 공항서

일하는 사람들이 공항을 이용하는 사람들보다 많아보일 지경이다.

공항 벽면에 그려진 '아랍스러운'  문양. 모스크 사방에 저런 글씨랄까, 그림이랄까, 크게 그려져서 걸려 있는 것도

보았었지만..그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모양 자체로도 충분히 인상적이다.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어떻게

그려지는 건지, 하다못해 글씨인지 그림인지부터 분간도 못하고 있으면서도.

다음 행선지는 카타르. 카타르까지는 사우디아라비아 항공을 타고 가게 되었다. 그런데 받아들고 보니 이 티켓이란

게 얼마나 엉성한지, 예전에 쓰이던 얇은 팩스용지같은 데다가 타자로 찍어낸 것 같은 글씨의 인쇄상태라니.

어쨌든 보기도 힘든 사우디아라비아항공, 사우디의 국적기를 탄다는 사실은 은근히 설레는 것이었다.

스튜어디스(flight-attendant라는 단어가 보다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가 서빙을 하고 있을지, 비행기 내에서 주류

제공이 가능할지 등등.

리야드에서 카타르 도하까지는 고작 1시간 20분의 비행. 조그마한 비행기 안에서 스튜어드가 비상탈출 방법을

열심히 알려주었다. 대체 저런 교육을 받으면 지상 수천미터 상공의 비행기에서 무사히, 혹은 죽지 않고 탈출할

수 있을지 회의스럽기 짝이 없지만..그래도 들어두면 나중에 능숙하게 써먹을 일이 있겠지, 하고 귀를 쫑긋 세우고

듣게 된다. 음음..산소마스크는 여기에 있고, 구명조끼는 이걸 땡기면 순식간에 부풀어오르는구나. 비상구는

저쪽에 있으니 비행기가 위태롭다 싶음 초연하게 훌쩍 뛰어내리면 되겠고. 어, 앞에 신문만 보고 있는 아저씨들,

아저씨들도 좀 배워둬야 하지 않겠어요? 나이들면 모든 것에 초연해진다.

이런 높이에서 날고 있단 말이다. 아무리 비행기의 떨림이나 좌우 롤링이 마치 비포장도로를 내닫는 4WD 자동차의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질 뿐이라 해도, 엄연히 여긴 하늘 위 세상이다. 발 딛을 곳 하나 없이, 날개도 없는 동물이

고작 저 얄포름한 날개 한짝 믿고 신문이나 펼쳐 보고 있거나, 심지어는 잠이 들어버린다니. 가만보면 저 날개란

것도 웨이브하듯이 진동이 끝에서부터 타고 들어오는 게 보일 때가 있다. 아기코끼리 점보의 커다란 귀가

펄럭펄럭하듯이 말이다.

좌석 앞에 놓인 멀미봉투와 비행기 안전소개 팜플렛. 저 요상한 폰트의 한국어가 시선을 확 잡아챘다. 아랍어,

영어, 불어, 독일어, 한국어...정도 밖에 알아보지를 못하겠다. 은근히 외국인들이 많이 타나부다..그리고 한국인도

많이 타나부다..하고 감탄해버렸다.

기내식은, 최악이었다. 이렇게 맛없는 건 처음 먹어봤지 싶을 정도. 물론 기내식 자체가 별로 기대할 만한 밥은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푸석푸석한 닭고기가 밥속에 숨겨진 저 노란 밥도 그렇고, 바싹 마른 빵위에 느끼하기만

한 초콜렛판이 이미 분리된 채 따로 노는 저 조각케잌, 그리고 빵이라기엔 뭔가가 부족한 느낌의 저 밀가루반죽

부풀어올린 것까지. 그레이프후르트와 오렌지가 나온 과일만 먹고 식판을 물리고 말았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항공에는 여성승무원이 있다. 빵을 나눠주고 밥을 나눠주시는 분, 후덕하신 웃음과 함께

