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백원, 이백원을 쥐고 달려갔던 곳은 으레 허름한 공터에 엉성한 천막으로 지어졌던 '덤블링장'.

 

앞으로 엎어지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쉼없이 튕겨올라오는 그 탄력 넘치는 그물망이 좋아서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

 

온몸이 흠뻑 땀에 젖을 때까지 뛰었던 기억이 있다. 문득 너무 높게 뛰었다 싶을 때의 짜릿한 공포감 역시 생생하다.

 

 

예기치 않게도 주문진의 어느 골목 귀퉁이에서 만난 '덤블링장', 정식이름은 트램폴린이란 건 이제야 알았다.

 

아직도 이런 곳이 있구나, 하는 신기한 마음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덤블링을 하며 까르르 웃음을 사방에

 

흩뿌리는 중이었다. 연령대에 따른 1점프대, 2점프대로 구분이 된 건 나 어렸을 적에도 그랬던가. 기억이 안 난다.

 

자전거를 대충 주차해놓고 그물망 위에서 온몸에 힘을 주어 발을 튕기고 엉덩방아를 튕기며 쑥쑥 키가 크는 아이들.

 

허름한 천막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건지 어설프게 걸쳐진 지붕천 사이로 봄볕이 함께 튕겨들었다.

 

무시하다 다치면 주인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무시무시한 안전수칙판의 낡은 상태를 보니, 내 어렸을 적에도

 

저런 거 하나쯤은 옆에 세워져 있었겠구나 싶다. 그런데 다 좋지만 6번은 대체 뭐지. 음주후엔 올라가지 못한다는.

 

그리고 11번도 웃긴다. 크게 소리지르거나 심하게 장난치는 어린이는 퇴장도 감수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룰이라니.

 

 

 

 


언젠가, 술에 잔뜩 취해서 조금은 울었던 다음날.

머릿속이 잔뜩 복잡하던 전날과는 달리, 머리를 떼어서 흐르는 찬물에 좀 담궈놓았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

오로지 그 생각 하나밖에는 남아있지 않던 날.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노래가사만 계속해서 되뇌이다 못해 장문의 네톤 대화명으로 적어두었던,

영혼이 절룩거리다 못해 절뚝거렸던 날.


그러고 보면, 다짜고짜 '절룩'이라고 써보냈더니 자기가 미안하다던 친구도 참.

이 캡쳐가 들어있던 폴더명도 참. "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

알집에서 새폴더를 만들고 만들고 만들면 까마귀가 나오고 지빠귀가 나오고 해오라기가 나오다간

급기야 새, 새새, 새새새가 나온다는 걸 알게 된 날이기도 했다. 2010년 4월의 어느날.








작년에 말그대로 (햇빛만 받으면) '샤방샤방한' 뱀파이어가 나와서는 '우쥬 매리 미'로 끝내던 '뉴문'이 개봉하던

때, 비슷한 제목으로 몇 개 안 되는 스크린수로 개봉했다가 금방 내린 영화가 있었다. 꼭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끝내 못 보고 놓쳤던 영화, '더문'.


공룡시대에서 세계종말까지의 시간축, 한국에서 남극 혹은 외계까지의 공간축, 그 위에서 '나'란 존재는 유일무이,

다른 누구와도 같지 않고 그야말로 유니크하다는 믿음은 쉽사리 건들 수 없는 신앙같은 부분이다. '나'란 사람은

내가 부모의 정자와 난자라부터 이어받은 유전적 형질에 더해 지금껏 쌓아온 독특한 경험과 교육, 교훈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며, 그렇기에 일란성 쌍둥이라 해도 엄연히 제각기의 개성을 갖고 있다는 거다. 요는, '개성'이다.


조금만 거창하게 나가자면, 그러한 '개성'이 존재함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가 자신의 개별적인 삶의

근본적인 이유이자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다'란 민주주의적 공리를 아무도 감히 반박하지 못하게 만드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내가 왜 숱한 사람이 앞서 걸어간 인류의 자취를 따라 굳이 수고로운 삶을 살며 하나의 자국을

남겨야 하는지, 나와 당신이 함께 지지고 볶고 싸우는 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이 바로

그 '개성'이기 때문이다. 난 앞선 누구와도 다르고, 함께 사는 누구와도 달라. 조금 깊어진 생각으로라면,

그 '다름'이 '우열'의 판단과는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런 관용을 발휘해 민주주의를 운용하는 기반이 될 거다.


그렇지만, 너무도 흔히 쓰이는 단축키 두 개를 상상해 본다. ctrl+c, ctrl+v. 파일 복사, 그리고 붙여넣기의 마법.

생성된 시간만 다를 뿐, 내용은 어느 것 하나 변하거나 달라진 구석이 없다. 나중에, 그런 명령어를 지시받는

컴퓨터가 인간과 자유로이 대화할 지경이 된다면, 그(녀) 컴퓨터는 인간이 가진 그 '알량한 개성'이란 걸

어떻게 생각할까.


파일이 가진 내용, 히스토리, 혹은 약간의 특질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금세라도 ctrl+c, ctrl+v의 마법으로

재현해 낼 수 있는. 영화에서 그런 컴퓨터 '거티'는 두 명의 존재에게 같은 이름을 부르고 같은 친근함을

표하며 같은 '동일자'로 부르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던 거다. '개성'이라고 그토록 자부심을 갖고 자아의

원천이라 여겼던 그 뿌리가 이토록 쉽게 복사되고 다른 그릇에 부어질 수 있는 거라면, 대체 인간은 어디에서

그 삶의 이유를, 의미를, 목적을 찾아야 할 것인가 묻게 되는 영화다.


