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 10점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돌베개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는 책읽기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무언가 자신의 사고 궤적을 이어나가는 행위랑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소설이나 문학류 이외의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 서적을 본다는 건 당시 자신이 갖고 있는 의문점,

고민이라거나 관심분야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 독서 리스트를 쭉 이어나가보면

그자체로 나름의 스토리랄까 문제의식이 뻗어나가는 그림이 잡히는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분노하라'라는 책이 내 손에 쥐어진 건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이 다들 쥐고

있는 이른바 '핫한' 책들은 일단 피하려고 하는 묘한 청개구리 심리에다가-아직 '정의란 무엇인가'는

좀체 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지구 반대편 레지스탕스의 목소리를 빌려 굳이 '분노하라'는 말을

전해듣지 않아도 될만큼 무시로 분노하고 있지 않은가. 그냥, 워낙 감각적인 표지가 맘에 들었다.


삶으로 말한다, '앵디녜부(Indignezvous)!'

저자는 이제 무관심과 냉소를 넘어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행동을

위한 에너지로서 분노를 말하고, 분노의 결과로 행복을 말한다. 삶의 안전망으로 기능해야할 사회보장

제도의 축소, '일반의 이익보다 특정인의 이익을 앞세우'게 된 경제 시스템, 정부와 대기업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쓰고 있는 찌라시 언론들,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대물림하는 교육. 분노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이런 식의 현실분석은 이미 차고 넘친다. 집회나 시위현장에서 배포되는 얇은 전단에

더욱 정밀하고 응축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에 기반한 결론, 혹은 주장도 같다. 이제 그만 속고,

그만 참고, 그만 당하자고. 분노하고 저항하자는 거다. 다만 이 책은, 그 뻔하고 당위적이며 선동적인

이야기에 담긴 무게가 다르다. 메시지의 진정성, 신뢰성이 다른 거다. 그러니 울림이 다를 수 밖에.
 

1917년에 태어난 저자는, 나치와 싸우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다가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갇힌 채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 탈출하고 다시 투쟁, '유엔 세계인권선언문' 작성에 참여했으며, 여전히

인권과 환경 등 사회문제 전반에 발언하며 활동하고 있다. 올해 아흔네살이다. 그런 '늙은이'가,

그런 '꼰대'가 좋은 게 좋다느니, 철 좀 들으라느니 따위 이야기가 아니라 '분노하라'는 거다.


90대 노인의 '격렬한 희망'에 위로받다

결국 이 책을 읽고 발견한 건, 육체적인 쇠락에 지지 않고 탄탄하며 쌩쌩한 열정과 젊음을 가진

어느 존경할 만한 투사의 삶이다. 그리고 그의 삶 자체로 느껴지는 위로다. 나보다 앞선 그의 삶과

신념과 가치를 발견하고는, 왠지 그의 여전히 탄탄할 것 같은 등을 바라보는 안온함과 믿음직함을

느끼게 되는 거다. 근 한세기동안 명멸해온 거대한 폭력과 광기를 지켜봐온 그가 희망을 말하니까.

그의 견지로 봤을 때 MB치하 3년간의 고난, 괴로움은 그야말로 '이 또한 지나갈 것'이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좌절과 절망을 느꼈을까.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편에 서왔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제 한세기를 살아온 노인의 혜안으로 젊은이들에게 고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총대를 넘겨 받으라, 분노하라는 거다.


수많은 한국의 레지스탕스에게. 특히 김진숙에게.

이 책의 소감은 사실 책에 씌여질 종류의 것은 아닌지 모른다. 분노하고, 행동하라는 그의 분명한

메시지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한국에 태어난 건 다행인지 모른다. 갈수록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어렵고 분노의 대상이나 책임의 소재를 밝히기 어려워지도록 복잡해지고 은폐되어지는

사회시스템의 진화 속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날것의 국가폭력, 비인간적인 자본의 모습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용역깡패의 모습으로, 어용 언론의 모습으로, 유치한 고소고발로,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의 밥줄을 끊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분노하기 유리할지도.


역시, 내게 책읽기는 사유의 연장이다. 요새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는 한진중공업의 그녀, 김진숙.

사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할아버지까지 찾아갈 것도 없었다. 젊어서부터 안 해본 것 없이 노동해온

오십대의 그녀가 도무지 한눈에 보기에도 어처구니없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대항해서 크레인에

올라간지 180여일이 가까워진 참이다. 한국의 자본권력, 그리고 그를 비호하는 국가권력은 최소한의

설탕코팅조차 없이 쓰디쓴 현실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참이다.


스테판 할아버지(저자)는, 그녀의 이런 투쟁을 안다면 노구를 이끌고 크레인 위에라도 오를 사람이다.