나눠주셨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사우디 국내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아마 사우디 내

여성들의 지위에 대한 변화의 조짐이 아닐까 싶다. 걸치고 계신 게 제복인 듯 한데 무지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두바이를 떠난 비행기가 리야드에 도착할 무렵이 되자 창밖 풍경이 언뜻언뜻 보인다. 온통 누렇고도 붉은 기가

감도는 모래벌판인데, 네모난 건물들이 보이고 모래벽을 쌓아 자신의 앞마당을 구획지은 듯 하다. 왜 선사시대의

집터를 발굴해 놨다는 곳에서 저런 식으로 복원된 흙벽이 꼬불대며 이어지고 있는 거랑 비슷해 보인다.

모랫판 위에다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린 걸까. 그런 선사시대 집터 복원현장같은 공간들을 시원하게 가로지르며

검은색 아스팔트 도로가 놓여 있다. 잘 보면 사막의 모래가 야곰대며 그 검은색 아스팔트 도로의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침식해들어가고 있는게 보인다. 누런 사막과 검정 도로의 경계가 슬몃 섞여 들어가는 느낌.

도착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아마도 초원이 늘어나는 느낌이다. 정확히는 초원이 아니라 각 집에서 꾸미는 정원이나

그런 거지 싶다. 아랍에서 초록색을 평화의 색, 부의 색..이라고 한다는 건 이 황량한 사막에서 마주친 녹색 식물의

귀함을 생각하면 쉽사리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저 가정들도 정원을 꾸미고 녹색 공간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고와 비용을 들이고 있을까. 가정이라기엔 너무 크지 싶기도 하지만, 왕족만 기십기백을 헤아린다는 이 독특한

왕국에서는 그런 왕족의 집 중 한 채인가부지 하고 마는 게다.

사우디에서는 관광비자를 내주지 않고 단지 사업용, 비즈니스용 비자만 내준다고 한다. 사전에 여러 복잡한 서류를

구비해서 사우디 비자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 후에야 사우디를 향해 떠날 수 있는 셈이다. 여성의 경우에는 그 비자

받는 것부터 쉽지 않다고 하며, 사우디 현지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댄다. 여성은 사회생활도 못 하고,

운전대도 못 잡으니 집밖에 나서려면 꼭 운전수 혹은 가드 역할을 할 남자가 필요한 나라. 사우디아라비아왕국.


비행기가 착륙했다. 황사가 심한 봄날처럼 시계가 온통 뿌연 비행기창 너머로 보이는 공항 건물도 특이하다.

모랫바람을 피해 땅위에 바싹 웅크린 듯 한 모양이랄까. 비행기가 몇 대 보이지 않는데, 알고 보니 왕족 전용

공항은 따로 있다고 한다. 그 쪽이 훨씬 사용자 수도 많고 비행기 수도 많다나.

사우디 아라비아 항공의 꼬리 날개 부분. 야자수 아래 교차된 칼 두자루 그림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상징같은

거다. 비행기 댓수가 적어서만은 아닌 거 같은데, 방금 거쳐온 두바이 공항에 비해서는 왠지 활기가 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불과 며칠 사우디에 머물렀을 뿐이지만, 그 잔뜩 처지고 늘어지는 느낌이란.

사우디 출장용 비자는 단수 비자, 유효기간은 발급일부터 3개월. 그리고 "Not Permitted to Work"라는 글자가

선명히 박혀 있었다. 두바이를 떠난 비행기에서 내려 모랫빛 건물 리야드 공항 안으로 도착하니, 정말 휑하다.

그도 그럴 것이 관광객은 전혀 없고 단지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한 사람들이나 공항을 이용하겠지만, 사우디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몹시 쉽지 않기 때문일 거다. 요즘 세상에 흔치 않은 왕정 체제에, 기십명에 달하는

왕족과의 연줄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사우디의 유력자가 스폰서십-그것도 심히 불공정한-을 맺어주지 않으면

왕국 내에서 사업도 불가능한 나라랜다. 게다가 공무원을 거슬리면 입국도 못하고 쫓겨나는 수도 있다는 아주

고약한 공무원 우위의 나라.


