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합에서 밥을 먹을 때 찾아왔던 새끼고양이가 있었다. 반가워서 버터바른 빵이나 딸기잼바른 크레페조각같은 걸

던져주다 보니 다음 식사 시간에도 알아서 찾아왔댔다. 스스럼없이 옆에서 세수도 하고 눕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는
 
모습을 보니까 전번에 제대로 쓰다듬어줬구나, 하는 확신이랄까.ㅋ 내 허벅지가 만든 그늘에서 편히 웅크리고

쉬고 있는 고양이를 보며, 내 가슴 속에 올려놨던 고양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나도 누구 한사람 대략

품어줄 만큼은 큰 거 같다고. 그래도 이제 내 호흡에 버거워 주위 사람들 못 챙기거나 신경못쓰는, 소중한 사람을

못 품어주는 일은 없을 거라는 나름의 자신감이 생긴 거 같다.

카이로-시와-알렉산드리아-아스완-룩소-다합-카이로..

마지막을 향해 가는 여행, 카이로를 향해 10시간 버스를 달렸다. 자리가 저번보다 훨씬 편했는지라 문제없이 내내

잘 수 있었다. 어제 중간에 한 잠 자주지도 않고 바다에서 쉼없이 놀았던 게 생각보다 많이 피곤했던 듯. 사실

밤새 달리는 동안 버스는 몇 차례나 멈춰서곤 했었다. 참 이놈의 동네 차도 널럴하게 몰고 다닌다고 생각하며 이왕

멈춰선 김에 해뜨는 거나 보자고 생각했다. 첨에는 아무 이유없이 바다일 거라 믿었던 길 양쪽, 어둠이 양껏

웅크리고 있던 그곳이 실은 먼지 뽀얀 황무지란 사실이 슬슬 드러나기 시작할 즈음, 군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이미 앞에 멈춰섰던 차를 샅샅이 뒤지고 우리차로 온 참이었다. 모든 짐을 다 꺼내놓고서 하나하나 풀어

헤치며, 가방검사를 하고 있었다. 이건 무슨 생쇼인가, 하고 있는데 결국 내 차례가 다가왔다. 아무리 이집트가

관광객을 보호하고 관광산업을 지키기 위해 군인과 경찰을 온동네에 풀어놓은 경찰국가라고 해도 왠 소지품검사?

어쩌면 다합에서 다른 곳으로 마약이나 다른 물건들이 밀반입될까봐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길 한구석에 몰아세워진 채 가방을 줄세워 차례로 열고 있는 모습이란 좀 씁쓸하다. 다른 외국인

여행자들도 다들 툴툴대며 불만가득한 표정이면서도 여권 보여주고 짐 풀어주고.


내 차례는 금방 지나갔다. 어디서 왔냐고 묻고는 여권만 보고 가버렸다. 하긴 혼자서 40명분 가방을 일일이

뒤지는 게 얼마나 짜증났겠어. 조금 후에 버스는 다시 출발했고, 난 다시 편하게 잠들었다.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은 더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어느 순간부터 문득 눈에 띄지 않아서 발을

쭉 뻗었다. 그가 잡히지 않기를 기원했다.




17시간여, 수많은 체크포인트(검문소)와 검표원에게 여권을 티켓을 보여줘 가면서 도착한 다합(Dahab).

룩소에서 다합까지 장장 17시간에 걸쳐 가장 큰 소원은, 의자를 한뼘만 뒤로 젖혔으면 하는 거. 하필 내 자리는

젖히는 레버가 고장난데다가, 90도, 딱 그 각도에서 움직일 줄 모르고 치솟아 있는 거다. 어찌나 답답하고

불편하던지, 열일곱시간 내내 이리뒤척 저리뒤척. 온몸의 근육이 다 뒤엉키고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짐부터 숙소에 부려놓고 이제 허기가 뭔지조차 잊어버린 배를 달래주러 밖으로. 확실히 홍해 건너 사우디가

바라보이는 바닷가 휴양도시라 물가가 비싸다. 해변 한번 쭉 돌아보고, 제일 사람이 적어보이고 평온해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이집션 아침먹고 이제 모르겠다. 눈앞에 바로 펼쳐진 파도, 머리위의 파라솔, 늘어지는

긴 의자, 배는 부르고 파도소리 황홀하고 바람도 시원하고. 그래, 쉬더라도 눈앞에 뭔가 그럴듯한 걸 병풍처럼

둘러놓고 쉬어야지, 그냥 호텔 방안에서 디굴대는 건 아니다. 남들 다 바쁘게 움직이는데서 혼자 늘어져있는

것도 그다지 내 스타일은 아닌 거 같고. 그래서 푸욱 쉬었다.

