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그리는 아버지의 영화, 하드보일드 버전의 '아름다운 인생'이랄까". ytzsche.


비우티풀Biutiful. 영어로 '뷰티풀'을 어떻게 쓰냐고 물어보는 딸에게 그가 알려주는 알파벳이었다.

가진 것 없고, 배우지 못했으며, 떳떳한 일자리나 제대로 된 가정환경도 만들어주지 못하는 아빠지만, 아이들 앞에서

아버지로서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는 거다.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은 아니어도, 최소한 영어 단어 하나쯤은 주저없이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던 거다.


그의 삶은 '비우티풀'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경제 위기로 흉흉한 스페인, 외국인 불법체류자들의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그들의 일당을 나눠갖는 게 그의 소득이다. 갈취, 혹은 등쳐먹는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경찰의 단속을 막기 위해

뇌물을 먹이는 것도 그의 일이다. 그렇게 그는, 스페인과 불법체류자 양쪽으로부터 멸시받고 혐오받는 사람이지만,

그런 멸시와 혐오의 대가로 근근히 이어지는 그의 삶은 초라하고 구질구질하기만 하다. 게다가 몇개월의 시한부 선고까지.


몇 개월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선고 앞에서 잔뜩 흔들려버린 그는, 전혀 떠날 생각이 없다. 아무리 영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 엄마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아내와 두 조그마한 아이들 앞에서,

훌쩍 떠나갈 수는 없었을 거다. 게다가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 자신도 아이들에게 아무 기억도 남기지 못한 채, 고작해야

몇달치 집세와 함께 가난만 남겨놓고 떠나가게 될 거란 생각이 그를 괴롭힌다.


그에겐 아버지가 있었다. 그가 어머니의 태중에 있던 젊은 나이에 스페인을 떠나 외국으로 일하러 떠났던 아버지는,

시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를 늘 그리워한다. 그가 자신의 파탄나버린 결혼생활과 위기에 처한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려 애쓰는 거나, 먼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애쓰는 건 모두

그의 아버지에 대한 결락감과 그리움에서 비롯했는지 모른다.


포르말린에 잔뜩 절어 미이라가 되어버린 젊은 아버지의 시신, 이장을 위해 열린 무덤 속에서 드러난 아버지 미이라의

얼굴을 한참동안 매만지는 그, 마치 아버지의 영혼과 이야기라도 나누는 것 같다. 그렇다. 그는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영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을 돌려보내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 그렇지만 영화는 이때 그가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는 삶에 응어리나 원망이 남아 떠나지 못한 영혼과의 대화만 가능한 것.


아버지 미이라와의 조우 이후에도 그의 삶은 여전히 구질구질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급함과 불안감에

떠밀린 무리수는 그를 나락으로 몰아간다. 조울증으로 고생하는 아내와의 재결합 시도, 중국인 이주노동자들의

무리한 건설현장 일용직 투입..어느 것 하나 끝이 좋지 못했고, 그는 다시 아이 둘과 함께 하는 싱글파더로, 사고로

몰살당한 수십구의 시체 틈바구니에서 옴쭉달싹 못하고 돌아와버렸다.


그렇게 그는 한발한발, 죽음으로 다가간다. 그의 삶은 전혀 개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더불어 그의 아이들 역시 그가

아버지 없이 살았던 지난 날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으로 빨려들어가는 것만 같다. 결국 죽음이 눈앞에 닥쳤고, 형편없이

너덜너덜해진 육체를 겨우 가누며 그는 죽음 직전까지 자신이 만들어낸 수십구의 중국인 영혼에게 고통받는다. 그건 그의

특수한 능력이 발현된 건지, 아니면 그저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의 발현이나 삶의 무게 그자체의 메타포었는지도 모른다.


죽음. 죽기 전 그는 딸애에게 아버지로부터 전해받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네며 자신을 잊지 말 것을 약속받는다.

아이들이 따르게 된 사람에게 뒤를 부탁한다. 비록, 딸애가 언젠가 그 다이아몬드가 가짜라며 내팽개치고 그의 기억 역시

내팽개칠지 모르지만. 그리고 비록, 아이들을 부탁한 이주노동자 그녀가 돈뭉치를 들고 언제든 튈 수 있고 실제로도

한번 시도했었지만. 그정도의 흐릿하고도 갸냘픈 희망뿐이라지만, 그게 그가 죽기 전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희망.


아마 그는 그의 아버지 미이라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던 거다. 영화의 도입 장면에서 나타났던 그보다 훨씬 젊고

민활해 보이던 청년은, 이제 그가 그의 아버지란 사실을 알게 된 관객들 눈앞으로 영화 마지막, 그의 죽음 이후에 다시

나타난다. 잠깐의 어색함과 긴장감 이후에 둘이 나누는 눈빛, 흘려내는 웃음소리. 비로소 그는 아버지와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거다. 아마도 그가 그토록 바라던 순간 아닐까.


