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지친 채 버스 좌석에 몸을 얹어놓고서 잠시 심령이 창밖을 부유하던 그때...문득 전화기가 온몸으로 울음을

울었다.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어? 다짜고짜 달려드는 그 목소리는 껌처럼 늘어진 채 저어기 어딘가쯤 철푸덕

널부러져있던 내 의식을 황급히 유체로 복귀시켰고. 난 여전히 술에 취한 듯...혹은 복화술을 시험하듯...

내 입술이 어디서부터 말려올라가고 혀가 어디에 위치하며 어떻게 잇몸을 쳐올리는지 하나하나 점검하며

대답하기 시작했다.


나...돌아올 길 찾을라고 아침에 옷에다가 밥풀을 잔뜩 묻힌채 집을 나섰어...하나하나 살금살금 뜯어가며, 길가다

웬지 맘에드는 사람들 이마빡에 666 바코드 새기듯 하나씩 납작하게, 동그랗게 붙혀놨었지..풍경이 갑자기

겹쳐지면서, 내가 지금 마녀가 들끓는 숲속에 버려졌다는 그 화급함...떨림...그런 느낌이 내 폐에 가스처럼

스며왔어. 무언가 내 손을 잡고 있었는데, 무언가 내게 따스한 느낌을 주고 있었는데, 무언가 내게 이것이

현실임을 항변하고 있었는데...그 뭔지모를 상실감이 차오르면서 왠지 이제 더이상 세상은 당장 방금전까지의

살아있는 세계랑은 달라졌다는 느낌. 두터운 벽지처럼 발린 세계가 2차원처럼 내 앞에서 누워 버릴 거 같은 느낌.


아...헨델은 그레텔의 손을 절대 못 놓았겠구나, 다른 한손으로 잡은 빵은 아마도-분명히-이빨로 물어뜯어

길바닥에 흩뿌려 놓았겠구나...손을 놓치면, 손을 놓으면, 숲의 나무가 전부다 누워버리거나 혹은 계란빛의

모래로 가득차 사막으로 가라앉는 걸 보고 말았겠지...깨어진 공간틈으로. 마녀가 등뒤에서 목덜미를 깨물듯한

조바심으로, 나무가 금세라도 뿌리를 뒤틀며 윈드밀을 선보일듯한 위화감으로 가득차버린듯해서, 눈알을

디룩이며 겁먹은 채 바라보는 세상에는 온통 내가 정성껏 붙여놓은 밥풀떼기들을, 헨젤이 이빨로 왕왕

물어뜯었을 빵 부스러기들을 소멸시켜버리는 녀석들이 푸드덕거리고 있었다. 그게 세발달린 까마귀가 되었건,

혹은 발톱사이에도 털이난 붉은 낙타가 되었건, 결국 햇볕에 바래 까매지고 말 파랑새가 되었건.


그래서 차는 달리는데 내 몸은 의자에 얹혀 있었고, 의식은 아마도 그림자를 떼어내고야 갈수있다는 그 곳에서

야위고 있었다는 걸...현실과 현실과 현실과 현실.


잠시동안 말이 없던 전화기가 마침내 입을 떼었다, 지금 거기 어디야? 와타나베, 거기 어디야? 어디야? 어디야?

미도리는 녹색이란 뜻이지. 안녕 녹색, 안녕 헐크..안녕 식물성 플랑크톤, 안녕 엽록소. 전화기가 녹아내리더니

내 혈관을 타고 심장을 삼키려 달겨들기 시작해서...난 오른손으로 왼쪽 팔뚝을 잔뜩 움켜쥐고 그놈을 막아야만

했지. 격하게 몇번 의자 손잡이에 그녀석을 부딪히고 나서야 다시 그건 내 머리속의 소주병에 들어가 스스로

병뚜껑을 닫고 잠을 청했어. 램프의 요정 바바..이제 소원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


안녕 하루키, 결국 난 노르웨이의 숲으로 돌아왔어. 이토록 성가신 인사말이라니. 내일 아침은 호랑이 버터에

미역을 말아먹어보자구.



