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황사라더니 햇살만 눈부시던 날. 아무래도 5월의 첫날 메이데이의 집회/시위를 막으려던

음모는 아닌가 싶도록 그럴 듯한 날씨였다. 붉은 목련이 햇살을 맞고 온통 하얗게 탈색된 그런 날.

서울 근교에 있어 지하철로도 갈 수 있는 경기도 모락산, 산 이름을 발음하니 재미있다 싶었는데

사모할 모, 낙양 낙, 해서 조선시대 왕이 낙양을 사모하며 올랐던 산이라나. 봄볕이 갸냘픈 신록을

뚫고 뚝뚝 뭉텅이로 떨어져 있는 그런 산길로 접어들었다.


몇 걸음 들어가니 좀더 짙어진 나뭇가지들의 차양, 덕분에 좀더 짙어진 녹색과 갈색의 향연.

자잘한 잎새들이 사방에 온통 튀어버린 페인트 물감처럼 점점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황사가 극심할 거라는 일기예보 탓인 듯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고즈넉한 산길.

겨울산이 잔뜩 품었던 잔설들이 투명하고 맑은 물이 되어 산의 옆구리에서 줄줄 새어나오기 시작,

사람들이 걸어서 오르내리던 계단이 한단한단 물그릇이 되어서 잔뜩 물을 움켜놓았다.

하늘이 조금 뿌옇긴 했지만, 그래도 갓난애 뺨같이 보들거리고 싱그러운 느낌의 둥근 산자락이다.

아스파라거스나 브로콜리처럼 봉긋봉긋, 그러면서도 울룩불룩한 질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산등성에서 또다른 등성으로 넘어가는 길, 잘 정돈된 잔잔한 평지를 지나니 또다시 나무뿌리가

울퉁불퉁 핏줄처럼 돋아난 오르막길이다. 뭐하나 반듯하게 수평이 잡히지도 않고, 이리 뒤뚱

저리 뒤뚱 기울어진 천연 나무계단에 약간씩 뒤틀려 자라나는 나무들, 덩달아 지나는 사람들도

제각기의 각도로 기울어진 채 산을 타고 있었다.

잔뜩 말라붙은 채 두껍게 나무에 덧붙어있는 껍질들, 드문드문 떨어져나간 모습이 더 황량하지만

그 뒤로 보이는 반짝반짝 연두빛 꼬마전구들이 켜진 덕에 조금은 부드럽게 다독다독. 근데 저건

무슨 코르크나무도 아닌데 나무껍데기가 저렇게 두꺼운가.


아무래도 블랙 & 화이트의 그림에서는 뭔가 서늘하고 가라앉은 느낌이 나는 거 같다. 아무래도

봄의 신록을 잡아내기에는, 저렇게 하늘 향해 조막손을 펼친 새순들을 찍는다 해도 왠지 그냥

전부 겨울산, 겨울나무 같은 느낌. 뭔가 분위기도 무거워지고 사연있는 느낌이랄까.

여릿한 잎사귀의 유아틱하게 작고 귀여운 비율을 가진 모양새도 모양새지만, 채 제대로

염색되지 않은 옅고 여린 빛깔이 아무래도 어린 잎의 뽀인트 아닐까. 저런 연두빛 잎새로

쫙 한줄기 햇살이라도 들이치면.


문득 느낌이 이상해서 하늘을 보면, 문득 파란빛이 담겼다간 이내 뿌옇게 흐린 구름이나 먼지에

덮여버리곤 하는, 그런 패턴이 반복되는 날씨. 그런 침침한 하늘 아래 침침하게 뻗는 나무의

잔가지들, 그리고 물기 뺀 큰 붓을 비틀어 대충 꾹꾹 누른 듯한 연두빛뭉치들. 청소 오랫동안


안한 집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먼지 뭉치 같기도 하다.

모락산 정상, 그렇게 높지 않은 산이라 쉬엄쉬엄 오르멍 사진찍으멍 밥먹으멍 놀았지만 금세

올라버렸다. 아래로 펼쳐진 건, 자줏빛 진달래숲, 연둣빛 나무숲, 그리고 회색빛 아파트숲.