그리고 김진숙 그녀는, 레지스탕스 할아버지처럼, 그리고 거리의 신부 문정현신부님이나 다른 한국의

이름없는 레지스탕스들처럼, 아무리 나이를 먹고 육체가 노쇠해져도, 지금과 같이 그런 열정과 분노를

가지고 우리에게 든든한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러려면 이 팬시하고 '깔쌈한' 표지의 책은 서가에

꽂아놓을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슴에 꽂아두어야 할 일이다.


그러면 혹시 또 아나, 우리는 백발 성성해진 김진숙이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를 이야기하며 분노하라,

그리고 저항하라며 쓴 또다른 뜨거운 책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신용산역에서 내려 조금 걸었더니 저 앞에 문득 많이 보던 건물이 보인다. 특히 '세무사 조xx 사무소'라는 저 파란 간판.

문득,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직접 와보는구나. 계속 생각만 하고 있다가 이제야.

[여기 사람이 있다] 우리들의 '구차한' 밥그릇싸움에 사형을 언도한 그들.

저 위에서 여섯 생목숨이 날아가 버렸다. 망루를 짓고 올라간지 하루만에,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어 그야말로

'테러분자들을 진압'하듯 불구덩이 속으로 토끼몰이해버렸던 거다.
그리고 책임자 처벌은 커녕 3000여쪽의 수사기록도 공개하길 거부하고, 진상 규명조차 마냥 소홀한 정부. 그들은

피해자 측에 대한 책임있는 사과나 유감 표명 등은 고사하고 어떤 대화도 일절 거부해 왔다.

그런 곳이다. 그런 곳에서 문정현 신부님을 비롯한 사제단과 피해자대책위, 철거대책위원회 분들이 분향소를

설치하고 매일 추모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내가 갔던 저번주 금요일, 이날은 참사, 혹은 학살이 발생한지 무려

193일째 되는 날이었다.

시끄러운 도심의 소음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점차 빠르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신호등을 건너니

아마도 작가선언 측에서 나온 듯한 분이 길거리 선전전을 하고 계셨다. "평범한 시민이었다. 죽여야 했는가?"

뭐라도 들고 가야겠다 싶어서 우선 현장을 지나 근처 슈퍼에서 집들이 선물용 휴지를 사가는 길, 유족분들 중 한분인 듯한

아주머니께 들려드리며 "어머니, 잘 풀렸음 좋겠어요."란 멘트를 하고 싶었다. 건물 위에 언뜻 잔뜩 불에 그슬려 허물어진

컨테이너가 보인다.

자, 여기서부터 일상이 깨어져나간달까. 사람들이 부산하게 쏘다니던 거리의 어느 지점에서부터 뭔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불안하게 만드는, 생경한 단어들과 '낯간지런' 호소들.

선연한 빨강색에 느낌표로 끝나는, 뭔가 강력한 어조로 요구하는 선전물들. 용산4구역 철거민들은 재개발을 틈타

한몫 벌어보겠다고 눈이 벌건 '속물'도 못 되었었다. 바랬던 건 단지 재개발 중에 영업을 계속하기 위한 가상가 제공,

그리고 재개발 이후의 임차/임대상가를 보장하라는 것이었을 뿐. 그조차도 묵살당하고, 이렇게 사태가 악화된 건

누구의 책임인가.

전철연의 삑삑거리는 소음 섞인 스피커, 낯설고 무서운 투쟁가, 그런 것들에 대한 관용, 나아가 이해를 바라는 건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사실 무섭고 낯설기는 소리없이 사람을 짓밟는 세련된 공권력이 한 수 위라고.

검찰은 수사기록 3천쪽을 법원의 명령까지 거부하고 벌금을 감수하며 내놓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거기에는 아마

용역과 경찰과의 공동 작전을 펼쳤던 정황이나 진압작전이 아무런 안전조치없이 취해졌음을 드러내는 증거가 있을 거란

추측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런 의혹이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비공개하는 이유는, 정말 뭔가 있는 거 아닐까.

7월 초에 인터넷 공간에도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다. 경찰의 진압훈련 시범 중에 용산 참사와 너무나도 흡사한 그림이

나타났던 것. 경찰은 이미 용산참사를 '도심 테러리스트 섬멸'작전 정도로 규정지은지 오래인 듯 하다.

분향소 앞을 지키고 늘어선 화분들. 조그마한 꽃집처럼,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봉싯봉싯 꽃망울을 열고 있었다.

꽃이라도 없었다면 어땠을까. 금방이라도 무너질듯 을씨년스런 건물에 자리잡은 분향소가 풍기는 허름한 분위기에

더해, 조화라거나 거대한 화환 같은 것들 하나 보이지 않는 삭막함까지 사람맘을 쳐댔을 거다.

분향소는 한산했다. 검은색 전철연 조끼를 입고 다니시는 분들은 의외로 매우 밝고 의연하셨다. 뒤늦게서야 이렇게

찾아뵙고 착잡하고 침통한 표정을 짓고 돌아다니는 스스로가 더욱 부끄러웠다.