(2004.11.30)


하루키처럼 [2009.08.07 제772호]
[레드 기획] 누구나 한 번씩은 거쳐가는 소설 <상실의 시대> 한국 출간 20년,
일상의 곳곳에 스며든 ‘하루키와 나’

(중략)

 
» 다음 카페 ‘무라카미 하루키 되기’의 회원들이 저마다 좋아하는 하루키의 책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박주희, 김도윤, 윤성의, 유승진, 윤종석씨.

“얼마만큼 좋아?” “봄날의 곰만큼.”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날의 곰만큼.” … “그게 무슨 말이야. 봄날의 곰이라니?”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 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상실의 시대>,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제목이 된 문장)

2003년 개설된 다음의 ‘무라카미 하루키 되기’ 카페 회원 수는 4천 명이 넘는다. 대부분이 20대다. 20년이 지난 뒤 17살에게도 하루키는 단숨에 읽힌다.

카페지기 김도윤(27)씨는 언어영역 이외의 책은 읽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를 피해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어야 했는데, 책방의 친한 누나가 “야 이거 읽어봐”라고 건네주는 것을 들고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에 앉아서 그냥 끝내버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것도 처음이었지만 그렇게 긴 소설을 독파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 뒤로도 질릴 때마다 꺼내본다. <상실의 시대>다.

같은 카페의 박주희(28)씨는 하루키의 수필을 좋아했다. 너무 좋아 일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나 읽은 소설인 <상실의 시대>는 ‘와타나베 바람 피우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대학교 4학년 무척 괴롭던 시절에 간 일본에서, 중고서점에 들렀다.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의 세 줄이 인생에 해답을 던져준 듯했다. “그러나 당시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되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간이라는 것은 때로 그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는 <상실의 시대>를 와타나베의 시각으로 다시 읽고는 모든 하루키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감각적인 문장도 좋지만 그것만이 하루키의 매력은 아니다. 윤종석(34)씨는 하루키 때문에 바람의 노래를 들으려고 한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작품이 있음). “책을 읽으면서 내 일기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루키에게 정말 감사한다. 살다가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때 다시 들춰본다.” 윤성의(28)씨도 “나뿐만이 아니구나. 애써 감추고 있던 생각을 얘기해줘서 위로를 받는다. 니체의 초인이나 오쇼 라즈니시처럼 극한을 긍정하는 사람이다.”

 

하루키는 PPL, 원 소스 멀티 유스

하루키는 맥주 TV광고보다 자극적이다. 하루키는 PPL이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맥주가 마시고 싶어지고 재즈가 듣고 싶어진다. 하루키는 원 소스 멀티 유스다. 책에서 책과 음악과 스타일이 가지를 뻗어나온다. 윤종석씨는 하루키의 소개로 레이먼드 챈들러를 읽고 헤어날 수 없이 빠졌고, 박주희씨는 글렘 굴드를 듣고, 먼 북소리를 좇아 그리스를 간다. 김도윤씨는 1년간 여행 가고 싶다고 엄마에게 말했다가 맞아죽을 뻔했다.

‘하루키처럼’은 이어진다. 그들이 진짜로 하루키에게 배우는 것은 ‘마이너리티’다. 유승진(27)씨는 “하루키에게는 거대담론과 거대권력에 대항하는 마이너리티의 정치학이 있다”고 말한다. 그가 오해되듯 탈정치화한 게 아니란 말이다. “80년대의 거대담론에서 인간 실존은 죽어 있었다. 김승옥 같은 예외가 있었지만 희귀했다. 그 단절 기간 동안 목말라 있었는데 하루키가 채워준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윤성의(28)씨도 비슷하다. “한국 문학이 극복하지 못한 지점에 하루키가 있다.”