휘휘 둘러보다가 문득 시선이 콱 꽂혔던 풍경이다. 하늘은 여전히 뿌옇지만 저게 황사인지

안개인지 구름인지는 모르겠고, 그 아래 여전히 까슬한 채 잎사귀옷을 챙기지 못한 나무들이

부드럽게 뭉개져버린 풍경 속, 연둣빛이 저렇게 강렬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모락산에서 능선을 타고 가면 바로 이어지는 백운산,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뭐,

표지판이 말해주겠지 싶어서 설렁설렁 내딛던 발걸음. 양쪽으로 아직은 힘이 덜 붙고 나이가

덜 찬 나무들이 구불구불 길을 만들어주던 그 오솔길을 세심하게 헤아려주던 봄바람.

지루했던 겨울과 지겨워질 여름 사이에서 잠깐 주어지는 봄날, 한눈팔 시간도 없는 거다.




목련이 허벅지게 피어올랐고, 벚꽃이니 매실꽃은 팝콘처럼 터져올랐다.

나른한 봄빛이 일렁이는 도심 속 조그마한 공원, 미디엄레어로 익힌 스테이크 정도의 온기가 담긴 벤치에 앉아

유약한 연두빛이 돋아나는 세상을 본다. 그리고 내 귓가에 속삭이듯 노래하는 그녀의 이야기.


그녀의 목소리는 그렇다. 간질거리는 봄볕과 꿈결같은 공기의 흔들림. 아무래도 좋아, 라는 식으로 사람을

멍하게 만들어버린다. 적당한 비음이 섞인 채, 여리여리해서 금새라도 끊길 듯 하다가는 훌쩍 높은 파도를

뛰어넘는다. 노래방이 보우하사 천편일률한 바이브레이션과 과잉한 목소리들 사이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단연

튀고야 만다. 흔들림없이 길게 뽑아내어지는 목소리, 그렇지만 잔잔함 속에서 사람 맘속에 숨겨진 버튼 하나를

쿡 누를 수 있는 강력한 힘과 호소력.


그녀의 이번 앨범 역시 말하자면, "참 뜬금없는 이야기들, 참 특이한 노래가사들이다." 대체 정신세계가 어디를

부유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그녀는 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느 때처럼 All songs written by 이상은,

Produced by 이상은이니, 앨범을 두고 그녀를 말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그녀의 앨범, 그녀의 조각, 그녀의

별부스러기니까. 그녀의 가사는 예컨대, 이런 식이다.


"저기를 봐 시간의 불꽃놀이 텅빈 저 미래는 무중력의 무한한 하늘..."(Stardust)
"지구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가만히 느끼고 있네...아, 반짝이는 파랑 플랑크톤 저 하늘의 별들과 이어져 빛나..."(섬)
"나는 왜 멈추어 있어야만 하나...플라즈마 구름 태양풍의 파도 그 흐름 속 나는 작은 입자 인디언핑크색 나노 텐트의 LA 실크로드 위 스카이 카들의 순례..."(Cosmic nomad)


그녀는 미국과 일본과 한국을 넘나들며 사는 아티스트답게 노마드의 감성을 늘 유지한다. 유랑하는 음유시인,

그녀는 삶을 부정하지도 않지만 적나라하게 긍정하지도 않는다. 밝지도 않지만 어둡지도 않다. 춥지도 덥지도,

화려하지도 수수하지도 않다. 어딘가의 야성적인 초원이나 차들빼곡한 주차장에 주차된 차 본넷 위에 누워

하늘을 보며 읊조릴법한 가사들. 시간의 비밀, 우주의 비밀, 세상의 비밀, 그리고 삶의 비밀에 대한 수많은

은유와 경구들이 등장하는 그녀의 노래는 뭔가 주문과도 같다. 혹은 기도문이랄지도 모르겠다.


'속삭임'이란, 상대에 대한 압박이나 강요없이,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다. '내 얘기 한번 들어볼래?'

그녀의 이야기엔 늘 사람을 빨려들게 하는 마력이 있다. 목소리와 음악 자체도, 그에 얹힌 가사말도. 어디론가

빨려들어가서 전혀 새로운 시공간 속에 그녀와 함께 누워있다가 오는 느낌. 음악이 어느순간 멈출 때마다

난 몽롱한 눈빛으로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잠시 망연해 해야 했다.


봄날과도 같은 앨범. 그녀의 14번째, 우리는 별부스럭지에서 생겨났다.