어쩌면 그는 아버지를 그리던 한 생을 가장 아름답게 마감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신이 누군가의 아버지로

살았던 삶 역시, 그 신산함과 누추함에도 불구하고, 그 낙관하기 쉽지 않은 자잘한 희망부스러기들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웠던 거다. 비우티풀. 그가 그의 아이에게 가르쳤던 대로, 비우티풀.






@ 전주 한옥마을.


어렸을 적 자주 꾸던 꿈이었다. 팔과 다리, 가슴과 목, 얼굴에 이르기까지 온 몸에 구멍이 숭숭 나서는 벌레들이

스물스물 기어다녔었다. '미이라'란 영화를 보기도 한참 전이었지만, 만약 내가 그 꿈의 모습을 재연해낸다면

딱 그 영화에서 풍뎅이들이 팔뚝 속에서 울룩불룩 꿈틀대며 사람 몸속을 헤집고 돌아다니고 눈알을 파내는

모습과도 같았을 거다.


그렇다고 벌레들이 그 구멍들을 헤집은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네들의 여섯개 다리가 잘그락잘그락, 정교하게

움직이며 온몸과 구멍들을 살살 간지르긴 했지만 아프지는 않았고, 내 몸에 더이상 구멍을 낼 생각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별로 적대적이지 않았고, 난 어쩜 그들의 반짝이고 반들거리는 케라틴질 껍데기를 차라리

쓰다듬어주고 싶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꿈에서 내가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수십년 묵어 썩어빠진 고목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연밥이라도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단순히 그 벌레들은 이미 누덕누덕 구멍난 상태라 더이상 내 몸에

구멍뚫기는 무리라 여겨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조상신과 헤르메스-여행자를 돌본다는-의 도움으로, 문득 6시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시계는 한개도 못 들었지만,

덕분에 아침도 먹고 샤워도 하고 일정도 점검하고 여유있게 택시를 탔다. 어제 그토록 찾기 힘들었던 투르고만 가리지와

부스를 쉽게 찾아 시와로 출발. 마루사 마투르와(Marsa Matru)에서 12시쯤 내려 점심으로 펠라페를 먹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1시반에 다시 출발.
 
여행자의 행색은 나와, 터키서 말을 섞었던 형님 한분밖에 없어서 살짝 비즈와히르 사막투어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끝없이 황량한 지평선과 그야말로 먼지같이 뿌옇기만 한 풍경에 지쳐 꼬박꼬박 졸아버리고

말았다. 카이로에서 마루사 마투르와까진 5시간, 거기서 시와까지는 4시간을 더 가야 했다.

그리고 시와. 갑작스레 푸른 빛깔이 눈앞에 점점이 나타나더니 커다란 마을이 되어 불쑥 눈안에 차고 들어왔다. 흙은

여전히 물기 하나없이 풀풀 날리는 먼지같건만, 야자수가 더불어 숲이 되니 이런 오아시스가 생겨났다. 아마 생겨난 

순서는 반대로 오아시스가 있어 더불어 숲이 이루어진 거겠지만. 사막이 저멀리 보인다. 여우를 볼 수 있을까.

죽은 자의 산, 이곳에 미이라가 네 구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산 사이의 크레바스처럼 갈라진 틈에 고이 모셔져

있는, 바싹 마른 사자(死者). 그들의 죽음은 무섭다기보다는 왠지 처연했달까. 완전히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기보다

껍데기만 남아 왜소하고 볼품없이 말라 비틀어진..

석양을 산위에서 맞이하기로 하고 조용히 앉아 기다렸다. 메마른 바람이, 그 꺼칠함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몸을

휘감았고,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조금 떨어진 사막의 모래 사각이는 소리가 들리는 환상에 빠졌다.

이 한가로움과 유유함. 시끄럽고 정신없는 카이로에서 내가 정말 바라던, 그리고 여행이 어느덧 이주가 넘어가면서

살짝 지친 내게 꼭 필요한 그런 거였다.

저녁으로 지방음식 중 삭슈가인가, 발음도 제대로 안 되던 그런 신기한 걸 먹었는데, 음식이란 게 상상력만으론 닿기 힘든

그런 영역인 거 같다. 이름만 가지고서는 예상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설명을 듣고도 도무지 어떤 음식인지 상상해내기가

힘드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있게 먹어치우고, 모처럼 간만에 배부르게 먹고, 물담배 시샤(seesha)를 한 대 피워올리며

포도 1킬로를 사서 나눠먹었다.


시샤가 생각보다 셌던 건지, 아님 내가 연기를 지나치게 몸안에서 많이 돌려버린 건지, 한국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문득 보였다. 마침 지나가던 당나귀를 붙잡고 장난을 치다가 사진 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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