무엇보다 그의 작가적인 태도야말로 ‘스타일’이다. 정은숙 마음산책 사장은 “소설에서 주는 아름다움과 자기 관리가 동시에 다가왔다. 하루키가 20대가 보는 패션지에 쓴 칼럼을 묶어낸 게 있다(<무라카미 라디오>). 그걸 읽고 하루키는 그런 데 써도 하루키의 몸을 버리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을 쓰기 위해 마라톤을 하고 담배를 끊었다. 소설가의 자세가 느껴진다.”

칼럼니스트 임경선씨는 2005년 “그저 그래야 될 것 같았고 또 너무나 그러고 싶었기 때문에” <하루키와 노르웨이 숲을 걷다>를 펴냈다. 그에게 하루키는 불가사의한 존재다. 변덕이 심한데 하루키에 대해서만은, 일본에서 빨간 책·초록색 책을 읽은 1987년 이후로 여전히 깊이 매료돼 있다. 그의 책상 앞에는 하루키의 사진이 붙어 있다. 하루키는 데레크 하트필드에게 문장에 대해서 배웠지만, 임경선씨는 하루키에게서 글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 임경선씨가 글을 고칠 때 언제나 옆에 하루키가 나타난다. “아이씨, 대충 보고 말지, 하는 생각이 들 때 하루키를 생각한다. 문장에 대한 집착, 잘 쓴 문장에 대한 집착을 유지하려고 한다. 얼음을 깎듯이 단어를 많이 없애려고 하루키처럼 노력한다.”

진실한 작가적 태도야말로 그의 ‘스타일’

하루키는 임경선씨에게 작가로서도 롤모델이지만 인간적으로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보는 유명인 중에서 성실함을 미덕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없어져간다. 진정성이 있으면서 성실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 임씨는 하루키가 ‘가치 전파자’라고 말한다. “건강하고 합리적인 개인주의, 다원주의, 민주주의를 몸소 실천하고 또 은연중에 글이나 사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파하는 것 같다. 강요가 아니라. 또한 그는 집단주의의 광기나 부조리함, 권위주의을 맹렬히 거부한다. 그만큼 ‘편견’이 없고 ‘상대성’을 인정하는 개인주의자다.”


*                                                                 *                                                                 *

#1. "하루키는 뭐랄까, 말하자면..왜 그거 뭐죠? 드라마 속에 광고가 숨겨진 거?" 그렇게 내가 물었고, 기자님이 PPL

이란 답을 알려줬다. 그렇게 하루키는 PPL(제품 간접 광고(Product Placement))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멋지고 단순한
 
표현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사실 PPL이란 비유는 어폐가 있다. 다만 그의 작품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음악, 음료, 음식,
 
작가의 이미지들이 워낙 강렬하다는 거다.


#2.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저 사진을 올리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찍으면서도 우리들끼리 아 이렇게 촌스러울 수가,

라고 탄식했던 포즈였었는데. 맘에 아주아주 들지 않는 사진이다.


#3. 뭐랄까, 그날 이야기했던 부분들이 기사 전체에 녹아있는 느낌이다. 누군가의 말로 인용되거나 적절히 쪼개지긴

했지만, 예컨대 임경선의 이야기도 그날의 인터뷰에서 몇차례 반복되어 강조되었던 부분이었다. 생각보다 하루키에

대한 평가는 정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여전히 인터뷰비는 없었다. 원래 없는 건가.




무라카미하루키되기(http://cafe.daum.net/harukimake)란 까페에서 최근 공지가 올랐었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출간 20주년을 맞아 한겨레21에서 기획기사를 쓰는데,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몇 명 모아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딱히 누군가에 대한 '팬질'은 해 본 적이 없는데다가 작가가 좋아

글을 읽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하루키의 소설들은, 적어도 고베 지진의 영향이 드러나기 이전의 작품들은 모두

워낙 마력적이었고 하루키 역시 딱 그만큼 특별한 작가였다.