입국심사대 앞에서 받은 입국카드. 마약소지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붉은 글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나씩 칸을 채우다가 잠시 펜끝을 망설이게 만든 항목, 종교. 무슬림이라고 적어야 통과시켜 주는 건 아닐까.

아님 최소한 기독교 계통은 아니라고 적어야 통과시켜 주지 않을까. 무교라고 적으면 뭐라 그럴까. 왼갖

생각들이 소용돌이치다가, 그냥 비워버렸다. 나중에 들었지만 무슬림들은 믿는 종교가 없다는 것에 대해

이해를 쉽게 하지 못한다고 한다. 신은 분명히 있는데 왜 믿지를 못하냐는 식인 거 같다.

입국카드의 뒷면. 스폰서와 주소를 적는 칸이 있지만, 우리는 사우디에서 스폰서를 구해서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므로 비운 채 패스. 스폰서를 구하게 되면 보통 수익은 51:49로 배분하게 된단다. 사업자가

51이 아니라 스폰서가 51을 먹는 불공정한 룰. 게다가, 언제든지 스폰서는 사업자를 떼어내고 자신의

바지사장을 내려보내 본인의 사업으로 꿀꺽할 수 있다는 점도 위험 요소다.

무사히 공항을 벗어났다. 에어콘이 빵빵하던 공항문을 나서자마자 훅, 하고 뻗쳐오는 건조하고 텁텁한 열감.

오랜만에 느껴보는 중동의 열기였다. 흐르던 땀이 말라붙고 입술이 바싹 타들어가는 땡볕 아래서 잠시 해바라기.

공항을 벗어나 시가로 진입하는 길에 보이는 건물들은 모두 모랫빛이다. 화려한 색깔 따위는 찾아볼 수 없고

모랫빛 풍경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건 그나마 짙은 녹색의 야자수 가로수들. 하늘마저 파랗다기보다는 뿌연

하늘빛이다. 왠지 침침하고 모래가 서걱서걱해 보이는 살풍경.

도심으로 향할수록 차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이 차들, 운전이 과격하다. 양쪽 사이드미러를 다 깨뜨리고 앞뒤

범퍼가 성한 차를 찾기 힘든 이집트 차들만큼은 아니더라도, 깜빡이도 안 켜고 훌쩍 1차선에서 3차선으로 내려서는

차가 있는가 하면 맹렬히 앞차를 추격하고 기어코 끼어드는 차들로 가득한 도로. 과격한 운전솜씨는 유명하댄다.

도착한 곳은 메리어트 리야드 호텔. 오성급 특급호텔이라지만, 꽤나 오래된 건물이지 싶다. 역시 누런 모랫빛

건물이고, 건물 앞의 네온사인은 중간중간 허물어졌다. 겉으로 보기엔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지만, 일단 들어가서

돌아다니며 확인을 해본 후 평가를 내리기로 했다.

그래도 호텔 주변은 잔디밭도 조성되어 있고 이런저런 녹색 식물들이 잘 가꿔지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우디 호텔이나 공항 등 공공장소를 함부로 사진찍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고 했다. 게다가 이 호텔도 들어가려면

정문에서 자신의 짐과 몸 모두 금속탐지기를 통과해야 했다. 잠시 나갔다 들어올 때에도 꼭 금속탐지기를 통과해야

하는 불편함은 기실 사우디 뿐 아니라 이후 카타르, 쿠웨이트 모든 나라들이 다 그랬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처음에는 엄청 불편했다. 테러의 위협을 대비한 것이라고 하던데, 실제 이집트나 쿠웨이트에서

호텔을 겨냥한 테러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몇 년 전쯤  얼핏 들어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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