다섯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역시 조그마한 화분들이 빈소를 지키고 있다. 참사 이후 6개월, 아직 이분들은 장례도

치르지 못했고...끊임없이 이슈를 몰고 다니는 이 정부 인사들에게 용산 참사란 마치 먼 옛날 일인양 까맣게 잊혀진게

아닌가 두렵다. 이분들에 대한 완벽하고 단호한 무시.

분향소 왼쪽에 지어진 평상엔 신부님들이 인터넷도 하고, 책도 보시고, 이야기도 나누시며 자리를 지키셨다.

문정현 신부님이 그 오른쪽 평상에 앉아 사람들을 맞이하고 계셨다. 나지막한 평상은 왠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털썩 주저앉아 잠시 쉬어갈 수 있다고 유혹하는 듯 해서 나도 잠시 앉아 땀도 식히고..신부님과 다른 분들의 이야기도

귀기울여 듣고.

그러고 보니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고 가시는 모양이다. 수박에 생수에 포도, 사과에 쌀포대까지. 좋은 분들이 많다.

다섯 분의 생전 모습이 그려진 액자가 분향소 옆 유가족 분들의 살림터를 가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치 내장이

터져나온 생선처럼 삶의 '누추한' 흔적들은 여기저기서 불에 그슬린 양동이로, 손잡이가 떨어져나간 냄비로

나타난다. 이런 것들을 안전하고 위협없는 공간에 부려놓고 일상을 살아갈 만큼, 그만큼의 보장도 못해주는

정부라니 한심하다. 화가 난다.

유가족분들의 일상 아닌 일상은 분향소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한쪽에서 매 식사를 준비했고, 또 건물외벽에

의지해 늘어뜨려진 빨랫줄에는 하루치의 빨래가 널려 있었다. 이토록 신산스런 삶을 자발적으로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건 이분들이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어느 한계에 도달했음을, 정말 그분들 말씀처럼 '악밖에' 남지 않은 싸움이다.

건물을 반바퀴 에둘러 보았다. 어느 지점에선가 올려다본 하늘은 시커멓게 그을린 채 팍삭 허물어져내린 컨테이너의

잔해로 가려져있었다. 울컥, 눈물이 났다.

여기였다. 이곳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들은 용산 주변 출근길을 온통 마비상태에 빠뜨렸으며, 용역들과 공조하여

토끼몰이식 강경책을 일관했고, 안전대책 하나없이 죽어라, 하며 기름불에 물을 끼얹었다.

건물 뒤에 있는 주차장에는 반짝반짝 세련된 색감의 닭장차가 마치 트랜스포머의 옵티머스 프라임처럼 늠름히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닭장차 안에도 역시 먹고 살기 위한 양푼이며 냄비, 식판들이야 있겠지만 차곡차곡 잘 갈무리된 채

깔끔하게 숨겨져 있을 거다. 이건 인간의 존엄성 문제기도 하다.

참 허약하기 짝이 없는 철판 한장이다. 폭발물과 위험물질이 가득하고 인근 주민에 크나큰 위협이 된다 판단하여

해치워 버린 거라지만, 실제로 주변 주민들은 아무 위해도 느끼지 않았다고 증언했던 바 있다.

"죽이지 마라. 민중이 이긴다." 죽이겠다고 달겨들면 사실 방법이 없다. 죽고 나면 이렇게, 끝인가 싶기도 하다.

용산참사가 벌어지고 나서 한동안 여론이 술렁댔었고 이로써 정권이 끝난다는 성급한 예측, 기대섞인 전망도 있었댔다.

그렇지만 그렇게 산뜻한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진 이야기란 거, 현실에서 찾긴 쉽지 않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건,

철거민 분들, 저 망루에 오르셨던 분들의 마음이다. 정권 퇴진시키자고 올라간 거 아니다.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이한몸

열사되겠다고 올라간 거 아닌 거다. 내게 살 길 좀 마련해 달라고, 반토막나고 거리에 쫓겨나게 생겼으니 생계 대책

마련해달라고 올라간 거다. 용역이 경찰과 손잡고 죽어라죽어라 괴롭히니 올라간 거다.


최소한 국가라면, 정부라면, 지들이 국가고 정부를 '자처'하겠다면, 국민이 먹고 살게 해줘야 할 거 아닌가.

가톨릭사회교리에 따르면, 양심에 따라서 거부할 권리란 '공권력, 명령이 도덕 질서의 요구나 인간의 기본권 또는

복음의 가르침에 위배될 때, 국민들은 양심에 비추어 명령에 따르지 않을 의무가 있다"고 한다. 전/의경들한테도

못할 짓이다. 그들도 이미 큰 상처를 입었을 터, 거기에 더해 스스로 용기를 갖고 불의에 항거하라 말하는 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애초 그런 상황에 봉착하게 만드는 부조리한 명령의 발화자가 더욱 혐오스럽다.


그들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을 아프고 병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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