저번주 수요일, 퇴근을 서둘러 홍대의 '한잔의 룰루랄라'라는 만화책방으로 향했다. 내가 5명의 인터뷰이 중 하나로

낄 수 있었던 건 아마도 하루키를 20년동안 알아왔다는 것, 그래서 초딩 때와 고딩 때와 대딩 때와 군인 때, 그리고

지금 어떤 느낌으로 읽고 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어서였던 것 같다. 초딩 때 영문모르고 펼쳤던 '노르웨이의 숲',

레종 데트르(raison detre)라던가, 주인공 와타나베가 하루동안 걸었던 발걸음을 세고, 오르내린 계단수를 세지만

아무도 그런 것엔 관심을 갖지 않는단 걸 알아차리는 부분이 깊이 인상에 남았었다. 그에 더해 나오코의 희뽀얀

육체가 달빛아래 노출되는 초딩에겐 다소 자극적인 장면도 틈날 때마다 발췌독하는 부분이었고.

(나중엔 책만 펼치면 자동으로 책장이 갈라져 그 페이지가 딱 열리곤 했었다는...ㅡㅡ;)

그런 얘기를 했다. 2006년쯤 싸이 미니홈피에 올렸던 감상을 인쇄해서 가져갔었다. 그때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루키의 소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미묘한 상실감과 허무함에 특정 '주의'의 틀을 씌워내며 그의 작품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제멋대로 유추해 내는 과정에, 과하리만큼 90년대 초중반을 경과하는 시대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있다는 거다. 누구나 그의 작품에서 느낄 흡입력과 강한 공감, 그런 것들에 이름을 부여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적극적인 독해의 작업이 그 하루키 작품 전부에 붙어있는 '친절한' 해설, 서평 등속의 것들, 그리고 그의 작품의 표지디자인, 카피..그런 것들로 제한되고 굴절되어 거개가 비슷한 시야로 보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작품들이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서(실제로는 한국에 한정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인기를 끄는 이유를 일반화하여 ready-made해낸다.

뻔하게 나오는 큰틀은 그렇다. 60년대말70년대초 전공투라는 이상주의적이고 환상적인(미망과도 같은) 경험을 하고 이에 대한 환멸을 겪은 하루키는 9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이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하겠지? 그 평론가입네 하는 작자들은?-시대적 경험의 동질감을 던져주며 인간 내부로 침잠하여 삶의 상실감과 허무함을 염세적 현실주의라는 스타일을 빌어 아주아주 매력적인 기교로 풀어낸다는 식이다. 글쎄......뭐랄까. 90년대 초에 지성계를 휩쓸었다는 유행..청산주의의 냄새가 너무나 짙다.

거대이념과 근대적 사고-합리와 인과가 보장되는-가 더이상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고, 사회주의의 실험은 거대한 사기극이었으며 68년으로부터 한국의 80년대에 이르기까지 혁명적인 열기의 분출은 치기어린 '젊음'탓이었다는. 그리고 그러한 과거를 가진 인간은 현실로부터 아무런 위로도 못받고 "아무곳으로도 갈 곳이 없다"는 허무함만을 채워가며 이것이 하루키의 작속 인물들의 전형, 내지는 기본적인 형상이라는 게 그들의 분석이다.

과연?

하루키의 작품에 드러나는 '상실'을 그런 식으로밖에 이야기할 수 없을까? 그러한 역사적인 실패, 그리고 후쿠야마식의 '역사의 종언' 이후 등장한 인간군상이 아니라, 하루키 자신이 끊임없이 환기하고 있듯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본질적인 상실감이라는 부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의 작중 인물들은 애초부터 갖고 있던 상실의 요소들이 외화되어 드러나면서 현실을 일그러뜨리기 혹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자본주의적 형태로 맞추어진 가족이 해체되고, 직업(직장)으로부터 탈출하며 등등, 그러한 조건들이 충족되고 난 후 쯔음 인물들이 맞닥뜨리는 현실은 조금씩 일그러져 리얼리티를 잃어가며 주인공-아니, 이말은 그의 소설에 적절치 않다..그냥 일인칭 "나"가 온당할 듯-여튼 그가 무엇인가를 확실히 놓쳤다, 잃어버렸다, 잊었다 라는 인식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가 대응하는 방식은 상당히 영웅적이다.
 