어딘가에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상상, 얼굴도 같고 성격도 같고 심지어 갖고 있는 기억조차 같다면.

그런 상대라면 우리는 아마도 그 상대를 죽여버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지 모른다. 솔직히 그런 식의 상상은

이미 했었다. 하느님인지 하나님인지 알라인지 부처님인지 태을인지간에, 그 신이라는 작자의 상상력이 워낙

빈약하고 노력이 미천해서, 초딩 5년의 국한이와 중딩 2년의 태호, 고딩 3년의 상은이와 대딩 1년의 석훈이가

어쩌면 같은 붕어빵틀에서 찍혀나온 같은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서로 모르고 있을 뿐 어딘가에 그(녀)와 똑같은

그(녀)가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지만 역시 그런 상상의 위험한 칼날은 항상 다른 사람을 향했을 뿐이었다. 만약 어딘가에 나와 똑같은

외모, 똑같은 성격, 똑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역시나 나는 칼을 쥐고 그를 향하거나 나를 향할 거라

생각한다. 내가 믿어왔던 세상, 내가 진짜라고 믿어왔던 발밑의 기반이 허물어지는 충격일 거다. 그럼 두려움,

혹은 황당함을 빌미로 생각조차 하기 싫어진단 건, 내가 지금 모종의 경계-빨간약과 파란약 중 하나를 골라

잡아야 하거나, 프로그램 속 세상의 외피가 벗겨질 즈음의 지점-에 서있다는 경고 신호인지도 모른다.





#1. 지워진 테입에 덧씌워진 '새롭고 오랜 기억'.
 
제리(잭 블랙)이 사고로 자석인간이 되고 나서 친구 마이크(모스 데프)가 일하는 비디오 가게의 비디오 테입이

전부 지워진다. 그렇게 아무 내용이나 기억도 없는 상태로 돌아간 채 허망한 타이틀과 앙상한 시놉시스만 걸치고

남아있는 테입들이지만, 그들의 필사적이고도 기발한 재창조 과정을 거쳐 다시 새롭지만 익숙한 무엇들을

품게 된다.


옛 영화들과 닮아 있으면서도 묘하게 코믹하고, 또 묘하게 감탄하게 만드는 그들의 새 영화들은, 마치 자신의

실수로던 어떤 이유로던 서둘러-예기치 않게-지워버린 과거의 사랑을 다시금 기를 쓰고 기억하고 각인해낸..

그런 결과물과 유사한 것 같기도 하다. 큰 얼개와 스토리 전개는 비슷하다 해도, 자신의 입맛과 현재 상황에 맞춰

이리저리 각색되고 힘을 덜 빼고 더 넣은 장면들.


그들의 '새롭고도 낡은' 영화는 대박이 났다. 사랑이 지난 후의 '새롭고도 낡은' 기억 역시 대개 대박이 되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어쩜 평생 품을 가슴시린 추억이 될 수도 있겠지만.



#2. 지워지는 '파사익의 팻츠'에 덧씌워지는 '새롭고 오랜 기억'

비디오 가게 주인 플레처(대니 글로버)는 이 마을, 파사익(Passaic)과 자신의 가게가 있는 건물에 얽힌 '팻츠'란

재즈 뮤지션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하곤 했다. 사람들이 그 뮤지션을 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비감한 마음을 갖고

있던 그였지만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라곤 마이크와 제리 뿐이었던 듯 하다. 건물을 철거하려는 당국의 시도에

끈질기게 저항해 보았지만 끝내 일주일 후 건물이 해체되기로 통보를 받은 날, 그는 사실 '팻츠'와 그 건물, 그리고

그 마을을 묶어주던 자신의 이야기가 거짓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시작되는 이야기의 재구성. 신부님, 독실한 교인,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마을 사람들이 풀어내는 '구라'들이

희미해지다가 급기야 펑, 소리내어 부정당할 뻔 했던 '팻츠'와의 이야기끈을 더욱 딴딴하고 풍요롭게 비끄러

매어주는 동앗줄이 되어 주기 시작했다. 그리곤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을 불러낼 만큼 힘있는 '사실'이 된다.


그렇게 가게 주인 플레처가 지워 버리려던 이야기,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이야기는 다시금 생명력을

얻고 또다시 '새롭고도 낡은' 기억으로 화한다. 그건 더이상 플레처가 말했던 그 내용과도 다르지만, 또 예전과

같이 얄팍하고 의미박약한 이야기도 아니다.



#3. 시간에 씻겨나가는 기억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사실 'Be Kind, Rewind' 이 영화 코미디라고 분류되어 있다. 그냥 배우들의 재기발랄한 표정과 연기를 즐겨주고,

또 노골적으로 조악한 특수효과, 그렇지만 그 통통 튀는 상상력과 표현력에 탄복하며 살짝 마지막에서 감동해

주면 그만일 영화인데, 괜히 심각한 척 다른 데를 보며 되도 않는 의미를 부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비카인드 리와인드', 되감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도로 의역될 수 있을까. 비디오 가게에 크게 적혀

있기도 한 이 제목은 그렇지만 괜히 이런저런 다른 생각으로 나를 계속 몰고 간다.

"종종 짜증나고 싫던 기억들, 다시 되감아 조금 더 여유롭고 아름답게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만의 기억이라 여겨지던 것, 다시 되감아 우리의 기억으로 만들어 더욱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완전히 잊혀지기 전에 말입니다...


나만 가슴이 살짝 아프게 본 걸까. 모르겠다.



덧댐. 참, 영화를 다 보고 이 영화 출연진들을 일별하는데 깜짝 놀랬다. 시고니 위버가 나왔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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