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요란스런 껍데기다. 중국에서 판매속도가 가장 빠르다느니, 수백만 매체가 어떻고 몇십주동안 1위가 어떻고.
빌게이츠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는 규모의 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로스차일드가문이 세계 금융을 쥐고 흔든지
어언 이백여년이 되었다거나, 링컨과 케네디의 암살, 미국의 남북전쟁, 심지어는 유럽의 전쟁들과 1, 2차
세계대전까지도 그들 일부 '배후세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했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이런 식의
허무맹랑한 음모론은 이런 식의 의문을 낳는다.
음모론의 빈틈이야 뻔하다. 안 뻔한가...?
그들-로스차일드가문의 적손들, 그리고 그 대리자들-이 무슨 하느님이냐? 과거에 있어서는 항상 상황을
완벽히 통제한 것처럼 묘사되며, 그와 똑같은 용의주도함으로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본데,
그들은 신이 아니다. 점차 방대해지는 조직에선 의사결정의 문제도 있을 수 있고, 판단 미스도 당연히 존재할
것이며, 그들의 목표 역시 긴 세월동안 오로지 '세계정부, 세계화폐'의 추구로 집중해 있었을리 없는 거다.
백번 양보해서 '자신들의 이윤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적 목표에 헌신했다고 해도, 전세계에 걸쳐 있다는
그들의 이해관계가 늘 일치했을 리는 더더욱 만무한 거 아닌가?
결정적으로, 지금의 자본주의 세계가 봉착한 구조적인 위기는 지은이의 말대로 금은에 기대지 않은 달러본위
불태환화폐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노출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을 그들이 이끌었다고? 넌센스다.
지은이는 지금의 틈새를 활용해서 중국이 기축통화 발행국으로서 패권을 차지하자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건
당장 그가 앞장에 수백 페이지에 걸쳐 설명했던 국제 금융세력의 완전성과 신적인 능력과 부딪힌다.
물론 일종의 국적을 넘나드는 파워그룹으로서의 금융자본 세력을 상정하는 건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전시 경제나 전후 보상금 문제, 혹은 은행 시스템과 화폐 발행과 관련한 문제에서 스스로의
이익을 보호하고 확대하기 위한 일종의 이해집단으로 힘을 발휘했다는 것까지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정도로, 이 책의 앞머리 챕터 몇 개는 이해하고 넘어가면 될 듯 하다.
안 뻔한가...?
그런 음모론에 경도된 책의 앞머리 절반쯤을 읽으며 한 댓번은 "그래서 어쩌라규~"를 외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불태환화폐가 고작 몇십년의 역사밖에 지니지 못한, 아주 특이한 경우임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듯 하다. 태초부터 그랬던 듯 단단하고 완전무결해 보이던 지금의
시스템이 실은 역사적인 구조물에 불과하다는 인식, 그리고 변경가능하다는 상상력의 자극. 그게 지금 시스템의
문제점을 바꾸는 단초일 테니까.
지은이가 말하는 대로, 금본위제가 폐지되고 은행들의 지급준비금제도에 기댄 불태환화폐제도가 그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돈'을 출현시켰다. 금이나 은과 같은 진정한 부(wealth)를 증거하는 화폐가 아니라, 은행으로부터
액면가만큼을 빌렸음을 의미하는 차용증서로서의 화폐. 그리고 그러한 화폐의 발행이 점차 팽창하면서 이른바
'인플레이션 택스(Inflation Tax)' 효과로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며, 그에 더해 전지전능한 '그들'의 입맛에
맞는 타이밍과 성과를 기한 세계적 차원의 경기변동이 유도되어 특정국의 자산과 부를 고스란히 가로챈다고 한다.
그게 지은이가 말하는 '양털깍기'의 의미이다. 경제가 호황을 이루고 급속한 성장을 이루다가, 어느 순간 거품이
잔뜩 끼었다 싶을 때 훌떡 경제를 말아버리고는 싼값에 주요 기간산업과 기업들을 차지하는 것.
결국 이 책의 요지는, 제9장 달러의 급소와 금의 일양지 무공, 그리고 제10장 긴 안목을 가진 자, 요 두 챕터에 전부
담겨 있는 듯하다.(제목도 참...중국스럽다.) 중국이 금융시장을 개방하기 전에, 황금에 기반한 화폐제도로 조금씩
위안화를 바꾸어나가며 미국의 국채나 달러 대신 금을 중국내에 쌓아두라고. 그렇게 서서히 세계의 기축통화로
등극해서 중국이 다시금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워낸 패권국으로 등장하라는 민족주의적 메시지다.
근데, 한국의 경제위기 당시에도 나왔던 이야기지만 국내자본과 해외자본이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지은이는
'중국'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중국 내의 금융자본도 역시 자기증식을 통한 이윤 추구라는 논리에 충실할 뿐 아닐까.
지금이야 세계 금융시장에서 수세를 점하고 있기에 방어에 급급할 뿐이지만 그들 역시 언제든 '로스차일드가문'이
그랬듯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바꾸고 국가를 변형시킬 집단인 거다. 그러니까 거기에서는 '국내자본' 대
'해외자본'의 구도 혹은 '중국' 대 '외부의 적'의 구도라기보다는, '공공영역의 수호자인(여야 하는) 정부' 대
'자본'의 구도가 더 설득력있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금태환화폐 시스템으로 변환시키기 위해서라도, 중국 내
자본과 협력하는 것보다는 타국 정부들과의 협조가 더욱 중요하고 효과적일 것 같다.
하나 더, 중국은 패권국을 추구한다고 치고, 한국에는 어떠한 함의가 있는 걸까. 이책. 중국 정도 되는 나라니까
외부 금융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던, 로스차일드가문이 전세계를 집어삼키겠다고 음모를 꾸미던 말던 그에 대항해서
뭔가 해보려고 하는 거지, 우리 나라는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중국에서야 이 책이 뭔가 대국인으로서의 역사적
책무라거나 괜히 어깨 으쓱하는 사명감을 느끼게 했을지 몰라도, 그래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해도, 한국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태환화폐 시스템의 역사적 형성과정이나 그 문제점들이란 건, 사실
이 책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많이 접할 수 있을 텐데...? 한국의 CEO들이 추천하는 책이라는데 왜 그럴까.
왠지 Snob effect란 단어가 오랜만에 떠오르는 듯.ㅋ
화폐전쟁 -
쑹훙빙 지음, 차혜정 옮김, 박한진 감수/랜덤하우스코리아