새로운 방식의 영웅성, 마치 바싹 마른 녀석이 다리를 부들부들떨며 돌띵이를 들어올리는 듯한, 자칫하면 깔릴 듯 위태로우면서도 한편으로 우스운. 적극적으로 현실을 일그러뜨리고 자신의 상실된 부분을 찾고자 나서는데, 그 여로는 사실상 사회로부터의 절연, 자신 내부로의 침잠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끊임없이 돌덩이를 밀어올리는 프로메테우스의 그림자가 언뜻 겹치기도 한다. 그 사회로부터의 절연은 약간 모호한 방식이긴 하고, 그래서 보르헤스같은 환상 문학의 냄새가 짙어지는 거겠지만 그걸 현실 도피라고 일률적으로 재단하는 건 온당치 않다.

중요한 건 애초에 상실이 있었고, 그 상실의 원천이 된 온갖 사회적 관계들, '일상'이라 불리거나 상식이라 불릴만큼 당연한 흐름으로부터 유리되어, 상실감을 느끼게 된 시점부터 일그러지고 얼개가 맞지 않는 현실을 더욱더 뒤틀고 단속적으로 토막냄으로써, 적극적으로 자신의 결락감(!)을 메워내고자 하는 하루키의 시도들. 그게 그의 작품 세계 아닐까..

태엽 감는 새, 이 작품에 슬쩍 드러나는 태엽감는 새 연대기 어쩌구의 맥락도 그렇다. 사실 세상은 인과가 뚜렷하고 합리적인 사고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대기처럼 하나하나 자체로 완결되어 닫혀 있는 사건이라는 게 하루키의 인식 아닐까. 거기에는 물론 이성에 대한 불신, 과학적 인과법칙에 대한 회의 등 포스트모더니티의 요소들이 담겨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세계관에 있어 근본적인 모순이라 할 만한 그 '상실감'은 현 세상의 '관계'들로부터 비롯되는 거라는 얘기다.

그의 글빨은 정말...멋지다. 정점에 다다른 기교와 깊은 통찰력, 그리고 장면별로 완전한 함축과 은유들. 더구나 태엽감는 새에서처럼 그러한 장면들이 결국엔 합류되어 하나의 직조된 의미를 그려내는 데에 이르면. 마치 짜라투스투라..처럼, 여러 잠언들과 금언들을 화려하게 짜깁기한 듯한 느낌이 없지 않을 정도다. 운명에 관한 대목..에서 내가 받은 느낌은 그런거다. 마치 재봉틀로 재봉질하듯, 이미 박힌 부분은 운명, 아직 박히지 않은 부분은 일반론이 지배하는 공백. 어차피 박히고 나면 운명이 되고 말. 여튼, 그람시와 연관지으면, 하루키는 그람시가 말한 '효소'의 개념을 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거 같다. 그리고 그보다 더, 하루키에 대한 판에 박힌 평들을 서로서로 베껴가며 재생산해내는 평론가들은 '효소'가 뭐에 써먹는건지부터 좀 생각해야 될 거 같다."