#. 자동차의 앞모습을 보고 저녀석 웃고 있구나, 인상쓰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밍숭밍숭한

헤드라이트를 가진 프라이드는 왠지 멍청해 보였고, 캐피탈 정도는 왠지 지적이란 느낌을 주는 얼굴을 갖고

있었고. 마티즈 정도는 내게..상당히 세련되면서도 은근 얍쌉하다는 느낌을 주었고. 뉴그랜저 정도는 적당히

무게 있는 표정과 적당히 올라간 눈꼬리를 갖고 있고.


유지태의 코란도는 그런 거였다. 이영애와 잠시 분위기가 틀어져 분위기가 싸해지면 디젤엔진 특유의 덜덜거리는
 
소음이 그 공간을 더욱 야박하게 했고, 새로 뽑은 이영애의 마티즈와 엇갈려 한눈에 잡힐 때에는 더욱더 그

무지근한 덩치와 투박함이 두드러져 보이는. 봄날은간다, 이영화에서 자동차는 그 인물들의 캐릭터를 구체화하는

하나의 적나라한 힌트였다.


이영애가 끌린 다른 남자, 그의 뉴그랜저는 그녀가 그에게 첨으로 관심보였던 선그라스만큼이나 짙은 검은색의

반들반들한 보디를 갖고 있었고, 유지태의 각진 코란도는 제대로 광이라곤 났던 적이 없는 거 같다.


#.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내겐 '사랑은 역시 변하는구나', 정도로 들렸다. 관계가 힘들어지거나, 유지태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는 장면에서는 여지없이 시계나, 하다못해 달력이라도 나왔다. 조막만한 공간이었고, 그만큼

시계가 세상에 널려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와 그가 충일감을 느끼던 그런 시간들에는 한번도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가 첨으로 화를 내던 시간 아침 10시반, 그후 혼자 남자가 꾸역꾸역 밥먹는 시간 11시, 남자의 할머니를 찾은

시간 밤 10시..그런 식으로, 계속 화면의 한구석에서 집요하게 시간이 흐르고, 안쓰러운 감정의 흐름과 관계의

변천을 의식시킨다. 결국 그런 아연스러운 시간의 흐름...그 극단의 형태는 마지막...남자와 여자가 서로 등을

돌리기까지..화면의 모서리로 여자가 사라질 때까지...몇번씩 서로 눈길이 엇갈리며 하염없이 부질없는 희망을

갖게 만드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거 같다.
 

그간의 관계를 집약해서 보여주듯 때론 같이, 때론 홀로..상대를 되돌아보고, 무언가를 기다리듯 애절하게 잠시

멈춰서 마주보지만..시간이 멈춰진다면 잠시나마 기대앉아 울어보기라도 하겠지만...


시간은 흐르고 봄날은 가고.


마티즈의 세련된 이미지를 가진 그녀였지만, 악수를 핑계로 먼저 등을 보여주는데 성공했지만, 역시 사랑을

세련되게 혹은 잘 정돈된 모습으로 한단 건 불가능하다. 가슴이 터질듯한 안타까움..대체 세상은 왜 이따위인

거냐고 고래고래 내지를법한.


#. 그래도 남자에겐 기댈 곳이 없다. 이미 훌쩍 커버린 그에게는 고작 친구녀석과의 짧막한 대화나, 할머니가 주는

사탕 정도가 남아있을 뿐...떠나간 사람을 내처 못잊는 할머니에게, 자신에게 화를 내고, 고함치고,

울어버리지만...허물어질듯, 무너져내릴듯 하면서도 자그마한 할머니의 어깨는 너무도 야위고 약하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래서 둘은 세상 한가운데서 오직 서로의 품에서만 기댈 곳을 찾았던 거였고.

그런데 더이상 그들은 서로의 외로움을 거둬내고 씻어주지 못한다. 외로움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영혼에 스며있는 것. 둘이 되어 그 외로움이 더욱 커질 때, 빈틈이 늘어나고 균열이 깊어질 때 봄날이

가버렸다. 최악보다 차악, 그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남자는 다시금 시간의 흐름이 숨겨진 곳에서 바람을 느끼며 헤어진 후 처음으로 웃음을 띄우지만...글쎄,

그 뒤에는 아마도 김기덕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정도...를 붙여서 생각해야 하지않을까.


봄날은 가버렸고, 시간은 흐르고, 다시 봄날이 오겠지만, 시간을 비끄러매고 태양을 묶어둘 재간이 없는 이상..

다시 봄날은 가고. 언젠가 분홍빛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분홍빛 양산을 드리운채로 햇살 가득한 봄날의

끝물쯤에서 세상을 등질지 모른다.


(2005.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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