그렇게 세네시간 바다보면서, 또 바다를 들으면서, 그림자가 방향이 꺽여 내가 앉던 자리를 두번인가 바꾼 거

빼고는 정말 아무 것도 안 했다. 저녁때가 되고 해가 뉘엿뉘엿 해질때까지도 그럴 수 있겠던데, 세시 좀

넘어서는 일단 인나서 샤워하고 다시 나워서 바다에 들어가기로 작정했다. 여태 breaking the ice는 할 만큼

한 셈이니까, 본격적으로 친해져 봐야지 하고. 숙소에서 나오는 물은 약간 짭짤한 게 아마도 바닷물을 어찌

바꿔서 수도로 끌어들이는 듯하다.


생각보다 파도가 높았고, 물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맑고 깨끗하길래 그냥 맘놓고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출렁출렁.

한시간도 채 안 있었는데 체온이 뚝 떨어졌다. 태양은 여전히 이글이글 모드지만, 아마 여기가 40도를 오르내리던

아스완이나 룩소보다 훨씬 북쪽이라 그런지 아님 그 동네서 워낙 단련이 된 건지 사실 다합은 그다지 덥단 느낌은

없었다. 바다라는 거대한 온도조절장치가 효과를 발휘한 건지도 모르겠다.

다합엔 유적이나 기타 입장료 낼 게 하나도 없고, 그저 바다다. 바다랑 긴 의자/파라솔 세트. 아무 레스토랑이나

카페 들어가서 제대로 갈린 망고쉐이크가 서비스로 나오는 초콜렛 핫케잌같은 음식 시키고 걍 한나절 개기면서

딩굴딩굴, 물담배도 피고, 마약해보지 않겠냐고 은근히 물어오는 사람들이랑 수작을 부려주고. 천국이다.

삼일정도 아무것도 안 하고 걍 눈뜨면 바다나와서 아무 긴의자에 철푸덕 앉았다. 홍해 건너 사우디아라비아의

왕국서 해가 기어코 탈출하는 걸 보고 나면, 다시 들어가서 씻고, 잠시 나른함을 즐기다가 다시 나와서 하루종일

걍 해변가에 바로 붙은 긴의자, 혹은 양탄자바닥, 혹은 모래사장에 왠종일 누워 바다소리를 듣고, 바다빛깔을

보고, 지나다니는 고양이랑 놀기도 하고. 배고프면 전과는 다른 메뉴 시켜서 맛나게 먹고, 더워지면 바다에

뛰어들어 잠시 놀아주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쓰고 싶어지면 노트를 꺼내 일기도 적어보고, 적어놓은 거 읽어

보기도 하고. 혹은 론리가이드북을 내키는 대로 펴놓고 읽기도 하고. 삐끼 아저씨들이랑 야한 농담같은 것도

주고받고,ㅋㅋ

그렇게 삼일동안 바다만 끼고 살았다. 정말 이게 릴랙스...라는 느낌이 들면서, 해지는 거 봐주며 물담배도

피워올려보고, 밤바다에 주저앉아 생각나는 노래 전부 불러보기도 하고.(난 이러면서 왠지 상실의 시대에서

나오코에게 바치는 그 멋진 장례신이 생각났다ㅋ) 24, 23, 21, 나이를 거슬러가 보기도 하고, 바다조차 흐른다.


문득 바다랑 피라밋이랑 닮았단 생각이 들었다. 파도를 예측할 수 있을까. 태양의 위치, 바다면의 굴곡, 재질의

차이로 인한 온도의 차, 자잘한 돌들의 방해, 해수 자체의 온도차와 그로 인한 별도의 작은 흐름..해수 표면에

떠있는 온갖 부유물들과 바람이 뒤흔들고 지나는 힘. 드문드문 새들의 날갯짓이나 부릿짓, 배가 만드는 파문에

물고기들이 튀어오르는 소소한 파문까지. 이 모든 걸 다 고려하고 파도의 움직임을 예측하거나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왜 일부러 더 어질러 볼라면 어딘가 어색하듯이, 혹은 아무리 멋지게 꾸며보려 해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움이나 부담스러움이 꼭 느껴지기 마련인데, 바다는 그런 게 없다. 피라밋, 오천년의 시간으로

씻겨내어진 피라밋도 그랬다.


인간과 자연의 타협점이랄까, 여행와서 숱한 건축물과 유적, 풍경이나 자연들을 봐왔지만 결국은 자연스러움의

지향, 사막..바다..산..조금은 거릴 두고 보는 게 좋고 직접 그안에 들어가게 되면 잘 보이지가 않는다. 그걸

닮아가는 피라밋, 이슬라믹카이로, 터키 셀축의 유적들.


생각해보면 제대 휴가나와서까지 노가다를 뛰어 모은 돈으로 나온 여행이었다. 그것도 제대한지 사흘만에

비행기 잡아타고 나선 길, 사람이 늘어짐을 넘어서 마치 잔뜩 허물어진 벽이 마침내 더이상 무너져내릴 데가

없을 때까지 무너져 내리듯, 그렇듯 무너져 내려 쉬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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