대체 어쩌자고 하루키의 소설에 그람시를 연결지으며 글을 마쳤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효소'란 개념이 뭐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니 대체 어떤 맥락인지도 잘 모르겠다는. 어쨌든, 하루키의 세계를 단지 자기 내면으로의 퇴행이라거나

도피로만 해석하는 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하루키가 내세우는 인물은, 주의주장, 이른바 '이즘'을 넘어선 인물이다. 어떤 사회 시스템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인간 내면의 문제에 집중하는 인물이다. 어떨 때 자신의 감정이 파르르 떨리는지, 어떤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자신과

타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죽기 전까지 함께 할 그 '결락감', 공허함 혹은 외로움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늘 유지하는 인물이다. 피곤한 인물이다. 하루키를 읽으면 내면 깊숙이 숨겨졌을 뿐이던 대답하기 어렵고 곤란한

문제들이 모처럼 밖으로 끄집어져 바람을 쐬었다는 후련함과 함께 망연스러움이 느껴진다.


요새는 또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리 해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 아무리 고민해도 답없는 문제, 가끔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의아해질 때 하루키를 펼쳐보며 그런 문제를 맞닥뜨리는 것도 좋겠지만, 어쩌면 대개의 시간엔

그걸 덮어두고 지내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여유가 없어진 건지도, 그저 피곤해진 건지도, 삶에 대한 눈먼 열정과

두려움없는 궁금증이 부담스러워진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기억이 차곡차곡 쟁여지고, 그러한 기억들이 계속해서 누적되면서 '나'를 이루는 걸 거라고

생각했었다. 비록 가끔은 손실되기도 하고, 적당한 모습으로 재구성되기도 하겠지만, 대체로 내가 문득 의식을

감지한 유년의 어느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기억들, 살면서 쌓아온 느낌, 경험, 그런 것들이 무한히 축적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러한 내가 가진 기억들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가진 기억들이 '나' 자신을 구성하는 거라면,

그렇게 쌓여가는 경험치를 통해서 조금씩 맘에 드는 모습으로 다듬어갈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고 쉽지도

않겠지만 '발전'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었다. 이놈들을 끌어안고 나아가면 성숙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아니다. 사람이란 게, 한없이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는, 끝없이 무언가를 쟁여넣고 손실을 최소화하며

보관할 수 있는 지퍼달린 크린백이 아니었다. 우연찮게 소거되거나 무의식적으로 재구성되는 기억의 소실만이

아니라, 어느 시점...문득 본격적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기억들, 자신의 살점들,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나 자신이라고 믿고 있던 이미지들, 관념들, 기억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던 경험들, 아니면 관계들..조금씩

밀려나고 후퇴하고 있다고 설핏 느끼고 있던 오래된 살점들이 먼지가 되고 어느 순간 콸콸 소리를 내며 내 몸을

투과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시간이 흘러가고 기억이 더해지고, 더이상 빈 공간을 찾을 수 없으니 이전의

것들을, 지금의 내게서 멀어져버린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거다. 상실해야 한다는 거다.



물론, 그 자리에는 새로운 기억들과 새로운 관계들, 그리고 새로운 감정들이 다시 채워진다. 예전에 알고 있던

나와는 약간 다른 모습, 그리고 약간 다른 체취를 가지고, 자신을 구성하는 새로운 요소들로 '나'를 소개하기

시작한다. 이제 된 건가. 나비가 허물을 벗듯 몸에 안맞고 시간에 지체되었던 기왕의 자신을 변화시켰으니

된건가.



아니. 문제는, 이제 알아버렸단 거다. 사람은 (적어도 나는) 버린단 행위에 절대 익숙치가 않고 버려야 할 거라는

생각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껍데기와 사고들, 나 자신을 구성하던 온갖 층위의 관계와 기억들은 마치

초딩 때의 일기장처럼 어딘가에 계속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단 사실이 깨어져 나갔다. 게다가, 그

당혹스러운 '상실의 의무'에 더하여, 처음 몸을 찢고 기억이 버려질 때 생긴 상처는 아물때쯤 해서 다시금

몇번이고 다시 파열되고 마는 마법같은 행사가 된다는 거다. 이제 평생 계속해서 리싸이클링될 '나'란 존재의

쓰레기 배출구가 되어..일정량 이상의 시간이 모이고 그사이 침잠해버린 이전의 나 자신을 버리고 감정과 관계를

버리고, 더이상 내가 아니게 된다. 상실은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린다. 그걸 알아버렸다.



그렇다면, 목까지 음식을 채워넣은 듯한 불편함 속에서 생각한다.

허무하다. 대체 난 뭐란 말이냐. 비록 지금 이런저런 것들로 '나'를 감지하고, 내살점이라 느끼고, 이게 나다..라고

느끼고 있지만. 어느 순간 고름처럼 시간이 고이고, 시간과 더불어 계속해서 알게 모르게 씻겨나가고 있음을 불쑥

의식하게 된다. 페이지가 정해져 있는 일기장은 연필로 써야 한다.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내고 지우개똥이

수북해지면 다시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사실 볼펜 따위도 주어지지 않았다. 튼튼한 동아줄이 내려와

죽을 때까지 쥐고 싶은 마음으로 영원한 것, 기댐직한 것을 찾지만, 고작해야 눌러 쓴 연필의 자국이 남을 뿐이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기내 방송에서 문득 '노르웨이의 숲'정도를 듣게 되면 가슴이 아파온다. 그뿐이다.



산다는 게 상실해가는 거란 사실을 몰랐었던 것, 상실이란 게 존재의 의미..소위 '레종 데트르'라는 아이러니를

받아들일 준비도, 의지도 없었다는 것, 그리고 대략 스물에서 서른, 광석이형같으면 서른셋, 기억이 꽉 차오르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시점이 지난후 그 안쓰러운 감각에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었다는 것. 새롭게 대체되는

자신의 기억, 자신의 살점,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미리 그 상실을 예견한 채 압도당해 버리는 것. 그게 시간을

중간에 끊어버리고 자신의 소모를 막아버리곤 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상실감의 원천인 거 같다. 견딜 수 없어져

버린 게다. 비어져 가고, 잊혀져 간다는 그 느낌을.



사실 그러한 상실감을 껴안고 살아가려면 세가지 정도, 선택지가 있다. 무언가 영원한 존재를 찾아 몸을 의탁하고

정신을 맡기는 것. 신이 되었건 구도가 되었건..인간으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영원성이라는 개념을 빌려오는

것. 아니면 상실감에 익숙해지고 그러려니...무뎌져 버리는 것. 원래 그런 거야, 시간이 약인거야..라는 말이 바로

그런 거다. 살아남기위한 전략으로서의 상실. 상실의 의무에 충실한 삶을 살아라 아버지는 말씀하셨지, 그런거.

그것도 아니라면, 글쎄...피칠갑을 한 영혼으로 꿋꿋이 살아가는 거다. 아프고, 절그럭거리고, 공허하고, 옆구리

어귀에서 콸콸대며 무언가 쏟아져나가버리는 느낌을 선연히 간직한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막되먹은

깡다구로 살아보는 거다. 적어도...잎새 하나 띄운 물잔 건넬 사람은 만날 수 있을 게다. 내가 잊었어도

날 기억시켜 줄 친구는 있을 게다. 날 나이게 하는 것들..조금은 더 지탱시켜 줄 안정감과 안온함으로 위로삼을 수

있을지 모른다.



비록 일상적인 상실이 주는 피폐함과 무의미함을 이길 수야 없을지언정.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데야..

그랬던 거 같다. '재미없다'는 말을 연발하는 친구녀석이나..뭔가 지쳐 보이는 사람들, 힘들고 우울하고 불안정해

보이는..나 역시. 의식했건 못했건, 환상이나 동화처럼 느껴지는 어릴 적과는 달라진 무언가가 있음을, 감지해

버린 거 같다. 한번 변하면,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거다. 돌이킬 수 없는.



서른 즈음에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속에 무얼 채워 살고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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